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삶은 언제나 멀리 있다. 가까스로 그곳에 닿으려 해도 손 닿을 듯 닿지 않는다. 삶이란 참 그런 것이다. 홍이의 부모가 부단히 벗어나려 하고 떠나려 해도 결국 머무는 곳이 남일동 언저리인 것처럼. 그렇다면 왜 떠나려 하는 것일까. 남일동이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혜진의 『불과 나의 자서전』은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벗어나고 싶은 동네, 혹은 재개발이라는 이유로 떠날 때를 기다리는 그곳 말이다.

소설 속 홍이는 남일동에 살았다. 홍이에게 남일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달산 아래의 허름한 동네, 골목에서 가겟집 아이들과 늦은 저녁까지 놀고 싶었다. ​사람들이 남일동이라는 이름이 아닌 ‘남일도’라 부르는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중3에 근처 중앙동의 학교로 전학을 가고서야 알았다. 행정구역 상 남일동에서 중앙동에 편입되었을 뿐 남일동이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난 부모는 남일동의 시절을 기억에서 지우려 했다. 단 한 번도 남일동에 산 적이 없는 것처럼. 남일동은 그런 동네였다. 누군가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동네. 화자인 홍이도 자연스레 남일동을 잊었다. 심각한 알레르기 치료 때문에 제일약국에 드나들면서 남일동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해 모녀를 만난다.

 

다니던 직장에서 왕따 문제로 결국 퇴사를 하고 현재까지 일을 찾지 못하는 홍이의 이야기를 주해는 들어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처음 본 주해에게 꺼낼 수 있다니. 그 후로 홍이는 주해 모녀와 자주 만나고 친하게 된다. 딸 수아를 혼자 키우는 주해와 만나면서 홍이는 그들이 사는 남일동에 드나든다. 주해 모녀와 어울리면서 홍이는 남일동에서 보낸 시절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의 기억, 경매로 이웃의 집을 샀던 아버지는 손수 집을 수리했다. 자신의 집을 가졌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어머니. 남일동에서 중앙동으로 이사 온 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학창 시절.

소설은 홍이의 시선으로 현재의 남일동과 과거의 그곳을 보여준다. 여전히 골목은 어둡고 마을버스 노선은 없고 쓰레기로 가득 채워진 빈 집들. 왜 그토록 사람들이 남일동을 꺼려 했는지,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런 남일동이 변하고 있었다. 주해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가로등 설치와 달산 방면의 마을버스 코스가 운행할 수 있도록 민원을 넣고 일일이 주민을 찾아 동의를 구하는 일 모두가 주해가 시작하고 행동한 결과였다. 제일약국 앞에서 마녀 시장을 열고 사람들이 남일동을 찾았다. 남일동은 변하고 있었다. 홍이는 그런 주해가 놀라웠고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주해가 일을 구하고 퇴근이 늦어지면 홍이는 수아를 돌봤다. 수아가 집과 가까운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의 취학통지서를 받자 주해는 학교로 찾아간다. 남일동에 산다는 이유로 다른 학교로 입학을 해야 한다니. 주해의 집요한 노력으로 수아는 가까운 학교로 입학을 한다.

 

주해에게는 남일동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떠날 수 없었고 재개발 바람에 더욱 매달렸다. 재개발 추진 위원회에서 일하며 아파트 당첨권을 얻어야만 했다. 악착같은 주해의 모습에서 홍이는 과거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남일동의 모습도. 홍이가 중3 시절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수아는 ‘난민’으로 불린다는 사실. 수아를 잘 키우고 싶은 주해의 간절함에는 행운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고 주해는 수아를 데리고 남일동을 떠난다. 남일동에서 태어났고 남일동에서 자랐지만 홍이에게 남일동은 상처였다. 남일동이 사라져버린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쓰레기를 태운 드럼통에 불을 지른다.

 

그 밤 나는 정말 없애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 안에 한번 똬리를 틀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고, 악착같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던 불안을. 못 본 척하고, 물러서게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두려움을. 오래전 내 부모의 가슴속에 드리우고 나에게까지 이어져왔던 그 깊고 어두운 그들을 정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168쪽)

이런 홍이의 마음은 여전히 존재하는 곳곳의 다른 이름의 남일동에 사는 누군가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고달픈 현실과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난과 혐오의 시선. 그러니 소설의 첫 시작에서 남일동인 철거되는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는 홍이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다. 원하는 삶을 꿈꿀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한 것일까. 이곳과 그곳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편견 없이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그리하여 그 삶의 자서전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불빛이 가득할 그런 날들이. 그런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삶을 사는 이야기, 지금 우리의 이야기다. 내가 사는 이곳도 그렇다. 이곳과 그곳을 구분하는 건 아파트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넓고 쾌적한 공간 누구나 꿈꾸는 곳이다. 하지만 그건 것들로 삶의 가치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쪽으로 기운다. 작은 소읍에 들어선 아파트가 너무 많다. 빈 땅은 두고 볼 수 없는 걸까. 물론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공간은 금세 쓰레기로 가득 차고 공사가 중단된 건물은 위험한 곳으로 인식된다. 김혜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은 개발과 무관한가 생각한다.

 

김혜진의 단편 「3구역, 1구역」에서도 재개발로 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길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 인연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 그 관계는 개발로 인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달라진다. 아니, 달라진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발로 인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묘한 입장의 차이. 더 좋은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욕망, 그것은 당연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나의 지역이 개발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곳은 이전과 다른 곳이 된다. 이전의 것들은 잊히고 버려진다. 그곳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정녕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왜 모른 척하는 것일까. 무언가 빠져간 듯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이다.

 

​고개를 들면 내가 사는 3구역이 그대로 내려다보였고 그 너머로 상대적으로 높고 반듯한 1구역의 모습이 보였다가 말다가 했다. 3구역이 이렇게 생겼구나. 잠깐씩 고개를 돌릴 때마다 3구역은 넓어졌다가 어두워졌다가 깊어졌다. 높이감을 느낄 수 없는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인 풍경은 웅덩이처럼 보였고, 재개발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고 해도 이곳을 바꿔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3구역, 1구역」중에서)

​어느 시절 내가 머물렀던 그 동네의 풍경이 떠오른다. 높은 지대, 좁은 골목, 버스 정거장까지의 너무 멀었던 나의 집. 하나의 대문 안에 또 다른 작은방들.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곳의 삶을 부정하거나 지우고 싶지는 않다. 퇴근 후 친구들과 늦은 밤까지 맥주를 마시고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택시 번호를 적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 하나의 소설이 내 일상을 쓰다듬고 주위를 살피게 만든다. 약자, 소외된 삶, 연대, 공존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김혜진. 그녀의 소설을 좋아하고 계속 읽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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