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시인선 23
이현승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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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없이 여름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슬그머니 가을이 왔다. 계절이 바뀌니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긴다. 길었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고 아침 저녁으로 뜨거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찬 물에 말아 먹던 밥과 냉면을 생각하면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절은 다른 이름으로 돌아오고 잊고 있던 그리움의 존재는 되살아난다. 이런 날들에 시를 읽는다는 건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는 다분히 감정의 소모를 불러올 것이고 나 역시 친구처럼 누군가에 짙은 우울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문자를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내게 속한 시간도, 주어진 시간이 늘었다거나 줄었다거나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가을은 받고 싶지 않은 우울이라는 선물을 덥석 떠맡기는 것이다.

 

 가을이라서 엊그제는 <가을 단상>이란 제목의 시를 따라 읽었지만 이 시집에서 첫 번 째 읽은 시의 제목은 <에이프릴>이다. 그렇다. 여전히 나는 봄을 그리워하고 봄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다가올 봄이 아닌 내 몸에 문신처럼 남은 지난 봄의 날들을 말이다. 더이상 봄눈에 놀라지 않는 오늘을 살지만.

 

  <에이프릴>

 

 우는 아이를 안고 걸어오는 길이었습니다.

 비둘기 두 마리 고추장비빔밥맛 삼각김밥을 쪼아먹고 있

었습니다.

 너덜너덜 더이상 삼각형이 아닌 삼각김밥처럼

 피만 것인지 지다 만 것인지 목련나무가

 눈비 지나간 사월의 끝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울 다 잠이 든 아이는 자다 깨어 다시 울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나뭇가지에 얹혔던 꽃도 눈도 갑작스런 찬바람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마와 불과 목과 겨드랑이도.

 

 꽃은 나뭇가지에서 피어나지만

 나무도 가 본 적 없는 세상으로 먼저 갑니다.

 공중에 잠깐 머물다 곤두박질치는 꽃잎들을

 나무는 돌멩이가 가라앉는 물속 보듯 바라봅니다.

 

 펄펄 끓는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오며 보았습니다.

 아프지 말아라 목련나무야 벚나무야 비둘기야

 해열진통제 같은 사월의 눈이

 펄펄 끓는 벚나무 이마를 가만히 짚습니다. - 62쪽

 

 <비의 무게>

 

 분리수거된 쓰레기들 위로

 비가 내린다

 끼리끼리 또 함께

 비를 맞고 있다

 

 같은 시각

 옥수동엔 비가 오고

 압구정동엔 바람만 불듯이

 똑같이 비를 맞아도

 폐지들만 무거워진다

 

 같을 일을 다행도

 어쩐지 더 착잡한 축이 있다는 듯이

 처마 끝의 물줄기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리는 빗속에서

 더이상 젖지 않는 것들은

 이미 적은 것들이고

 젖은 것들만이

 비의 무게를 알 것이다 - 22쪽

 

 지난 봄, 나는 펄펄 끓는 열보다 더 뜨거운 아픔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내 감정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아파했다. 두 번의 계절이 바뀌었지만 크기를 잴 수 없는 슬픔은 여기 저기 흩어졌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 해마다 봄을 맞이하면 우리는 또 각 자의 자리에서 소리없이 절규하고 통곡할 것이다. 비에 젖은 것들만이 비의 무게를 안다는 당연한 말이 왜 이리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눈물의 원료>

 

 우리는 언제나 두 번 놀란다

 한 번은 갑작스런 부고 때문에

 또 한 번은 너무나 완강한 영정 때문에

 

 다 탄 향의 재처럼 가뭇가뭇한 눈을 씻고

 우리는 산적과 편육과 장국으로 차려진 상을 받으며

 사나운 곡소리와 눈물을 만드는 재료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의 얼굴이란 웃는 표정과 우는 표정이 비슷하고

 가리는 울음과 드러내는 웃음이 반반 섞이고 나면

 알 수 없다 알 수 없이 망연하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호흡은 들숨일까 날숨일까

 마지막 날숨을 탄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들숨을 결심할 때의 그것으로 볼 수 있을까

 

 남의 밥그릇에 밥을 퍼줄 때만 우리는 잠시 초연해질 수

있다

 밥통을 열어젖힐 때의 훈김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

지는 것들을 본다 - 28쪽

 

 <친애하는 사물들>

 

 아파서 약 먹고 약 먹어서 아팠던 아버지는

 주삿바늘을 꽂고 소변주머니를 단 채 차가워졌는데

 따뜻한 피와 살의 영혼으로 지어진 몸은

 불타 재가 되어 날고 허공으로 스몄는데

 

 아버지의 구두를 신으면 아버지가 된 것 같고

 집 어귀며 책상이며 손 닿던 곳은 아버지의 손 같고

 구두며 옷가지며 몸에 지니던 것들은 아버지 같고

 내 눈물마저도 아버지의 것인 것 같다

 

 우리는 생긴 것도 기질도 입맛도 닮았는데

 정반대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본다

 포옹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마주 오는 차량의 운전자처럼

 무표정하게 서로를 비껴가버린 것이다 - 82쪽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소식들이 점점 늘어간다. 누군가의 발병,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이별, 누군가의 실패나 좌절이 아무렇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매 시각 뉴스는 잔혹한 뉴스를 전달하고 우리는 점점 소모되고 사라진다. 균일화된 눈물을 흘리거나 동일한 크기로 분노를 발산한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삶의 공식인 것처럼 받아들이려 한다.

 

 <다정도 병인 양>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 두 살의 주인공에게도

 울분이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 - 54쪽

 

 어떤 이들에게 가을은 아주 위험한 계절이다. 여름 내 단단하게 부여잡은 감정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가을, 처진 등을 보여도 될 누군가가 필요하다. 시를 읽으라는 권유는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라도 읽어야 뭉쳐진 가슴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왼손을 잡아줄 오른손이 없는 이들에게, 오른손을 잡아줄 왼손이 없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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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늦은 밤 친구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오랜만의 휴일을 잠으로 채웠다며 놀이터에서 바람과 마주하는데 조금은 서럽다는 문자였다. 친구의 마지막 문자를 받은 3월 이후로 처음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는 안부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종종 있었던 일이라, 그저 잘 지내리라 믿고 있었다. 친구는 나와 고등학교와 대학을 함께 다녔다. 언니들과 함께 자취를 하던 친구 덕분에 나는 맛난 집 밥을 자주 먹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내 젊은 날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 변덕스러운 감정을 견뎌 준 친구였다.  서럽다는 문자에 나는 엉뚱한 답을 보냈다. 이 계절에 잘 먹어야 하고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고. 

 

 어디 서럽기만 할까. 때로 화나고 분노하며 외로운 게 삶이 아닐까. 친구와 이런 책을 함께 읽고 싶다.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인 <세상에 예쁜 것>, <펄벅의 인생 수업>을 건네면 서러운 마음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아, 분명 친구도 분명 좋아할 허연의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도 잊지 말아야 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인연과 운명이 존재한다고 믿는 친구를 나는 좋아한다. 학창시절 함께 라디오를 듣고 그 시절에는 당연했던 우정 반지와 목걸이를 나누던 날들이 기억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친구. 아, 그 반지와 목걸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자면, 올리버 색스의 책이 나왔다. 부제가 더 눈에 들어오는 <깨어남>, 그의 책은 어렵지만 언제나 궁금하다. 이 책은 아마도 영화로 만들어진 그 소설이 아닐까 싶다.  몇 달 전 EBS에서 통해 영화를 본 후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잘 알려진 유명 소설의 뒷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도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줄 것 같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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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9-1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내고 싶은 문자를 자목련님이 받으셨군요.^^
살다보면, 그저 서러울 때가 예정된 손님처럼 찾아오지요.
박완서님의 새 산문집이 눈에 뜨입니다. 세상에 예쁜 것!

자목련 2012-09-11 11:50   좋아요 0 | URL
이 계절의 바람과 햇살이 잠자던 울증을 깨우는 게 아닌가 싶어요..
살다보면, 보석처럼 빛나는 날도 오겠지요?
제목도 넘 좋아요. <세상에 예쁜 것!>이라니..
 
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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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진다. 물처럼 담는 그릇에 따라 변형되기도 한다. 물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보여지는 모습에 따라 다르고 보고 싶은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인간은 때로 진짜 나를 감추기 위해 변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나쁜 의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히가시노 게이고의매스커레이드 호텔에서 형사 닛타가 열흘 동안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호텔리어로 살아야 하는 이유도 그랬다. 호텔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세 명의 피해자, 사건마다 알 수 없는 조합인 두 개의 숫자만을 남긴 세 건의 살인사건에 숨겨진 단서를 통해 다음 서건 장소를 알아낸다. 도쿄 최고의 야경으로 유명한 최고급 호텔에서 과연 살인은 일어날까? 소설은 예고된 범죄 공간에서 사건을 막고 범인을 검거해야 하는 단순 명료한 추리소설의 형식과 요건을 갖추고 있다.

 

 형사들은 벨보이, 하우스 키퍼, 방문객, 프런트 직원으로 위장하며 수사한다. 범인에 대해 밝혀진 단서가 없으니 모든 인물이 용의자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그 공간이 바로 호텔이라는 점이다. 호텔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출입한다. 더구나 호텔리어는 고객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호하려 한다. 호텔리어인 나오미가 닛타와 마찰이 생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닛타의 고교시절 교생 선생님이 과거의 오해로 호텔리어로 나타난 닛타에게 온갖 트집을 잡아도 불평이나 불만을 제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국 닛타 형사는 나오미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고 협조를 구한다. 호텔에 대한 애정으로 나오미는 그를 돕지만 여전히 불만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니까 닛타는 호텔에 방문하는 모든 고객들을 의심하며 뒷조사를 하려는 반면, 나오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고객을 옹호한다. 누군가에게는 잠시 머무르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나오미에겐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곳이자 일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설사 그가 진실을 숨긴 채 가면을 쓴 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소설은 호텔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보여준다.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일 수 있는지,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지, 감춰진 욕망의 크기를 낱낱이 드러낸다. 숙박부에 기재하는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가명인 경우는 허다하고 남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는 위험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방문도 많은 곳이 호텔이다.  내가 아닌 나로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어느 공간이든 가능하지만 호텔이라는 곳은 허락받은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색안경을 끼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위험한 존재이며, 속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남을 속일  수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것은 안락하고 편안한 객실을 위해 많은 감시 카메라가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다.

 

 열정과 패기만 앞세운 닛세와 어리바리한 아저씨 같지만 범죄 해석과 정보 수집에 탁월한 노세와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탁월한 추리 감각을 선보이는 나오미의 활약은 소설의 흥을 돋군다. 짧은 시간 경찰이 아닌 호텔리어로 생활하면서 닛타는 타인에 대한 가면 벗기기가 아닌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오미 역시 닛타를 응원한다.  

 

 누가 범인일지 단 한 명의 고객도 놓치 수 없기 때문에 독자는 집중할 수밖에 없다. 방문객은 물론이며 내부의 호텔 사정을 가장 잘 알며 마스터키를 지닌 직원도 의심해야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함께 범인을 추리하고 예상 경로를 추리하는 동시에 인간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때로 가면의 날로 채우고 싶은 욕망, 혹은 때로 가면의 날로 채워야만 하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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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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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 무한하다고 믿는 단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도 그건 사랑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도 담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사랑은 영원하며 무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랑은 존재만큼 그 영향력도 무한하다. 우리는 흔히 사랑 때문에 죽고 사랑 때문에 산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결코 쉽게 해서는 안 될 엄숙한 말인지도 모른다. 암 투병 중인 소녀와 소년의 사랑 이야기인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깨닫게 한다.

 

 소설은 말기 암 환자인 열 여섯 헤이즐이 환우 모임에서 골육종으로 다리 하나를 절단한 소년 어거스터스(이하 거스)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산소 탱크가 신체의 일부이고 투약 부작용으로 퉁퉁 부운 얼굴의 헤이즐에게 의족을 한 거스는 정말 멋진 아이였지만 관심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내민 손에 담긴 진심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암이라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암은 그들에게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헤이즐과 거스는 주변의 염려와 걱정을 뒤로 하고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지만 헤이즐과 거스는 최선을 다해 삶을 즐긴다. 함께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적당히 부모에게 반항한다. 지극히 십대스러운 둘의 모습은 그 존재만으로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거스가 헤이즐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연락을 취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면서 둘 사이는 긴밀해진다. 서로에서 속한 부분은 점점 더 커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거스는 헤이즐이고 헤이즐은 거스인 것이다.

 

 괴팍스러운 작가와의 만남은 기대했던 만큼의 즐거움을 안겨주지 않았고 여행에서 돌아온 거스는 헤이즐에게 암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이 된 사실을 고백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자신의 전부를 거는 일임을 거스는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미래는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응, 난 지상에서 잊히는 게 두려워. 하지만 내 말은, 우리 부모님처럼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난 사람이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고, 영혼 간의 대화를 믿어. 망각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거야. 내가 내 목숨을 잃는 대가로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게 두려운 거지. 위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최소한 위대한 선을 위해서 죽어야 하지 않겠어? 난 내 삶도 죽음도 그렇게 의미있 않을까 봐 두려워.” 178쪽

 

 거스는 헤이즐이 자신의 장례식에 와 주고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잊혀지는 게 아니라 간직되는 것을 바란 것이다. 헤이즐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헤이즐을 사랑한 거스의 죽음이 얼마나 위대하며 아름다운 일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스를 사랑한 순간부터 말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이 닥쳐올지 긴장을 늦을 수 없는 현실이라서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이 눈부시고 아름다운 게 아니다. 암이라는 질병 앞에서 마주한 사랑이 아니라 한 소녀와 한 소년의 무한대의 사랑이라서 그렇다.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이기 때문에 빛나는 것이다. 그게 이 소설이 특별한 점이다. 아이들의 사랑이 예뻐서, 간절해서 아프고 아프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대신 환하고 벅찬 감동을 전해주는 건 십대 소년 소녀의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닥친 못된 운명에 대해 때로 욕하고 때로 원망하고 두려워하면서 헤이즐의 표현대로 죽음의 부작용을 잘 견디고 있어 고맙고 대견한 것이다.

 

 “난 널 사랑하고, 진심을 말하는 그 간단한 기쁨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난 널 사랑해. 사랑이라는 게 그저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고, 결국에는 잊히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우리 모두 파멸을 맞이하게 될 거고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날이 오게 될 거라는 것도 알아. 태양이 우리가 발 딛고 산 유일한 지구를 집어삼킬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도 어쨌든 너를 사랑해.” 163쪽

 

 누가 이처럼 멋진 사랑을 거부할 수 있을까. 누구나 거스의 고백을 받는 게 아니다. 오직 단 한 사람, 헤이즐만을 위한 고백이다.이토록 근사한 거스의 고백을 받은 헤이즐은 내내 행복할 것이다.  우주가 사라지지 않은 한, 설사 우주가 사라진다 해도 거스와 헤이즐의 사랑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무한대의 그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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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9-0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도 어제 아니, 토요일에 받았어요. 과장이 아니라 사실, 자목련님이 말씀 안해주신 그거,
찾으러 가야죠 이제, 저도.

자목련 2012-09-07 10:49   좋아요 0 | URL
지금쯤은 아이님도 거스와 헤이즐을 만나셨겠지요?
 

 

 요란한 태풍이 지나가고 고요한 시간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철저한 대비로 피해는 없었다. 청테이프를 붙인 창문은 당분간 그대로 있을 것 같다. 곤파스의 악몽을 기억하는 친구와 지인들은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냈고, 나는 괜찮다는 답을 보냈다. 나는 먼저 그들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정한 사람들이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발 끝에 닿았다. 밤마다 발가락을 꼼지락 꺼린다. 곧 여름 이불과 옷들을 정리할 시간이 올 것이다. 두 계절이 겹쳐 지나는 시간은 불현듯 그리운 누군가가 있다. 용기 내어 연락을 하는 대신, 그저 마음이 담아둔다. 가을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날들의 밤은 고요하고 고요할 것이다. 그런 밤에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싶다.

 

 강풍이 불어오고 정전으로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올라 내게 온, 단정한 글씨체로 김연수라는 이름이 적힌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가을이지만 이상하게도 조용하고 슬픈 봄을 닮은 빛깔인 필립 지앙의  『나쁜 것들』, 아직 읽지 못한 하루키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진짜 가을 하늘을 연상시키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막다른 골목의 추억』을 읽으면 좋겠다.

 

 

 

 

 

 

 

 

 

 

 

 

 

 

 

 

 

 김연수와 하루키의 책은 점점 늘어간다. 가을이라는 비밀을 품은 밤은 점점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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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0 2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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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0 2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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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0 2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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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1 09: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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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1 0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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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2 0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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