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시간은 왜 이리 빠르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분명 수술 후 회복의 시간을 견디던 1월에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2016년을 채운 365일 가운데 5개월이 지났다. 곧 6월이다. 여름의 한가운데에 놓인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눈앞에 놓인 달력을 보니 오늘은 월요일. 저마다 다른 이름의 요일들이 내게는 모두 같은 이름의 요일로 다가오는 일상을 산다. 그러다 이런 시를 읽으며 어제는 일요일이었구나 생각한다. 어떤 시는 과거를 불러오고 어떤 시는 현재를 마주 보게 만든다. 박은정의 시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점에 서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어떤 시는 길을 잃고 헤매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누군가를 보여주고 어떤 시는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에 매달리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일요일의 미로
일요일, 손을 내밀어도 잡히지 않는 손, 발목이 비틀린 짐
승이 낮게 뒹굴었다 너의 머리 위를 지나는 구름을 기억하
렴 풀무치들과 죽은 해바라기까지,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우리는 걸었다 그쪽으로, 빛이 멀어지고 키 큰 나
무들이 두서없이 흔들렸다 혀를 말고 잠이 든 까마귀와 밤
사이 불어난 이끼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어 일
요일은 계속 걸었다 지겨운 짐승들의 울음이 위안이 될 때
까지, 오늘의 운세는 북쪽을 피하라 이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야 우리는 일요일처럼 설핏 웃었다 긴 밤이 덮쳤다 돌
아보아도 돌아갈 수 없는 어둠만 되풀이되는, 그럴수록 귓
바퀴를 돌던 물소리는 얼마나 환하게 반짝였던가 나가는 길
을 찾을 수 있을까 흔적만 남은 풍경이 너의 다리가 될 때까
지 그쪽으로, 일요일은 걷고 또 걸었다 (63쪽)
창밖으로 쌓인 눈이 녹고 있는 산 중턱을 바라보던 지난 겨울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더듬어 본다. 시간이라는 미로에 갇혀 요일의 이름을 잊고 사는 이들의 건조한 시선을 좇는다. 일요일 다음의 월요일을 향해 걷는다고 믿었던 시간도 존재했을 터. 여전히 시간이라는 미로 속에서 반복해서 걷고 또 걷는 놀이를 즐기는 이는 없다. 미로를 좋아하는 건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 아이들은 출구가 존재한다는 걸 믿기 때문이고 어른들은 그 출구를 끝내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포기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아이였던 어른이 시간 속에 믿음은 사라졌다는 게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니 계절이 바뀌는 일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신비로움이 아니라 반복된 삶일 뿐이다.
긴 겨울
겨울이 지겨울 때마다 그 짓을 했다 길고 나른하게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둘 중 하나는 죽기를 바라듯 그럴 때마다 살
아 있다는 게 징글징글해져 눈이 길게 찢어졌다 사랑이 없
는 밤의 짙고 고요한 계절처럼 이 반복된 허기가 기나긴 겨
울을 연장시켰을까.
네 손바닥에 모르는 주소를 쓰고 겨울의 조난자들처럼 방
을 찾던 저녁이었지 방은 아담했고 누런 벽지의 무늬와 흐
린 불빛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언 몸을 녹이자
너는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웃었고 나는 네 얼굴을 핥는다
자꾸 잠이 오는데 괜찮을까
흔들리는 벽지 아래 서로의 손목을 쥐여주면 꽤 멋진 연인
이 되었다 우리는 가짜와 진짜처럼 정말 닮았구나 시린 외
풍이 불어와 겹겹의 바닥으로 쌓이는 밤 이불을 덮는 지루
함도 없이 이 겨울을 나자 궁색하게 남은 목숨의 자국이나
껴안으며 가까워질수록 사라지는 표정처럼 지겨워 지겨워
태어난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울고 있었을 뿐인데 (90쪽)
그 겨울에 다녀간 선배 언니는 겨울이 길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언니의 모습은 마치 자신이 겨울인 양 보였다. 모든 요일을 같은 이름의 요일로 살고 있는 나는 언니의 말에서 겨울이 따뜻한 계절이란 걸 발견했다. 그 뒤로 나는 주문처럼 겨울이 길었도 괜찮겠다고 중얼거렸다. 겨울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계절, 혼자가 아닌 둘이 될 수 있는 계절이었다. 긴 겨울이 사라진 뒤 봄이 찾아오면 겨울은 얼마나 슬플까. 봄이 되면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포근했던 겨울의 온기를 잊고 살겠지. 다시 추워진다는 일기 예보와는 상관없이 거실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도 긴 겨울을 통과하는 걸 아쉬워하는 것만 같다. 하나의 계절을 통과한다는 건 성장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겨울과 봄이 지났고 여름을 맞는 지금, 나는 조금이라도 성장했을까?
대화의 방법
평생 인형의 얼굴을 파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는 아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내 이빨은 단단해졌다
말을 해도 말이 하고 싶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되물어보던 허기처럼
형광등은 깜빡이고
인형은 얼굴도 없이 던져졌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14쪽)
내 목소리로 생성된 말을 잃은 시간, 아무 목적도 없이 눈으로 시를 따라 읽는다. 아이와 인형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까, 반복해서 읽는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만 들리는 눈빛 언어나 복화술을 쓰는지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다. 박은정은 그런 모호함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입구와 출구가 존재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는 미로를 즐기는 어른이라고 할까. 그녀가 선택한 시어는 밝거나 명랑하지 않다. 일부러 잔혹한 말들을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걷다 발견한 이정표가 오히려 길을 잃게 만드는 것처럼. 하여 누군가는 도돌이표처럼 걷다가 걷기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자신과 닮은 시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이런 풍경을 보며 웃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 포기를 한 건 아니지만 온전한 웃음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모두가 같은 이름의 요일들을 살고 있다.
풍경
아무것도 아닌 것이
풍경이 되는 일은 아름답다
회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기도처럼
가방을 열면
너의 손이 담겨 있지
의미도 무의미도 없이
피어나는 꽃으로
이상한 유언을 쓰다가
부끄러워 살고 싶어질 때
경계도 없이
투명한 공중으로 던져올리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나는 왜 여기에 없고
너는 왜 여기에 있는가
고통스러운 두 사람을 본다
내가 만지는 네가
웃고 있는 풍경 (46~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