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방영을 시작한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대하사극이라 기대가 컸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는 많았지만 고려를 다룬 드라마는 많지 않았기에 반가웠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다룬 드라마. 드라마의 원작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하며 시청할 것 같다.
길승수 작가의 『고려거란전쟁:고려의 영웅들』 을 읽으면서 자연적으로 소설 속 인물과 드라마의 인물을 떠올리게 되었다. 저자의 『고려거란전쟁』가 전체적인 전쟁의 흐름을 다루었다면 소설에서는 2차 고려거란전쟁을 기록한 전쟁일지와 동시에 '고려의 영웅들'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전장의 나가 적과 맞서 싸우는 실존하는 고려인의 모습을 들려준다. 군사를 지휘하는 지도사의 모습, 병법과 전략을 세우는 모습,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병사들의 사기를 복 돋우는 모습, 나라를 위하기보다는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모습, 전쟁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을 마주한다.
2차 고려거란전쟁은 소배압을 필두로 황제 야율융서가 직접 전장에 나온 거란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중요했다. 막대한 군사력을 내세워 전쟁을 시작했으니 거란의 쉬운 전쟁이 될 거라 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소설은 1010년 11월 16일을 시작으로 날짜와 시간별로 이어가며서 공간을 바꿔가며 고려와 거란의 전투 상황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그러니까 흥화진, 구주성, 통주, 서경 등 곳곳에서 전투 현장을 그리며 대치하며 상대의 전략을 예측하는 고려 영웅들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놀랍고 인상적인 것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진입하는 거란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 노래를 부르고 뿔나발을 불러 전혀 밀리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는 고려의 모습이었다. 『고려거란전쟁(상)』 에서는 특히 현종을 왕으로 세운 강조가 통주에서 거란과 싸웠지만 포로로 잡혀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 모습과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조원을 도와 서역을 지킨 강민첨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장면 앞에서 강민첨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과 마필, 기계가 보통강의 얼음 위를 가득 메우며 전진해오는데, 말의 발굽과 각종 기계의 바퀴에 긁히는 얼음 조각들이 마치 안개처럼 날리며 대기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더욱이 해가 비추어 서릿발처럼 날을 세운 병장기들이 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대기 중의 작은 얼음 조각들이 이 빛을 산란시켰다.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구름 위 천상의 군대가 지상에 도래한 것 같았다. (상, 432쪽)
서경을 함락하고자 하는 거란과 그에 맞서는 고려의 전술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의 약한 부분을 집중 공략하는 거란군을 막을 수 없기에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올라 성 안으로 집입하는 거란군이 바닥으로 내려올 때 빠질 수 있는 구덩이를 판 것이다.
거란군에게 패해 산속으로 흩어진 아군은 모으고 포로로 잡혔지만 투항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하며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은 높은 직책의 사람만이 아니었다. 성안의 평민과 노비도 군사를 도왔다. 생동감 넘치는 전투의 모습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되어 긴박한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주먹을 쥐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읽다 보면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 얼마나 소수인가 알게 된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증명한다고 할까. 그러나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듯 지난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승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드라마를 챙겨보면서 『고려거란전쟁(하)를 마저 읽었다. 드디어 강감찬이 등장했고 양규의 용맹함을 마주했다.사실, 강감찬만 읽고 있었고 양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고려거란전쟁(상) : 고려의 영웅들』 에서 실감 나게 전쟁의 모습을 그렸다면 『고려거란전쟁(하) : 고려의 영웅들』에서는 인물에 대한 깊이가 느껴졌다고 할까.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왕순(현종)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 그러니까 거란에 항복하자는 이들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이들 의견을 듣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고뇌의 모습. 한 나라를 책임지는 왕이 무조건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왕후의 임신을 이유로 개성을 떠나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대신의 속내는 왕을 보필하며 결국 그들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식솔의 안전을 생각하면 우선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을 것이다.
왕순은 피난을 청하는 대신 군사를 차출하여 밥을 주고 사기를 돋우라는 강감찬을 믿기로 한다. 한국의 역사 속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하는 강감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신출신이었던 이가 전쟁을 이끄는 장군이 되었다는 것도 놀랍다. 소설에서 묘사한 강감찬은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고집쟁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감찬은 예부시랑이나 육십이 넘은 나이였다. 평소 말이 많지 않았고 엄격하기로 말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으며,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관료들은 평소 강감찬과 가까이하기를 꺼렸다. 강감찬이 심하게 원리원칙주의자인데다가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강감찬은 관료들끼리 사적인 교분을 맺는 것을 싫어했고 당파를 이루는 것은 더욱 싫어했다. 문하생들의 모임 따위는 당연히 나가지 않았다. 관료들끼리 사적 교분이 있으면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 180쪽)
『고려거란전쟁(하) : 고려의 영웅들』에서는 강감찬의 면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양규와 김숙홍의 활약이 가장 인상적이다. 아니,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곽주를 탈환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과 거침없는 행보와 거란의 포로로 잡힌 고려인을 구하고자 노력한 모습은 감동을 안겨준다. 전쟁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승전을 기약할 수 없는 전략,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절박함. 양규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곽주 탈환이 가능했다고 보인다.
“우리는 저들보다 병력이 아주 적습니다. 적은 병력을 기책(奇策)으로 메워야 합니다. 지금부터 거란군이 물러갈 때까지는 오직 이것에 집중해 주십시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나라를 지키는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한 가지에 집중합시다!” (하, 94쪽)
역사의 기록을 다루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쟁을 다룬 소설이기에 내게는 낯선 말들이 많았다. 영채, 토산 같은 단어는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소설을 읽으며 검색을 많이 했다. 강민첨, 양규, 김숙홍, 김종현 같은 인물을 검색하고 지식백과를 통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지역명들, 그림으로 만나는 무기, 작가가 생생하게 그려낸 전투의 모습으로 그 안에 살았던 이들을 생각한다. 작가는 이름있는 장수가 아닌 무명의 병사의 활약을 입체적으로 담아내어 그들을 우리가 기억하게 만든다. 고려서, 요사, 송사를 빠짐없이 공부하고 고려사를 기록하고 싶었던 작가의 수고에 감사하다.
드라마의 재미는 이제부터다. 그 안에서 나는 강감찬이나 양규보다는 김숙홍, 강민첨, 무명의 병사를 기한 배우들은 조금 더 애정 할 것 같다.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와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소설이다. 이미 읽고 있거나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