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파괴의 역사 - 과학자의 시선으로 본
김병민 지음 / 포르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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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소비를 한다. 물을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스마트폰을 쓰고 TV를 시청한다. 따지고 보면 부족한 게 없는 삶이다. 그런데도 좀 더 편한 삶, 좀 더 안락한 삶을 원한다. 불편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잊지만 정작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돌아감을 선택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나 역시도 선뜻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없다. 나의 삶이, 거창할 것 업는 나의 소비가 지구를 파괴하는 게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큰 차는 물론이고 명품도 없으니까. 과연 그럴까?


화학공학자 김병민의 『지구 파괴의 역사』를 읽으며 확인했다. 지구에 사는 우리 모두는 날마다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래전 인류가 시작되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내내 그러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외면하고 아직은 괜찮다고 여기며 살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 현재 인류의 모습이라는걸. 그러니까 '지구 파괴의 역사'는 인류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살아온 역사이자 욕망의 결과라는 것이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기업은 ESG(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을 외친다. 소비자도 착한 소비를 하려고 노력한다. 지속 가능한 삶에 동참하고자 재활용품을 위한 분리수거를 한다. 입지 않는 옷은 의류 수거함에 넣으면서 그 옷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거라 여기며 안도한다. 쓰레기가 아니니 괜찮다는 생각은 괜찮을 걸까. 우리나라가 헌 옷 수출국 5위라는 사실에 놀랐다. 개발도상국에서 그 옷이 모두 주인을 찾는 게 아니라는 것, 낡아서 버리는 게 아니라 많아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리는 일상.


눈앞에 쌓이는 게 보이면 괴롭고 불편하지만 녹색 의류 수거함에 고민과 의식을 같이 넣는 것은 주저하지 않는다. 몸에 들어오는 미세 플라스틱은 걱정하면서 그 주범이 우리 자신임은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가 깨끗해지면 지구는 더러워진다. (62쪽)


올여름 폭염의 대가는 전기세 폭탄이었다. 어쩌겠는가 당장 더운데 당장 시원한 바람이 필요한 것을. 저장할 수 없는 전기. 대체 에너지로 적합한 것은 무엇일까. 지구 표면 절반을 덮고 있는 물에서 얻을 수 있는 수소, 저자의 언급대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으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놀랍고도 흥미로운 점은 인류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과 과학을 발전으로 더 좋은 쪽으로 가야 하는데 전쟁은 멈추지 않고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질병으로 발생하는 인명 피해. 과학을 발달로 인해 밝혀낸 로마의 멸망 원인이 기후 변화와 신종 감염병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 로마의 도시화와 개발이 전염병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로마로 모여들었을지.


우리는 이미 메시지를 충분히 받고 있다. 메신저는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무시할 뿐이다. 깨닫지 못할 인간을 위해 자연이 메신저로 직접 나서고 있지 않은가. 절대 자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 메신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연에서 인류가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1쪽)


자연과 함께 공생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우리는 왜 자꾸만 자연을 파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환경을 지킬 수 있는 과학 발전은 가능한 것일까. 과학자가 아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개발한 플라스틱은 세제에 남아 우리 몸에 흡수되고 바다에 흘러 생명체(물고기를 비롯한)에게 고통을 남기고 생명체는 인간에게 돌아온다. 지난 8월 24일 일본이 방류를 시작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도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이 그저 지구라는 행성에 속한 여러 부족 중 생명체,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일부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311쪽)


나의 하루를 생각한다. 나의 소비를 돌아본다. 잠시 멈춤으로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소유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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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은 훨씬 크고 장엄하고 고귀한 것이다. 나 하나는 세계의 최소 단위이자 세계의 모든 것이기도 한 존재다. 희망의 단서端緖인 나 하나를 지켜내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경외하고 함께 걸어가는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척박한 광야에서도 작은 올리브나무 하나가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으면, 그러면, 나무는 나무를 부르고 숲은 숲을 부르며, 다시 천 년의 사랑이 시작된다. 이런 시대에 작은 올리브나무 같은 나 하나로부터 우리 삶을 지키는 푸른 방패가 되고 소리 없이 세상을 지탱하는 푸른 기둥이 되어갈 것이니. 여기 천 년의 올리브나무 아래 기대어 그대 안의 신성한 빛과 강인한 빛을 길어 올리기를. (11쪽, 「서문」 중에서)


오래된 나무를 보면 경건해진다. 그 나무가 품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냥 거기 나무가 있구나, 꽃을 피우면 예쁘고 열매를 맺으면 고마웠다. 언제부터였을까. 한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을 살아내는 일의 고단함과 위대함을 깨닫게 된 게. 거대한 자연 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들이 인간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면서다.


박노해의 포토 에세이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그런 마음이 쌓여 인간을 어루만지는 사진을 만났다.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에서 담은 37장의 사진. 제목 그대로 이 사진집은 올리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눈물과 고단함을 품은 나무와 삶이 있다. 올리브나무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올리브나무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올리브나무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 어쩌면 토속 신앙처럼 보이기도 하는 몸짓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간절한 바람과 기도를 생각하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된다.





사진집을 펼치며 마주한 첫 번째 사진. 올리브나무가 품은 시간은 과연 얼마일까. 그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나무와 인간의 시간은 과연 같은 것일까. 자꾸만 질문이 생긴다. 그러면서 가만히 사진을 매만진다. 마치 올리브나무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처럼. 그러데 올리브나무뿐일까. 인간 곁에서 인간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식물과 동물은 얼마나 많은가. 어리석은 인간만이 그 놀랍고도 귀한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올리브나무가 바라본 풍경을 알지 못한다. 올리브나무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바람과 어떤 고난과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시인의 글귀를 따라 올리브 나무와 사람들을 생각할 뿐이다. 올리브나무처럼 남은 사람들, 올리브나무처럼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는 사람들을 말이다.


한때는 올리브 숲이었으나, 세월이 흘렀다. 거친 바위 산에서 살아남은 올리브나무 세 그루.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저 나무들은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굳건하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서,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른 채 하나의 비밀스러운 기둥이 되어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30쪽)


인간의 잔혹한 손길에 잘려나가고 파괴되고 무너졌을 모든 것. 시인이 마주한 풍경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시인의 시선을 붙잡은 건 올리브나무 가지에 담긴 애도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쟁이 끝나는 순간에도 삶은 이어진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그렇게 살아남고 살아간다. 처절하게 소리치고 울부짖는 대신 기도를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의 죽음을 누가 허락했단 말인가. 이 한 장의 사진을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당신들에게 전쟁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냐고. 그 죽음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쟁 그 후이다. 파괴는 한순간이지만 재건은 긴 가난과 노동이고, 죽은 자는 산 자의 가슴에서 매일 다시 죽는다. 살아남은 이들은 마을 묘지를 조성해 올리브나무 가지를 바치며 경전을 읽고 기도한다.

“죄 없이 죽은 자는 높은 자리에 있으리라.”

신의 손길을 대신하듯 올리브나무 가지가 차가운 묘지를 푸른 숨결로 어루만진다. (80쪽)





그럼에도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치는 감사와 기도 앞에 나도 두 손을 모은다. 항상 부족하다고 불평하며 살았기에 부끄럽다. 하루를 마치고 내일을 맞이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하나하나 따지지 않아도 모든 것이 감사한 일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알 자지라 신화에서 창세기로 전해진 노아의 방주 이야기. 노아는 비둘기가 올리브 새잎을 물로 오는 것을 보고 홍수의 시대는 끝났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임을 알았다. 이로부터 올리브 가지를 문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전란의 땅에 노을이 물들고 오늘도 긴 아잔 소리가 울릴 때 하루 일을 마친 농부는 올리브나무 사이에서 기도를 바친다. 파괴된 대지에 가장 먼저 피어났던 저 올리브 새싹처럼. 사무치는 마음으로 삶에 대한 감사를 드린다. (92쪽)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삶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니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분쟁과 전쟁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반복되는 역사 앞에서 재생되는 삶의 폐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축소되고 세상과의 단절은 더욱 확대되는 세상.


박노해 시인은 사진을 통해 묻는다. 편리함이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고. 우리가 스스로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내 안의 나무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올리브나무 하나가 내게로 와 가만히 옆에 선 느낌이다. 눈과 마음을 보는 사진들, 오래 담아두고 싶다.





이 가을, 박노해 시인의 에세이를 읽으며 올해 남은 날들을 헤아려도 좋겠다. 바쁘면서도 뭔가 이루지 못해 늘 아쉽고 불안한 시간, 정작 무얼 위해 살고 있는지 생각한다. 멈추지 않는 전쟁, 나는 괜찮다는 부끄러운 안도, 삶은 무엇으로 채워지는지 누군가 내게 알려주면 좋겠다.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는 세상, 희망은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기댈 존재는 내 곁에 있는 인간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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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11-20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읽었네요^^;;
자목련님 축하드립니다

저도 마침 어제 벵갈고무나무가 10m는 크게 가로수로 서 있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었던 터인지라 자목련님 말씀하신 ‘경건함‘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꿈 속에서 저도 그 나무가 너무나 신기해서 계속 봤거든요

자목련 2023-11-20 11:38   좋아요 1 | URL
얄라 님, 감사합니다.
크고 웅장한 나무가 가로수로 있는 길, 그 길에서는 경건하고 신비로운 삶을 마주할 것 같아요.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
김달님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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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은 어떻게 다루냐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어떤 톤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어떤 조사를 붙여 쓰는가에 따라 전해지는 감정의 온도가 다르다. 호응하고 공감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귀찮은 태도와 목소리로 상대가 건네는 말에 호응한다고 하면 그건 진정한 호응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말과 글은 어렵다. 매일 듣고 하는 말, 쉽게 쓰고 전달하는 글에서 위로를 얻고 기억하는 일은 그만큼 귀하고 소중하다. 말을 듣고 나누고 글을 쓰고 글쓰기 수업을 하는 김달님의 에세이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는 그런 마음이 담겼다.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는 사람이라서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뭔가 살가운 결이 느껴지는 글이다.


에세이는 사는 이야기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을 글로 공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누군가의 삶의 단편을 읽고 공감하는 일은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가능하다. 공감을 불러오는 글을 쓰는 게 어려운 이유다. 저마다 형편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단단한 사람인 것 같다. 단련되었다고 해야 할까. 여러 방면으로 많은 글을 써왔고 사람을 쓰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사를 쓰려고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소중히 듣는 사람, 상대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마음으로 기억하려는 사람,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같이 나누려는 사람, 이 에세이를 통해 그런 이들을 만난다. 저자는 그 마음들을 다듬고 매끄럽게 매만져 우리에게 전한다.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아느냐고, 혹시 그런 마음을 놓친 적이 없냐고 말이다.


어떤 말은 그저 스쳐지나는 말이 되고 어떤 말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남아있는 말은 상처로 남기도 하고 따뜻한 온기로 남기도 한다. 저자는 수많은 말 가운데 온기를 품은 말을 주워 담는다. 그리고 자신의 온기를 더해 독자에게 전한다. 한 번 만나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은 택시 기사와 나눈 짧은 시간 나눈 대화, 암 치료를 하는 친구가 들려준 말, 그와 동행한 병원에서 마주한 풍경, 어른이 되어 찾은 피아노 학원에서 만난 아이가 들려주는 말, 초등학교에서 정구부를 맡게 된 친구가 들려준 아이들의 말. 책에서는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건 회사 건물의 청소를 담당하는 일본인 ‘치에코’ 씨의 말이었다. 미화일기를 쓴다는 그녀가 좋아하는 한국어에 대해 한 말이었다.


“정성, 저는 정성이라는 말이 좋아요.”

“왜 그 말이 좋은가요?”

“정성에는 마음이 담겨있으니까요.” (36~37쪽)


그런 말들을 읽다 보면 나는 어느새 생면부지인 그들의 곁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내가 만난 새벽의 택시 기사, 아파트에서 만난 청소 아주머니, 주일에 봉사를 하시는 교회 어르신들, 전화할 때마다 다정하고 건강한 기운을 전하는 나의 친구와 지인들을 떠올린다. 지금껏 내가 받기만 한 말과 마음과 내가 하지 못한 말, 내가 전하지 못한 마음을 생각한다. 말이 지닌 힘, 말에 담긴 정성과 마음을 말이다. 매일 마주하는 일상, 슬픈 일이 있을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나를 지켜주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사는 건 다 비슷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녕 삶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인지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재고 부재를 마주하고서야 느낀다. 저자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면서 애정을 갖는 것처럼 저자가 인터뷰를 진행한 분의 “앞으로도 잘 살아가세요”란 말 하나에 알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그런 말을 직접 듣은 저자가 살짝 부럽기도 했다.


나는 그런 게 좋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가 어떤 삶들과 함께 살아가는지 구체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 내가 모르는 인생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찾아오던 놀라움과 부끄러움. 그와 동시에 또렷하게 생겨난 삶에 대한 애정과 의지가. (91쪽)


나는 누군가에게 잘 살아가세요란 말을 진심을 할 수 있을까. 매 순간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을 담은 말을 하며 살고 있는가. 문득 삶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하는 수많은 말은 상대에게 어떤 기운을 전할까 생각하니 마음을 다잡게 된다. 좋은 기운은 아니더라도 나쁜 기운은 전하지 않도록 살펴야겠다.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는 제목처럼 삶이란 이처럼 배우고 자라는 일의 연속이라는 걸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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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0-0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잘 지내셨나요.
이제 여름은 지나고 가을이 되어서인지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3-10-10 16:2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말씀처럼 차갑고 쌀쌀한 날들이에요. 서니데이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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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를 꼽자면 낯선 세계로의 초대라 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소설 속에서는 가능하니까. 처음 접하는 작가의 소설에 대한 기대도 그러하다. 이 작가는 무엇을 들려줄까,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작가의 의도를 따라잡을 수 없지만 그래도 소설을 많이 읽다 보면 나름대로 그 끝을 예상할 수 있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무지 모르겠다. 페터 슈탐의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은 혼란의 연속이다. 어쩌면 나에게만 그런 소설일지도. 소설이란 그런 것이기도 하니까.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면 한 번 더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라 하고 있는 일이라 취향, 삶의 태도까지 그렇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속 화자 앞에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도플갱어'라고 치부하기엔 부족한 또 다른 나를 만난 것이다. 20년 전의 젊은 나를 만나는 것, 가능할까. 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나 독자는 화자 앞에 나타난 옛 연인 ‘막달레나’를 닮은 '레나'에게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자신과 막달레나의 만남, 그리고 그가 쓴 단 한 권의 책과 배우였던 막달레나의 이야기. 그것은 과거가 아니다. 레나에게는 현재의 일이다. 그러니까 레나도 현재 배우이고 남자친구는 작가이며 그의 이름은 크리스다. 물론 나는 크리스와 만난 적이 있다. 작가인 화자가 고향의 작은 서점에서 낭독회를 하고 돌아온 호텔에서 만난 직원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크리스란 청년은 분명 자신이었다.


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화자는 레나와 크리스의 사랑과 위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 막달레나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레나의 입장은 어떨까? 늙은 중년의 남자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막달레나와 그의 첫 만남은 크리스가 자신과의 첫 만남과 닮았다. 그를 뿌리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자가 들려주는 이런 말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레나에게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독자를 향한 것이라 여겨진다.


당신은 언제고 항상 원래의 길로 다시 되돌아오게 돼 있소. 당신의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오. 어떤 작품이 여러 연출가에 의해 연출될 경우와 마찬가지요. 무대가 달라지고 심지어 대사가 바뀌거나 축소되어도 줄거리는 변함없이 진행된다는 것이오. (91~92쪽)


겨우 반나절,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을 그려낸 이 소설에서 화자와 레나는 산책을 하고 대학 도서관에 들르고 가게에서 대화를 이어간다. 하지만 나는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하다. 실재하는 게 누구인가 혼란스럽다. 화자와 막달레나인가, 레나와 크리스인가. 20년 전 화자는 막달레나를 떠났지만 현재는 그 반대다. 레나가 크리스를 떠났으니까.


젊은 파토스에 휩싸여 나는 그녀와 글쓰기 중 하나를, 사랑과 자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 비로소 나는 사랑과 자유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공존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33쪽)


200쪽도 안 되는 소설은 내게 끝까지 마침표나 느낌표를 안겨주지 않았다. 무수한 물음표만 남겼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화자(크리스토퍼)를 만나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확신은 들지 않는다. 다시 화자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다고 해도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페터 슈탐의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은 절대 다정스럽지 않은 소설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호함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누군가 저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안겨준다. 나의 과거와 나의 미래를 다 꿰뚫고 있는 나를 닮은 존재와의 만남이 만들어낼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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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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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사람의 힘든 모습을 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좌절한다. 그럴 땐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도 조심스럽다. 혹여 오해할 수 있으니까. 마냥 시간을 기다린다. 그 힘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그저 비껴 서서 마주할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최은미의 장편소설 『마주』는 복잡한 소설이다. 무엇이 복잡한고 하니 마음이 그렇다. 그건 어떤 마을일까. 가장 가까운 이와의 관계가 어긋날 때 무너지는 마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소용돌이치는 것. 엄마와 딸의 관계, 막역한 친구 사이, 크게 나가 사회와 개인의 관계까지.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의 봄을 가만히 떠올린다. 모든 게 비대면을 향해 나가던 시절, 확진자의 동선과 겹치는 곳이 있는지 살피며 마음을 졸이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시절. 소설 속 '나리'가 기정 시에서 운영하는 캔들 공방도 다르지 않았다. 단편 「여기 우리 마주」에서 확장된 이야기. 공방의 손님이자 친구였던 '수미'의 확진으로 공방은 문을 닫고 나리가 느끼는 공허와 단절.


수미는 확진되기 전 딸 '서하'와 크게 싸우고 나리는 수미가 아닌 서하를 품는다. 나리도 채은의 엄마였지만 서하를 향한 수미의 집착을 이해할 수 없다. 가족끼리 만나고 친분을 쌓았지만 엄마라는 역할에서 수미와 나리는 달랐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소설의 제목처럼 그건 수미와 나리가 마주해야 할 것, 수미와 서하가 마주해야 할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연대하고 나중에는 환대하는 삶에 대한 희망 같은 것.


사실, 나는 이 소설이 무척 좋았지만 그 좋음에 대해 말하는 게 참 어렵다. 코로나 검사를 하면서 결핵 균의 잠복 사실을 알고 나리가 떠올린 기억들. 최은미가 그려낸 나리의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일은 어린 시절 나리와 잠깐 시간을 보낸 '만조' 아줌마로 이어진다. 사과 과수원을 했던 시절, 항상 피곤했던 나리의 엄마, 여자여자한 나리와 다르게 체격이 좋은 엄마, 엄마 몰래 군것질의 흔적을 사과 밭에 숨기는 나리. 엄마라면 절대 주지 않을 것들을 주는 만조 아줌마. 과수원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성장해 결혼을 하는 나리 앞에 나타난 만조 아줌마. 결핵으로 연결된 만조 아줌마. 나리의 몸에 남아 있는 그것은 만조 아줌마에게서 시작된 것일까.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맛난 사과를 열게 하는지 아는 사람, 나리에게 시장 곳곳을 구경시켜주며 특별한 경험을 안겨 준 사람. 엄마 보다 더 궁금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 수미가 퇴원하고 함께 아줌마의 사과밭에서 일을 도우며 만조 아줌마가 살던 딴산에 대해 알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사람들이 모여든 곳, 혐오와 냉대가 시작된 곳. 그래서 그들은 뭉칠 수밖에 없었고 끈끈하게 연대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만을 알았다. 어떤 이유로 들어왔든 딴산에 들어왔다는 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겐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한 몸을 누일 장소가 없었다. 있을 자리가 없었다. 죽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딴산으로 들어갔다. (224쪽)





그 시절 결핵은 코로나19 같은 것이었을까. 피하고 기피했지만 시간이 지나 일손이 부족할 때 딴산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일꾼일 뿐 공동체를 이루는 일원이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사람들.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만조 아줌마는 나리 엄마의 고단함을 살폈고 어린 나리의 마음을 읽었다.


엄마가 방학 때마다 일주일에 한 번 나를 만조 아줌마한테 맡긴 건 엄마의 부탁이 아니라 만조 아줌마의 제안이었다. 숨 좀 쉬라고 그랬지. 나리도 나리 엄마도. 만조 아줌마는 말했다. 이나리와 이나리 엄마한테 동시에 가지고 있던 어떤 연민에 대해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을 담고 있던 이나리라는 여자아이의 눈빛에 대해서, 쓰이고 또 쓰이던 마음에 대해서. (282쪽)


만조 아줌마의 마음처럼 나리도 그러했다. 수미와 심각한 갈등으로 힘든 서하를 보았다. 그런 마음 때문에 나리와 수미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만조 아줌마를 만나고 온 후 수미와 나리는 조금 편안해졌다. 딴산 지역이 코호트 격리가 되고 그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 아픈 사람, 사회의 안전장치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한 시스템의 부재. 그것은 뼈아픈 고통이었다. 불과 3년 전의 일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염려하고 돌봐야 하는 존재라는 걸 말이다. 비대면 교육과 업무에서 대부분의 돌봄은 여성이 감당해야 했다. 엄마라서, 이모라서, 고모라서, 여성은 더욱 끈끈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 개인의 희생이 아닌 제도적 돌봄이 필요하다.


최은미는 개인의 불안과 관계의 단절을 개인과 사회로 연결하여 확장시킨다. 개인과 개인이 마주한 사회가 있다고 말한다. 너와 내가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재난과 고통은 한 사람만이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우리가 마주할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고.


서하를 보고 있는 어른이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수미가 체감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말해줄 수 있었다. (304쪽)


한 사람의 성장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돌봄과 기도가 필요한가 생각한다. 성장뿐일까. 살아가는 내내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던가. 도움을 받은 만큼 도움을 주는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다. 서로 똑바로 향하여 마주 보며 눈부신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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