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거짓말에 물들다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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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빨간 원피스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젊었고 싱그러웠던 시절이다.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의 무게에 짓눌리는 삶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를 이해시키려도 애쓰지도 않았다. 어떤 이는 청춘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계절이었다, 그 시절의 여름은.

 

 한은형의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는 그런 여름 같았다. 그러니까 긴 겨울의 끝에서 누구나 기다리는 봄이 아닌 통과해야 하는 계절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이 없거나 아쉽다는 게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그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간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론가 황현경의 진짜 연애소설이란 말도 맞겠다. 내게는 그것이 여름을 향한 사랑으로 보였으니까.

 

 수록된 8편의 단편은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는 점이 단점이자 장점이다. 조금은 낯설은 소재와 말투, 이야기의 흐름이 그렇다. 한은형의 등단작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은 꼽추 미카엘의 이야기이자 욕망에 대한 것이다. 호수가 보이는 숲 속의 멋진 별장의 집사이자 돈을 주면 무엇이든 하는 미카엘과 그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는 이들의 모습은 끔찍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버려야 하는 미카엘의 삶은 잔혹한 슬픔이다. 누군가에게는 여름밤이 권태로운 일상의 도피처지만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삶의 연장일 뿐이다.

 

 “여름밤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치명적으로 아름답거든. 짧은 게 더 자극적이잖아, 치마처럼.”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17쪽)

 

 표제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분명 외롭고 쓸쓸한데 정작 표현하지 못한다. 누가 봐도 멋지고 당당한 치과 의사는 ‘나’에게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자신의 자위행위를 글로 써달라는 것이다. 그 어떤 요구도 없이 그게 전부다. 욕망과 맞닿는 순간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었을 치과 의사의 고독은 얼마나 처절한가. 치과 의사와 만나기 위해 반드시 지나쳐야 했던 너구리 상(象)은 그 여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오직 개를 위한 요리책을 제안한 남자가 결국 개가 된 기이한 이야기 「그레이하운드의 기원」, 애인이 아니라 연인의 역할을 하는 로봇이라는 설정의 「연인형 로봇」, 평양으로 파견 나간 남자가 그곳의 교통경찰 여자를 사랑하는 「샌프란시스코 사우나」는 기발하고 도발적인 상상이다. 특히 이런 문장은 한은형이 만든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제복을 입고 반복된 행동을 하는 여자를 향한 무한 애정이라니.

 

  ‘그녀는 거리에서 시를 쓰고 있었다. 순간마다 완벽하게 사라지고 완벽하게 창조되는, 그래서 완벽한 시. 우리는 동료였다. 애정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나는 회전교차로와 공산주의와 시인의 역할과 사랑에 대해 이해했다. 사랑은 무언가 부족할수록 생겨나는 것 같았다. 나는 없는 게 많았다. 현실감도, 책임감도, 준법정신도, 자부심도, 열등감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 괜찮은 시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사우나」, 98~99쪽)

 

 불현듯 이 모든 게 존재하는 공간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곳에서는 개가 된 남자를 만나는 것도 나만을 향해 지나친 충성을 사랑이라 믿는 로봇도 평범한 일상이겠지. 그러나 그것이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걸 곧 알아차릴 것이다. 여름은 지속되지 않을 테니까. 빨간 원피스의 시절이 그러했듯이. 때문에 여름은 찬란하다. 다른 여름이 오기 전까지 그 여름은 유일하니까.

 

 한은형의 소설에서 여름과 여름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억은 오직 여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여름과 한은형을 하나로 묶고 싶은 나의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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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1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름도 입추가 지나자 조금 꺾이는 것 같아요. 여전히 뜨겁지만 그래서 좋기도 한‥ 저도 여름이면 입던 빨간원피스가 있는데 이젠 조금 끼이는 듯해서 안 입어요. 나잇살이 붙네요. ^^ 마음도 그렇게 조금은 둔해지길‥

자목련 2015-08-11 10:48   좋아요 0 | URL
정말 신기해요. 아침 저녁으로 더위가 옅어지는 기분이에요.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 빨간 원피스는 여름과 뗄 수 없는 기억이라 자주 등장해요,ㅎ

책읽는나무 2015-08-10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엔 빨간 원피스??
그리고 여름엔 한은형의 소설!!
상상하고 있어요^^

자목련 2015-08-11 10:49   좋아요 0 | URL
잔꽃무늬가 프린트 된 빨간 원피스.
한은형은 여름을 좋아하는 소설가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상상 속 여름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