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증인 - The Last Witness
유즈키 유코 지음, 이혁재 옮김 / 더이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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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죄는 다른 거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 인간이 범한 죄를 정확히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247쪽)


최근에 법정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기 때문일까. 소설에서도 무조건 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승소를 바라고 있다. 정작 범인의 죄 유무는 상관없이 말이다. 일본 여성 작가 유즈키 유코의 장편소설 『최후의 증인』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제목을 통해 짐작 가능하듯 재판에 관한 것이다.


소설은 하나의 살인사건이 발생으로 시작한다. 호텔에 투숙한 중년 연인 중 여성이 남성을 향해 나이프를 겨운다. 그리고 시작된 재판 장면, 피의자를 향한 여자 검사 쇼지의 질문이 날카롭다. 그에 비해 상대 남자 변호사 사카타의 활약은 눈에 띄지 않는다. 피의자의 목욕가운과 살해도구인 나이프에 남겨진 지문, 검사는 유죄를 확신하고 피의사를 몰아붙인다. 주변 인물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와 피의자는 연인이었고 그로 인해 치정의 살인이 목적이라고 말이다.


뭔가 놀라운 반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리숙한 모습의 변호사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변호사 사카타는 전직 검사로 도쿄에서 변호사 사무실이 있다.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은 도쿄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지방 도시다. 도코가 아닌 곳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자신의 상사였던 이의 부하 검사와 재판을 해야 하는 사카타. 그가 사건을 맡은 이유는 사건 전개가 흥미로울 것 같아서다. 정말 이런 이유로 변호를 맡는 게 가능하긴 할까. 뭔가 비밀이 있는 듯 보이지만 작가는 그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은 살인사건의 재판 진행 과정과 함께 7년 전 일어난 사건을 교차로 들려준다. 7년 전 이곳에서 의사인 다카세와 미스코의 초등학교 5학년 아들 스구루가 사망했다. 비가 오는 날 학원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호를 위반하고 음주운전 차에 치여 숨졌다. 친구가 그 모든 걸 목격했지만 경찰은 비 때문에 잘못 본 거라고, 운전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아이의 잘못으로 죽은 거라고 결론을 맺는다. 기소조차 되지 않은 사건에 부모는 경찰과 검사를 만나 항의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건설회사 사장인 가해자 시마즈가 경찰과 유착했다는 게 뻔했다.


7년이 지났지만 다카세와 미스코는 그 슬픔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진행 중인 사건의 당사자다. 미스코는 아들의 복수를 위해 시마즈에게 접근했다. 그 과정에 미스코가 말기 암을 진단받는다. 다카세는 아내를 말리지만 단호한 아내의 모습에 동의한다. 미스코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하나하나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미스코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복수의 성공만을 바랄 뿐이다.


재판의 진행과정은 검사 쇼지의 일방적인 승리처럼 보인다. 재판이 끝나는 마지막 날 사카타가 기다리는 건 한 명의 증인이다. 사건을 의뢰받고 재판을 진행하는 지금까지 증인에게 증언을 부탁했다. 하지만 사카타가 찾아올 때마다 증인은 거부했고 마지막 날 그가 법정에 나올지는 알 수 없다. 판결이 나오는 날, 등장한 최후의 증언. 그의 증언으로 반전이 시작된다. 7년 전 교통사고의 죽음과 현재 사건의 연결점, 드디어 밝혀지는 진실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유즈키 유코가 숨겨놓은 트릭에 감탄한다. 놀랍고 뛰어난 결말을 말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재미와 스릴이 넘친다. 그만큼 빠져드는 소설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부와 권력으로 사건을 음폐하고 유리한 쪽으로 결론을 만드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한다. 사카타의 말처럼 죄를 지은 이는 마땅히 죄를 받아야 하고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보편의 진리를 말이다.


“재판의 목적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겁니다. 재판이 검사나 변호사를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피고인과 피해자를 위해 있는 거지요. 죄를 제대로 처벌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되는 겁니다.” (351쪽)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놓쳐서는 안 되는 소설이다. 일상의 무게에 치진 이들에게 기막히게 멋진 도피처를 선사한다. 다가올 휴가철에 함께 한다면 더욱 즐겁고 신나는 휴식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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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수영장 수박 수영장
안녕달 글.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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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쏟아지는 장맛비가 멈춰도 차오르는 습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더위 때문인지 입맛이 사라진다. 시원한 커피만 찾게 된다. 불쾌지수는 높아지고 숨겨졌던 화가 폭발할까 두려울 지경이다. 나 같은 증상으로 힘들다면 그림책을 추천한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기분에 날개가 달린 듯 나쁜 기분은 멀리 달아난다.



아이나 조카가 있다면 이미 만났을 것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꺼내는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바로 안녕달의 그림책 『수박 수영장』이다. 이런 그림책은 할 말이 없다. 그냥 보면 된다. 그냥 즐기면 된다. 그냥 시원한 수박 속으로 풍덩, 그러면 끝!여름이 시작된 시골 마을 모두가 기다리던 수박 수영장이 개장을 했다.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수박 수영장으로 모여든다. 너도 나도 신나게 수박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논다. 아, 이런 맛난 아이디어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수박을 먹다가 생각했을까. 걱정 근심 따위는 모두 잊고 놀기만 하면 된다. 유년 시절 고대하며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떠오른다. 시골 마을에서 변변한 놀 거리도 없었고 방학숙제만 가득했는데 방학은 왜 그렇게 기다렸을까.



맑고 투명한 수박 물에 첨벙거리며 놀 때 태양은 뜨거워지고 노는 아이들을 위한 구름 장수의 구름 우산과 먹구름 샤워가 등장한다. 솜사탕 같은 구름 우산과 먹구름 샤워(소나기)는 정말 예쁜 표현이다. 해가 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밖에서 놀았던 어린아이가 되어 그림책 속 아이들과 하나가 된다.



놀이는 언제나 아쉽다. 수박 수영장이 문을 닫는 게 아쉽다. 하지만 내년에도 수박 수영장이 문을 열릴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름 대표 과일 수박의 맛은 여름이 제일 맛나듯 시원하고 달콤한 그림책 수박 수영장은 요즘이 제 철이다. 입에 수박 한 조각 베어 물고 마음으로 수박 수영장에서 즐겁게 수영하는 시간, 여름이 좋은 이유가 아닐까. 아이들과 물놀이를 가거나 휴가를 떠날 때 이 책을 챙겨간다면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멋진 어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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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7-0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아요~ 진짜 이런 수영장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목련 2022-07-04 16:40   좋아요 1 | URL
네, 정말 예쁜 그림책이에요. 이 여름에 더위를 식혀주는 멋진 수박수영장을 상상해요!
 
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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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오래 하면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간보다는 정성과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전문가란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스스로 경지에 도달했다고 느낀다면 성공적이다. 각각의 분야에는 전문가가 있지만 각자의 삶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건 만족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네 인생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빨리 답을 알려주지 않으니까. 살면 살수록 삶을 비루하고 치사한 것들을 쌓아올린 허무한 성 같으니까.


김훈의 단편집 『저만치 혼자서』 속 인물들도 다르지 않았다. 단단해지기는커녕 허약하고 약한 존재라는 걸 확인할 뿐이다. 삶이란 소중한 누군가와 동행하는 게 아니라 결국엔 혼자라는 걸 말이다. 부조리함으로 둘러싼 사회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명태와 고래」 속 이춘개가 그러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물질로 살던 그가 조업 중에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명태를 잡으러 간 게 전부였다. 북에서 6개월 만에 돌아온 그는 여러 정보기관에서 조사와 심문을 받았다. 그게 끝이이어야 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명태를 잡으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춘개의 삶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6년 후 간첩죄로 수감되었다. 엉뚱하게 흐르는 삶을 이춘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휴전 상태로 남과 북이 대치한 땅에서 산다는 걸 때때로 잊는다. 나는 경험하지 않았기에, 겹겹이 쌓인 공포와 고통을 알지 못한다. 「명태와 고래」 와 결은 다르지만 전사자의 유해를 찾는 「48GOP」 를 통해 국가의 폭력과 전쟁의 비극을 느낀다. 그저 개인의 삶이라 치부할 수 없는 아픔이 전해진다. 김훈은 슬픔을 구체화하거나 절망을 극대화하지 않는다. 김훈의 인물은 조심스러울 정도로 감정을 절제한다. 그것으로 인해 삶의 참담함을 전할 뿐이다. 어떤 감정은 가만히 바라볼 때 확연하게 드러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안달복달한다고 원하는 쪽으로 나가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에도 과감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건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단했던 지난 생에 대한 연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굳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아도 서로를 알 것 같은 노년의 두 남자의 일상을 그린 「저녁 내기 장기」 와 퇴직을 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며 대장 내시경 검사를 미루는 남자의 이야기 「대장 내시경 검사」는 헛헛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치열하게 살았던 젊은 시절의 숱한 감정들이 모두 타버려서 재만 남은 게 괜히 서럽게 다가온다.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그 시간이 곧 도래할 것만 같다.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세월은 다시 세월을 풍화시킨다. (「대장 내시경 검사」 중에서)


간직할 만한 추억 하나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삶이란 추억보다는 상실이나 아픔으로 채워진다. 노량진 고시원에서 함께 공무원 공부를 하며 짧은 기간 동거했던 영자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는 「영자」 가 애틋한 이유다.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조금 서로의 영역에 침범했어도 괜찮았을 젊음인데 마음 한 자락 들어갈 여유가 없다.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게 젊음이라서 그럴까. 고만고만한 삶을 위로하며 격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돌이켜지지 않는 것들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저절로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었다. (「영자」 중에서)


결국엔 죽음으로 연결되는 삶이라는 걸 아는 게 인생일까. 사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죽는다는 건 어찌 알 수 있을까.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삶의 이치일까. 평생 신을 따르고 봉사하며 살았던 수녀들이 죽음을 앞두고 생활하는 ‘도라지수녀원’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는 젊은 신부의 이야기 「저만치 혼자서」 와 끔찍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재수생 연옥을 구조한 대원이 여자가 살려고 무얼 자꾸 잡으려 했다는 과정을 들려주는 「손」 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는 뭔가를 꽉 부여잡고 산다. 단 한 번 주어진 죽음은 혼자 감당할 몫이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갈무리는 『저만치 혼자서』 속 인물처럼 저만치 혼자서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후회와 아쉬움이 아니라 한 톨의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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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랏다 2022-07-1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우연히 들어와 읽는데 책리뷰들이 술술 읽히고 공감가고 재밌어요~~ 자주 올께요!!^^

자목련 2022-07-18 15:02   좋아요 0 | URL
살어리랏다 님, 반갑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시원한 오후 이어가세요^^
 


모내기가 한창이던 때에 읽은 책이다. 그때는 비가 조금 왔으면 싶었다. 장마철이시작되고는 쨍한 햇볕이 그립니다. 자연의 뜻은 알 수 없기에 그냥 맡길 뿐이다. 감자와 마늘은 땅 속에서 숨겼던 굵고 예쁜 자태를 세상에 드러냈다. 이제 얼마후에는 고추를 따는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을 읽지 않았더라면 논과 밭의 작물을 보면서 벌써 이렇게 컸구나, 수국을 보러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쳤을 것이다. 시골에 살면서 직접 농사를 짓지 않기에 큰 감흥을 놓친다.


올해 초 「농부와 소설가」란 다큐를 흥미롭게 시청했다. 소설가 김탁환이 섬진강에 내려가 직접 농사를 짓고 소설을 쓰고 책방을 여는 과정을 담은 다큐였다.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는 2021년 열두 달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건 농사를 짓는 방법보다는 곡성에서 글을 쓰고 땅을 만지며 만난 하루하루와 계절의 모습이다.


서울의 집필실을 정리하고 섬진강 옆 폐교였던 곳에 ‘달문의 마음’이라는 새로운 집필실을 장만한 김탁환은 40분은 쓰고 20분은 쉬면서 눈앞에 마주한 논과 밭의 풍경을 감상하고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그것들에게 스며든다. 1월부터 12월까지 꼬박 365일을 다 채운 일기는 아니지만 어느 날엔 한 줄, 어느 날엔 하고 싶은 말들이 더 많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기쁘고 벅찬 날들의 기록이다.


숙소와 집필실을 오가는 길을 걷으며 마주한 풍경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만나는 할머니, 하나하나 품게 된 개와 고양이들. 그를 섬진강으로 이끈 농부 과학자 이동현에게 배우는 농사일. 맨발로 흙을 밝으면 손으로 직접 모를 심고 피를 뽑고 풀을 매는 모습은 유유자적한 풍경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익히는 일이다. 흙을 만지고 제철 채소를 심고 키우면서 체득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금치와 시금치 사이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거기 흙이 있다. 시금치의 뿌리가 흙을 파고든다. 그렇게 파고들어야만, 시금치는 힘을 길러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독자도 상상력의 뿌리를 맘껏 내려야 한다. 단어와 문장과 문단에 대한 작가의 집착과 욕심이 독자를 틀에 가둬 자유를 빼앗을 때도 있다. (83~84쪽)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하는지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나는 상상한 적이 없다. 백 명이 넘는 사람이 등장하고 몇 년 동안 구상과 자료를 준비하고 시작했지만 초고를 버리고 다시 쓰는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더운물에 손을 넣고, 커피를 내리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트는 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는 그가 곡성에서 창문을 열면 들리는 새소리와 함께 시작하면서 그가 적는 바람은 신성하면서도 뭉클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아침에 집필실 근처에 찾아와 울어주는 새들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고, 떨어지는 물방울들에게 ‘오늘 내 글이 잘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마음을 갖는 것. 지극히 모자라고 어리석지만 다른 존재와 교감하는 생명체란 사실을 아는 순간은 소중하다. (86쪽)


그래, 차차 쓰면, 살면, 걸으면, 만나면 될 것이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그 뒷날이라도. 이번에 얻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그 자리에 닿지 않더라도. 저 나무들처럼 그래, 차차. (128쪽)


곡성에서 소설을 쓰고 초보 농군으로 살면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섬진강을 걷고 탐하는 그가 들려주는 섬진강의 자연은 아름답고 황홀하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든든함이라고 할까. 11월의 강가와 습지를 상상하게 된다.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오직 11월에만 볼 수 있는 풍경과 감상이다.


습지에 서면, 오감이 새롭게 작동한다. 강물은 검푸른 빛을 짙게 띠고, 겨울철새들 울음은 낭랑하며, 마른 풀과 젖은 낙엽의 냄새는 묘하고, 나무들의 껍질은 거칠고 단단하다. (362쪽)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고 차곡차곡 인생을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 그가 판소리를 배우고 대본을 쓰고 작품을 발표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단순한 일기의 형태를 지녔지만 그의 다짐이며 계획표이자 미래를 향해 나가는 동력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곡성에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까지 냈으니까.


문득 궁금해진다. 작년에 문을 연 생태책방엔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을까. 김탁환의 밭에서는 어떤 작물이 자라고 있을까. 큰 키에 해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땅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대신 올해는 작약을 심는다고 했는데 정원에 작약꽃이 활짝 피었을까. 섬진강을 떠올리면 이제 김탁환의 달문의 마음과 들녘의 마음이 함께 따랄 올 것 같다. 언제나 그곳에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은 말할 것도 없이.


김탁환의 일기처럼 최근 작가들의 에세이(일기)가 출판의 대세인 듯하다. 작가의 개인적인 일상과 은밀함을 기대하는 독자에게 반가울 수도 있을 터.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아쉬운 부분도 있다. 그건 좀 설명하게 복잡하다. 모든 일기는 사적일 수밖에 없다. 일기가 일기장을 벗어나면 모두의 글이 되기 때문이다. 황정은, 김연수의 일기는 기대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행복한 시간이었고, 문보영의 개성 넘치는 글도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작가의 글이라는 이유만으로 문학적인 부분만 궁금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글쓰기의 비밀 같은 걸 들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문보영의 글에서 만난 이런 문장처럼 말이다. 


개인이 각자의 정신이 미치지 않도록 기울이는 노력의 형태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글만 쓰면 안 된다고, 새로운 경험이 글의 밑천이 될 거라는 말은 반만 맞다. 글쓰기는 도자기 빚기와 같다. 도자기를 빚을 때, 물레는 계속 비슷하게 돈다. 도는 행위는 유지되지만, 미묘한 손길에 변화를 줌으로써 도자기의 형태와 아름다움이 빚어진다. 그러므로 도자기를 빚는 인간에게 왜 자꾸 도냐고, 왜 자꾸 똑같은 동작만 반복하냐고, 그만 돌고 새로운 것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 사람은 거대한 반복 안에서 자신만의 내밀하고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기시대』 중에서)


내가 좋았던 일기가 모두에게 좋을 수 없고 내가 좋지 않았던 일기가 모두에게 좋지 않은 건 아니다. 모든 문학이 그러하듯이,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기도 문학이니까. 그래서 여전히 누군가의 일기를 읽고 싶다. 비밀스럽고 은밀한 이야기를 말이다. 가장 읽고 싶은 건 아직 읽지 못한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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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6-29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농부와 소설가‘ 어디서 했나요? ebs?
알았으면 저도 봤을텐데...
김탁환 작가 참 열심히 사는 작가죠.
저 힘들어서 우찌 사나 했더니 섬진강에 둥지를 틀었군요.
정말 멋지게 사네요. 책 읽어봐야겠어요.^^

자목련 2022-06-30 12:28   좋아요 1 | URL
kbs로 기억합니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확인하실 수 있을 듯해요.
김탁환 작가를 지지하는 어머님과 아내 분이 더 멋진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2-06-30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진강‘ 보고 김용택? 그랬는데
김탁환의 에세이네요
이분 소설 좋아하는데, 관심이 가네요.

자목련 2022-06-30 12:26   좋아요 1 | URL
김탁환 소설가의 소설 좋아하신다면 더 즐겁게 읽으실 것 같아요.
편안하고 좋은 글이었어요^^

그레이스 2022-07-08 18:38   좋아요 0 | URL
축하드려요~
자목련님~♡

자목련 2022-07-11 17:57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저도 축하드려요^^

mini74 2022-07-08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관왕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7-11 17:58   좋아요 0 | URL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 신진 작가 9인의 SF 단편 앤솔러지 네오픽션 ON시리즈 1
신조하 외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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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누리호 2차 발사가 성공했다. 방송을 통해 높이 날아올라 저 멀리 우주 속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감동적이고 뿌듯했다. 이제 정말 우주의 시대가 펼쳐지는 것일까? 일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SF의 세계, 문학계에서도 SF는 더 넓고 다양해졌다. 네오픽션에서 출간한 신진 작가 9명의 SF 단편 앤솔러지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더 이상 상상이 아닌 미래의 어느 날을 보여준다. 우리를 도와주는 단순한 기능의 인공지능 AI가 아니라 일상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조금 무섭기도 하고 조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표제작 이세형의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제목 그대로 감정을 파는 이야기다. 미래의 어느 날 우리는 정말 감정을 팔게 되는 건 아닐까. 소설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여자와 색소폰 연주가인 남자는 역할 대행 아르바이트를 통해 만난다. 연인에게 이별을 전하는 역할로 둘 다 대신 나온 것이다. 그렇게 만난 둘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들은 어느 날 AI를 통해 감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의 연락을 받는다. 그동안 그들이 대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제 세상은 모든 분야에 AI가 장악한다. 심지어 상대와 화해를 할 경우에도 심리상태를 분석한 AI가 문자를 보낸다. 감정을 소모할 일이 없으니 불편한 일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데이터의 시작이 된 두 남녀는 경제적으로는 부족할 게 없었지만 결국 헤어졌고 남자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본다. 누군가에게 색소폰을 연주하며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일, 그때마다 남자는 다양한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자는 돈을 주고 감정을 체험한다.


감정적 체험이 시장을 통해 돈으로 거래되는 시대가 정말 올지도 모른다. 물질적 풍요로 인해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를 알지 못하는 시대,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려면 그 경험을 구매한 사람만이 가능한 시대. 소설 속 상상이라 할지라도 너무 두렵다. 인간 자체가 AI가 되는 시대라고 해야 할 테니까. 인간 고유의 감정, 인간 고유의 존엄을 잃어버린 미래를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클레이븐의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도덕을 구매하는 세상이라니, 정녕 도덕이라는 게 구매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주인공 정수는 택배 일을 하는데 도덕 베타 버전 4.0을 구매하지 못해 그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도덕은 신규 버전은 빠르게 출시되는 데 그걸 구매할 여력이 없다. 생계를 위해 누군가는 다른 이의 도덕을 훔치고 죄를 지는 이들은 화형에 처한다. 도덕을 규정하는 자, 누구인가. 정부 권력이겠지만 그런 잔혹한 미래는 상상으로도 별로다.


강윤정의 「대통령의 자장가」는 대통령 지수의 아이가 납치되면서 시작한다. 여기서 아이란 대통령의 인공자궁 속 아이를 말한다. 여성의 자궁이 아닌 남성의 자궁에서도 아이가 자랄 수 있는 시대란 설정이 흥미롭다. 그것도 어려운 이들에게는 인공자궁을 선택할 수 있다. 대통령이 인공자궁을, 그것도 특정한 브랜드를 선택했다는 게 정치적인 공격을 받는다. 소설은 대통령의 인공자궁을 무사히 구해해는 과정과 더불어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으로 추리소설의 재미를 안겨준다. 인간의 몸이 아닌 곳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는 일, 어쩌면 곧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성탄의 「정신의 작용」은 인간의 정신을 업로드해 사후에도 남긴다는 놀라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다. 이른바 영생 프로젝트. 죽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기를 바라는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할까. 그러나 연구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업로드한 뇌, 그러니까 디지털 자아가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휴머노이드와 가상세계의 AI가 가득한 세상에 누군가는 AI 우울증을 앓고 이도 있다. 영생 프로젝트의 연구자인 수연도 그렇다. 자신의 상황을 들려주는 수연에게 팀장 연경이 묻는 말은 현재의 우리네 모습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진짜 소통의 총량이 있는데, AI와 대화하면 그동안 쌓아둔 걸 오히려 갉아먹게 된다는 건가요?” (「정신의 작용」, 259쪽)


우리는 과연 진짜 소통을 하고 있는 걸까. 스마트폰을 통해 대면이 아닌 비대면으로 다양한 것들을 해결하는 시대에 적응하느라 진정한 소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모두 그쪽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끝내 감정까지 구매하고 소설처럼 도덕이나 규범, 문화까지 정부가 규제하는 사회가 온다면 그건 인간의 사회일까.


무뇌증이지만 인간의 뇌를 이식받아 변호사가 된 등장하는 신조하의 「인간의 대리인」처럼 언젠가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대결하게 된다면 그 들 중 누구를 선택할까. 가격적 경쟁력을 따진다면 인간 변호사와 인공지능 변호사 중 누가 더 높은 수임료를 받게 될까. 질문이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간을 돕는 존재로 등장한 휴머노이드를 소재로 한 지금까지의 소설은 인간과의 우정이나 인간에 대해 알아가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게 끝일까.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조종할 것이고 그들에게 선이 아닌 악을 택하게 할 수도 있다.


죄인을 돕는 건 죄가 없는 성자만이 가능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건 사람이 아닌 신의 아들이었듯이 인간을 변호할 수 있는 건 인간이 아닌 자일 것이다. 그래서 기계들의 은밀한 물음에 대해 나의 대답은 늘 같다. 나는 항상 인간의 변호사다. (「인간의 대리인」, 39쪽)


언제나 그렇듯 SF 소설은 놀라운 상상력과 다양한 세계로 이끈다.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작가의 이력이 다양한 만큼 소재 역시 그렇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소설이 현실로 실현되는 시대가 다가오니 가벼운 재미에서 멈출 수 없다.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서로를 인정하고 연대하는 그런 미래를 그리는 소설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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