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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평점 :
어떤 순간을 기억한다. 찰나였지만 내 몸의 모든 세포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 앞에서, 어떤 그림 앞에서, 어떤 문장 앞에서. 감히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그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룬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불어오는 모래 폭풍을 함께 헤쳐나가는 것. 죽음과 삶이라는 경계를 떠올리면 우리네 인생이란 참 단순하다. 그 단순함을 인정하는 과정이 복잡할 뿐이다. 교차하는 곡선과 엉클어진 실을 풀면 결국 하나의 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생의 마지막은 어떤 선이 될까, 궁금해진다.
소설은 요란한 자동차 경주로 시작한다. 자동차가 낯선 존재였던 시절, 그것은 기이한 풍경이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어떤 순간이 되고 삶의 목표가 된다. 소를 팔아 정비소를 만든 울티모의 아버지 리베로 파르리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아들에게 전해진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울티모는 자동차가 달리는 길이라는 운명과 마주한 것이다. 어린 시절 잠깐의 꿈이 아니라 생의 목적이다. 아름다운 서킷을 만들겠다는 울티모의 꿈은 한 번도 변모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곧게 뻗은 길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워. 이 직선에서 온각 곡선과 위험한 굽이들이 갈려나가지. 그러면서 관대하고도 올바른 질서가 만들어지는 거야. 길들은 그런 것을 할 수 있지만,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은 곧게 나아가지 않아. 마음의 행로에는 질서가 없어.’ 115쪽
꿈이 존재하므로 울티모는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불구가 된 아버지, 자동차 경주를 함께 관람했던 백작의 아이를 낳은 어머니를 피해 참전한 전쟁에서도 그는 길을 믿고 의지한다. 이제 그의 길은 확장된다. 단순한 서킷이 아니라 그 길에 함께 달리 사람들, 그 길에서 바라볼 풍경들로 채워진다. 전쟁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 만났던 길을 가슴에 품었지만 미국을 택한다.
청년이라 불리기에도 어린 울티모가 전장에서 어떤 생을 살았는지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통해 듣는다. 그에게 드린 금빛 그늘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우정을 배신한 전우를 어떻게 그의 길에서 제외했는지 말이다. 그렇다. 소설은 주인공 울티모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사랑을 만난다. 발랄하고 도도한 러시아 아가씨 엘리자베타와 함께 피아노를 판매한다. 엘리자베타가 피아노 레슨을 하면 울티모는 피아노를 조립한다. 둘은 함께 지냈지만 엘리자베타는 거짓 일기로 울티모에게 사랑을 고백할 뿐이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의 내밀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전쟁, 가난, 그리고 둘 사이에 피아노와 길이 더해진다. 단 한 장의 편지도 남기지 않고 울티모는 떠나고 엘리자베타는 약혼자였던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다.
‘오래전,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날 밤에 내 아버지 옆에서 이런 것을 배웠어요. 인생살이의 핵심과 시간의 숨결로 우리를 이끄는 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길이라는 것을요.’ 229쪽
중년이 된 엘리자베타가 그의 고향을 찾아 아버지를 만났지만 둘은 그저 자동차, 자동차 경주,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이탈리어로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이 온전했던 울티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던 길에서 엘리자베타는 그를 그리워한다. 그녀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울티모를 그곳에서 느낀다. 울티모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여전히 서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모든 길은 순환적이고 어딘가로 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이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를 휘감고 있는 공포의 안개가 너무나 짙어서, 길들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265쪽
어쩌면 울티모와 엘리자베타의 길이 만나는 교차점은 단 한 번뿐이었는지 모른다. 다시 만나기 위해 누군가 그 길을 되돌아가거나 찾아야만 했다. 엘리자베타의 사랑이 더 컸던 걸까. 그녀가 그 길을 찾아 나선다. 울티모의 서킷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엘리자베타는 그녀가 지나온 길이 결국엔 내부에 이르는 길이라는 걸 발견한 것이다. 신열과 방황으로 가득 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삶의 파편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모든 삶은 무한한 혼돈이며 그것을 단 하나의 완전한 형상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더없이 정교한 예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책들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눈매나 들판에 홀로 선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에 감동하는지.’ 450쪽
고백하자면, 나는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 무척 마음에 든다.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 숨바꼭질하듯 곳곳에 숨겨둔 감정의 문장들, 눈을 감고 소설 속 서킷을 그려본다. 아름답고 황홀한 서킷과 하나가 되어 달리는 그들을 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나의 길, 그 위에서 만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선이 얼마나 유려할지. 상상만으로도 찬란한 기쁨을 안겨준다. 그러니 설사 그것이 완벽한 서킷이 아닐지라도 나는 이미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