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기 도미노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5
최영건 지음 / 민음사 / 2017년 4월
평점 :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선 내게 속한 일상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제한을 두어도 괜찮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마구 벌어지는 세상이니까. 타인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관계의 끝에는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의 나를 이끄는 관계에도 최선을 다하기에 부족하다. 최영건의 『공기 도미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 관계를 확장시키려 애쓰는 일, 모든 게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소설을 읽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문학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잡을 수 없는 작가의 목소리를 잡으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다. 뭔가 내가 모르는 대단한 의미가 행간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 그것과 마주하지 못한다면 내게 읽기는 외면적인 행위에 불과한 게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단지 하나의 이야기, 꾸며진 이야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설 속 인물이 입체적으로 내게로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문장의 옷을 입은 인물에 반하거나 현실보다 더 적나라한 생활인의 모습에 놀라거나 표정 없는 인물의 얼굴과 겹쳐지는 누군가가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영건의 소설은 도미노란 단어가 주는 불안에서 끝내 반전을 이끌어내지 않았다. 예측된 결과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 쓰러지고 무너지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소멸하는 인물들이라고 할까. 연주가 할머니 복자의 재혼 상대인 현석을 도우러 그의 집에 방문했을 때 목도한 그곳의 분위기는 화합이 아닌 분리였다. 현석과 아들 내외는 서로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서로 다른 환경의 두 가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 겪어야 할 배려나 소통은 존재하지 않았다. 연주와 할머니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복자에게 연주는 애정의 대상이 아닌 주종 관계처럼 보인다. 연주가 운영하는 카페의 실제 주인, 연주 행동, 연주의 연애, 모든 게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엔 곳곳에 불안과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자함과 우아함으로 위장한 현석과 복자, 그리고 저마다 누군가와 갈등을 빚는 인물들이 있다. 현석의 며느리 소현에겐 외도하는 남편 원균, 원균에겐 내연녀 해정, 연주에게는 연인인 병식, 병식의 친구 태영에겐 여동생 진수가 그러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소설 속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변화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우연한 사고에 휘말리고 갑자기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오토바이 사고로 연주를 잃고 뒤이어 현석이 떠나고 복자는 혼자 남았다. 그런 복자를 현석의 며느리 소현이 살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다.
‘손을 뻗으려면 눈앞의 공기를 흩뜨려야 한다. 손을 뻗기 전의 장면을 부숴야 한다.’ (21쪽)
‘눈앞의 문제를 위해 손을 뻗다 보면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다른 것들마저 훼손하게 된다. 망가뜨리고도 느끼지 못한다. 부서뜨리면서도 조각들을 볼 수 없다. 큰 그림, 작은 그림, 아주 작은 그림. 아주 작은 그림만을 보는 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표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72쪽)
생각해보면 삶이란 그렇게 지속된다.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 작은 균열에 무너지는 일상과 관계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지금과는 다른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나가기 위해 도미노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 끝에 변화와 성공이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도미노를 세우고 누군가는 그것을 쓰러뜨리기를 원한다. 무너지는 도미노를 세우는 일. 어쩌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저마다 도미노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때로는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게 중요한 목표가 된다.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하나의 조각으로, 하나의 도미노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