한낮의 불운 - 2024 공쿠르 단편소설상 수상작
베로니크 오발데 지음, 이세진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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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은 편인가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면 처음에 가졌던 시선이 안쓰러운 쪽으로 급격하게 변할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이제 나는 인생은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선택할 안목이 조금 생겼다. 인생은 알 수 없고, 그래서 신비로우며 생을 살아가는 일은 대단하다. 그러니 대놓고 『한낮의 불운』이란 제목의 소설에도 크게 두려워하지 말기 바란다.


2024 공쿠르 단편소설상 수상작인 베로니크 오발데의 『한낮의 불운』은 그런 불운이 가득하다. 불운으로 치닫기 쉬운 기질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는 「오귀스트 바라카가 겪은 낭패들」의 주인공 ‘오귀스트’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열여덟 번째 생일 전날 아버지가 죽었다. 사고는 때와 장소를 가리자 않고 방법도 가리지 않고 찾아오니까. 그렇다 해도 아버지가 죽었으면 어머니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우리의 주인공 오귀스트의 어머니는 진즉 그의 곁에 없었다. 당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고 아들에게는 과일 바구니를 보냈다. 폭탄을 받은 기분이라는 오귀스트의 마음이 알 것 같다. 세상에는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다양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 있으니.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사정이 있고 그의 삶이 있었으니라.


아무튼 그래도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어머니가 보내준 약간의 돈이 있었다. 사실 오귀스트의 불운은 차고 넘쳤는데 자잘한 것은 설명하기도 입 아프다. 가장 큰 불운을 꼽자면 음향 기사 국가고시를 낙방이었다. 근데 동명이인이 있어 합격이 바뀐 것으로 6개월이 걸려 정정되었다. 사소한 일상이나 연애의 불운은 오죽했겠는가. 이쯤 되면 내 인생은 왜 이런가 한탄하고 세상과 단절하고 싶을 수 있겠지만 오귀스트는 익숙해진 탓인지 인간에게 큰 기대를 하지고 실망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소리에 매진할 준비가 되었고 스튜디오를 위한 건물을 보려고 부동산 중개인과 만났다. 오귀스트보다 연상이며 딸이 있는 그녀가 바로 ‘에바 코파’로 이 소설집의 중심에 있다. 여기까지만 하자. 딸을 부양해야 하는 에바는 어떻게든 이 계약을 성사시켜야 했고 오귀스트는 건물의 자세한 정보가 아닌 에바에게 이미 반해버렸으니. 그의 불운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고 상상해도 나쁘지 않다.


이제 「“당신은 성공으로 빛나고 있네요”」 속 주인공 에바의 삶으로 들어가 보자. 파리에서 운전면허 없이 지내는 에바는 지하철, 버스 파업에 퇴근길이 지옥이다. 낮에 지상층에 습기 많은 집을 보고 간 남자 때문에 슬프기도 했다. 맞다. 그 남자는 오귀스트다. 그러나 남의 슬픔을 봐 줄 여유가 없다. 원하지 않고 꿈꾸지 않았던 부동산 중개인으로 생활해야 한다. 이해할 수도 없고 무대에 올릴 수도 없는 희곡을 쓰는 전 남편이 양육비를 보내주지도 않으니까.





거기다 딸의 문제도 머리 아프다. 딸 ‘마르그리트’가 자신의 이름을 남자 이름 ‘보브’라고 불러달라고 하질 않나. 공부에 관심도 없으니. 그나마 딸이 요리를 좋아하고 재능을 보여 요리학교에 진학하고 대형 레스토랑에서 실습을 하게 됐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집에 들어오자 마주한 소식은 잘렸다는 딸의 이야기. 딸의 설명을 들으면 충분히 그럴만한 사정인데 매니저는 복귀시킬 수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속상해하는 에바에게 딸은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여 엄마를 위로한다. 그리고 에바는 딸을 믿는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에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기대할 수 있는 운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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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의 딸 마르그리트는 왜 이름을 보브로 바꾸고 싶었을까. 그 이유는 「자기에게로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데 다른 독자를 위해 말을 삼가기로. 이처럼 『한낮의 불운』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연작 소설집이다. 여덟 편의 소설에서 모두가 주연이자 조연인 것이다. 마지막 「동네의 여왕」 속 ‘릴리’와 ‘조’를 보자면 특히 그렇다. 릴리와 조는 단짝 친구다. 예쁜 릴리는 모두가 좋아하고 추앙하는 소녀, 조는 그런 릴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그녀를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릴리이므로. 어느 날 동네를 촬영할 일이 생기고 영화감독이 오디션을 보기로 한다. 릴리와 조는 오디션에 참가하고 당연 릴리가 뽑힐 거라 생각하는데 결과는 릴리가 아닌 조였다. 그 일로 조와 릴리는 결별한다. 그 뒤로 사람 사귀는 일은 어려웠고 결혼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은 에바와 카페를 하며 동네의 여왕으로 살고 있다. 조 자신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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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소설에서 죽음, 상실, 해고, 이별, 사기 등 굵직한 불운이 등장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소설 속 인물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건 아니다. 운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대단한 운이라고 저렇게 보면 별거 아닌 운에 불과하고. 그러니 운 만 쫓는다면 불행한 나날이 될 것이다. 운은 없다가도 있는 것이니까. 좋다가도 나쁘고 나쁘다가도 좋은 것,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에바의 말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찾기를 반복하는 일 말이다.


살면서 잃는 것은 하나뿐인데 그 하나를 끊임없이 잃어가는 거지. 그게 뭐가 됐든. 어떤 느낌일 수도 있고 작은 기쁨이나 희망일 수도 있는 그것을 되찾고는 해. 그것의 메아리라도 되찾았다가 또다시 잃어버리기를 무한 반복하는 거야. (「“당신은 성공으로 빛나고 있네요”」,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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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9-16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 잘 읽으셔서 저도 기쁩니다! ㅎㅎㅎ 이래서 한 작가의 팬이 되는 거 같네요.
저도 오발데가 마음에 들어 독후감을 하나 더 썼답니다. 10월 마지막 날에 얼로드 예정이라 ㅎㅎ 너무 멀지요?

자목련 2026-09-17 10:15   좋아요 1 | URL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그 독후감은 혹 <불한당들에게도 은총이>일까요? 업로드 일정 기억해야겠네요 ㅎㅎ

구단씨 2026-09-1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할 때 펼쳤다가, 괜히 읽다 덮다 반복하다가 초반을 넘어가지 못하고 완독을 못한 책이네요.
자목련님 별점 보니 다시 펼치고 싶어졌어요.
마지막 단락 발췌해주신 문장에 오래 눈길이 머물러요.
살면서 읽은 것을 하나뿐이라는데, 뭐가 하나야 싶다가도
그 하나를 끊임없이 잃어가는 거라는 게 맞는 말 같기도 해서요.

자목련 2026-09-18 11:06   좋아요 0 | URL
그 초반, 뭔지 알 것 같아요,
저도 한 번에 읽은 게 아니라 덮었더가 한참 뒤에 다시 처음부더 읽었거든요.
분명 재밌게 읽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에티오피아 G1 시다모 보나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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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커피를 내리며 향부터 마시고 그 뒤에 천천히 마셨다. 참 좋다. 추천한 대로 완벽한 아이스는 어니고 미지근한 아이스라고 할까. 뜨거운 여름에 아이스커피로 마셨다면 한 잔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 같다. 나와 잘 맞는 커피는 에티오피아 산이라는 이번에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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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택배 상자를 열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진다. 커피향 때문이다. 조금 신나는 마음이 필요했는데 다행이다. 새로운 커피를 주문했다. 알라딘 커피는 꽤 만족스러운데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 커피는 포장도 예쁘다. 사진에는 그 예쁨이 담기지 않았다. 노란, 아니 쨍한 레몬색이라고 하면 맞을까. 아무튼 커피를 내리기도 전에, 마시기도 전에 그 환한 향이 나를 좋은 기분으로 이끈다. 땡스투는 커피장인이 되라는 그분에게. 나도 500g을 살 걸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커피향이 묻었을지도 모르는 책은 박솔뫼가 대상을 수상한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민음사 편집자 김민경이 방송에서 나와 체호프 단편 「내기」를 소개하기에 찾아서 읽다가 희곡이 궁금해서 『체호프 희곡선』을 주문했다. 정작 가장 반갑고 기다린 책은 김연수의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인데 예약 주문이라 10월에나 도착할 것 같다.






더위가 물러간 날씨는 제법 선선하다. 아직은 민소매를 입고 얇은 이불을 덥는다. 이럴 때 감기가 달려드니 조심해야 한다. 아, 조심할 게 왜 이리 많은가. 가을을 타지 않지만 올가을은 가을을 탈 것 같다. 그저 가을인데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 미리 헐거워진 마음을 조이기로 한다.


생일일 친구와 통화를 했다. 목소리는 반가웠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는 어두웠다. 색으로 따지면 깊게 가라앉은 검은색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서로가 알고 있지만 모른 척 그 깊이에 대해, 그 어두움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했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친구의 9월이 무사히 지났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친구에게도 조금은 신나는 마음이 필요한데, 커피향 같은 신나는 마음이 곁에 있기를 바란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이 9월을, 이 가을을 이야기할 때 슬퍼하고 쓸쓸하지 않았으면 한다. 미리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자꾸만 마음이 그쪽으로 기운다. 나이가 든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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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9-1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0g 살걸….. 하시게 될 텐데….🥹 전 땡투받은 걸로 또 살게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6-09-11 10:55   좋아요 1 | URL
이 원두도 제 커피 리스트에 추가되었어요.
따뜻하고 평온한 하루 보내세요, 특별히 오늘은 더더욱!!

blanca 2026-09-1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를 끊기로 했는데 오늘 디카페인으로 마시니 참 좋더라고요. 김연수의 신간 소식에 어찌나 신났던지... 하지만 예약판매라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는 게 아쉬워요. <계절 쓰기>의 그 짧은 글로도 가슴을 울렁이게 하더라고요.

자목련 2026-09-11 10:58   좋아요 0 | URL
아, 커피를 끊을 결심!
저는 어려울 것 같아요. 줄이는 정도로 타협하고 있어서...
김연수 소설은 정말 반갑지만 말씀처럼 기다림이 너무 길어요. <계절 쓰기>에서 만난 글은 너무 좋고요!
 
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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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의 <루시 게이 하트>가 좋아서 읽게 된 소설인데 참 좋다. 포레스터 부인의 매력이 무엇인지, 그녀의 생이 어떻게 흘러갈까 궁금증을 불러온다. 뭔가 부도덕하고 부적절한 관계로 결말을 맺을 것 같았는데. 그런 포레스터 부인을 흠모한 닐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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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여름에 대한 걱정이 자란다. 여름을 채울 폭염과 높은 습도를 체감하기도 전에 이미 여름의 한복판에 도착한 듯 겁을 낸다. 언제부터 여름은 이런 계절이 되었을까. 그래서 여름이 되면 여름의 즐거움, 여름의 맛을 생각한다. 더위를 많이 타기에 여름보다는 겨울을 더 선호하지만 여름의 매력에 끌리기도 한다. 빠져드는 여름의 저녁, 뒤척이는 여름밤, 쏟아지는 불평과 불만, 그것은 여름을 살아내는 증거이자 견디는 힘이기 떄문이다. 그러니 김연수의 여름에 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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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연수의 글을 읽기 전 제주의 여름을 모르고, 제주의 세화를 모른다. (세화, 여름의 이름)을 읽고 그 바다를 상상한다. 언젠가 그 바다에 닿을 거란 기약은 할 수 없지만 그 바다 ‘세화’를 품을 수 있다. 『계절 쓰기』는 제목 그대로 여덟 명의 저자가 한 계절을 맡아 쓴 이야기다. 두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날 수 있다. 같은 계절이지만 그 느낌은 다르다.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데 이상하게 매번 여름을 쓴 글을 지나치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 김연수의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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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연수가 들려주는 세화의 여름, 제주의 바다. 현무암, 김영갑, 오일장, 제철 한치의 맛을 읽는 일은 여름의 풍경이자 제주 세화에서만 만날 수 있는 여름이다. ‘세화’란 가는 꽃이 아니라 다랑쉬오름에서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가늘고 긴 수림지대를 뜻하는 이름이라는 것까지. 김연수가 기억하는 세화에서 보낸 그 여름밤은 다음에 찾은 그것과 결코 같을 수 없다. 매년 변화하는 여름, 살아있는 생물처럼 요동치는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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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듯이. 매일의 날씨가 달라지듯이.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낮과 밤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낮은 밤을 모르고 밤은 아침을 알지 못하지만,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또 돌아옵니다. (세화, 여름의 이름),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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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시작되면 시인으로서 휴가 신청을 한다는 김소연에게 겨울은 (미현실의 방)이다.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시적 언어 따위를 밖으로 꺼내지 않아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좋아진다는 시인. 시인이 아닌 오롯이 김소연으로 지내는 계절. 그것은 어쩌면 시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모든 것을 키워내는 단단한 동면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경주를 만나는 일도 즐겁다.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봄 이야기 (봄의 눈)은 팽나무처럼 자신을 지탱해 준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할머니를 통해 식물의 이름을 알고 순과 나물을 어떻게 먹는지 배운다. 고사리 새순으로 봄이 등장하고 자신의 엄마로부터 그것을 꺾는 걸 배운 할머니. 허태임의 봄은 자신을 돌보고 보살핀 할머니라는 겨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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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겨울눈을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야 낙엽을 떨어뜨린다. 이파리가 연둣빛을 상실한 채 말라간다고 해서 나무가 발달을 멈추는 건 아니다. 더 치밀하게 세포를 만드는 방식으로 겨울을 대비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하듯이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이겠지. 그건 생존 전략인 동시에 일종의 신성한 의식일 수도 있다. 겨울을 무사히 건너기를 빌고 봄의 새순을 희망하는, 나무 세계의 동제 같은 것. (봄의 눈), 7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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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윤경희의 가을 쓰기 (장미철)에서 만난 장미 기록과 직겁 찍은 사진은 신기하면서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장미에 대해서 새로운 걸 알게 되었다. 내게 5월의 장미로 각인된 장미가 한 해 여러 차례 개화하는 ‘개화 반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느 계절에 장미를 만나고 놀라지 말기를. 장미에 사로잡혀 장미 시력이 생겼다는 저자의 말이 재밌다. 장미를 보면 저자가 자동으로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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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홍한별의 가을, 인류학자 전의령 여름, 작가 김지승의 겨울과 은유의 봄도 각별하다. 저마다의 기억과 선명함으로 남은 계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나만의 방에 저장된 계절의 특별한 장면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일까. 가만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름은 아픈 계절인데 그래서 애틋한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여름의 시작엔 엄마의 죽음이 있었고 어느 여름에 나는 두 번이나 병실에서 긴 시간을 보냈고 커다란 여름의 기억은 큰언니와의 작별이다. 봄, 가을처럼 짧아서 아쉽고 붙잡고 싶은 계절이 아니라 여름은 어떻게도 건너뛸 수 없는 계절이 되었다. 아마도 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이 아니라 그 안의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좋아하고 좋하며 한정원의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맣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 「너무나 많은 여름이」, 281쪽)


나는 여름의 하늘을 조금 사랑한다. 당당하고 등등한 푸름을, 푸름을 가벼이 저버리고 소나기를 내리는 패기를, 패기를 무효하는 천진한 무지개를. 「조금 사랑하기」, 일부)


조만간 여름은 끝날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이미 가을이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돌고도는 계절, 다음 계절이 있다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은 기록 속에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계절을 읽는 일, 계절을 사는 일을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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