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여름에 대한 걱정이 자란다. 여름을 채울 폭염과 높은 습도를 체감하기도 전에 이미 여름의 한복판에 도착한 듯 겁을 낸다. 언제부터 여름은 이런 계절이 되었을까. 그래서 여름이 되면 여름의 즐거움, 여름의 맛을 생각한다. 더위를 많이 타기에 여름보다는 겨울을 더 선호하지만 여름의 매력에 끌리기도 한다. 빠져드는 여름의 저녁, 뒤척이는 여름밤, 쏟아지는 불평과 불만, 그것은 여름을 살아내는 증거이자 견디는 힘이기 떄문이다. 그러니 김연수의 여름에 반할 수밖에 없다.

나는 김연수의 글을 읽기 전 제주의 여름을 모르고, 제주의 세화를 모른다. (세화, 여름의 이름)을 읽고 그 바다를 상상한다. 언젠가 그 바다에 닿을 거란 기약은 할 수 없지만 그 바다 ‘세화’를 품을 수 있다. 『계절 쓰기』는 제목 그대로 여덟 명의 저자가 한 계절을 맡아 쓴 이야기다. 두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날 수 있다. 같은 계절이지만 그 느낌은 다르다.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데 이상하게 매번 여름을 쓴 글을 지나치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 김연수의 여름이다.

소설가 김연수가 들려주는 세화의 여름, 제주의 바다. 현무암, 김영갑, 오일장, 제철 한치의 맛을 읽는 일은 여름의 풍경이자 제주 세화에서만 만날 수 있는 여름이다. ‘세화’란 가는 꽃이 아니라 다랑쉬오름에서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가늘고 긴 수림지대를 뜻하는 이름이라는 것까지. 김연수가 기억하는 세화에서 보낸 그 여름밤은 다음에 찾은 그것과 결코 같을 수 없다. 매년 변화하는 여름, 살아있는 생물처럼 요동치는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여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듯이. 매일의 날씨가 달라지듯이.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낮과 밤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낮은 밤을 모르고 밤은 아침을 알지 못하지만,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또 돌아옵니다. (세화, 여름의 이름), 24쪽

겨울이 시작되면 시인으로서 휴가 신청을 한다는 김소연에게 겨울은 (미현실의 방)이다.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시적 언어 따위를 밖으로 꺼내지 않아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좋아진다는 시인. 시인이 아닌 오롯이 김소연으로 지내는 계절. 그것은 어쩌면 시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모든 것을 키워내는 단단한 동면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경주를 만나는 일도 즐겁다.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봄 이야기 (봄의 눈)은 팽나무처럼 자신을 지탱해 준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할머니를 통해 식물의 이름을 알고 순과 나물을 어떻게 먹는지 배운다. 고사리 새순으로 봄이 등장하고 자신의 엄마로부터 그것을 꺾는 걸 배운 할머니. 허태임의 봄은 자신을 돌보고 보살핀 할머니라는 겨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나무는 겨울눈을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야 낙엽을 떨어뜨린다. 이파리가 연둣빛을 상실한 채 말라간다고 해서 나무가 발달을 멈추는 건 아니다. 더 치밀하게 세포를 만드는 방식으로 겨울을 대비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하듯이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이겠지. 그건 생존 전략인 동시에 일종의 신성한 의식일 수도 있다. 겨울을 무사히 건너기를 빌고 봄의 새순을 희망하는, 나무 세계의 동제 같은 것. (봄의 눈), 73~74쪽

문학평론가 윤경희의 가을 쓰기 (장미철)에서 만난 장미 기록과 직겁 찍은 사진은 신기하면서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장미에 대해서 새로운 걸 알게 되었다. 내게 5월의 장미로 각인된 장미가 한 해 여러 차례 개화하는 ‘개화 반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느 계절에 장미를 만나고 놀라지 말기를. 장미에 사로잡혀 장미 시력이 생겼다는 저자의 말이 재밌다. 장미를 보면 저자가 자동으로 떠오를 것 같다.

번역가 홍한별의 가을, 인류학자 전의령 여름, 작가 김지승의 겨울과 은유의 봄도 각별하다. 저마다의 기억과 선명함으로 남은 계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나만의 방에 저장된 계절의 특별한 장면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일까. 가만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름은 아픈 계절인데 그래서 애틋한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여름의 시작엔 엄마의 죽음이 있었고 어느 여름에 나는 두 번이나 병실에서 긴 시간을 보냈고 커다란 여름의 기억은 큰언니와의 작별이다. 봄, 가을처럼 짧아서 아쉽고 붙잡고 싶은 계절이 아니라 여름은 어떻게도 건너뛸 수 없는 계절이 되었다. 아마도 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이 아니라 그 안의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좋아하고 좋하며 한정원의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맣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 「너무나 많은 여름이」, 281쪽)


나는 여름의 하늘을 조금 사랑한다. 당당하고 등등한 푸름을, 푸름을 가벼이 저버리고 소나기를 내리는 패기를, 패기를 무효하는 천진한 무지개를. 「조금 사랑하기」, 일부)


조만간 여름은 끝날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이미 가을이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돌고도는 계절, 다음 계절이 있다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은 기록 속에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계절을 읽는 일, 계절을 사는 일을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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