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거짓말에 물들다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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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빨간 원피스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젊었고 싱그러웠던 시절이다.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의 무게에 짓눌리는 삶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를 이해시키려도 애쓰지도 않았다. 어떤 이는 청춘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계절이었다, 그 시절의 여름은.

 

 한은형의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는 그런 여름 같았다. 그러니까 긴 겨울의 끝에서 누구나 기다리는 봄이 아닌 통과해야 하는 계절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이 없거나 아쉽다는 게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그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간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론가 황현경의 진짜 연애소설이란 말도 맞겠다. 내게는 그것이 여름을 향한 사랑으로 보였으니까.

 

 수록된 8편의 단편은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는 점이 단점이자 장점이다. 조금은 낯설은 소재와 말투, 이야기의 흐름이 그렇다. 한은형의 등단작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은 꼽추 미카엘의 이야기이자 욕망에 대한 것이다. 호수가 보이는 숲 속의 멋진 별장의 집사이자 돈을 주면 무엇이든 하는 미카엘과 그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는 이들의 모습은 끔찍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버려야 하는 미카엘의 삶은 잔혹한 슬픔이다. 누군가에게는 여름밤이 권태로운 일상의 도피처지만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삶의 연장일 뿐이다.

 

 “여름밤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치명적으로 아름답거든. 짧은 게 더 자극적이잖아, 치마처럼.”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17쪽)

 

 표제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분명 외롭고 쓸쓸한데 정작 표현하지 못한다. 누가 봐도 멋지고 당당한 치과 의사는 ‘나’에게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자신의 자위행위를 글로 써달라는 것이다. 그 어떤 요구도 없이 그게 전부다. 욕망과 맞닿는 순간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었을 치과 의사의 고독은 얼마나 처절한가. 치과 의사와 만나기 위해 반드시 지나쳐야 했던 너구리 상(象)은 그 여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오직 개를 위한 요리책을 제안한 남자가 결국 개가 된 기이한 이야기 「그레이하운드의 기원」, 애인이 아니라 연인의 역할을 하는 로봇이라는 설정의 「연인형 로봇」, 평양으로 파견 나간 남자가 그곳의 교통경찰 여자를 사랑하는 「샌프란시스코 사우나」는 기발하고 도발적인 상상이다. 특히 이런 문장은 한은형이 만든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제복을 입고 반복된 행동을 하는 여자를 향한 무한 애정이라니.

 

  ‘그녀는 거리에서 시를 쓰고 있었다. 순간마다 완벽하게 사라지고 완벽하게 창조되는, 그래서 완벽한 시. 우리는 동료였다. 애정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나는 회전교차로와 공산주의와 시인의 역할과 사랑에 대해 이해했다. 사랑은 무언가 부족할수록 생겨나는 것 같았다. 나는 없는 게 많았다. 현실감도, 책임감도, 준법정신도, 자부심도, 열등감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 괜찮은 시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사우나」, 98~99쪽)

 

 불현듯 이 모든 게 존재하는 공간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곳에서는 개가 된 남자를 만나는 것도 나만을 향해 지나친 충성을 사랑이라 믿는 로봇도 평범한 일상이겠지. 그러나 그것이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걸 곧 알아차릴 것이다. 여름은 지속되지 않을 테니까. 빨간 원피스의 시절이 그러했듯이. 때문에 여름은 찬란하다. 다른 여름이 오기 전까지 그 여름은 유일하니까.

 

 한은형의 소설에서 여름과 여름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억은 오직 여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여름과 한은형을 하나로 묶고 싶은 나의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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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1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름도 입추가 지나자 조금 꺾이는 것 같아요. 여전히 뜨겁지만 그래서 좋기도 한‥ 저도 여름이면 입던 빨간원피스가 있는데 이젠 조금 끼이는 듯해서 안 입어요. 나잇살이 붙네요. ^^ 마음도 그렇게 조금은 둔해지길‥

자목련 2015-08-11 10:48   좋아요 0 | URL
정말 신기해요. 아침 저녁으로 더위가 옅어지는 기분이에요.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 빨간 원피스는 여름과 뗄 수 없는 기억이라 자주 등장해요,ㅎ

책읽는나무 2015-08-10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엔 빨간 원피스??
그리고 여름엔 한은형의 소설!!
상상하고 있어요^^

자목련 2015-08-11 10:49   좋아요 0 | URL
잔꽃무늬가 프린트 된 빨간 원피스.
한은형은 여름을 좋아하는 소설가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상상 속 여름은 어떤가요?
 
비포 아이 고 - 내 남편의 아내가 되어줄래요
콜린 오클리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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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가고 있는 지금, 하늘이 더 크게 보인다. 아니면 내가 더 작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28쪽)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산다. 어김없이 내일을 꿈꾼다.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어설픈 공감이란 단어로 내뱉어서도 안 된다. 다만 생각하고 다짐한다. 절실하지 않은 삶은 어디에도 없다고. 경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데이지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싶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을 기록하며 하루하루를 알차고 소중하게 사는 데이지에게 암은 지워야 할 목록  가운데 하나였다. 사랑하는 남편 잭과 함께 이겨낼 수 있었다. 항암 치료와 방사능 치료도 다시 인생의 목록에 존재할 거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고 승리했다.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암이 재발했다. 단순 재발이 아닌 시한부 삶을 통보하고 있다. 데이지의 몸은 아무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어떤 통증도 증상도 찾을 수 없기에 데이지는 믿고 싶지 않다. 논문을 쓰고 잭이 졸업을 하면 더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죽음이라니.

 

 누구라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데이지는 달랐다. 낡은 집을 수리할 계획을 세우고 강의를 듣고 치료를 위한 진료도 놓치지 않는다. 확인되지 않은 임상치료에 참여하며 여느 때와 똑같은 일상을 이어간다. 눈물로 인사를 전할 엄마에게도 담담히 알리고 자신의 상황을 떠벌리지 않고 가장 소중한 친구 케일리에게만 전한다. 그렇게 죽음과 함께 살아가다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다. 딸이 사라진다는 것을, 친구가 사라진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 잭의 아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문득, 그러나 또렷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이 잭에게 일어날 일임을 깨닫는다.’ (135쪽)

 

 시시각각 다른 크기와 형태로 다가오는 죽음의 절망이 아닌 혼자 남겨질 잭이 안타까워 데이지는 견딜 수 없다. 자신이 없으면 엉망인 일상을 이어갈 잭. 무엇 하나 찾지 제대로 찾지 못하고 필요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공부밖에 모르는 잭. 과연 잭의 졸업식에 참여할 수 있을까? 데이지는 잭의 곁을 지킬 아내를 찾아주기로 한다. 분명 미친 짓이다. 잭과 함께 남겨진 시간을 쪼개어 살아도 부족한데 아내를 찾다니. 이런 일을 응원할 사람은 케일리뿐이다. 잭에게 어울릴 사람을 찾기 위해 사이트에 가입하고 공원이나 카페에서 여자들을 관찰한다. 잭이 좋아할 스타일인지, 말이 통할 만한 사람인지 살펴보다 쏟아지는 어떤 감정과 마주한다.

 

 그랬다. 데이지는 여전히 간절하게 잭을 사랑한다. 약 때문에 오렌지색 우스꽝스러운 피부가 되고 암세포가 자신의 영혼까지 지배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잭과 처음 만난 그 순간의 떨림처럼 그를 원하고 그를 사랑한다. 잭에게 완벽한 아내를 찾아주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아무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은 잭의 사랑을 원했다.

 

 ‘잭이 나를, 진짜 나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예쁜 나를, 강하고 능력 있는 나를, 그가 사랑에 빠졌던 나를.’ (359쪽)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걸 주려고 애쓰고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강요한다. 데이지와 잭이 사랑하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서로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오해를 쌓아가는 둘에게 필요한 것 역시 사랑이다. 데이지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잭이 받아들이는 건 온전히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내 옆 바닥에는 하얀 운동 양말이 열 켤레는 쌓여 있다. 치우기를 잊어서가 아니다. 너무 게을러서도 아니다. 그게 우리들만이 이해하는 장난이기 때문에 거기 둔다. 내가 끊어낼 수 없는 데이지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 그리고 데이지가 어디에 있든, 웃고 있기를 바란다.’ (412쪽)

 

 영원한 이별 때문에 오늘의 사랑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곁에 있는 사랑을 만지고 느끼고 기억해야 한다.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기 두렵고 무섭지만 그것을 함께 계획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랑도 필요한 것이다. 사랑을 믿지 않고 결혼을 포기하는 시대에 사랑의 의미를 말하는 소설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만으로 삶의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사랑, 절망을 버릴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의 존재를 보여준다. 데이지와 잭의 사랑이 그러하다.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사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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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뺏기 - 제5회 살림 청소년 문학상 대상 수상작 살림 YA 시리즈
박하령 지음 / 살림Friends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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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가 많으면 자립심이 강해진다. 질투와 시기를 통해 성장한다. 부모는 공평하게 사랑을 주고 지원한다고 말하지만 자식들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아닌 예쁜 손가락이 있다고 믿는다. 예쁜 손가락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부모가 제시하는 길을 착실하게 수긍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고집과 주장이 강해 절대 굽히지 않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예쁜 손가락이기보다는 신경 쓰이는 손가락이 맞겠다.

 

 어쨌든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때로 강력한(예의바른 행동, 착한 마음, 뛰어난 학습력...)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일란성 쌍둥이 자매 중 언니 은오가 외할머니와 살게 된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동생 지오의 피겨 스케이팅과 외할머니의 재력을 지키기 위해 재혼 반대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알았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솟아오르는 화를 분출하려 할 때 부모님은 이혼 소식을 통보했고 아빠는 재혼을 했다. 얼마 후 엄마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남겨진 가족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쌍둥이 자매와 외할머니가 전부다.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은오는 지오와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쌍둥이라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판이하게 다른 성향과 지오가 성형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은오에겐 이번에도 대학이란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지오가 공부를 더 잘하기도 했지만 은오는 납득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겼고 이제는 학교와 집에서도 은오는 지오에게 자신의 의자를 뺏기는 기분이다.

 

 그나마 밴드 짜장만이 은오에게 유일한 쉼터였다. 처음엔 분장을 도와주는 것으로 들어왔지만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부산에서 친하게 지냈던 선집을 만난다.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라는 생각에 힘들었을 때 선집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선집은 은오가 아닌 잠깐 부산에 왔던 지오에게 마음이 있었다. 아, 은오는 어찌해야 할까.

 

 미래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과 선집을 놓고 지오와 벌이는 묘한 감정,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하는 은오의 속마음은 아프다. 어렵고 싫다고 돌아가거나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착한 아이가 될 수도 없다.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길을 찾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기에 은오, 지오, 선집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과 성장을 본다.

 

 ‘난 그동안 솎아진 아이라는 생각 때문에 세상으로 향하는 안테나를 접고 살았다. 누군가와 닿기 위해서는 손가락을 펴야 한다. 손에 쥔 미움의 불씨를 버리고 내 안의 상처도 털어 내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마음의 닻을 올려야 한다.’ (174쪽)

 

 누구도 자신의 삶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은오는 스스로 자신의 의자를 선택할 것이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부모님의 불화로 외로웠던 지오를 이해하면서 말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향한 은오의 목표와 애정은 대견하고 고맙다. 어른들의 입장에도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10대의 감정과 갈등을 있는 솔직하게 담아서 청소년 문학의 기대주가 될 것 같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삐뚤어짐은 성장이다.’라고 생각한다. ‘삐뚤어짐’은 단순히 탈선이나 질서를 위해(危害)하는 파격이 아니라 자기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난 시키는 대로 잘 해내는 아이보다 자기 색깔을 갖기 위해 이를 드러내며 반항하는 아이가 더 건강한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청소년들은 재량껏 삐뚤어지면서 성장하고 우후죽순으로 자라면서 스스로를 다듬고 또 맘껏 흔들리면서 차곡차곡 내실을 채워야 한다. 그래야 마땅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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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한은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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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에 대해 생각한다. 거짓말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해 생각한다. 겁많은 ‘자살 수집가’에 대해 생각한다. 거짓말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로 견뎠다. 이제는 안다. 이런 거짓말은 나쁘다는 것을. 하지만 나빠서 더 좋은 것도 있는 법이다.’ (17쪽)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감추는 방법은 많다. 모든 걸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은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어떤 이는 손을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어떤 이는 거짓말이라며 상대방을 혼란시킨다. 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다면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닌 좋은 것이다. 이처럼 거짓말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경계에 놓이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낸 이가 있을까? 그것이 어떤 거짓말이든 우리 일상에 가까이 있다.

 

 여름에 태어난 돌이라는 뜻을 가진 열일곱 살 소녀 최하석에게 거짓말은 자신을 지질 수 있는 거대한 갑옷 같았다. 그러니까 『거짓말』은 거짓말에 의지해 존재했던 시절 1996년의 이야기다. 할머니라 할 수 있는 화가 엄마와 목장 주인이지만 목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빠는 하석에게 화를 내지 않는 부모였다. 최재인이란 인기 많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 언니가 있었지만 하석이 태어날 즈음 죽었다. 약한 심장으로 태어나 수술을 했고 세 살 때 쥐약을 먹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 역시 하석에서 무언가 숨기는 게 있었다.

 

 ‘거짓말도 멋지지만 때로는 멋진, 거짓말보다 더 멋진 진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진실은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거짓말의 편인 것이다.’ (96쪽)

 

 한은형은 단편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와 마찬가지로 평범을 거부하는 인물과 독특한 문장을 내세운다. 하석은 또래 10대와는 달랐다. 이상하게도 습관처럼 거짓말을 하는 하석은 위태롭기는커녕 당당하고 자유롭다. 남자와 함께 잤다는 이유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와서도 다르지 않다. 한 번쯤 죽고 싶은 생각을 품은 아이들과 달리 구체적으로 자살하는 방법을 모은다. 모든 걸 책으로 배우고 익혔다. 선생님과 수영 강사를 유혹할 정도로 대담하다. 어른의 잣대로 보면 되바라진 아이다. 그럼에도 나쁜 남자에게 끌리듯 묘하게 하석에게 빠져든다. 당연 친구도 없고 PC 통신에서 만난 ‘프로작’이 유일한 소통 상대다. 무관심처럼 여겨지는 부모님의 이상하고 불편한 사랑에 대해서도 죽은 언니와 자살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열일 곱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어른들의 세계와 세상의 모든 게 시시해 보이는 시절, 죽음만이 내 존재를 확인시킬 수 있다는 이상한 확신 같은 것 말이다. 재인이 그랬던 것처럼 하석도 죽음을 꿈꾼다. 죽음이 존재와 부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라 믿는 것처럼 거짓말은 언제나 유혹적이다. 현실을 부정할 수 있고 새로운 진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싶은 열망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석은 무엇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뒤늦게 알게 된 죽은 언니가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엄마라는 사실일까? 아니면 자살 수집가로 위장한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일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면 언니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니의 첫 자살 시도도 열일곱 살 때였다. 나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를 넘기면 죽지 못할 거라고 여겼을 거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잘 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야 한다. 낡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완결된 이야기에 뭔가를 더 붙이는 건 억지로 늘려놓은 대하소설이나 다름없으니까.’ (203쪽)

 

 1996년에 열일 곱 살이었던 하석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의 거짓말은 여전히 존재한다. 거짓말이 없었더라면 하석은 어느 순간 사라졌을 테니까. 어떤 단어는 하나의 시절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석에게 거짓말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10대의 방황이며 자아인 것이다. 그리고 한은형에게 거짓말은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 더 붙이자면 여름도 소설일 것이다. 단순히 하석(夏石)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거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한은형에게만 속한 여름과 진실 같은 거짓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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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름과 여름 사이, 혹은 여름이 가기 전에
    from 그리하여 멀리서 2015-08-10 11:31 
    여름은 빨간 원피스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젊었고 싱그러웠던 시절이다.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의 무게에 짓눌리는 삶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를 이해시키려도 애쓰지도 않았다. 어떤 이는 청춘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계절이었다, 그 시절의 여름은. 한은형의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는 그런 여름 같았다. 그러니까 긴 겨울의 끝에서 누구나 기다리는 봄이 아닌 통과해야 하는 계절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이 없
 
 
 
개인적 기억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9
윤이형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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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새롭게 편집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영원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아서 시간에 지남에 따라 점점 옅어진다. 모든 걸 기억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만약 기억을 잃어버리는 삶과 모든 걸 기억하는 삶은 존재한다면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언제나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를 소설로 담은 윤이형은 <개인적 기억>에서도 현재가 아닌 미래를 배경으로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남자의 삶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가치를 묻는다. 소설은 2058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주인공 마흔일곱 살 지율이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떠올리며 시작한다. 자신에게 그 소설을 읽어주던 목소리를 기억하며 필사를 시작한다. 지율은 모든 걸 기억할 수 있었다.

 

 지율은 2022년 열한 살에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 진단을 받는다. 어떤 사물을 마주했을 때,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살아나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런 아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엄마는 집을 떠나고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던 지율도 독립한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의대를 선택했지만 지율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난독증에 걸리고 스물다섯 살엔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손님인 은유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은유는 지율의 능력을 특별하게 여기고 기자나 작가가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난독증에 걸린 지율에게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읽어준다. 은유는 지율과 반대로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는 여자였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지난 모든 사랑을 함께 떠올리는 남자와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는 여자의 사랑은 때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어떤 삶도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다고 믿는 지율에게 은유의 삶은 너무도 단순하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가족에 대해서도 그래. 뉴스 사회면에 자투리로 요약되는 삶이야. 팍팍하고, 가족의 생존 외에는 생각하는 게 별로 없는 삶이야.’ (98쪽)

 

 은유를 사랑하면서 지율은 ‘과잉기억증후군’ 을 이겨내고 싶었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치료 과정에 복용한 약 때문이었을까, 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모든 기억을 버리려 노력했지만 은유는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아니,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기억하는 것이다. 잠재의식 속에 남은 책과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의 애틋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늙은 나무가 잘려나가거나, 추억의 장소들이 문을 닫았을 때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면 했다. 내게 그런 슬픔은 ‘인간’의 표지처럼 느껴졌다. 나는 머릿속에 내가 가본 모든 장소를 언제까지나 담아둘 수 있었기에 그곳들을 그렇듯 소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119쪽)

 

 단 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잊지 않으려고 계속 그의 이름을 되뇌고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일까? 망각의 바다를 유영하는 게 우리 삶일지라도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려는 본능이 우리를 지켜줄 거라 믿고 싶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읽었더라면 이 소설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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