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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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나를 주목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스타가 된 것처럼 우쭐하기보다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어디를 가든 알아보는 사람들과 질문이 이어진다면 피곤하다. 그러니 열 살 어린 나이에 우주에서 날아온 운선에 머리를 맞은 우리의 주인공 알렉스는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2주 동안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난 세상, 알렉스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전의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

 

 소설은 운석을 맞은 아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온다. 확률적으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라는 걸 알려주듯 말이다. 알렉스는 한동안 집에서 생활한다. 운석을 맞은 충격으로 간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몸이 주는 신호를 감지하고 점차 잘 견디게 된다. 알렉스는 운석 때문인지 공부를 열심히 한다. 특히, 과학, 우주를 좋아한다. 문제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엄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할 고통이다. 그러다 아이들을 피해 어느 헛간으로 피하는데, 그곳에서 소중한 인연 피터슨 씨를 만난다.

 

 ‘카오스에서 질서를 찾는 것은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질서 아래 숨은 카오스를 찾을 수도 있다. 질서니 카오스니 이런 개념들은 불안정하다. 옷을 바꿔 입고 장난치는 쌍둥이와도 같다. 질서와 카오스는 자주 섞이고 겹친다. 시작과 끝이 그렇듯이. 세상일은 겉보기보다 복잡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111쪽

 

 월남전에 참전했고 아내가 죽은 후 애완견 커트와 지내는 피터슨은 주변 사람들과 교류가 적다. 이웃들에게는 괴팍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알렉스와는 점점 가까워진다. ‘커트 보거네트’를 좋아해 개 이름까지 커트라 지은 피터슨을 통해 그의 소설과 만난다. 그러다 애완견 커트가 갑자기 죽게 되고 혼자 남은 피터슨의 강이 악화된다. 급기야 불치병 진단을 받는다. 알렉스는 커트 보거네트를 읽는 독서 모임을 만들어 피터슨이 사람들과 교류하게 도와준다. 

 

 피터슨은 다가오는 죽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려 한다. 그러니까 자살을 시도한다. 알렉스가 발견하고 고비를 넘겼지만 피터슨은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열여덟 알렉스는 그런 피터슨의 마음을 이해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돕는다. 그리고 중대한 계획을 함께 실행한다. 스위스로 자살여행을 떠난다. 피터슨의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맞닿는 여행, 둘은 행복하다.

 

 ‘입자들은 튀어나오면서 존재하는 동시에 순간의 작은 파편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너무 빨라서 그것들의 존재를 기록할 만큼 예민한 도구는 발명되지 않았다. 사라진 다음에나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란 ‘별난’ 입자와 닮았다는 것을. 우주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금방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우주의 규모로 보면, 별조차 눈을 깜박이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지나간다.’ 429쪽

 

 알렉스와 피터슨의 사귐을 통해 삶과 죽음, 우정에 대해 생각한다. 우연이 운명으로 이어지는 뜨겁고 따뜻한 이야기. 책에 등장하는 물리학 용어나, 우주에 대한 이론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거대한 우주 공간에서 펼쳐지는 삶의 향연은 아름답다. 때로 치열하게 망가지고 때로 폭발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책을 통해 만나는 커트 보거네트의 소설에 대한 부분도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을 읽고 커트 보거네트의 소설을 읽는 이가 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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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6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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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 좋은 계절은 따로 없다. 그러나 추리, 스릴러는 여름에 읽어야 한다. 더위를 날려 줄 서늘한 기운을 담은 책 말이다. 인형 귀신을 연상시키는 표지로 시선을 끄는  미쓰다 신조의 첫 호러 단편집 『붉은 눈』이야말로 여름에 읽어야 제격인 소설이다. 단편 8편과 네 편의 짧은 괴담 기담이 실렸다.

 

 무서운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중간에 멈추거나 공포를 견디며 끝까지 듣는 두 가지다. 『붉은 눈』은 무섭지만 멈출 수가 없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이야기를 이끄는 실력 때문인데 특히 이 소설집에서는 화자로 등장하는 작가가 실제로 근무했던 잡지사나 사진집을 언급하여 더욱 호기심을 키운다. 

 

긴 머리카락에 살결이 희고 예쁜 아이였는데 특히 양쪽 눈동자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째서인지 처음에는 알차채지 못했지만 유심히 보니 오른쪽 눈보다 왼쪽 눈의 홍채가 색이 진하더군요. 그런 짝짝이 눈으로 저를 응시할 때면 뭐랄까, 쾌감과 전율을 동시에 맛보는 듯한 기분이…….’ (「붉은 눈」, 11쪽)

 ​

 표제작 「붉은 눈」은 유년 시절 전학 온 소녀 마도 다카리에 대한 이야기다. 마도 다카리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 한다. 따돌림을 당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항상 혼자였다. 외할머니가 무당였던 화자는 마도 다카리에서 어떤 기묘한 기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마도 다카리가 학교에 오지 않아 반장과 함께 집을 방문하는데 그 후로 화자와 반장은 무언가가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꿈을 꾼다. 그것은 반장은 꿈에서 집 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고 그 후에 병으로 죽는다. 화자는 인간의 형태를 한 이상한 형체로 오직 붉은 눈만 선명한 꿈에 시달린다. 붉은 눈의 소녀 마도 다카리의 집을 다녀온 후 일어난 일이라 단순한 꿈이라고 단정을 짓기 어려운 것이다.

 

 소설은 이처럼 귀신이나 유령이라고 확정짓기 어려운 괴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소문에 불과하다고 무시할 수 없는 누군가의 경험이라 더욱 공포는 강해진다. 어린 시절 담력 시합을 하듯 친구들과  벼랑 위의 집을 조사하는「내려다보는 집」도 그렇다. 울며 겨자 먹기로 데려간 친구의 동생에게만 보인 집주인. 그러나 정작 부모들의 문의엔 아무도 찾아온 적이 없다는 말이 돌아온다. 동생이 본 건 무엇일까?

 

 제목 그대로 호러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기묘한 괴담을 중계하며 소설로 써보라는「한밤중의 전화」,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탐정에게 찾아와 죽은 친구들이 꿈에 나타나 자신을 부른다는 「죽음이 으뜸이다 ; 사상학 탐정」은 낮에 읽어도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독특한 점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감 나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귀신이나 유령의 기척 말이다. 읽기만 해도 기분이 이상해진다.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떤 소리를 차단하고 싶어진다.  

 

‘슥슥슥…… 하고 다다미를 훑는 듯한, 드드득드드득…… 하고 썩은 갈대밭에 손을 얹는 듯한, 츠읏츠읏츠읏…… 하고 마룻바닥을 기는 듯한, 쿵…… 하고 봉당에 떨어진 듯한, 툭툭툭…… 하고 봉당을 걷는 듯한, 서서히 커지는 소리가 확실히 문을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  (「붉은 눈」,  36쪽)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있자 묘한 소리가 들렸다. 초인종 소리가 아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별당 어딘가에서…… , 끽……, 내 머리…… , 끼익……, 머리 위에 있다…… , 끼이익…… 별당 창문 쪽에서 끼이이이이익…… 하고 조금씩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뒷골목의 상가」,  231쪽) 

 

 인상적인 기억이나 상처가 된 경험을 소재로 일상의 공포를 제대로 포착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공포의 실체를 끄집어내는 소설이다. 그래서 자꾸만 어떤 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가 나를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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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달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신예용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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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지나치게 깊으면 독이 생기고 결국엔 상처를 남긴다. 비단 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이 그러하다. 집착, 질투를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스리지 못 했을 때 사고는 일어난다. 살인도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루이즈 페니의 추리소설 『가장 잔인한 달』 속 살인도 그렇다. 어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다.

 

 ‘답은 책이나 보고서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인간에게 있다. 심지어 가끔은 형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잡을 수도, 막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언가에 있다. 답은 어두컴컴한 과거와 그 안에 숨겨진 감정 속에 있다.’ 94쪽

 

 소설은 조용한 마을 스리 파인스의 사람들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여느 평범한 마을과 다르지 않게 서로에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때문에 어떤 이벤트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부활절을 앞두고 마음에서는 교령회가 열린다. 그러니까 죽은 자를 불러오는 모임이다. 누가 주최를 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약간의 긴장과 함께 설렌다. 첫 번째 교령회는 참석자가 적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실패로 돌아가도 사람들은 두 번째 교령회를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 해들리 저택으로 모여든다. 깊은 밤, 영매를 중심으로 원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은 어떤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한 여자가 죽는다.

 

 겁에 질린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여자는 마들렌이다. 놀랍게도 단순 사고사가 아닌 살인으로 밝혀진다. 누군가 ‘에페드라’라는 약물로 그녀를 죽였다. 사건 해결을 위해 가마슈 경감이 마을을 찾는다. 친구이자 상사인 브레뵈프는 형사 르미외를 함께 보낸다. 가마슈를 감시하기 위한 첩자다. 상사였던 아르노의 부정을 고발한 가마슈는 경찰 내부에 적이 많았다. 가마슈가 스리 파인스에서 조사를 하는 동안 브레뵈프는 언론에 가마슈와 가족에 대한 충격적이고 잔인한 기사를 내보낸다. 가족을 상대로 비열한 짓을 버린 그가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걸 가마슈는 언제 알게 될까?

 

 이처럼 소설은 마들렌을 죽인 범인을 찾는 이야기와 동시에 가마슈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경찰 조직과의 대결을 그린다. 범인은 마들렌이 암이 재발하여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른 채 죽였다. 가마슈는 마을 사람들과 마들렌의 관계를 조사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읽는다. 마들렌은 암에 걸렸지만 주변을 빛내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엔 애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가마슈는 마들렌이라는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놓치지 않는다. 금세 사라질 옅은 그림자라도 말이다. 

 

 ‘그는 감정을 모았다. 그리고 정서를 수집했다. 살인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인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한 행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 지점에서 모든 일이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웠던 감정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다. 감정의 주체를 집어삼킬 때까지 비틀리고 부패한다. 결국 인간성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142쪽

 

 초반에 등장인물을 전부 소개하는 과정이 조금 지루하다 할 수 있지만 그 지점을 넘기면 소설 속 무대와 배우를 모두 그릴 수 있다. 그것이 루이즈 페니의 특징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인간의 내면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두 번째로 만난 루이즈 페니의 소설은 아주 세련된 감성 추리소설이다. 처음에 발견하지 못했기에 다행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내면에 감춰 둔 수많은 것들 중 가장 위험한 것은 비밀이다. 우리는 그 비밀을 너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에게도 감추려 한다. 비밀은 착각을 부르고, 착각은 거짓을 부른다. 그리고 거짓은 벽을 만든다. 우리의 비밀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이유는 비밀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갈라놓기 때문이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두렵고 성나고 비참한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급기야 자신에게마저 등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4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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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김혜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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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시작이다’란 말은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까? 어쩌면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국한된 말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 끝은, 끝일뿐이다. 잔인하게도 그렇다. 시작을 위한 시도만 존재할 뿐이다. 울부짖음으로, 몸부림으로 말이다. 무수한 몸부림의 끝에 시도는 시작을 잉태할 수 있다. 김혜진의 『중앙역』은 그런 비루하고 치사한 인간의 몸짓을 통해 시작을 말한다. 그러니까 감히 말하자면 시작은 희망의 다른 말이며 반드시 시도라는 절망을 견뎌야 한다.  

 

 이야기는 불편하다. 친절하지 않다. 깊고 단단한 절망의 구덩이에서 시작한다. 다른 삶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 웃음과 기대를 안고 움직이는 사람들, 잠시 이별을 위해 머무는 곳, 중앙역에서 그들과는 다른 생존을 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점묘화 속 점처럼 인물을 묘사하여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전달한다. 때문에 화자인 ‘나’는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저 중앙역에 모여든 노숙자 중 하나로만 인식된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과연, ‘나’는 왜 이곳에 왔으며 이전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이다.

 

 ‘내 시간은 어딘가에 단단히 묶여 있다. 누군가 내 시간을 단단히 매어둔 게 틀림없다.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이다. 한꺼번에 모두 잘라내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이 지겨운 하루를 빨리 소진해버릴 수 있을까. 나는 계단이나 벤치에 정물처럼 앉은 사람들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흘끔거린다.’ 31쪽

 

 소설은 단순하다. 중앙역 안에서의 시선과 그들을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으로 나눠진다. 화자인 ‘나’ 는 안에 있고 독자인 ‘나’ 는 밖에 있다. 뉴스를 통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람들의 모습을 픽션으로 만나는 일은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김혜진은 『중앙역』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아니 잊고 싶어 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삶에 대해 말한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의 사랑, 그들의 희망,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오만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화자인 ‘나’는 화가 난다. 가방을 훔친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함께 꿈을 꾸는 일에 대해 질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참을 수 없다. 젊음이라는 이유를 들어 광장을 벗어나 쪽방을 얻어 새롭게 시작하라는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알콜중독자로 복수가 차오르는 나이 많은 여자와 살고 싶다. 어쩌면 그들의 말대로  ‘나’는 아직 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에게 여자마저 없었더라면 삶은 지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욕망과 본능 그 아래에 놓인 태초의 인간에게 부여된 평화였으니까.

 

 벼랑 끝에 놓인 사람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경찰서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울타리는 너무 빈약하다. 강자에게 유린당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법자가 되어 살아야 한다. 그래서 폭력에 앞장서고, 자포자기의 삶을 산다. 우리는 알면서 외면한다. 누군가는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내 일이 아니니까. 시작을 위해 시도를 반복하면서도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그들이 느낄 거대한 공포를 알지 못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감옥을 나와 결국 자살을 선택했던 사람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나는 세계가 남김없이 무너지는 장면을 상상한다. 모든 게 공평하게 황폐해지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 절망감과 무력감을 떨쳐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소리 지르고, 고통을 느끼고, 죽어가면서, 우리도 이렇게 살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여자와 나는 이미 다 무너졌는데. 이토록 또렷하게 망가진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우리는 자신을 숨기고 가장할 얇은 거짓 하나조차 걸칠 수 없다. 발가벗은 진실은 언제나 서로를 향해 각을 세우고 할퀴고 흉터를 남긴다.’ 167쪽

 

 소설 속 중앙역은 가상 공간이 아니다. 작가는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주변이 풍경을 단문을 이용한 최대한의 절제로 시작을 위한 시도의 세찬 몸부림을 그려낸다. 그래서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언제나 ‘안’이 아닌 ‘밖’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될까?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을 때 삶은 끝이다. 그러니 죽어가는 여자를 끝까지 곁에 두지 못하고 응급실에 밀어 놓고 도망치듯 돌아서는 화자를 비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절망 끝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끝은 시작이다’라는 말을 조심스레 건네는 젊은 작가의 손을 덥석 잡을 용기가 없다.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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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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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순간을 기억한다. 찰나였지만 내 몸의 모든 세포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 앞에서, 어떤 그림 앞에서, 어떤 문장 앞에서. 감히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그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룬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불어오는 모래 폭풍을 함께 헤쳐나가는 것. 죽음과 삶이라는 경계를 떠올리면 우리네 인생이란 참 단순하다. 그 단순함을 인정하는 과정이 복잡할 뿐이다. 교차하는 곡선과 엉클어진 실을 풀면 결국 하나의 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생의 마지막은 어떤 선이 될까, 궁금해진다.

 

 소설은 요란한 자동차 경주로 시작한다. 자동차가 낯선 존재였던 시절, 그것은 기이한 풍경이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어떤 순간이 되고 삶의 목표가 된다. 소를 팔아 정비소를 만든 울티모의 아버지 리베로 파르리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아들에게 전해진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울티모는 자동차가 달리는 길이라는 운명과 마주한 것이다. 어린 시절 잠깐의 꿈이 아니라 생의 목적이다. 아름다운 서킷을 만들겠다는 울티모의 꿈은 한 번도 변모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곧게 뻗은 길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워. 이 직선에서 온각 곡선과 위험한 굽이들이 갈려나가지. 그러면서 관대하고도 올바른 질서가 만들어지는 거야. 길들은 그런 것을 할 수 있지만,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은 곧게 나아가지 않아. 마음의 행로에는 질서가 없어. 115쪽

 

 꿈이 존재하므로 울티모는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불구가 된 아버지, 자동차 경주를 함께 관람했던 백작의 아이를 낳은 어머니를 피해 참전한 전쟁에서도 그는 길을 믿고 의지한다. 이제 그의 길은 확장된다. 단순한 서킷이 아니라 그 길에 함께 달리 사람들, 그 길에서 바라볼 풍경들로 채워진다. 전쟁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 만났던 길을 가슴에 품었지만 미국을 택한다.

 

 청년이라 불리기에도 어린 울티모가 전장에서 어떤 생을 살았는지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통해 듣는다. 그에게 드린 금빛 그늘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우정을 배신한 전우를 어떻게 그의 길에서 제외했는지 말이다. 그렇다. 소설은 주인공 울티모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사랑을 만난다. 발랄하고 도도한 러시아 아가씨 엘리자베타와 함께 피아노를 판매한다. 엘리자베타가 피아노 레슨을 하면 울티모는 피아노를 조립한다. 둘은 함께 지냈지만 엘리자베타는 거짓 일기로 울티모에게 사랑을 고백할 뿐이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의 내밀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전쟁, 가난, 그리고 둘 사이에 피아노와 길이 더해진다. 단 한 장의 편지도 남기지 않고 울티모는 떠나고 엘리자베타는 약혼자였던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다.

 

‘오래전,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날 밤에 내 아버지 옆에서 이런 것을 배웠어요. 인생살이의 핵심과 시간의 숨결로 우리를 이끄는 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길이라는 것을요.’ 229쪽

 

 중년이 된 엘리자베타가 그의 고향을 찾아 아버지를 만났지만 둘은 그저 자동차, 자동차 경주,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이탈리어로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이 온전했던 울티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던 길에서 엘리자베타는 그를 그리워한다. 그녀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울티모를 그곳에서 느낀다. 울티모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여전히 서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모든 길은 순환적이고 어딘가로 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이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를 휘감고 있는 공포의 안개가 너무나 짙어서, 길들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265쪽

 

 어쩌면 울티모와 엘리자베타의 길이 만나는 교차점은 단 한 번뿐이었는지 모른다. 다시 만나기 위해 누군가 그 길을 되돌아가거나 찾아야만 했다. 엘리자베타의 사랑이 더 컸던 걸까. 그녀가 그 길을 찾아 나선다. 울티모의 서킷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엘리자베타는 그녀가 지나온 길이 결국엔 내부에 이르는 길이라는 걸 발견한 것이다. 신열과 방황으로 가득 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삶의 파편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모든 삶은 무한한 혼돈이며 그것을 단 하나의 완전한 형상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더없이 정교한 예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책들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눈매나 들판에 홀로 선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에 감동하는지. 450쪽

 

 고백하자면, 나는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 무척 마음에 든다.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 숨바꼭질하듯 곳곳에 숨겨둔 감정의 문장들, 눈을 감고 소설 속 서킷을 그려본다. 아름답고 황홀한 서킷과 하나가 되어 달리는 그들을 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나의 길, 그 위에서 만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선이 얼마나 유려할지. 상상만으로도 찬란한 기쁨을 안겨준다. 그러니 설사 그것이 완벽한 서킷이 아닐지라도 나는 이미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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