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었다. 일기예보에서 예측한 대로 무섭게 비가 내렸다. 창문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한다.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 창문을 열었다가 달려드는 빗줄기를 밖으로 내몬다. 풀냄새, 비 냄새에 취했다가 깨어난다. 여름의 날들인 것이다. 벌써 7월이고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낸다는 말에 아는 동생은 내게 혼을 냈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난은 꽃을 피웠다. 난이 꽃을 피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난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기에 미안해졌다. 낮에는 몰랐던 은은한 향기가 밤을 지배한다. 여름밤, 가만히 캔맥주를 마시다 향기를 떠올린다. 곧 꽃은 지고 언제 이 꽃을 다시 볼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신비롭고 알 수 없으니 더욱 소중하다.

 

 

 

 

 

 

 우리의 통화는 그런 것이었다. 10년 동안 글과 글 사이를 오가다 말과 글 사이를 오갔다.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말들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고맙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말과 글 사이에 우리는 나란히 서 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위한 글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글, 나 자신을 위한 글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읽고 쓴다는 일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고 지탱할 것이다. 그리고 회복시킬 것이다. 쏟아지던 비를 바라보며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울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자라고 있다는 걸까. 문득, 그 힘이 자라는 걸 계속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만이 알 수 있는 힘이기에, 나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 가져온 책은 두 권이었다. 모두 읽었고 지금은 아무것도 읽지 않고 있다. 책장에서 발견한 타샤 튜더의 ​『타샤 튜더, 나의 정원』속 꽃들을 보기만 했다. 꽃을 본다는 건 평화롭고 즐거운 일이니까.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을 다시 읽을까 꺼냈지만 읽지 않았다.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 드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제일 만나고 싶은 책이다. 언제나 그렇듯 읽고 싶은 책은 나중으로 미뤄진다. 그래서 살며시 말한다. 책들아,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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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가신 엄마는 말이 많지 않으셨다. 그건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말을 참고 사셨다는 거다. 그러니 내 기억에는 누구와 말싸움을 하지도 않으셨고 이웃 아주머니의 통박스러운 말투도 그냥 듣기만 하셨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웃 아주머니는 말이 참 많으셨고 말도 빠르셨다. 해서 좋은 소리도 때로는 무섭게 들리기도 했다. 이제는 곧 여든을 바라보고 있지만 현재도 아주머니는 걱정도 많이 하고 싫은 소리도 많이 하고 다정한 말도 많이 하신다. 김종관의 『놀러 가자고요』를 읽으면서 내 고향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일손이 모자라 품앗이로는 절대 농사일을 할 수 없는 현실, 논과 밭을 모두 팔아 자식들 보태주고 노인네만 남은 모습, 누구 자식이 무슨 자동차를 몰고 왔더라, 누구 자신이 사업을 망했더라, 누가 아프다더라. 한데 모여 점심을 먹고 소리 없는 말들이 넘치는 마을회관까지. 어쩌면 내가 시골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김종관 소설 속 인물이 쏟아내는 걸쭉한 사투리로 이어나가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면서 뵙는 어르신들의 바로 그들이었다. 여전히 농사를 지으시고 만나면 마늘 값을 걱정하고, 아직 끝내지 못한 모내기며 요양원에 계신 이들의 안부를 묻는 익숙하고 친근한 모습 말이다.

 

 때문에 ‘장기호랑이’란 아이디로 온라인에서 장기를 배우며 오프라인에서 마주한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장기호랑이」와 한 숨 쉬는 아홉 살 아이를 걱정해서 병원을 전전하며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홉 살배기의 한숨」을 제외한 7편의 단편은 범골이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한 하나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특히 범골 마을 역사책을 만들기 위해 자료 조사격인 「『범골사』해설」이나 범골 동네 인물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범골 달인 열전」을 읽다보면 누구라도 범골이라는 마을을 아는 것마냥 느껴질 정도다. 한 동네 사람만 알 수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을 들은 것처럼.

 

 여전히 농사를 짓는 오빠와 한때 1가구 1소를 키우던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구제역 때문에 외부와의 소통도 어렵던 때 곧 새끼를 낳을 어미소의 장기가 먼저 나와 죽을지 살지 모를 소를 지켜보는 「산후조리」는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쏟아진 장기도 걱정인데 새끼를 낳으니 어미소와 송아지를 챙기느라 어머니는 말 그대로 소 산후조리를 한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소를 키우던 외양간을 떠올렸다. 정성껏 소죽을 쑤고 새끼를 낳을라치면 전선을 이어 환하게 불을 밝히던 밤. 그때는 요즘처럼 심각한 구제역도 조류독감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노인회장의 아내와 통화로 시작하는「놀러 가자고요」는 고령화된 농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방송을 통해 공지했지만 참여율이 낮아 직접 전화를 걸 수밖에 없다. 노인회장을 대신해 마을 사람들과 일일이 상황을 전달하는 노인회장의 아내는 같이 놀러 가자고 말하면서 안부도 묻고 각 가정의 속 사정도 듣는다. 정작 전화를 한 노인회장의 아내는 몸이 아파서 놀러 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젊어서는 일하느라 바빠서, 늙어서는 몸이 따라주지 못해 놀 수가 없으니. 거기다 자식들이 온다고 하면 자식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가정을 꾸린 자식에게 부모는 뒷전이다. 남들 다 사서 효과를 보는 욕조기를 하나 샀으면 싶은데 선뜻 사주지 않는 아들 내외에게 속상한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만병통치 욕조기」는 씁쓸하다. 필요할 때만 전화하고 찾아오는 자식과 다르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살뜰하게 챙겨주니 노인들이 정을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상술을 부리는 판매원이 밉기까지 할 정도다. 호기롭게 4백만 원을 할부 결제할 수 없는 아들 내외의 심정은 곧 우리의 그것과 같다.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는 광고로 노인들을 불러 모으고 결국엔 안마기나 온열기를 결제하게 만드는 이들이 이곳에도 많아 소설 속 이야기로만 여길 수 없다. 이제 이 모두가 김종광의 고향 이야기며 가족 이야기라는 걸 눈치챈다. 도시가 아닌 시골의 일상,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생경하고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친근해서 소설 같지 않은 이야기. 한가하고 여유로운 농촌이 아닌 누구보다도 바쁘고 치열한 삶의 현장.

 

 유쾌한 김종관의 농촌소설을 읽노라니 떠오르는 이가 있다. 누군가는 이문구를 생각하겠지만 내게는 한창훈이다. 우리 동네 어르신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바다에서 바지락과 굴을 채취하기 때문이다. 바다를 상대로 싸우기도 하고 바다의 품에 안겨 살아가기도 하는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여기가 좋다』. 드세고 투박한 사투리로 섬의 하루하루를 들려준다. 비릿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안겨주는 글들이 참 좋았다. 술 한 잔 걸치고 걸쭉하게 내뱉는 정겨운 육과 아무도 모르게 가슴 깊은 자리에 숨겨두었던 사연을 끌어올리는 힘에서 섬사람의 애정을 본다.

 

 많은 이들이 힘들고 지쳤을 때 마지막 보루인 농촌으로 돌아오듯 『나는 여기가 좋다』속 누군가도 그러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오는 이도 있었지만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섬은 가장 안전하고 가장 평온한 삶 그 자체였다.  재미있는 건 김종관은 「놀러 가자고요」를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놀러 가자고 독려하는 에피소드를 그렸고 한창훈은 삼도노인회 제주 여행기」를 통해 섬에서 섬으로 여행을 떠난 노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르신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는 건 어디나 쉽지 않은 법. 그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살아온 작가라서 현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고향을 기록하는 김종광과 섬과 바다를 떠날 수 없는 한창훈, 그들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건 사람 사는 이야기, 삶이었다.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난다. 맨발로 흙을 밝았을 때, 너른 갯벌을 걷을 때 발가락 사이로 간지럼을 태우듯 파고드는 감각.

 

 누군가는 잠시 머물고 놀다가는 농촌이나 바다가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그 터전의 본 모습을 기억하고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 하나하나, 그 모든 걸 소설로 쓰는 김종광과 한창훈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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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는 지난주에 사전투표를 했다. 이른 시각에도 많은 이들이 있었다. 분주하게 준비하는 사람들, 여섯 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뽑아야 할 사람은 많고 어느 부분에서는 결정을 하는 게 어려웠다. 과연 내가 지지하고 내가 선택한 이가 당선이 될까. 대부분 선택한 이가 당선이 되었다.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 

 사전투표일 하루 전에는 귀한 친구를 만났다. 그러니까 지난주 목요일에 친구가 내가 사는 곳으로 왔다. 서로 시간을 맞추는 일도 힘들지만 그래서 더 반갑고 즐겁다. 6월에는 사람을 만나는 달인가 싶다. 다음 주에는 고모와 사촌동생도 만날 예정이다. 친구는 오기 전부터 내게 즐거운 요구를 했다. 아무래도 내가 사는 곳이 바닷가 근처라서 맛있는 식당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를 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곳을 잘 모른다. 가본 곳만 가는 게 편하니까. 결국엔 식당은 친구가 검색했고 카페는 내가 선택했다. 가격 대비 맛은 보통인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바닷가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보고 알아주는 우리의 이야기는 샘물처럼 달콤했고 기뻤다.

 

 돌아가기 전 이른 저녁을 집에서 먹었다. 대접하거나 부담스러운 사이가 아니라서 있는 반찬만 가지고도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처음 온 친구는 선물을 한 보따리 가져왔다. 정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챙겨온 것이다. 나도 친구에게 몇 가지 챙겨주었다. 줄 수 있는 건 뭐든 주고 싶었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주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친구는 내게 주고 싶은 걸 너무 많이 챙겨왔고 나는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미안했다. 친구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책은 줄 수 없었다. ㅎ

 

 좋아하는 마음일까, 사랑하는 마음일까. 어떤 마음이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니까. 친구가 필요한 건 나와의 시간이었고 우리는 그것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알라딘의 다정한 이웃님에게도 매번 받기만 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지만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은 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글로 이어진 인연, 신기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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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는 해가 저무는 시간에 해수욕을 즐기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더운 날씨였고 우리는 해수욕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데 적지 않게 놀랐다. 오랜만에 멀리서 온 지인과 함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참 좋구나, 싶었다. 꾸미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그런 사이가 아름답다. 짧지만 알찬 시간,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을 기대하는 만남, 우리는 그렇게 만나고 헤어졌다.

 

 5월에는 제법 분주했다.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을 읽어야 했고 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 일정이 끝나고 나서야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음식을 먹은 날처럼 그런 날들이 있었다. 싱그럽고 푸르던 5월은 심술쟁이처럼 갑자기 여름을 불러왔다. 더위를 몰고 온 것이다. 작년 이 맘 때를 떠올렸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지금이 훨씬 더운 날들이다. 자연스레 주말의 바다를 떠올린다. 지구는 점점 더 빨리 뜨거워지고 우리는 점점 더 빨리 에어컨을 켠다. 우리가 추억하는 여름은 먼 곳으로 사라지고 우리가 만지는 여름은 불탄다.

 

 6월에는 나의 일상을 채워줄 좋은 소설이 많다. 이제 다시 소설을 읽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소설을 사랑하는지, 소설이 나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확인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나는 이런 소설을 기다렸다. 최정화의 소설집 『모든 것을 제자리에』, 천희란의 장편소설 『영의 기원』, 누군가 꼭 읽어야 한다고 말한 이기호의 『누구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밀어두었던 책을 읽고, 밀어두었던 일상을 시작하고, 밀어두었던 마음을 펼치고 싶다. 여름을 여름답게 즐겁게 보내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고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것이다. 책과 이어지는 귀한 일상, 가까운 이와 나누는 소소한 대화의 즐거움, 나를 사랑하는 이의 눈빛을 지켜보는 일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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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6-05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깥은 여름이고, 아직 실내는 그래도 그만큼 덥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몇 시간 전, 오늘 낮은 뜨거운 날씨였어요.
자목련님,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8-06-08 12:23   좋아요 1 | URL
주말에 비가 내리고 나면 조금 열기가 식어질 것 같아요.
서니데이 님, 청량한 주말 보내세요^^
 

 

 이별은 쉽지 않다. 다음 만남이 예정되어 있어도 그렇다. 그래서 김광석은 ‘우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고 노래했을까. 붙잡을 수 없는 시간과의 이별, 잠시 떨어져야 하는 한시적 이별, 영원한 이별. 그 모두가 아프고 힘들다. 이별 후 가장 힘든 건 부재를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뜨거웠던 감정은 서서히 식어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별의 수순을 밝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하지 않다.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만이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다. 연애의 끝이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결혼의 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니까, 모든 걸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을 거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지원과 영진도 이혼을 위한 대화를 나눌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잦은 다툼과 화해, 반복되는 일상, 상대를 바꾸려 노력하다 지치고 더 이상 화를 내지도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은 상태. 알고 있다. 곧 무서운 폭우가 내리칠 거라는걸. 그리고 폭우가 지나고 나면 개운할 거라는걸.

 

 서유미의 『홀딩, 턴』의 지원과 영진의 결혼생활은 보통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이 아니라 그냥 우리 주변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서로 다른 습관과 사고를 지닌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함께 가족이 되는 건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 둘이 헤어지는 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며 죽도록 미워하고 증오해서가 아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식상한 말이지만 더 행복해지기 위해 헤어짐을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지원과 영진은 여느 부부처럼 사소한 것들로 다툰다. 작은 것들을 채워주지 않으니 더욱더 실망하게 된다. 모든 걸 다음으로 미루는 영진의 행동에 화가 나는 지원, 지원의 잔소리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영진. 떨어져서 서로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영진이 친구의 집으로 떠나고 지원은 혼자 남아 둘이 함께 한 시간을 되짚어본다.

 

 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 (47쪽)

 

 소설은 담담하게 영진과 지원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들려준다. 첫눈에 반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둘의 연애와 헤어짐의 과정까지 말이다. 지원은 이러한 상황을 친구 승아와 이나에게 전하고 둘은 너만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지원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몇 년 전 모든 걸 혼자 감당했을 승아을 생각한다. 소설에서 지원과 친구들의 대화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육아로 힘든 이나, 이혼 후 번역을 하는 승아, 그리고 이혼을 앞둔 지원.

 

 인생에서 정답이 있을 수 없듯 영진과 지원의 선택이 오답은 아닐 것이다. 헤어지는 선택을 했지만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애틋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너무 늦은 확인이라고, 누군가는 그렇다며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살듯 그들의 인생은 그들이 사는 것이다. 다만, 소설 속 그들처럼 서로의 사랑에 지쳐있거나 결혼 생활의 위기를 직감하는 이들이라면 상대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조언을 건넬 것이다.

 

 사랑했던 이들이 헤어짐을 준비하며 겪는 마음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한 소설이다. 복잡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지원의 상태를 표현한 구절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인생이라는 시간은 어떤 시간을 지나든 다음 시간이 온다는 것, 그것이 기쁨이든 아픔이든 말이다.

 

 그저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세탁의 시간을 지나는 것 같았다. 코스의 어디쯤에서 물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그 과정을 지나면 다음 코스로 넘어간다. 유쾌한 기분이라고 할 순 없지만 더 나빠질 건 없다는 생각으로 몸의 힘을 뺀다. 지금은 거품이 일지만 다음 코스, 그다음 코스를 지나면 결국 세제가 씻겨 내려갈 거라는 사실에 몸을 맡긴다. 어떤 일이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나가리라는 믿음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은 세탁기의 버튼을 눌러놓고 바라보았다. (114쪽)

 

 『홀딩, 턴』은 이별하는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잘 그려냈다. 소설 속 영진과 지원에게 이별은 사랑의 다른 이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유미의 장편소설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김숨의 소설집『당신의 신』이 생각난다. 김숨의 소설집에 수록된 세 편의 소설 모두 이혼을 말하기 때문이다. 『홀딩, 턴』속 부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이혼은 가부장 제도를 고발하는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혼」에서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감정을 공감하지 않는 남편과 이혼을 선택하는 딸 민정의 모습은 대조적이면서 뭔가 후련하다. 그렇다면 이혼 후의 삶은 어떨까? 「읍산요금소」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결혼과 동시에 단절된 경력, 친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상황, 한국 사회에서 이혼 한 여성의 현실과 그를 향한 시선이 어떤지. 좁디좁은 요금소 안에서의 일상이 그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 김숨은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새의 장례식」에서는 폭력의 대물림에 대해 언급한다. 이혼한 아내가 재혼한 남편과 만나게 된 남자는 과거 자신도 모르게 아내에게 행한 폭력을 생각한다. 그것이 과거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라는 걸 뒤늦게 확인한다. 이별한 후에야 아내의 상처를 마주한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일, 그것이 얼마나 폭력의 행위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많다.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듯 이별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이별하는 과정이 힘들겠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 이별을 결정한 순간 상처가 자라기 시작하니까. 추억도 상처로 전락하니까. 그러나 이별한 후에도 사랑이 오고 이별한 후에도 살아갈 수 있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삶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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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5-25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별을 결정한 순간 상처가 자라기 시작˝ 이 표현 좋네요 :) 저는 좀 더 앞의 시간을 덧붙여 ˝이별을 예감한 순간부터....˝라고.

자목련 2018-05-30 16:39   좋아요 1 | URL
이별이 없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별을 감지하는 순간 삶은 조금씩 무너지는 것 같아요. 사랑은 참, 어렵고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