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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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로 위장된 처절한 삶의 단면. 여전히 지독한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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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 끝날 때까지 소설을 말할 수 없다. 이야기가 끝이 나야 그 이야기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작은 소회, 비평, 비판 혹은 고마움까지. 그것이 연재가 끝나고 책으로 묶여 나왔다 해도 그렇다. 한 권의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전해주기도 하니까. 같은 문장에서 밑줄을 긋고, 같은 묘사에서 감탄하는 경우도 많지만 언제나 새로운 책처럼 다가온다. 계간지에서 만난 시를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면, 한 권의 시집에서 읽은 시를 제목만이라도 온전히 나열할 수 있다면, 시집은 펼칠 때마다 같은 시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와 소설이 그러하듯, 시집은 읽을 때마다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평범했던 시어들이 일상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어제와 같은 오늘의 날씨를 기록하게 만든다.

 

 지난 겨울 눈이 오는 날들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다. 메일을 확인하려 컴퓨터에 앉았고 자판 위에 올려진 손가락은 서점을 클릭하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박시하의 신간을 발견하는 일 따위는. 그래서 반가웠고 그래서 마음이 평온했다. 『눈사람의 사회』로 만난 박시하는 슬픔이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녀가 슬픔이 아닌 기쁨을 말해도 그녀가 행복을 말해도 내게는 그것은 온전한 슬픔으로 박힌다. 설령 그것이 오독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리 읽는다. 시집의 마지막에는 이런 시가 있었다. 유일한 여름으로의 초대였다. 결코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다. 문학은 그렇게 삶을 지배한다. 우연이 아니 운명이 될 수밖에 없는 시라니. 여름은 가을이 되었고 가을은 겨울이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가 아닌 혼자서 세 개의 계절을 맛보는 날이 이리 빨리 올 줄 몰랐던 나는 점점 늘어나는 낮의 길이를 측량하며 봄을 기다렸다.

 

 

 여름의 주검

 

 

 한 주검을 통해

 여름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리 울음소리만큼 분명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유일한 여름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꿈으로

 이상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노란 뱀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반투명한 사실에 대한

 

 그 여름의 세계는

 저녁의 거울처럼 두렵고

 훌륭한 죽음이 되어갔습니다 (82쪽)

 

 

 누군가의 죽음이 아닌 모든 죽음을 향한 애도가 아닐까. 죽은 자를 통해 위로받고 살아가는 산 자의 슬픈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낀다.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름다운 건 그들을 기억하는 산 자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박시하는 슬픔을 슬픔을 쪼개어 그것이 지닌 빛의 아름다움을 아는 시인이다. 무거운 그림자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슬픔의 힘을 아는 시인이다. 박시하는 그것을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슬픔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을까.

 

 

 묘비들

 

 

 깊고 둥근 침묵 아래

 영혼만으로 울 수 있던 한때였다

 

 종종 다른 영혼과 어깨동무를 했다

 별이 그늘을 비추는 것처럼

 우린 당연하고 미약했다

 벤치에 앉아 잠들거나

 나비를 따라 날고

 꽃의 심장에 들락거렸다

 

 죽어서도 살았지만

 서로를 기억하지는 않았다

 묘지의 길은 묘지의 길로만 났으므로

 삶의 악취를 표백하며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의 이름을 대신 썼다

 

 엔딩 없는 흑백영화를 관람하는

 다정한 우리가 늘어선

 탈색된 사진을 한 장씩 받았다

 

 느린 비와 함께

 전주곡 같은 햇살이 쏟아지는 한때였다 (16쪽)

 

 

 그림자

 

 

 검은 길 흰 눈

 시작되는 나라

 

 먼 안부

 기차의 입김

 얼음 레일 위

 맨발로 서서

 

 기차가 멈추지 않아

 소식을 전할 거야

 어두운 책 속에서

 

 반 발짝의 무덤

 네가 가린 너

 못갖춘마디

 슬픔이 그린 그림

 

 기차가 달리지 않아

 사라지는 나라 (37쪽)

 

 

 특히 이런 시가 좋다. 좋아서 정말 미칠 것 같다.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삶은 얼마나 건강한가. 구체적으로 살고 싶다니, 이렇게 사랑스럽기까지 한 시라니. 귀엽고 발랄한 시어 덕분에 그 뒤에 감춰진 거인 같은 슬픔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만다. 저마다 짙은 슬픔을 거느리고 사는 삶을 위로하는 시다. 그렇다고 슬픔이 사라지거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슬픔과의 동거에 익숙한 누군가는 안다. 박시하의 시가 어떤 치료제보다 강력하다는 걸 말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싶어

 

 

 젓가락, 접시, 소시지, 오렌지주스, 달걀……

 

 그런 것들이 될 거야

 사물이 된다면

 달그락거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은 언제나 숨겨지고

 수평선은 어둠을 끌어올리지

 어둠에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거야

 

 눈물이 나는 건

 물새떼처럼 알 수 없고

 구름처럼 멀리 있는 것들 때문이지

 

 가라앉아서 숨을 쉬자

 물고기가 된다면

 수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삶은 사라지게 될 거야

 아무것도 슬프지 않을 거야 (50쪽)

 

 

 밤

 

 

 내가 가장 슬펐을 때가

 검고 탁하다고 해서

 밤이 밤이 아닐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78쪽)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따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울하고 어두운 시가 어떻게 삶을 치유할 수 있느냐고. 작은 어둠이 큰 어둠과 만났을 때 그것의 존재는 미미하다. 밤에도 강렬한 태양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짙은 슬픔은 옅은 슬픔을 밝게 만든다. 과연 슬픔 없는 세상은 아름다울까. 우리가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은 말과 슬픔을 삼키며 온몸으로 세상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건 아닐까. 여하튼 나는 박시하의 시집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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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조로운 생을 살고 있다. 단조롭다는 말은 간단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복잡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시절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삶이기도 하고 어느 시절부터는 만족과 충만으로 다가오는 삶이기도 하다. 단조롭다는 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같은 일상의 반복, 말 그대로 이벤트는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여 가끔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눈을 뗄 수 없는 불꽃놀이나 거대한 산처럼 다가온다.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 가운데 하나는 반가운 사람이 온다는 것이다. 지난 화요일에는 즐거운 기다림이 있었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언니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화장도 하고 괜히 시계를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화장실에도 자주 들락거렸다. 처음으로 운전을 하고 혼자 나를 만나러 온 언니도 나처럼 살짝 흥분된 듯 보였다. 우리는 겨울에 만났고 계절은 봄이 되었다.  조금 늦은 점심을 위해 찾은 카페에서 식사를 하며 소소하면서도 특별한 일상을 공유했다. 소년, 소녀가 아닌 청년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점점 더 나약해지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자신감을 놓치는 삶에 대해 말했다.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말, 결핍을 떠올리면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된다는 말은 서로에게 달콤한 약이었다.

 

 즐거운 기다림이 있는 반면 불안을 동반한 두려움도 있다. 어떤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 그렇다. 최선을 다한 일에 대한 결과라면 불안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은 단조로운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흔들어 놓는다. 그것에 매달리게 만든다. 매달린다고 해서 결과가 번복되거나 달라지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안다는 것과 그것을 삶에 실천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다. 그것이 일치가 되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여우가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충만한 즐거움처럼 즐거울 수는 없지만 그것에 매여 다른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주일의 기다림이 나를 조금씩 흔들 것이다.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미세한 흔들림을 느낀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책에 빠져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잠시 미루고 이런 책을 곁에 둔다. 미야베 미유키의 <비둘기피리 꽃>, 요네자와 호노부의 <빙과>, 찬호께이의 <기억나지 않음, 형사>. 세 권 중에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읽었는데 정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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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이 몸 위에 식탁을 만든다 밤 속으로 타들어가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며 식탁보 끝자락에 코를 박고 엄지

손가락을 빤다 하얗게 부르튼 엄지손가락을 다른 네 손

가락 밑에 숨긴다 콘센트를 앞에 두고서도 플러그를 어

디다 꽂아야 할지 몰라 청소기를 가지고 방 안을 빙빙

돌던 당신에게 암이 뇌로 전이됐어요 말하지 못했다 숫

자를 더 이상 읽을 수 없는데도 고개를 돌려 자꾸 시계

를 보던 당신에게 몇 신가요 물어보지 못했다 하나, 둘,

셋 다음은 어둠 바람이 당신을 통과하지 못한다 당신만

큼의 바람이 밀려난 곳에서 불이 비를 태우는 시간 이

빨과 잇몸 사이에 자를 대고 칼을 긋는다 아무것도 뱉

지 않는다 수박을 입에 넣어드릴 때마다 까맣게 탄 숫

자를 틱, 틱 식탁 위로 내뱉던 당신이 내 앞머리를 쓰다

듬는다 (「사월」전문)

 

 

 

 

 어쩌다 이런 시를 마주하고 읽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장승리의 『무표정』시집이었고 처음에 펼쳤을 때는 들어오지 않았던 시다. 4월이라서, 사월이라서 그런가 보다.

 우리 아파트에도 자목련이 보이고 팝콘 같은 벚꽃도 보인다. 복도에 서면 야트막한 동산 속 초록의 틈에서 분홍이 보이기도 한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점점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처럼 진달래가 늘어난다. 예뻐서 슬픈 봄이다. 맑아서 아픈 봄이다. 봄이 나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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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16-04-14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자목련님의 글은 그저 반갑지요..

자목련 2016-04-15 11:44   좋아요 0 | URL
반갑게 맞아주시니 감사해요.
바람구두 님, 맑은 봄날 보내세요^^

[그장소] 2016-04-1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는 말 ㅡ놔두고 가요 ...모든 단어를 구겨넣은 ㅡ좋다 !

자목련 2016-04-15 11:43   좋아요 1 | URL
장승리 시집, 참 좋아요!!

[그장소] 2016-04-15 18:37   좋아요 0 | URL
몹시 ㅡ이해가 갑니다 ㅡ아직 보진 못했지만 ㅡ!^^
 

 

 수수꽃다리의 연한 자줏빛 꽃봉오리는 우리 아파트에도 봄이 왔다는 신호다. 이사를 오고 3년이 지나서야 겨우 꽃의 이름을 외웠다. 같은 아파트지만 동마다 봄이 다르게 찾아온다. 피는 꽃도 다르다. 제일 먼저 매화가 피고 벚꽃과 목련도 뒤를 따른다. 그렇게 천천히 봄이 오는 동안 4월이 되었다. 도처에 봄이라는 걸 알리는 건 예배를 드리며 오가는 길에서 만나는 자동차들이다. 근처에 바다가 있으니 주말에는 자동차가 급격히 늘어난다. 도로 옆 밭에는 제법 자란 보리가 싱그럽고 하지 감자를 심은 작고 아담한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자동차 차 문을 열면 흙냄새가 맛있게 달려온다.

 

 내가 좋아하는 4월이다. 4월은 잔인한 슬픔을 간직한 달이지만 좋아한다. 4월에 기다렸던 소설이 나왔다. 작년 가을부터 내가 기다린 소설집이다. 김이설의 두 번째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은 여전히 잔혹하고 참담하다. 표제는 첫 번째 소설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이다.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4월을 견디는 건 소설이나 현실이라 같을 듯하다. 편혜영의 장편소설 『홀』도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이다. 지난 소설 『선의 법칙』과는 다른 기대감이랄까.

 

 4월에는 이런 책도 읽을 것이다. 한귀은의 문장과 그녀가 선택한 문장을 만나는 시간 『여자의 문장』​, 기억의 끝이 어디인가 스스로 묻고 또 묻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쉽게 읽을 수 없는 예술서에 대한 이야기 『혼자가 되는 책들』 ,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세월호, 그날의 기록』.

 

 

 

 

 

 

 

 

 

 

 

 

 

 

 

 

 

 

 

 4월이 되니 낮에는 제법 덥기도 하다. 곧 소매가 짧은 옷을 입을지도 모르겠다. 거리마다 꽃눈이 내릴 4월, 꽃이 지면 눈부신 초록이 가득할 4월, 특별히 변화와 희망의 씨앗을 잉태하는 4월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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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4-04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이 수수꽃다리라고 딸아이가 그래서 정말? 어제 그랬어요. 오늘은 정말 꽃들이 만개하고 하늘은 맑고... 너무 예쁜 봄날이었어요.

자목련 2016-04-05 18:02   좋아요 0 | URL
따님과 제가 통했나 봐요, ㅎ
눈 닿은 곳마다 꽃이 가득해요. 봄, 봄, 봄이구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