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소설은 묘한 끌림이 있다. 같은 주제를 다양한 시선에서 다룬다고 해야 할까. 그의 소설에는 죽음, 분노, 욕망, 본능이 있다. 분명 다른 작가의 글에서도 만날 수 있는 주제다. 그러나 필립 로스의 소설에는 그만의 힘이 느껴진다. 아무렇지 않게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정말 자연스럽다. ​때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순진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전락』에 이어 『죽어가는 짐승』을 통해 그는 늙음과 죽음에 대해 접근한다. 떨어져서는 안 될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늙음과 죽음. 스스로 늙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가까이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거부할 수 없다.

 

 소설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비평가 케페시가 『포트노이의 불평』과 마찬가지로 특정인에게 자신의 8년 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는 1992년 예순둘의 나이에 대학에서 자신의 강의를 듣던 여학생 콘수엘라의 건강한 육체에 반하고 만다. 이혼을 한 그는 여러 차례 여학생과 사귀었기에 어떻게 콘수엘라에게 접근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비평 수업이 끝나고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고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계기로 스물넷 콘수엘라와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관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지적능력과 권위를 이용해 부적절한 관계를 즐겨왔던 그에게 콘수엘라는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콘수엘라의 매력에 빠진 케페시의 삶엔 그녀만 존재한다. 심지어 그는 콘수엘라의 남자 친구를 질투하기에 이른다. 케페시의 늙은 육체에서 뿜어나오는 욕망은 콘수엘라의 젊고 탄력적인 육체의 정열에 굴복당한 것이다. 그렇다. 노 교수와 젊은 여제자의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인 케페시의 사랑인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박범신의 『은교』를 떠올리거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결말을 맺었을까, 궁금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필립 로스가 소설에서 말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죽음이다. 죽어가는 짐승에 관한 것이다. 8년이 지난 지금 케페시를 찾아온 콘수엘라가 그러했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뭔가 부족했다. 콘수엘라를 가장 빛나게 했던 가슴에 문제가 생겼다.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사는 건 케페시가 아닌 젊은 콘수엘라였다.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콘수엘라는 절대 모자를 벗지 않았고 자신의 상징이었던 아름다운 가슴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케페시 앞에는 쿠바를 사랑하는 부모를 둔 당당했던 콘수엘라 대신 두려움과 공포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콘수엘라가 있었다. 어느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그토록 아름다웠던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니, 케페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의 절망과 슬픔을 콘수엘라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케페시.

 

 아, 그냥 쾌락의 몸짓과 파격적인 연애 이야기였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도덕한 삶을 즐기는 케페시를 질타하고 끝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죽는다는 건 공평할 수 있지만 죽음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어디서든 다가오는 죽음. 누군가에게는 달려오고 누군가에게는 천천히 걸어온다. 우리 생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안다. 그것이 목표가 아닌데도 그렇게 가고 있다. 생을 지속할수록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무엇이든 쉽게 말할 수 있던 시절이 존재했다는 게 놀랍기도 하다. 노년의 삶을 짐작했던 시절, 모두가 늙고 죽는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시절은 행운이었다. 다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모두에게.

 

 ‘죽어가는 것과 죽음은 구별해야 해. 아무런 중단 없이 계속 죽어가기만 하는 게 아니야. 건강하고 몸이 좋다고 느끼면 보이지 않게 죽어가고 있는 거야. 확실한 종말이 반드시 대담하게 선언되는 건 아니야.’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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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7-1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가 노교수와 여제자의 사랑을 통해서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만의 그 깊이있는 시선이 너무 놀라웠어요. 자목련님의 리뷰를 읽으니 내일은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목련 2016-07-20 10:19   좋아요 0 | URL
정말 필립 로스는 대단한 작가 같아요. 그의 소설을 읽을수록 그에게 빠져들어요. 아직 읽지 않은 소설이 많으니 다행일까 싶어요.
 

 

 좀비는 더 이상 신선한 소재가 아니다. 더불어 기피 대상도 아닌 듯하다.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잘생기고 멋진(?) 좀비를 만나왔기 때문이다. 좀비는 한국소설에서는 익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김중혁의 장편소설 『좀비들』을 읽었지만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그리운 존재였다. 여기 우리가 만났던 이전의 소설과는 다른 좀비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한차현의 『Z : 살아있는 시체들의 나라 』가 있다. 생존을 위해 인간을 먹고사는 좀비, 인간의 적으로 살아가는 좀비, 그런 좀비로 인해 돈을 벌고 영원한 생을 꿈꾸는 좀비 같은 인간, 인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의 이야기다. 한차현은 인간의 탐욕의 결과로 좀비를 탄생시키고 공간과 시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공간은 샤워실. 눈을 뜨니 지저분한 샤워실에 갇혔다. 목에는 개 목걸이처럼 강철 벨트가 있고 주변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누가 대체 이런 곳으로 납치했는지 알 수 없다. 곁에 있는 사람도 믿을 수 없다. 그래도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있는 여섯 뿐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한 명은 죽었다. 서로를 견제하며 살피는 중 좀비가 등장한다. 좀비로 인해 그들은 서로 힘을 합친다. 납치와 좀비 사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을까. 최초의 좀비는 누구였을까.

 두 번째는 서울 도심의 넓고 화려한 파티장. 가면으로 자신을 가리고 알몸으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로 한국에서 명예와 부을 자랑하는 상류 사회의 최고 VIP. 한국을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가면 무도회와는 다른 난잡하고 퇴폐적인 파티다. 그리고 그 가운데 누군가를 노리는 킬러들. 그들은 좀비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제 좀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 의사 김건호(가네야마)의 아픈 딸 활란이 등장한다. 김건호는 딸의 치료를 위해 금기의 방법을 동원하고 활란은 좀비로 살아남는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암시하듯 좀비의 탄생 과정에 일본의 생체실험과 731 부대의 잔혹한 만행이 연결된다. 좀비에게 공격을 당한 이는 좀비가 되고 이 과정에서 김건호도 좀비가 되어 한국 근현대사 곳곳에 등장하여 현재의 거물로 존재한다. 여전히 40대 모습으로 말이다. 좀비 바이러스로 돈을 벌고 사람들을 납치하고 실험하며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파티장에서 킬러가 노리는 인물은 바로 김건호.

​ 한차현은 좀비라는 소재를 빌려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한국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가면 뒤에 숨겨진 실체가 그러하듯 추악한 민낯을 보여준다. 실존 인물의 등장과 역사적 사건의 교묘한 배치가 흥미롭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색다른 재미가 아닐까 싶다. 납치된 사람들을 좀비로부터 구해내고 김건호와 상대하는 Z와 전문 킬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은 좀 아쉬웠다. 좀비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정통 좀비 소설이 아닌 한국형 좀비 소설이라 말하면 어떨까.

 세상에 놀랄 일은 없다. 뭐든 터지고 나면, 그것이 어떠한 사건이건 어느 정도 필요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고 만다. 세상을 변화시킬 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세상의 질서다. 그것이 이 나라의 정의다. (372~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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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고 있다. 당연하다. 젊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해도 선뜻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일정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기는 하다. 주름이 깊어지는 얼굴과 짙어지는 기미를 가만히 바라본다. 김중혁의 『바디무빙』때문이다. 김중혁의 산문은 유쾌하고 즐겁다. 그의 산문을 전부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산뜻한 느낌을 받는다. 글에서 그가 글을 쓰는 동안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마감을 맞추느라 힘겹게 썼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몸을 키워드로 쓴 글이라 해서 나는 약간의 의학적 정보나 인체에 대한 기초 상식과 유머러스한 글을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 몸에 대한 이야기는 맞다, 그러나 결국은 시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수영장에서 마주한 인간의 몸처럼 다양한 기억의 몸에 대한 이야기. 영화, 드라마, 책에서 만나는 몸이라는 언어가 들려주는 속삭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을 지탱하기 위해 애쓰는 저마다의 몸과의 만남은 애틋하다. 영화 <그래비티>속 샌드라 불럭은 사고로 딸을 잃고 살아간다. 김중혁은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통해 상실과 견딤을 말한다. 멈출 수 없는 삶이기에, 쉬지 않고 걷고 또 뛰어야 했을 몸. 몸을 써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잡념을 버리기 위해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던 우리네 어머니를 생각한다.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춤에 대한 언급은 경이로울 정도다. 콜라텍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 춤을 배우고 이전에 몰랐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다. ‘춤이란 그런 것이다. 춤이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125쪽) 나는 그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몸과 몸이 만나는 경이로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인간은 결국 시간 속에서 소멸해가는, 스스로를 상실해가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몸은 소멸의 징후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전광판인 셈이다. 나이가 들면 뼈는 삐걱거리고, 어디선가 시간의 살덩이가 날아와서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한다. 시간이 갈수록 몸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41쪽)

 

 김중혁의 언어로 들려주는 몸에 대한 이야기. 그냥 스쳐보았던 영화 속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 책의 한 구절이 다시 몸으로 들어온다. 그만의 글과 그림으로 만나는 재치 있는 ‘몸의 일기’도 정말 재미있다. 그의 정의가 아닌 내 맘대로 신체 각 부위를 정의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인식보다 강력하며, 기억한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닐 수 있으며, 안다고 해서 영원히 기억할 수 없으며, 우리가 대체 어떤 존재들인지 영원히 모르고 죽을 확률이 클 것이다.’ (127쪽)

 

 몸이 전하는 말을 제대로 듣는 순간, 우리는 늙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한다. 몸을 원하는 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착각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른들의 말씀처럼 비가 오면 몸이 먼저 소리를 내는 나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몸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는 나는 아프기 시작하면서 몸을 아끼고 극진하게 보살핀다.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몸이라는 존재를 통해 삶을 보는 것이다. 몸과의 소통에 대해 생각한다. 김경주의 아름다운 언어로 만나는『밀어』를 펼친다. 예전과 다르게 이런 문장에 눈길이 머문다.

 

 무릎이라는 단어를 처음 발음했을 때를 기억할 수 없을지 몰라도 무릎이라는 단어를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발음하는 사람의 편에서 단어의 연골들에 무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람 하나 찾아오지 않는 저녁에 찾아오는 무릎의 멍을 문득,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불러보고 싶어지는 순간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무릎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해서야 사람들은 무릎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54쪽, 무릎)

 

 늑골은 등의 풍습을 만들어낸다. 늑골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에 따라 등은 지평선이 사라지기도 하고 능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늑골이 입안의 무언가를 뱉어낼 때 그 사람의 악몽이 시작되는 것처럼, 늑골은 육체 속으로 들어와 있으면서도 육체와 함께 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늑골의 가계이다. 마치 우리 자신의 손이 거의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육체라는 듯, 타인만의 귀를 대고 그곳의 누군가의, 늑골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등에 닿을 수 있는 우리의 육체는 없다. 손을 닿을 듯 닿지 못한다. (360~361쪽, 등)

 

 생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조건처럼 여겨지는 몸, 한 번도 어루만져 준 적이 없는 몸의 어느 부위를 생각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뒷모습을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등이 그리워진다. 등을 기댈 수 있는 누군가의 등, 등을 긁어줄 수 있는 손. 아, 이제 다양해진 기능의 효자손을 장만해야 할까.

 

 몸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을 읽는다. 한때는 몸에 새기고 싶었던 문장이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어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디.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힌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소리를 낸 순간.’ (「어깨뼈」, 전문)

 

 몸은 말한다. 어쩌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게 궁극적인 생의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이가 타인의 몸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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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6-2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중혁은 역시 산문이 더 나은 듯해요.

자목련 2016-06-24 15:20   좋아요 1 | URL
이상하게도 산문으로 끌려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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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글이 왜 좋은지 알 것다. 담담한 목소리와 거침없는 목소리의 적절한 조화. 중국에 대한 설명서로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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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이다. 더위라는 옷을 입어야 한다. 가볍고 얇은 옷이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옷이 아니다. 곳곳에 덩굴장미가 자태를 뽐낸다. 붉은빛이 태양을 닮았다. 손을 대면 데일 것 같고 바라보면 눈이 아파 올 것만 같다. 감자꽃이 피었고 모내기가 끝난 논에서는 푸른 물결이 파도친다. 곧 마늘을 캘 것이고 부산에 이어 가까운 해수욕장도 개장을 할 것이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늘어나고 진짜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신고 벗기 편한 여름 운동화를 주문했고 비빔면을 반복해서 주문하고 있다.

 

 아이스크림과 바다를 닮은 책을 선보이는 출판사의 마케팅이라니.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서 읽고 싶으니까. 조금씩 읽고 있는 『슈베르트와 나무』, 수상작보다는 김엄지의 소설이 궁금한 『창백한 말』, 한강이라서,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흰』, 강렬한 표지에 끌리는 『붉은 소파』, 책에 대한 이야기『탐독』까지 6월의 책은 정말 알차다.

 

 

 

 

 

 

 

 

 

 

 

  6월, 더위, 그리고 휴가. 작은언니는 휴가로 아프리카 말라위를 다녀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름에, 아프리카라니. 작은언니의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 계획을 듣고 나는 종종 아프리카와 말라위를 검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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