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한은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여름에 대해 생각한다. 거짓말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해 생각한다. 겁많은 ‘자살 수집가’에 대해 생각한다. 거짓말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로 견뎠다. 이제는 안다. 이런 거짓말은 나쁘다는 것을. 하지만 나빠서 더 좋은 것도 있는 법이다.’ (17쪽)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감추는 방법은 많다. 모든 걸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은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어떤 이는 손을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어떤 이는 거짓말이라며 상대방을 혼란시킨다. 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다면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닌 좋은 것이다. 이처럼 거짓말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경계에 놓이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낸 이가 있을까? 그것이 어떤 거짓말이든 우리 일상에 가까이 있다.

 

 여름에 태어난 돌이라는 뜻을 가진 열일곱 살 소녀 최하석에게 거짓말은 자신을 지질 수 있는 거대한 갑옷 같았다. 그러니까 『거짓말』은 거짓말에 의지해 존재했던 시절 1996년의 이야기다. 할머니라 할 수 있는 화가 엄마와 목장 주인이지만 목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빠는 하석에게 화를 내지 않는 부모였다. 최재인이란 인기 많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 언니가 있었지만 하석이 태어날 즈음 죽었다. 약한 심장으로 태어나 수술을 했고 세 살 때 쥐약을 먹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 역시 하석에서 무언가 숨기는 게 있었다.

 

 ‘거짓말도 멋지지만 때로는 멋진, 거짓말보다 더 멋진 진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진실은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거짓말의 편인 것이다.’ (96쪽)

 

 한은형은 단편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와 마찬가지로 평범을 거부하는 인물과 독특한 문장을 내세운다. 하석은 또래 10대와는 달랐다. 이상하게도 습관처럼 거짓말을 하는 하석은 위태롭기는커녕 당당하고 자유롭다. 남자와 함께 잤다는 이유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와서도 다르지 않다. 한 번쯤 죽고 싶은 생각을 품은 아이들과 달리 구체적으로 자살하는 방법을 모은다. 모든 걸 책으로 배우고 익혔다. 선생님과 수영 강사를 유혹할 정도로 대담하다. 어른의 잣대로 보면 되바라진 아이다. 그럼에도 나쁜 남자에게 끌리듯 묘하게 하석에게 빠져든다. 당연 친구도 없고 PC 통신에서 만난 ‘프로작’이 유일한 소통 상대다. 무관심처럼 여겨지는 부모님의 이상하고 불편한 사랑에 대해서도 죽은 언니와 자살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열일 곱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어른들의 세계와 세상의 모든 게 시시해 보이는 시절, 죽음만이 내 존재를 확인시킬 수 있다는 이상한 확신 같은 것 말이다. 재인이 그랬던 것처럼 하석도 죽음을 꿈꾼다. 죽음이 존재와 부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라 믿는 것처럼 거짓말은 언제나 유혹적이다. 현실을 부정할 수 있고 새로운 진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싶은 열망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석은 무엇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뒤늦게 알게 된 죽은 언니가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엄마라는 사실일까? 아니면 자살 수집가로 위장한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일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면 언니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니의 첫 자살 시도도 열일곱 살 때였다. 나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를 넘기면 죽지 못할 거라고 여겼을 거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잘 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야 한다. 낡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완결된 이야기에 뭔가를 더 붙이는 건 억지로 늘려놓은 대하소설이나 다름없으니까.’ (203쪽)

 

 1996년에 열일 곱 살이었던 하석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의 거짓말은 여전히 존재한다. 거짓말이 없었더라면 하석은 어느 순간 사라졌을 테니까. 어떤 단어는 하나의 시절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석에게 거짓말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10대의 방황이며 자아인 것이다. 그리고 한은형에게 거짓말은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 더 붙이자면 여름도 소설일 것이다. 단순히 하석(夏石)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거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한은형에게만 속한 여름과 진실 같은 거짓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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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름과 여름 사이, 혹은 여름이 가기 전에
    from 그리하여 멀리서 2015-08-10 11:31 
    여름은 빨간 원피스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젊었고 싱그러웠던 시절이다.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의 무게에 짓눌리는 삶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를 이해시키려도 애쓰지도 않았다. 어떤 이는 청춘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계절이었다, 그 시절의 여름은. 한은형의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는 그런 여름 같았다. 그러니까 긴 겨울의 끝에서 누구나 기다리는 봄이 아닌 통과해야 하는 계절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