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괜찮아
니나 라쿠르 지음, 이진 옮김 / 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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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가족과 이별한다. 저마다 시기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이별을 준비하면서 살지 않는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하게 이별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산다. 존재 이전에 이별했다면 운명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어떻게 스며들어 우리는 지배할까. 그건 그들을 기억하는 이의 애정과 노력에 의해서다. 내가 모르는 엄마의 젊은 시절을 들려주는 고모의 노력 같은 것들. 니나 라쿠르의 『우린 괜찮아』속 마린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다.

마린에겐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사람들의 시선이 엄마를 닮았다는 걸 알 확인시켜준다. 모든 걸 준비해 주는 할아버지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할아버지의 공간과 마린의 공간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살고 있다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마린의 아기 때 사진이 없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린의 곁에는 친구 메이블이 있었고 그녀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친절하게 마린을 대했다. 둘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영혼을 나누는 사이였다. 문학에 대한 마린의 열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였다. 어느 밤 바닷가에서 할아버지 몰래 위스키를 마시고 서로를 탐하는 순간 밀려드는 황홀한 감각이 증거였다. 그런 메이블의 연락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혼자가 된 건 마린의 선택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메이블에게 마린은 왜 그런 태도를 보였을까. 후회하고 있다는 걸 메이블은 알고 있을까.

 

창밖엔 달, 나무들의 윤곽, 캠퍼스의 건물들, 산책로를 수놓는 불빛들이 펼쳐져 있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나의 집이고, 메이블이 떠난 뒤에도 이곳이 나의 집일 것이다. 나는 그 풍경의 고요함을, 그 날카로운 진실을 음미한다. 눈이 따갑고 목이 멘다. 이 외로움을 무디게 할 무언가가 있었으면. 외롭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한 단어였으면, 외롭다는 말은 훨씬 덜 아름답게 들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 외로움을 감당해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중에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불시에 덮치지 않도록, 온몸이 마비되어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16쪽)

소설은 기숙사에 홀로 남은 마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마린은 갈 곳이 없다. 추운 겨울을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 그리고 메이블이 온다. 메이블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을까. 마린은 기쁘면서도 두렵다. 텅 빈 기숙사에서 마린은 메이블을 맞을 준비를 한다. 잘 지냈다는 인상을 주도록 책상과 벽을 정리하다 그만둔다. 메이블은 다 알 수 있으니까. 둘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소설은 마린과 메이블이 기숙사에서 함께 보내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긋났던 메이블과 마린의 감정들, 바닷가에서 서로를 확인했던 그 마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마린이 세계를 흔든 거대한 사건인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드러난다.

 

마린이 먹을 음식을 챙기고 빨래를 정리하고 학교생활의 상담을 해주던 할아버지, 마린의 편에서 든든하게 자신을 지켜주던 분이었다. 버디란 이름의 할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는 근사한 분이셨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마린이 미래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마린의 일상은 습관처럼 평온했으니까. 새벽에 메이블을 만나러 나가던 일이며 할아버지가 혼자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일. 마린에게 할아버지는 유일한 울타리고 가족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실종 후 할아버지가 누구와 살아왔는지 알게 된다. 할아버지가 사랑한 딸, 마린의 엄마였다. 할아버지는 딸의 유령과 살고 있었다. 마린에게 보여주고 돌려줘야 할 엄마를 독차지한 것이다.

정상적이었던 일상이 무너졌다. 마린은 감당할 수 없어서 도망쳤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메이블의 문자와 전화를 외면하고 대학 기숙사에서도 괜찮은 척 지냈다. 잘 지낸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메이블을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집으로 같이 가자는 메이블의 말에 응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메이블과 함께 지난 모든 순간을 떠올리고 추억하며 언젠가는 괜찮아질 수 있다고 느꼈다. 할아버지를 잃은 무거운 상실감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너무도 순진해서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일 거라고 믿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의 조각들을 맞추기만 하면 그럴듯한 하나의 형상이 완성될 거라고 생각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우리 모습 같은, 우리의 거실 같은, 그리고 우리를 키워준 사람들 같은 형상이 완성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 대신. (157쪽)

어둡고 침울한 쪽으로 기울 수 있는 내용을 마린의 시선으로 묘사하며 균형을 맞춘다. 마린과 메이블의 맑고 투명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십 대 소녀만이 볼 수 있고 느끼며 알 게 되는 세계라고 할까.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로맨스 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마린처럼 우리도 이별과 상실, 그 안에서 성장하며 다른 세계를 공유하게 된다. 그리하여 단단해진 우정과 사랑을 마주하며 괜찮다고 말하며 웃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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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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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근대의 틀을 벗어나 현대로 가기 위해 몸부림칠 때, 클림트는 고전보다 더 먼 과거, 더 먼 세계로 역영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맥질했을 것이다. 그의 영감의 원천은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이집트의 상형문자, 미케네와 아시리아 문명의 문양, 라벤나의 모자이크에서 나왔다. 다른 화가들이 햇빛의 인상이나 형태의 주관적 모습을 고민하고 있을 때 클림트는 오직 장식에 집착하고 있었다. (280쪽)

첫눈에 반한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에 대한 느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로잡혔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림 말이다. 묘하게 끌리는 그림, 클림트의 그림이 그러하다. 자꾸만 시선이 머무는 그림,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사로잡았을까? 클림트가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독특한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간직한 화가, 그를 만나러 빈으로 떠난 전원경을 따라 그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나는 클림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사생활이 복잡했다는 것 정도만 들었을 뿐이다. 이 역시 소문 비슷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의 가족, 그의 연인, 그가 사랑한 것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클림트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은 흥미로웠고 이 한 권의 책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선 것 같아 즐거웠다. 클림트의 그림을 떠올리면 황금빛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게 금 세공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이라니. 어쩌면 그를 둘러싼 가족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데 화려한 색감과 클림트의 그림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더욱 놀라웠던 건 빈 장식공예학교 학생 신분인 어린 나이에 예술가 컴퍼니를 창립했다는 것이다. 두려움이라곤 없었던 클림트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런 도전과 혁신적인 클림트를 생각하면 19세기 말, 과거를 지향하는 듯했던 도시 빈을 떠나 새로운 이상향을 찾았을 것 같은데 아니었다. 클림트에게 빈은 그 자체로 그의 삶을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전부였다.

이 책의 시작도 그러하다. 빈이라는 도시와 가족. 빈의 클림트 빌라, 부르크 극장, 빈 미술사 박물관, 빈 분리파 회관 제체시온, 이탈리아 라벤나, 아터 호스의 클림트 센터로 이어져 클림트의 삶과 그의 그림을 보여준다. 예술가 컴퍼니가 의뢰받은 천장화로 인해 빈에서 입지를 굳혔고 새로운 개혁의 의지는 빈 대학 천장화의 스케치에서 대한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클림트의 확고한 의지는 스물세 명의 예술가들과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활동으로 이어진다.

내게 중요한 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내 그림을 좋아하는가 하는 문제다. - (《비너 모르겐차이퉁》, 1901년 3월 22일 - 94쪽)

책에서 본 클림트는 큰 키의 우람한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연약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남동생의 죽음을 경험하면서도 심리적으로 불안했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힘들어했다. 그가 가족이자 연인이었던 에밀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찾은 이름도 에밀리였으니까. 정신적 지주였던 에밀리에게 자신의 모든 걸 남겼다는 게 이해가 된다.

책을 통해 클림트의 그림에 대한 해설을 드는 건 기대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겨우 책을 통해서만 접해지만 길이 34미터에 달하는 <베토벤 프리즈>는 정말 아름다웠고 놀라웠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의 경이로움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클림트 그 이름 자체가 유니크한 세계라는 걸 실감한다. 아름다운 초상화가 변화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기묘하면서도 점점 더 황홀해지는 작품.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면서 클림트가 빠져든 건 무엇일까, 궁금할 뿐이다.

에밀리와 여름을 보낸 아트 호수에 대한 부분도 무척 좋았다. 클림트의 풍경화는 정말 매력적이다. 좀 더 많은 풍경화가 수록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책이라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클림트가 살아온 삶에 대한 이해와 그가 지향한 그림의 세계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여전히 우리를 미혹하는 클림트의 그림, 그 안에서 그가 영원히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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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삶은 언제나 멀리 있다. 가까스로 그곳에 닿으려 해도 손 닿을 듯 닿지 않는다. 삶이란 참 그런 것이다. 홍이의 부모가 부단히 벗어나려 하고 떠나려 해도 결국 머무는 곳이 남일동 언저리인 것처럼. 그렇다면 왜 떠나려 하는 것일까. 남일동이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혜진의 『불과 나의 자서전』은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벗어나고 싶은 동네, 혹은 재개발이라는 이유로 떠날 때를 기다리는 그곳 말이다.

소설 속 홍이는 남일동에 살았다. 홍이에게 남일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달산 아래의 허름한 동네, 골목에서 가겟집 아이들과 늦은 저녁까지 놀고 싶었다. ​사람들이 남일동이라는 이름이 아닌 ‘남일도’라 부르는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중3에 근처 중앙동의 학교로 전학을 가고서야 알았다. 행정구역 상 남일동에서 중앙동에 편입되었을 뿐 남일동이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난 부모는 남일동의 시절을 기억에서 지우려 했다. 단 한 번도 남일동에 산 적이 없는 것처럼. 남일동은 그런 동네였다. 누군가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동네. 화자인 홍이도 자연스레 남일동을 잊었다. 심각한 알레르기 치료 때문에 제일약국에 드나들면서 남일동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해 모녀를 만난다.

 

다니던 직장에서 왕따 문제로 결국 퇴사를 하고 현재까지 일을 찾지 못하는 홍이의 이야기를 주해는 들어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처음 본 주해에게 꺼낼 수 있다니. 그 후로 홍이는 주해 모녀와 자주 만나고 친하게 된다. 딸 수아를 혼자 키우는 주해와 만나면서 홍이는 그들이 사는 남일동에 드나든다. 주해 모녀와 어울리면서 홍이는 남일동에서 보낸 시절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의 기억, 경매로 이웃의 집을 샀던 아버지는 손수 집을 수리했다. 자신의 집을 가졌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어머니. 남일동에서 중앙동으로 이사 온 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학창 시절.

소설은 홍이의 시선으로 현재의 남일동과 과거의 그곳을 보여준다. 여전히 골목은 어둡고 마을버스 노선은 없고 쓰레기로 가득 채워진 빈 집들. 왜 그토록 사람들이 남일동을 꺼려 했는지,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런 남일동이 변하고 있었다. 주해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가로등 설치와 달산 방면의 마을버스 코스가 운행할 수 있도록 민원을 넣고 일일이 주민을 찾아 동의를 구하는 일 모두가 주해가 시작하고 행동한 결과였다. 제일약국 앞에서 마녀 시장을 열고 사람들이 남일동을 찾았다. 남일동은 변하고 있었다. 홍이는 그런 주해가 놀라웠고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주해가 일을 구하고 퇴근이 늦어지면 홍이는 수아를 돌봤다. 수아가 집과 가까운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의 취학통지서를 받자 주해는 학교로 찾아간다. 남일동에 산다는 이유로 다른 학교로 입학을 해야 한다니. 주해의 집요한 노력으로 수아는 가까운 학교로 입학을 한다.

 

주해에게는 남일동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떠날 수 없었고 재개발 바람에 더욱 매달렸다. 재개발 추진 위원회에서 일하며 아파트 당첨권을 얻어야만 했다. 악착같은 주해의 모습에서 홍이는 과거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남일동의 모습도. 홍이가 중3 시절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수아는 ‘난민’으로 불린다는 사실. 수아를 잘 키우고 싶은 주해의 간절함에는 행운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고 주해는 수아를 데리고 남일동을 떠난다. 남일동에서 태어났고 남일동에서 자랐지만 홍이에게 남일동은 상처였다. 남일동이 사라져버린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쓰레기를 태운 드럼통에 불을 지른다.

 

그 밤 나는 정말 없애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 안에 한번 똬리를 틀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고, 악착같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던 불안을. 못 본 척하고, 물러서게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두려움을. 오래전 내 부모의 가슴속에 드리우고 나에게까지 이어져왔던 그 깊고 어두운 그들을 정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168쪽)

이런 홍이의 마음은 여전히 존재하는 곳곳의 다른 이름의 남일동에 사는 누군가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고달픈 현실과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난과 혐오의 시선. 그러니 소설의 첫 시작에서 남일동인 철거되는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는 홍이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다. 원하는 삶을 꿈꿀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한 것일까. 이곳과 그곳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편견 없이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그리하여 그 삶의 자서전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불빛이 가득할 그런 날들이. 그런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삶을 사는 이야기, 지금 우리의 이야기다. 내가 사는 이곳도 그렇다. 이곳과 그곳을 구분하는 건 아파트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넓고 쾌적한 공간 누구나 꿈꾸는 곳이다. 하지만 그건 것들로 삶의 가치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쪽으로 기운다. 작은 소읍에 들어선 아파트가 너무 많다. 빈 땅은 두고 볼 수 없는 걸까. 물론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공간은 금세 쓰레기로 가득 차고 공사가 중단된 건물은 위험한 곳으로 인식된다. 김혜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은 개발과 무관한가 생각한다.

 

김혜진의 단편 「3구역, 1구역」에서도 재개발로 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길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 인연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 그 관계는 개발로 인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달라진다. 아니, 달라진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발로 인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묘한 입장의 차이. 더 좋은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욕망, 그것은 당연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나의 지역이 개발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곳은 이전과 다른 곳이 된다. 이전의 것들은 잊히고 버려진다. 그곳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정녕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왜 모른 척하는 것일까. 무언가 빠져간 듯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이다.

 

​고개를 들면 내가 사는 3구역이 그대로 내려다보였고 그 너머로 상대적으로 높고 반듯한 1구역의 모습이 보였다가 말다가 했다. 3구역이 이렇게 생겼구나. 잠깐씩 고개를 돌릴 때마다 3구역은 넓어졌다가 어두워졌다가 깊어졌다. 높이감을 느낄 수 없는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인 풍경은 웅덩이처럼 보였고, 재개발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고 해도 이곳을 바꿔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3구역, 1구역」중에서)

​어느 시절 내가 머물렀던 그 동네의 풍경이 떠오른다. 높은 지대, 좁은 골목, 버스 정거장까지의 너무 멀었던 나의 집. 하나의 대문 안에 또 다른 작은방들.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곳의 삶을 부정하거나 지우고 싶지는 않다. 퇴근 후 친구들과 늦은 밤까지 맥주를 마시고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택시 번호를 적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 하나의 소설이 내 일상을 쓰다듬고 주위를 살피게 만든다. 약자, 소외된 삶, 연대, 공존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김혜진. 그녀의 소설을 좋아하고 계속 읽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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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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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죽었다. 죽은 언니를 발견한 건 안타깝게도 동생이다. 잔혹하고 처참한 모습이 언니의 마지막이었다. 동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느 주말과 다름없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언니가 살고 있는 말로로 향한다. 역에서 언니를 볼 수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간호사 업무가 많거나 반려견 페노와 함께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노라는 그저 언니 레이첼을 빨리 만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노라가 마주한 건 언니와 페노의 죽음이었다. 이제 노라에게 중요한 건 범인을 잡는 일이다.

경찰이 조사를 시작했고 형사는 노라에게 질문을 한다. 언니를 해칠 만한 이가 있는지, 언니에게 어떤 변화가 느껴졌는지, 마지막 통화를 했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묻는다. 노라는 언니에 대해 자신이 아는 사실을 모두 말한다. 과거 15년 전 열일곱 살의 언니가 폭행을 당한 사실, 결혼을 하려고 했던 남자가 있었다는 것, 간호사로 일하면서 피곤해한 점. 그러나 그런 것들은 범인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이 들려준 일들이 더욱 놀라웠다. 페노는 보통의 애완견이 아니라 방범용으로 훈련된 개였고 언니는 말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노라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범죄현장인 언니의 집으로 갈 수 없는 노라는 경찰이 구해준 헌터스에 머물면서 범인을 찾기로 한다. 15년 전 그 남자가 언니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언니의 집에 방문한 사람, 이웃, 모두가 다 의심스럽다. 노라는 언니의 집 주변에서 언니를 관찰하고 지켜본 이의 흔적으로 보이는 담배꽁초를 발견한다. 하지만 경찰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15년 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술에 취한 십 대 소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 언니의 행동이 불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후로 레이첼과 노라는 비슷한 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마다 법원을 찾았다. 그러나 언니를 폭행한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노라는 이번에도 범인을 잡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언니가 지났을 거리, 언니가 만났을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고 접근을 시도한다.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레이첼과 어떤 사이였는지 파고든다. 노라의 용의주도함과 집요함에 빠져들게 된다. 그들 가운데 범인이 있을까. 레이첼을 왜 죽였을까. 범인에 대한 궁금증과 용의자를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때문에 누군가는 이 소설을 심리 스릴러, 추리 소설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언니 생각을 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추억 하나가 꼬리를 물고 다른 추억으로 이어지고, 시간은 전혀 흐를지 않는 것만 같다. (202쪽) ​

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언니를 꼭 껴안았을 때 느꼈지던 언니의 체중이 기억난다. 시간이 느릿느릿 흐른다. (273쪽)

 

하지만 이 소설에서 돋보이는 건 노라와 레이첼이 함께 보낸 시간이다. 노라의 시선에 따라 레이첼의 삶을 들여다보며 둘만의 추억과 상처를 보여준다. 십 대 소녀 시절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울다 웃고 싸우기도 했던 시절, 같이 먹었던 음식, 같이 본 풍경, 바다. 알코올중독이었던 아버지는 그들에게 울타리가 되지 않았고 오직 자매만이 서로의 보호자였다. 레이첼이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라는 도왔고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묘한 갈등이 있었고 그것은 노라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키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폭행, 살인, 스토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오는 이야기, 단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소설이다.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보다는 죽은 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압도적인 소설이라 해도 좋겠다. 작가는 상실감에 빠진 노라의 감정을 섬세하고 서정적으로 그려내 전달한다. 멈춰진 레이첼의 일상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애절한 슬픔이 통증으로 남을 뿐이다.

빨간 립스틱을 좋아하는 언니는 앞으로 다시는 손등에 여러 가지 립스틱을 발라보며 약국 진열장 앞에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개봉하면 휴일에 보려고 했던 영화도 못 볼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좋아하는 판 콘 토마테를, 퇴근 후 토마토와 마늘을 으깨고 올리브오일을 뿌린 다음, 구운 빵에 문질러 그걸 부엌에서 선 채로 먹는 일도 없을 것이다.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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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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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소설 속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동병상련, 혹은 그래도 그들보다는 나은 것 같다는 나름의 위안. 아니면 단순한 재미와 즐거움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즐거움』을 읽으면서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알려진 대로 소설은 잘 읽혔다. 지루하거나 무겁지도 않고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그 정도였다. 그러나 앞선 독자나 출판사, 언론의 칭찬은 과한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건 맞다. 그러나 특정 세대, 그러니까 딱 30대를 위한 소설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작가가 자기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소설에 풀어냈고 그 역시 30대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소설의 소재나 작가의 시선은 신선하다 할 수 있다.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었다는 것, 직장 생활의 고단함과 월급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시대가 다르지만 직장인의 스트레스는 여전하니까. 입으로는 모두 등등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하면서도 지위의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는 모습과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한 후에야 가능할 것 같은 복지에 대한 약속은 씁쓸했다. 제목에서 어떤 공포를 짐작할 수 있는 「새벽의 방문자들」는 혼자 사는 여성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택배 주문 시 수령인의 남자 이름으로 하거나 무인 택배함을 이용하는 일, 엘리베이터를 혼자 탈 수 없는 두려움. 인상적이었던 건 새벽에 소설 속 주인공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을 찾아오는 남자들의 평범함, 그것을 사회적 문제인 성매매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저 하나의 상황을 확장시켜 이야기로 만든다는 점이 장류진의 장점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고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을 전전하다 드디어 첫 출근길 아침 풍경을 묘사한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과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직장동료의 결혼 준비를 들려주는 「잘 살겠습니다」, 그리고 결혼 칠 년 만에 장만한 집에 대한 애착과 그 공간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들인 도우미와의 갈등을 그린 「도움의 손길」은 가장 보편적인 청년의 모습으로 보였다. 급여를 30일로 쪼개어 하루 평균 지출비용을 정하고 살아야 하는 마음, 받음만큼만 돌려주겠다는 의도, 부모 세대의 관심을 간섭으로 여기는 태도. 「도움의 손길」의 경우, 독자가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와 반전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장류진이 소설에서 그들의 깊은 고민이 너무 가볍게 표현된다는 점이다. 그 가벼움의 무게를 내가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꿈을 위해 현실과 타협할 수 없어 하루하루 위태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년의 일상인 「다소 낮음」, 반대로 다큐멘터리 피디가 뒤고 싶었지만 현실은 식품회사의 회계팀 취직한 「탐페레 공항」에서는 이전 소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탐페레 공항」에서 화자는 이력을 위해 졸업 전 휴학을 하고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더블린으로 가는 도중에 경유지인 핀란드 탐페레 공함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짧은 시간 만난 노인에 대한 기억이 찌들어가는 현실을 울컥하게 만든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의 숨 막히는 현실과 불안정한 감정의 조화가 나쁘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결국엔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좋은 소설이 나에게도 해당될 수는 없다. 베스트셀러가 모두 좋은 소설이 아니듯 말이다.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처음 맛본 음식과도 같았다. 설렘과 기대가 있었다. 나중에 다시 찾을 음식일지는 모르겠다. 누군가 처음이라 그렇다고 익숙해지면 괜찮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그런 즐거움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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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5-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서 마음에 남는 무언가가 거의 없는 그런 책이었던 거 같아요. ㅎㅎ

자목련 2020-05-12 16:5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모두 다 좋다고 하는 소설인데, 저만 이상한가 싶기도 하고. ㅎ

수다맨 2020-05-13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은 고민이 너무나 가볍게 표현된다‘라는 표현에 크게 동의합니다. 디테일을 다루는 솜씨는 뛰어난데 작가가 추구하는 창작의 방향이 직장인들의 속물성이나, 삼십대 여성의 전형성을 포착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꽤 괜찮은 수준의 세태소설들의 모음집‘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만 깊은 호감이 가지는 않더군요.

자목련 2020-05-15 10:35   좋아요 0 | URL
네, 특정 세대의 이야기를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 안에서도 몇 몇 집단과 부류만 집중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 소설집 외에 다른 곳에서 만난 단편에서도 그런 느낌이 이어지니 당분간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없을 듯해요. 비 오는 금요일, 건강하고 편안하게 보내세요^^*

야툽 2020-05-1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류진 작가의 다른 단편을 읽고 싶어도 ‘냉장고장고장고 고장은 아닐거야‘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 못 읽고 있습니다. 남는 게 없다는 점이 이 책을 비판하는 독자들의 공통점이네요.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많이 읽은 소설이라지만 저는 오히려 깊이가 없어 충격이었습니다

자목련 2020-05-20 15:55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장류진 작가의 등단 당시 출판사와 언론의 찬사 때문에 얼마나 대단한가 싶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어요. 너무 쉽고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