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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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죽음을 유기하기 위해 파놓은 깊은 구덩이 같은 발굴 현장에 내리고 있는 눈송이들이 그는 죽음처럼 보였다. 죽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언제나 우리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 삶의 윤곽을 뒤덮어버리는 선뜩한 비늘들인 것이었다.’ (115쪽)

 

 죽음을 읽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것이 실재가 아닌 소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루하루의 삶이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존재 앞에 무기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미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한 이별을 했고 죽음에 익숙해져 단단해졌다고 여겼지만 죽음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성처럼 나를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소설을 읽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저 습관처럼 읽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망각할 수 있으므로. 물론 소설의 마지막을 덮으면 바로 현실이 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소설을 읽기 전과 확연히 다르다.

 

 보존과학자로 유물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일을 하는 남자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정부에게 비밀리에 파견한 공무원인 여자. 모두 죽음을 지척에 둔 삶이다.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만지는 그들이 만난 건 우연일까, 운명일까. 남자가 보존 처리한 미라 특별전을 여자가 관람한 것이다. 복원된 유물을 미화하는 설명에 화가 난 여자에게서 그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생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했지만 실패한 이들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지금껏 버텨온 생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순간 그녀는 그에게 문자를 보낸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자신을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엄마를 죽음으로 이끈 병,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지켜야 했지만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신호였다.

 

 그는 어떤 것도 소홀히 지나칠 수 없었다. 그 모든 풍경과 소리와 냄새가 다 그녀와 자신의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어떤 가느다란 실낱처럼 여겨졌다. 그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자신의 눈에 음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137쪽)

 

 서로에게 서로의 전부를 보이지 않아도 작은 눈빛만으로도 전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자의 유물을 파내는 구덩이, 그 어둠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동안 그들에게 죽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갉아먹듯 살아가는 그에게 그녀는 자신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자, 전부였다. 거기 죽음이 있으므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하게 살아가는 남자에게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위안이자 애도를 부여한 것이다.

 

 남겨진 자에게 위안이 되어야 하는 그녀의 일상은 그와의 만남 후 미세하게 달라졌다. 상담자를 대하는 태도와 삶에 대한 자세가 정해진 메뉴얼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음을 그녀는 느꼈다. 그것은 죽음을 당당하게 마주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박영의 소설은 분명 죽음이란 이미지에서 시작되었지만 천천히 어둠과 그림자를 걷어낸다.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삶이라는 진실. 설사 그 삶이 고독할지라도 아름답다는 걸 기억하라는 듯 빛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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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2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의 시발은 아마도
죽음이겠죠.

죽음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 삶이라는 역설
이 새삼 와 닿습니다.

자목련 2017-05-29 17:42   좋아요 0 | URL
한 손에는 삶이, 다른 한 손에는 죽음이 닿아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공기 도미노 오늘의 젊은 작가 15
최영건 지음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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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선 내게 속한 일상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제한을 두어도 괜찮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마구 벌어지는 세상이니까. 타인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관계의 끝에는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의 나를 이끄는 관계에도 최선을 다하기에 부족하다. 최영건의 『공기 도미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 관계를 확장시키려 애쓰는 일, 모든 게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소설을 읽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문학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잡을 수 없는 작가의 목소리를 잡으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다. 뭔가 내가 모르는 대단한 의미가 행간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 그것과 마주하지 못한다면 내게 읽기는 외면적인 행위에 불과한 게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단지 하나의 이야기, 꾸며진 이야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설 속 인물이 입체적으로 내게로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문장의 옷을 입은 인물에 반하거나 현실보다 더 적나라한 생활인의 모습에 놀라거나 표정 없는 인물의 얼굴과 겹쳐지는 누군가가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영건의 소설은 도미노란 단어가 주는 불안에서 끝내 반전을 이끌어내지 않았다. 예측된 결과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 쓰러지고 무너지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소멸하는 인물들이라고 할까. 연주가 할머니 복자의 재혼 상대인 현석을 도우러 그의 집에 방문했을 때 목도한 그곳의 분위기는 화합이 아닌 분리였다. 현석과 아들 내외는 서로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서로 다른 환경의 두 가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 겪어야 할 배려나 소통은 존재하지 않았다. 연주와 할머니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복자에게 연주는 애정의 대상이 아닌 주종 관계처럼 보인다. 연주가 운영하는 카페의 실제 주인, 연주 행동, 연주의 연애, 모든 게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엔 곳곳에 불안과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자함과 우아함으로 위장한 현석과 복자, 그리고 저마다 누군가와 갈등을 빚는 인물들이 있다. 현석의 며느리 소현에겐 외도하는 남편 원균, 원균에겐 내연녀 해정, 연주에게는 연인인 병식, 병식의 친구 태영에겐 여동생 진수가 그러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소설 속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변화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우연한 사고에 휘말리고 갑자기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오토바이 사고로 연주를 잃고 뒤이어 현석이 떠나고 복자는 혼자 남았다. 그런 복자를 현석의 며느리 소현이 살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다.

 

 ‘손을 뻗으려면 눈앞의 공기를 흩뜨려야 한다. 손을 뻗기 전의 장면을 부숴야 한다.’ (21쪽) 

 

 ‘눈앞의 문제를 위해 손을 뻗다 보면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다른 것들마저 훼손하게 된다. 망가뜨리고도 느끼지 못한다. 부서뜨리면서도 조각들을 볼 수 없다. 큰 그림, 작은 그림, 아주 작은 그림. 아주 작은 그림만을 보는 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표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72쪽)

 

 생각해보면 삶이란 그렇게 지속된다.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 작은 균열에 무너지는 일상과 관계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지금과는 다른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나가기 위해 도미노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 끝에 변화와 성공이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도미노를 세우고 누군가는 그것을 쓰러뜨리기를 원한다. 무너지는 도미노를 세우는 일. 어쩌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저마다 도미노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때로는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게 중요한 목표가 된다.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하나의 조각으로, 하나의 도미노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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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도미노 오늘의 젊은 작가 15
최영건 지음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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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묘하게 빠져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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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408
안미옥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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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집과 시간을 보내는 건 참 달콤하다. 당신에게도 이 시집이 닿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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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특별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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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비단처럼 깔렸던 동백을 기억하는 시간, 한강의 내밀한 숨소리를 읽는 시간, 그리고 고독과 당신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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