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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바닥이 따뜻하다. 눅눅한 기운을 걷어내려고 보일러를 돌렸다. 발바닥에 타고 전해지는 따뜻함이 좋다. 어김없이 콧잔등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래도 좋다. 아, 뜨거운 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아침에 듣는 음악이 좋고, 커피가 좋고, 자두가 좋고, 복숭아가 좋고, 맥주가 좋고, 치킨이 좋고, 책이 좋고, 글이 좋고, 당신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 내가 좋아하는 걸 모르는 당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걸 아는 당신, 좋은 것들은 이리도 많다.  

 

 한 작가에 대한 애정은 어떻게 생성되는 걸까? 첫 인상, 입소문, 출판사의 홍보 문구, 표지, 지인의 추천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구병모, 김경욱, 이응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신간이 유혹하는 아침이다. 이 작가들과의 첫 만남을 생각한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만난 구병모는 신선했다. 이어 만난 <고의는 아니지만>은 놀라웠고 <아가미>는 독특했다. 신간 <파과>는 어떤 느낌일까. 김경욱의 소설은 단편 드라마로 만났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위험한 독서>가 제일 좋았다. 아니, 읽지 못했기에 그의 소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장편소설 <야구란 무엇인가>는 야구에 대한 소설일까? 표지를 장식한 토끼의 의미가 궁금하다.

 

 이응준과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은 무척 아름답다. 요즘 제목의 대세는 밤인가 보다. 이증준의 <밤의 첼로>는 얼마나 매혹적일까?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으로 만났던 감성을 떠올린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여름 거짓말>이야말로, 이 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싶다. 저절로 표지에 손이 간다. 물결의 말들이 내게로 스며들 것 같다.

 

 

 

 

 

 

 

 

 

 

 

 

 

 

 

 

 

 

 

 

 

 

 

 

 

 좋아하는 동생의 글에 의하면 좋은 것을 좋아하려면 많은 의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좋아하니까, 때로 싫은 것도 싫어하지 못하고 서운함도 감수해야 한다는 거다. 읽히지 않는 책을 덮지 못하는 일, 읽지 못하는 책을 구매하는 행위의 근원에도 사랑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러므로 모든 사랑에는 성실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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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끝난 뒤인지라 삶과 죽음, 다시 말하면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투우장뿐이었고, 나는 그것을 잘 살필 수 있는 스페인에 몹시 가고 싶었다. 나는 글을 쓰는 법을 배우려고 하였고, 그것을 가장 단순한 사물로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의 하나인 격렬한 죽음이다. 거기에는 병사라든가, 흔히 말하는 자연사라든가, 또는 친구나 그 밖에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의 죽음에서와 같은 복잡성은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죽음은 사람이 쓸 소재의 하나가 될 수 있다. 11쪽

 

 

 어제 도착한 책 상자에서 꺼낸 헤밍웨이의 오후의 죽음』의 일부다. 일부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한 장을 넘겼을 뿐이고 계속 이어 읽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계속해서 책을 사고 있다. 내 방은 엉망진창이다. 어떤 형태로든 탈이 날 것이다. 시집은 시집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쌓아두고,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많지도 않은 책이 방치된 것이다.

 

 그런데도 책을 주문하려고 생각 중이다. 강성은의 시집 단지 조금은 이상한을 말이다. 아직 알라딘 책 소개에는 목차차를 비롯한 시집에 대한 정보가 없다. 출판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표제작 <단지 조금은 이상한> 시를 옮긴다.

 

 

 아직 이름이 없고 증상도 없는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 땐 멈춰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생동하는 세계와 같은

 

 단지 조금 이상한 병처럼

 단지 조금 이상한 잠처럼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계절처럼

 슬픔도 없이 사라지는

 

 위에서 아래로 읽는 시절을 지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는 시절을 지나

 이제는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관해진

 노학자의 안경알처럼

 

 일요일의 낮잠처럼

 단지 조금 고요한 

 단지 조금 이상한

 

 

 

 

 

 

 

 

 

 

 

 

 

 

 

 

 

 

 

 노란 참외를 먹고, 다홍색의 방울 토마토를 먹고, 김언수의 소설집 을 읽다가 설터의 단편집 『어젯밤』을 뒤적이다가, 간질거리는 목이 신경 쓰여서 잠들기 전 약을 먹어야 할까, 고민하는 밤이다. 월요일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친구에게 내일은 문자를 보내야 겠다는 생각, 굵은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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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는 이맘때, 수국에 빠져 있었다. 수국을 보러 가려고 계획을 세우고 수국을 간절히 바랐다. 여름을 앓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올해도 수국을 향한 마음은 같다. 하지만 계획은 없다. 그러니까, 아마도 올 해는 수국을 보지 못할 것 같다. 수국의 날들을 대신하며 이런 시를 찾았다.  릴케의 가장 아름다운 시를 엮은 이 시집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구매한 건 몇 년 전. 읽기로 작정한 건 아니다. 그저 생각날 때마다 펼치게 될 것이다. 수국이라는 말에 반가워서 옮긴다.

 

 

 분홍빛 수국

 

 누가 이런 분홍빛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산형꽃차례의

 이 꽃송이 들 속에 이런 분홍빛이 모여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금을 입힌 물건들의 금 빛깔이 벗겨지듯이 이 꽃송이들은

 많이 써서 그런 것처럼 서서히 붉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들은 그런 분홍빛을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분홍빛은 이들을 위해 지상에 남아서 허공에서 미소짓는가?

 천사들이 있어서 분홍빛이 사라질 때면, 이 분홍빛을

 다정하게 받아주는가, 마치 향기처럼 관대하게?

 

 아니면 이들은 분홍빛을 포기하는 건지도 모른다,

 분홍빛이 꽃의 시듦에 대해 절대 알지 못하도록,

 하지만 이 분홍빛 아래서 푸른빛은 다 엿들었다,

 푸른빛은 이제 시들어가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147~148쪽>

 

 

 청수국

 

 팔레트에 마지막 남은 초록빛 같다,

 이 이파리들은, 마르고 투박하고 거칠다,

 파란빛을 스스로 띠지 않고 그저 멀리서

 반사시키는 산형(繖形) 꽃차례들 뒤편에서.

 

 그것들은 울어 지친 듯 파란빛을 대충 반사한다,

 파란빛을 일부러 다시 잃어버리려는 것 같다,

 그리고 오래된 파란 편지지들처럼 그것들 속에는

 노랑, 보라색 그리고 잿빛이 깃들여 있다 ;

 

 어린아이의 앞치마에 어리는 것 같은 퇴색한 빛깔,

 더 이상 해질 게 없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우리는 한 작은 생의 짧음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지만 산형 꽃차례들 중 하나에서 갑자기

 파란빛이 새로워지는 것 같다, 초록 앞에서

 감동적인 파란빛이 즐거워하는 게 보인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101~102쪽>

 

 

 

 시집을 둘러보다 이런 시집을 발견했다. 홍일표 시인의 『매혹의 지도』다. 고백하자면, 표지에 끌려 클릭했다가 수국과 마주한다.  ‘수국에 이르다라는 시다. 수국을 노래한 시인이 고맙다. 알라딘에 올라온 시의 전문은 이렇다. 시인은 달지 않은 수국이라 말한다. 하지만 시에서, 수국에서, 단 맛이 난다.

 

 

 솜사탕을 수국 한 송이로 번안하는 일에 골몰한다//솜사탕은 누군가 내려놓고 간 벤치 위의 따듯한 공기/헐떡이다가 그대로 멈춘//수국은 수국을 통과하며 말한다//하늘에서 엎질러진 구름이 완성한 노래가/나무젓가락에 매달려 반짝이는 동안/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햇살들이 손수건만 한 경전을 펼쳐들기도 한다//땅속에서 캐낸 태양은 먹기 좋게 식어 있다/붉은 껍질만 잘 벗겨내면/달지 않은 수국 한 송이 꺼내/한 열흘 땅 위의 배고픈 그림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멀리서 온 바람이 수국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지나간다
―「수국에 이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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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2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4 0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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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 잘 지낸다는 L의 문자를 받았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나도 잘 지낸다고 답을 보냈다. 잘 지낸다는 말로, 우리는 긴 이야기를 생략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복잡한 나날의 연속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피곤하고 고단한다. 서늘하거나 강렬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여름과 맞닿은 날들, 어떤 사람은 휴가를 준비할 것이고, 어떤 이는 장마를 걱정할 것이다.

 

 나른한 오후다. 책을 펼치다 졸음으로 빠져들 오후다. 그전에 이런 책으로 감기는 눈을 세운다. 궁금한 책들이다. 기다렸다고 말해야 한다, 제임스 설터의 장편 『가벼운 나날』을 말이다. 서늘한 기운이 전해져서 좋다. 자칫 무거운 나날이 될 여름에 필요한 제목이 아닐까. 단편집 『어젯밤』을 읽은 이라면 『가벼운 나날』이 매우 반가울 것이다. 여름처럼 강렬한 제목, 『미친 사랑』속 사랑은 얼마나 치명적일까. 내겐 시인으로만 각인된 심보선의 『그을린 예술』은 분명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궁금하다.

 

 

 

 

 

 

 

 

 

 

 

 

 

 

 

 

 

 

 

 

 이제 읽은 책과 읽고 있는 책이다.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피카소 월드』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피카소의 작품과 그의 개인적인 사진이 함께 담겼다 - 그의 그림과 조각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한 책이라 생각한다.) 『이별 리뷰』로 만난 한귀은의 『모든 순간의 인문학』은 영화, 책, 일상에 대한 인문학이다. (이제 읽기 시작했다.) 날씬한 여자의 뒷모습을 표지로 내세운 『프랑스 남자들은 뒷모습에 주목한다』는 프랑스와 프랑스 사람을 탐구한 책이다. 그들의 문화, 사고방식, 관습을 통해 프랑스를 말한다.

 

 

 

 

 

 

 

 

 

 

 

 

 

 

 

 

 

 

 책장을 정리한다. 그러니까,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 읽을 예정인 책들로 나눈다. 책들의 자리를 바꾸면서 잊고 있던 책들과 만난다. 어떤 책은 다시 훑어보다 같은 구절에서 멈추고, 어떤 책에선 처음 만난 듯 낯선 구절을 메모한다. 여름, 강렬한 날들로 채워지겠지만 그 속에 숨은 서늘한 날들을 기다린다. 나른한 오후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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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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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0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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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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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이 되었고 아카시아꽃이 환하게 피었다. 아파트 복도에 나가면 옅게 아카시아 향이 닿는 듯하다. 송홧가루가 지나가고 아카시아 꽃이 피고 곧 밤꽃도 필 것이다. 앵두는 붉게 익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작약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을 터. 모든 것들이 자기 자리에서 부지런히 해야 할 일들을 해내고 있다. 나는 여기 그대로 있고 너는 아직 멀리 있구나. 너에 속한 다른 이름들의 너는,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너¹에게 가슴에 새기는 달, 5월에 편지를 보냈다. 너²에게 초록이 닿기를 이란 문자를 6월에 보냈다. 너³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하루를 너와 나는 다르게 보내고, 같은 하늘을 너와 나는 다른 부분을 보고, 같은 드라마를 볼 수도 있고, 같은 노래를 듣기도 하겠지. 같은 책을 읽고 있을 수도 있고, 어느 순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그러니 속상할 필요도 없다. 나는 여기에, 너는 거기서 살아가면 된다.

 

 6월, 이런 책을 곁에 두려고 한다. 돌아온 정유정이란 말은 적당하지 않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다.『28이란 숫자가 의미하는 게 무얼까, 궁금할 뿐이다. 도서관이 아닌 내 방 책장에서 꺼내보고 싶은 박범신의『외등』, 표지부터 수줍은 숙녀를 닮은 박상수의『숙녀에게』, 김려령과 구병모의 소설을 만나는 창비청소년문학 『파란 아이』를 우선 담는다.

 

 

 

 

 

 

 

 

 

 

 

 

 

 

 

 

 

 

 

 

 겨울과 봄이 지났고, 여름이 시작된다. 작년보다 강한 더위와 많은 비가 내릴 거라고 한다. 작년만큼만 견디면 될 것이다. 작년만큼만 이겨내면 될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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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전히 슬픔의 구간에 속하지만
    from 그리하여 멀리서 2013-09-09 20:16 
    나를 증명하는 몇 가지 서류를 본다. 한글과 한자로 쓰인 나의 이름, 나의 나이, 내가 살고 있는 주소를 본다. 한때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절에는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엄숙한 감사라는 사실을 나는 아주 늦게 깨달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대로다. 변한 건 무엇일
 
 
프레이야 2013-06-0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월도 벌써 넷째날이네요. 올여름 더 덥고 비도 더 많이 온다고 하던가요? 그렇군요! 자목련님에게도 제게도 지치지 않는 여름이 되면 좋겠어요.^^ 정유정의 신간소설 제목의 의미가 궁금하네요, 저도.

자목련 2013-06-04 20:34   좋아요 0 | URL
해마다 여름은 더 빠르고 강하게 달려오는 듯해요.
좋은 책들이 더위를 막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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