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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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말미에 공동체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이후에 이들이 메인주로 옮기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의 그곳 'Good life center'를 본다면 더 그럴 것이고 말이다. 하여간 이들 부부는 생태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귀감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은 완전히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세 끼 식사 중에 두 끼는 이들처럼 먹을 수도 있고, 돈과 일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도 찾아 보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로써 다 이루었는가? 라고 물어 보면 잠시 숙연해 진다. 왜 그런 것인가? 생태적 삶이 삶의 카테고리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판옵티콘의 감시 체제나 이윤의 포섭에 부단히 저항할 힘이 있는가? 라는 ... 별스런 질문은 아니다. 니어링 부부라면 내 의문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일단 시작해 보는 겁니다'라는 식으로 말할 것이다. 그렇지. 맞는 말이다. 시작하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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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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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지 여사의 라다크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을까? 몇 년 전에 읽고 다시 읽은 책. 라다크인들에게 변화는 '재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것이 재앙인 이유는 그들 자신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개발'이란 정신적 빈곤을 수반할 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애초에 이들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열등감'이란 얼마나 수치스러운 감정인가 말이다. 문제는 이들을 개발 이전으로 끌고 가는 방법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현실 속에 녹아 있는 생태적 잠재성을 끌어 내는 방법이 무엇인가다. 이 문제란, 결국 라다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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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5
토머스 모어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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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90년도에 읽은 것으로 기억난다. 그때는 삼성판 사상 전집에 속해 있었지. 세로 쓰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드는 의문은 이렇다. 노예를 기반으로 한 유토피아가 자연스러웠던 건 시대적 한계라는 것인데... 아니면 플라톤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놀라운 것은 돈과 상품에 대한 통찰이다.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도 마찬가지. 꽤나 현실적인 행정가였던 모어경이었기에 이런 식의 상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완전히 뜬구름 잡는 세상 얘기라면 이 책이 어떻게 고전의 반열에 올랐겠는가. 맑스 이후에 '유토피아'라는 이름에는 '부적절한 상상'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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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 시공 로고스 총서 7 시공 로고스 총서 7
맬컴 보위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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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프로이트와 라캉

 

 

@이 장에서 보위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 기술의 수사학, 그리고 이론구성에서의 특화된 상황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1. "욕망은 언명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명될 수 없는 것이 된다."(<에크리, 804;302>) ... 욕망은 정신분석의 주제이지만, 분석자가 그 욕망에 대해서 뭔가를 기술하려고 하면 늘 기술되지 않는 미진한 부분을 남기곤 한다. ... 그렇지만 라캉은, 정신분석 이론은 그 이론의 범위를 벗어나는 그 무엇에 대해서 침묵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13) 

 

2. 프로이트를 비방한 사람들이 비록 프로이트가 '당치도 않은' 얘기를 꺼냈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는 반응을 보인 데 비해, 라캉을 매도하는 사람들은 우선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이유로 '당치도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경우, 즉 위험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14)

 

3. "글쓰기는 텍스트를 중시함으로써 스스로의 변별성을 획득한다. 글쓰기의 이러한 특징은 독자들에게 들어온 입구가 곧 나가는 출구가 되는 그러한 의미의 고정을 뜻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입구를 어렵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이런 의미에서 내 글은 전통적인 글쓰기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에크리, 493;146>) 무의식의 출구에서 해방되는 '출구'와 그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제한된 '입구'를 동시에 찾아보겠다는, 이러한 어려운 글쓰기는 정신분석의 전통에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 라캉처럼 의도적으로 애매 모호한 글쓰기에 지속적이고도 적극적인 가치부여를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14~15)

 

4.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편지는 늘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 가장 부패한(도움이 안되는) 위안은 지적인 위안이다./ 성적 관계라는 것은 없다. (16)

 

4-1. 라캉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의미가 넘쳐흐르는 언어로 온갖 가능한 심리학을 꿈꾸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성과 자명성을 표방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심리학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7)

 

5. [프로이트가 생물학에 특권을 부여한 것에 반하여] 라캉의 저서는 첫 줄부터 강력한 반생물학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생물학은 심리 과학자에게 믿을 수 없는 모델일 뿐 아니라 탐구의 대상을 오도한다는 것이다. 심리 과학자의 의도가 인간의 행동 중 인간적인 것을 파악해 내는 것이라고 볼 때, '자연적인' 결정 요인보다는 '문화적인' 결정 요인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능보다는 콤플렉스, 욕구보다는 구조를 더 우위에 둬야 하며, 심리 과학자의 가까운 동료로서는 생물학자보다는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를 더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9)   

 

6. 초기저작에서는 종속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두 개념-'언어'와 '무의식'-이 라캉 사상의 핵심 개념이 된다. ... 1938년 당시 라캉의 '문화'와 '인간계'(human order)는 '무한한 변주' 앞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가족 콤플렉스, 23>). 그러나 그 변주를 관측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은 아직 없는 상태였다 ... 라캉의 후기저작으로 가면, 무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를 닮은 언어는 사실상 인간계의 모든 것이 되고 만다.(21)  

 

7. [프로이트가 '덧없음'에 대해 안정된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반해] 라캉의 이론은, 인간의 마음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덧없음'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다. 하룻밤의 꽃핌이 그 사랑스러움의 극치를 이루는 감각-지각의 세계는, 라캉이 볼 때 환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상상계(the Imaginary)의 영역이다. 이 상상계 속에서 인간은 세계의 파편을 선택하여 그 파편과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 하고, 또 완전한 것처럼 보이는 지각된 것에서 자아의 상상적인 완전성을 찾으려고 한다 ...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모든 결과물은 이미 죽음의 표시가 새겨져 있다. 시들고, 실패하고, 부족하고, 분열되고, 쇠퇴하고 마침내 죽어 버리는 것이 그 결과물의 자연적인 영역이다. 욕구는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으며 욕망의 대상은 끊임없이 달아난다.(25)  

 

@ 맬컴 보위가 설명하는 라캉의 이러한 특징에서 불교적 인간관과 인생관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 또는 이러한 특징은 굉장히 '금욕적'이라는 것도...

 

8. 라캉은 프로이트보다 정신분석학의 주체와 인접학문과의 상관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확신한 것 같다 ... 언어학, 수사학, 시학이 필수불가결한 우군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위상을 놓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에서 망설인 반면, 라캉은 그렇지 않았다. 라캉은 인문과학이라는 말을 싫어했고, 그래서 정신분석학을 가리키는 정확한 용어로 '추측과학'(conjectured science)이 더 적당하다고 말할 정도였다.(27)

 

@[보위의 문제의식] 공식적인 수학의 언어를 지향하는 듯하면서도, 욕망하는 무의식의 중구난방식 헛소리에 이끌려 갔던 것이다. 라캉이 보기에 정신분석은 '문화의 연구' 그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이렇게 자리매김함으로써, 그는 하나의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 그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만약 '언어'와 '문화'라는 무제한의 영역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는 자신의 이론화 작업을 언제 언디서 멈춰야 할 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8)

: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이론'에 대한 라캉의 자세가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한다.라캉에게 이론은 '잡종교배'다. 즉, 기존하는 이론으로서의 언어학과 인류학이 정신분석과 교배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학문적 발전의 도상에서 서로 조력하는 관계인 것이지, 일상적 관찰 속에서 만나는 언어적, 인류학적 펙트 전체는 아닐 것이다. 이때 학문적 교배는 다양한 현실관계를 교통정리하는 신호체계를 얼마나 교묘하게 조절하는가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8-1. 다른 형태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라캉이 볼때 '이론'은 연쇄, 실타래, 빗장, 베짜기 같은 것으로서, 의미를 생산하는 요소들이 서로 뒤범벅된 것이다. 이론은 잡종교배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시간 속에 거주하며 끊임없이 변해 가는 과정이다. 이론 속에는 재치, 역설 그리고 애매 모호함이 늘 내재해 있다. 애매 모호하지 않은 명백한 언어를 명확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분석자-또는 언어 안에 항구적인 개념의 거처를 만들려고 하는 분석자-는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뭘 모르는 바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정신분석 이론가들과는 다르게 '뭘 아는 비바보'가 되려는 라캉의 노력은, 그의 모든 연구과제를 프로이트의 사상으로보터 멀리 격리시켰다.(28)

 

9. 라캉은 일관성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초기 이론을 후기 이론에 포섭시키는 기술이 너무나 교묘하여 그의 저작들은 모두 수미일관한 것처럼 보이며, 또 단일한 창조적 주제를 싸고 도는 지속적인 계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교묘한 기술은 프로이트에게도 있었다. (31)

 

10. 인간의 언어를 중시하는 라캉이 살펴보는 인간의 일상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말로써 서로 대화를 하고, 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자신의 의미하는 바와 의미하지 않는 바를 동시에 말한다. 그들은 무엇을 얻든 좀더 많은 것, 좀더 다른 것을 원한다. 그들은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의 일부만을 얻고 있음을 의식한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일상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이다. 욕망의 수단인 언어를 다루는 과학, 직접 말할 수 있는 욕망과 직접 말할 수 없는 욕망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과학, 화자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쌍방간의 압박을 다루는 과학이다 ... 그것은 인간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특징 특징, 말하는 주체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인간이 인간적으로 되는 그 순간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관계일지라도 인간이 상징적 관계로 들어서는 그 순간을 들어야 할 것이다."(<세미나 I, 178;155>) (33)

 

@라캉에게서 사회과학과 언어학이 중대한 시사점이라는 것은 이로써 충분히 알 수 있다. 프로이트와 변별점도 분명하게 인지되는데, 그것은 '주체성'과 '상호주체성'이라는 특징적 길항관계라는 것이다.

 

 

 

2장 '나'의 발명

 

@이 장에는 라캉의 초기 사상, 즉 자아와 동일시에 대한 보위의 생각이 서술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보위는 라캉의 이 시기를 '상징계/상상계/실재계'로 가기 위한 사전작업의 시기로 본다.

 

1. 1936년 8월 3일 오후 3시 40분. 라캉은 마리엔트바에서 개최된 14차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단계}(Stade du miroir)라는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에크리] 초판본 말미에 붙어 있는 참고 문헌에는, 이 논문의 발표 날짜와 시각을 기재함으로써, 그 논문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35)

 

1-1. [이외에 자아형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다룬 논문들] ... {'현실원칙'을 넘어서}(Au dela principe de realite, 1936), [가족 콤플렉스], {정신적 인과 관계론}(Propose sur la causalite psychique, 1946), {정신분석에서의 공격성}(L'agressive en psychanalyse, 1948), {'나'의 기능을 구성하는 거울 단계}(Le stade du miroir comme formateur de la fonction du je, 1949) ... (36)

 

1-2. 라캉에 따르면, 임상정신의학, 연합심리학, 유럽철학의 데카르트 전통, 정신분석 학계 내에서의 수정주의 운동 등은 모두 심판의 날을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의 시조인 프로이트조차도 초기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부터 멀리 물러선 것[초기의 무의식 강조에서 후기의 자아 강조로의 후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36)

 

1-2-1. 프로이트는 자아가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권한과 책임을 자아에게 부여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이나 세계를) 의식하는 개인의 정신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온 유럽의 고전 철학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이다. 특히 프로이트의 오류는, 그 자신이 정신분석학의 시조로서 충분히 이런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37)

 

1-2-2. 라캉은 [자아와 이드]의 이런 이중적인 측면 중에서 '추천 사항'["정신분석은 자아가 이드를 점진적으로 정복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프로이트, [자아와 이드]) 40] 쪽에만 집중하면서 프로이트의 다른 쪽 주장(인간의 마음이 너무 분열되어 있다는 문제)은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그[라캉]는 또다른 도덕적 입장을 표명하고 싶어했고, 그런 입장을 더욱 도발적인 초기 프로이트를 바탕으로 구축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41) ->밑의 2. 참조.

 

2. 거울단계(mirror stage, 프랑스어는 stade du miroir ; 거울의 경기장)는 단순히 개인 성장사의 한 점을 차지하는 시기가 아니라 하나의 경기장(stade), 인간주체의 싸움이 영원히 치러지는 그런 경기장인 것이다 ... 이 말장난능 그 뒤에 더 거대한 야망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인생주기에서 개인의 인성이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최초의 순간을 찾아 보자는 것이며, 나아가 정신분석이라는 도덕적 드라마의 새로운 시작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거울의'(specular) 순간에 대한 라캉의 설명은 자아의 탄생 신화와 타락 신화를 동시에 마련해 준다. (41)

 

2-1. 경험적 관측 사실 ...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된 유아의 행동 ... "이 행위(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것)는, 원숭이의 경우엔 거울 이미지의 허상이 파악되면 더 이상 원숭이의 흥미를 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원숭이와는 달리, 실제 아이에게서는 일련의 몸짓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움직임과 그 움직임 주변의 환경, 그 자신의 육체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말하자면 아이가 모방하는 현실 사이의 관계를 경험한다(<에크리, 93;1>)." (42)

 

2-1-1. 거울 단계의 시기에 난생 처음으로 아이의 세계에 뭔가가 가물거린다 ... 거울 앞에, 비록 조잡한 형태이긴 하지만 하나의 자율성 또는 개인의 통제력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이다. (42~43) 

 

2-2. 아이는 계속하여 그 이미지를 자기라고 착각하면서 계속 거기에 집착한다. 아이의 관심은 자신의 실제 몸뚱이와 거울 속에 비친 몸뚱이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집착하며(capte), 그 몸뚱이와 거울 이미지 속의 환경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몰두한다. 그러니까 아이는 거울에 사로잡혀 있다(captive). 그러나 라캉은 집착이나 사로잡힘이라는 용어보다는 별도의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것은 도덕적이면서도 법적인 의미를 내포하여 포괄적인 뜻을 가진 포획(捕獲, captation)이다 ... 거울은 아이에게 위안을 주고 또 유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함정이면서 유인(leurre)이라는 것이다.(44)

 

2-2-1. "아이와 거울만 있는 그 현장은, 비록 책임 있는 행위자로 생각될 만한 존재(어머니, 유모, 아버지)가 없더라도, 형성중인 아이의 자아에 거짓과 기만을 주입시킨다." (44)

2-2-2. 인간이 진리를 향해 진보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표면만을 제공하는 빛이 없는 거울'(<에크리, 188>)을 넘어서야 한다.(45)

 

@그렇다면, 진리는 '상상계'에 존재하지 않고 '상징계'에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진리는 '자아'에 있지않고, '언어'와 '사회적 관계'에 있다는 것? 그러면, 자아에 집착하는 한 그는 진리에 대한 퇴행적 동일시만을 경험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 질문에는 긍정적인 대답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져 있는 것 같아 보인다. 

 

3. [소외(alienation)의 문제] 라캉은, 거울에 사로잡힌 아이는 망상적인 자아형성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병원의 광기에 노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라캉은 아이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이 뒤따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45)

 

@[보위의 문제의식]바꾸어 말하면 alienation에 [맑스나 헤겔의 명료한 규정에 비해]너무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어서 그 의미들이 서로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래서 소외가 가리키는 조건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없고 또 탈소외(de-alirnation)의 처방이 아예 없는 것이다 ... 게다가 라캉의 가설에는, 소외가 조직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임상적 자료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런 지형도나 메시지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만다. (46~47)

 

3-1. 거울 이미지는 '나'의 신기루이며, 아이가 나중에 획득하게 될 통합 조정의 잠재적 능력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임을 예고한다. 실제로 거울 이미지는 이런 능력의 발달을 촉진시킨다 ... 그러나 '나'의 소외적 방향'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인(아이)이 영구히 자기자신과 불화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동결(고정)시킬 수 없는 주체의 과정을 끊임없이 동결시키려-즉, 늘 움직이는 장인 인간의 욕망을 고정시키려-하는 것이다.(48~49)

 

3-1-1. 이러한 주체의 자기분열은 프로이트의 꿈 연구로 처음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라캉에 의해 하나의 악몽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49)

 

4. '파편화된 신체'(corps morcele) ... 이 환상은 자아의 '소외하는 동일성(identity)'(<에크리, 97;4>)과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다 ... 아이는 어릴 적에 신체가 전반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런 기억과 관련된 불안이 안전한 몸을 가진 '나'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촉진시킨다. 그런데 자아를 향한 이러한 투사는 파편화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 그리고 자아의 단단한 무장이 오히려 개인에게 하나의 폭력을 가하여 또다시 그의 파편을 흩뿌리게 한다. (50)

 

4-1. 주체가 자아를 향해 앞을 내다보든 또는 파편화된 신체를 되돌아보든, 주체는 하나의 구성(construction)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그 구성이 상태만 바뀌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50)

 

5. 초기의 라캉은 이마고(Imago)라는 용어를 특히 좋아했는데, 이 용어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해 놓은 것이다 ... '이마고'는 마음의 대상으로서, 어린아이의 아주 초창기 경험에 바탕을 둔 무의식적 원형이다 ... "우리는 이마고를 심리학의 중심과제라고 지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갈릴레오가 불활성의 구체적인 부분을 물리학의 기본으로 삼은 것과 유사하다."(<에크리, 188>)(54~55)

 

6. 라캉의 초기 논문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안정된 중심점은 동일시(identificatation)라는 개념 ...  (55) 

 

6-1.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동일시는 정신적인 장치의 주요동기이다. 동일시는 활력의 원천이며, 개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극적인 상호관계의 촉진제이다. 그러나, 라캉은, 동일시라는 기제가 막강한 설명력을 가지려면 아주 초창기의 원형 상태에서부터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시작될 즈음에는 아이가 이미 너무 커 버렸고, 또 아이의 동일시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 동일시의 원칙에만 바탕을 둔 설명은 어색하거나 불분명한 것이 된다는 주장이다. (57~58)

 

6-1-1.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적 동일시를 최초의 근원적 순간-남자아이나 여자이이나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가장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지 모르는 순간-으로 파악했으나, 라캉은 오이디푸스가 2차적 순간이며, 자아를 진정시키고 정상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에크리, 116~7;22~3>). 오히려 라캉은 파괴적이고 문제적인 최초의 동일시가 거울 단계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58)

 

7. 아무튼 라캉이 재조정한 '동일시'와 '나르시시즘'은 종종 한 가지 개념으로 사용된다.(58~59)

 

7-1. 이 주인공[나르시스]은 자기의 얼굴을 비추는 표면의 막강한 힘에 매료되었고, 또 그 표면에 비친 이미지를 자기파괴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사랑한다 ... "이런 성애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을 소외시키는 이미지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관계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는 에너지와 형태를 얻게 되며 또 자아는 바로 이 관계에서 비롯된다."(<에크리, 113;19>) 이렇게 형성된 자아는 자살적 희생의 궁극적 순간을 향해 그 열정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60)

 

7-2. 자아가 형성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아의 파괴가 벌어진다는 것 ... 소외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소외된 상태가 악화되는 것뿐이다. (60)

 

7-3. 자아의 먼 과거에 대한 라캉의 시각은 자아의 미래에 대한 야만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1차적' 나르시시즘은 필연적으로 모든 인간적 욕망을 움직이는 구조적 사령탑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모든 인간이 복속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환상이 있다. 이것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육체의 열정'에 복속되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 이것은 영혼의 지고한 열정이며, 가장 고상한 욕망을 포함하여 모든 욕망에 그 구조를 부과하는 나르시시즘이다."(<에크리, 188>)(61)

 

8. 라캉은, 거울단계에서 주체의 내부에 동일시 기제가 진행되면 이것이 나중에 시각적 지각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의 논지는 바로 자기동일시의 원초적인 충동이 거울 너머의 세계에서도 무한히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거울의 이미지는 가시적 세계의 문턱이 될 것이다."(<에크리, 95;3>)(63)

 

9. 라캉이 볼 때, 이 연합심리학의 악덕은 늘 유사성의 관념을 가지고 작업을 하려 드는 데에 있다. 라캉은 이 유사성이 심리 모델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일관성을 보장해 준다고 보는 태도를 못마땅해했다. 게다가 이 심리학은, 관념이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보았다(<에크리, 75~6>) (64)

 

9-1. 모든 형태의 동일시는 유아의 나르시시즘적 의식의 반복이다. 아이는, 라캉이 볼 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분열을 일으키는 미덕이라도 갖추고 있지만, 지식을 추구하는 어른-가령 심리학자들-은 기계적으로 동일시적 절차를 적용하여 그들의 망상적 근원을 위장하려 들 뿐이다. (64)

 

10.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그 대파국은 편집증과 똑같은 증세를 보인다. 자아는 편집증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에크리, 114;20>) 거울의 가  사회적 로 바뀌면서 편집병적 소외가 나타난다(<에크리, 98;5>). 치료방법으로서의 정신분석은 통제된 편집증을 인간주체 안에 도입시킨다(<에크리,109;15>). 그리고 지식 그 자체는 모든 양태에서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편집증적이다(<에크리, 94;2/96;3/111;17/180).

 

10-1. 라캉도 달리와 마찬가지로 인간계의 내재적 구조에 대해서 말했다. 인간의 지식은 환상-오해, 기만, 유혹, 유인 등-에서 시작되고, 그 결과 불가피하게 자동화 체계를구축한다. 그러니까 정신분석은 주체의 원초적 섬망을 재복제하고 조절하려는 노력이다.

 

11. [임상적 수준 이상으로 도약하기를 꺼려했던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적 개념 수정이 정신분석 학계를 넘어서서 전 분야에 커다란 반향을 몰고 오기를 기대했다. (69)

 

12. 이 시기의 라캉은 정신분석이 곧 자아와 상상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72)

 

제3장 언어와 무의식

 

@이 시기에 중요하게 생각되는 논문은 {문자의 기능}과 {정신분석에서 말과 언어의 기능과 영역}(The function and Field fof Speech and Language in Psychoanalysis)[로마 담론]이었다.

 

1. "여기에 기계적 사용에 의해서 무의미하게 된 개념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개념들의 역사를 새롭게 점검하고 또 그 개념들이 주체의 기반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따져서 얻어낸 새로운 의미가 있다. 나는 그 개념들에게서 이 새로운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고 본다."(<에크리, 240;33>)(79)

 

1-1. 정신분석자들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무의식을 하나의 장소, 힘, 체계, 무언의 충동덩어리, 혹은 아직 문자화되지 않은 생각이나 관념 등으로 뭉뚱그려 생각하기가 더 쉬웠다.(79)

 

1-1-1. 그런데, 이 시기의 라캉에게는, 언어란 하나의 미로였다. 즉, 언어란 정신분석과 그에 관련된 모든 특징이 생겨나는 미로였고, 정신분석자들은 그 미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나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정신분석자는 정신분석의 원래 목표와는 다른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되고, 또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79~80)

 

1-2.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근본적인 본능적 욕구[drive]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역동적 상태를 유지하는 기억의 저장고(그러나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전개해 나가던 프로이트는, 이 순간에 언어 또는 언어의 유령이 그 '아래쪽' 깊숙한 곳에 침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그리고 정신분석이 종국에는 통합된 인간과학 분야에서 생물학으로 편입되려면, 드리이브는 침묵하는 것, 불가해한 것, 단순한 말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되어야많 했다. (86)

 

1-2-1.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말을 줄기차게 천명하고 다닌 것은, 결국 프로이트의 야심만만한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분석을 언어에 값싸게 팔아넘긴 것밖에 되지 않는다.(86)

 

1-2-2. "가령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보자. 여기에서 꿈은 문장의 구조 또는 책의 내용에, 또는 더욱 가깝게 말해 보면, 그림 퍼즐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되어있다. 즉 꿈은 문자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의 꿈은 원초적 도상학으로 나타날 수 있고, 어른의 꿈은 의미화 요소의 음성적, 상징적 요소를 동시에 재생한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혹은 지금도 쓰이고 있는 중국의 한자 등에서 나타난다."<에크리, 267;57>(87)

 

1-2-3. 프로이트는 자신이 동원한 많은 이미지들이 불만족스러울 정도로 잠정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언어학적 모델이 아닌 다른 모델도 자신을 매혹시킨다고 말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순전한 언어과학으로 파악하는 것을 꺼렸다.

 

1-3. 환자와 분석자는 정신분석에 들어가면 인간 소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되고 또 그 덧없는 소망을 정확히 집어내지 못해 한없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 이러나 절박한 상황을 감안할 때, 정신분석을 하나의  일관된 이론적 언어로만 포착하려는 라캉의 시도는 본질을 흐리는 것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90)

 

2. 프로이트를 상징계의 선구자로 지목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 특히 전문 용어의 차원에서 볼 때 그러하다 ... 프로이트의 상징은 근본적인 인간 경험에서 우러난 고정된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그 상징의 의미는 여러 개인 혹은 여러 문화에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 압축(condesation)과 전치(displacement) ... 너무 경직되지도 또 너무 유연하지도 않은 체계인 이 두 양태는 개인의 욕망이 갖고 있는 의미화의 구조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이 체계를 '상징계'로 지목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 라캉이 프로이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이 '상징계'에 있다.(91~92)

 

2-1. "인간은 말한다. ...... 그러나 그것(말하는 것)은 상징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에크리, 276;65>)(94)

 

2-2. 라캉은 상징계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지 인습적인 규칙에 의해서만 구속받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 부재와 배제 등의 냉혹한 사법적(제도적) 절차에 의해서도 규제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옮겨갈 때(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갈 때) 새로운 구조적 원칙, 새로운 배제의 원칙이 기능하게 된다고 간략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전환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점을 단 한순간도 암시하지 않는다.(95)

 

2-3. 라캉의 새로운 상징과학은 기존에 있던 체계적인 요소들을 새로운 전체로 엮어내기는 했지만, 기이하게도 별로 변증법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 상징과학은 기호의 안정성을 채택했고 그래서 내부적 균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문장학, 수상학, 골상학처럼 형이상학적으로 거대한 야망을 갖춘 그런 것이 되고 말았다.(98)

 

3. 라캉이 내세우는 소쉬르는 기호를 신봉하는 학도이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그 기호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의미를 표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프로이트와 함께 보편적인 인간성향의 공동 발견자로 추대되어 왔다. 그리고 그 보편적 인간 성향은, 확고부동한 구속의 틀 안에서 인간의 모든 사고를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긴 그늘을 던지는 것이었다.(99)

 

3-1. 라캉의 논문에서는소쉬르의 이름이 거명되기도 전에, 이 균형(기표와 기의 사이의 균형)이 깨지고 만다. "언어과학의 등장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의미의 과학이 모두 그런 것처럼 구성과정을 연산식으로 공식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연산식은 다음과 같다. 'S/s'.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기표가 기의를 지배한다. 여기서 지배한다고 하는 것은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는 가로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에크리, 497;149>"(100)  

 

3-1-1. 첫번째 주제는 기표들 사이의 관계가 다른 언어적 관계보다 훨씬 중요하고 도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의미는 서로 다른 요소들의 닫혀진 질서 내에서 발생하는 조합적 놀이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도 분해 가능하거나 다시 다른 의미와 조합할 수 있는 일련의 개념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만질 수 없는 발산물의 형태로 생겨난다. 기표의 영역은 독립적이며 또 자치적이다. ...... 이리하여 말의 의미화(기표화) 연쇄과정은 다음과 같이 된다. "기표들은 목걸이로 만들어진 또 다른 목걸이 속의 고리일 뿐이다."(<에크리, 502;153>)(101~102)

 

3-1-2. 두번째 주제는 '기표'가 스스로의 경계를 가진 체계가 아니라, 기의를 적극적으로 압박하는 힘이라는 점이다. 기표는 기의를 '예상하고', 기의를 '침범하고' 또 그 안으로 '들어간다'(102)

 

3-2. 의미를 생산해 내는 책임이 기호의 구성 요소들(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가 충전된 단 하나의 구성요소(기표)에 의해 생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03)

 

3-3. [라캉에게] 시인들이 언어의 다의성이라는 세계에 빈번히 출입하면서 이미 상징계를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기표의 대가'라는 것이다. ...... 모든 의미화 작용이 기호의 감옥으로 운좋게 타락한 결과라는 점 ...... (106)

 

3-3-1. '기표'는 글쓰는 사람의 영역이지만 또한 모든 사람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표가 그 행동 양태에 따라 세분화되고, 또 은유와 환유(라캉이 야콥슨에게서 빌려온 용어)라는 두 개의 비탈(<에크리 511;160)에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고 본다면, 글쓰기는 공공재산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글쓰는 사람은 그 재산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라캉은 이 두 용어를 간단하게 다시 정의했는데, 그 정의는 언어 속의 일상용어로 확립되었다. 그 정의란 바로 "은유는 '한 단어 대신에 다른 단어를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이고 환유는 '한 단어에 이어서 다른 단어를 결합하는 것'이다."(<에크리 506~7;156~7)(107)

 

3-4. "압축(Verdichtung)은 기표들의 포개짐이다. 은유가 중요한 수사법으로 등장하고 Verdichtung  dichtung('시의 창작'이라는 뜻)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압축은 선천적이고도 고유한 시의 기능으로 간주된다.

전치(Verschiebung)는 환유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작용의 방향전환과 관련이 있다. 환유는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무의식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기도 하다.(<에크리, 511;160>)"(110) 

 

4. 무의식이 의식적인 생각, 말, 행동 등에 가하는 압박에 대해서, 라캉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무런 중단 없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캉에게는 마음의 수력학이 없다. 무의식의 압박은 하나의 의미화 질서와 다른 의미화 질서 사이에서 벌어지는 간섭의 방식으로 일관되게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정신분석적 면담에서 도움이 되는 생물에너지학적인 힘(인간이 내뱉는 말의 '뒤'와 '밑'에 숨어 있는)도 없5고, 기표들의 미친 듯한 행진을 마침내 종식시킬 베일 속에 감추어진 대기중의 기의(veiled signified-in-waiting)도 없다.

"무의식은 근원적인 것도 아니며 본능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이 알고 있는 근원적인 것이란 기표의 근본에 불과하다."(<에크리, 522;170>) ...... 의미화의 마지막 초소를 넘어서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경계가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공허-프로이트를 포함하여 많은 정신분석 저술가들이 본능과 생물학적 필요라는 용어를 애타게 중얼거리면서 달아나려고 했던-가 있다. 이것이 라캉의 주장이다.(112)

 

5. [라캉은] 기의=억압된 기억이라는 등식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만약 억압된 것에 이런 종류의 권위를 부여한다면 그의 'S/s' 연산식에서 기의가 오히려 윗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은유와 환유는 의미화 연쇄에서 연쇄고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양태이고 또 구조와 일관성을 제공하는 원칙이지만, 기의는 모호함과 (환자의) 주관적인 힘을 위해 작용하는 비밀요원인 것이다.(114)

 

5-1. 기의는 아주 심각한 제한을 받으면서 이론의 장으로 들어오게 된다. 대체로 보아 기의는 기표가 성공적으로 축출해 버린 것으로 등장하고, 미끄러짐(라캉이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용어. 소쉬르에게 의미작용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안정된 결합이지만, 라캉에게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결합이다. 라캉은 소쉬르의 연산식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 가로줄을 그려 넣는 것으로 이를 상징화했다. ...), 굴러내림, 망설임, 도망침, 끝나버림, 분산됨, 사라짐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5-2. 기표와 기의의 뒤얽힘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만들어낸 용어는 ...... 고정점(points de capiton)이라는 것 ...... 만약 이 고정점이 너무 빡빡하면 개인은 절망이나 자기희생으로 내몰리게 되고, 너무 헐렁하면 광기의 위협을 받게 된다. "나는 자세한 수치는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표와 기의를 일치시키는 근본적인 고정점을 최소한 여러 개 성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리하여 그 사람은 정상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고, 만약 그 고정점이 전혀 확립되지 않거나 또는 그 고정점이 뜯겨 나간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는 것이다.<세미나 III, 304>"

그러니까 자살과 정신병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일상적인 삶의 구도가 잡힌다는 얘기이다.(115)

 

6. [라캉이 보기에]정신분석 운동은 ...... 자아가 개인적인 자기동일성의 터전이라는 주장을 터무니 없이 우대했다. 정신분석은 개인의 내면에서 영원히 벌어지고 있는 파편화와 투쟁을 보았으면서도 일부러 그 특징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 그래서 정신분석은 '자동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자아의 사회학적, 시적 기능을 철저히 신봉하는 올바른 사고방식'(<에크리, 523;171>)이 되어 버릴 위험에 빠져 있다고 라캉은 주장한다. 그리고 자아를 강조하는 자아심리학에 대하여 라캉은 아주 강력히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 '기표'-라캉이 특별히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 것-는 여러 세기에 걸쳐 누적되어 온 쓸모 없는 심리학적 추측을 싹 쓸어내는 새 빗자루가 되었다. (116~117)

 

@근대철학의 회의적 경험론자들로부터 시작되는 '자아심리학'의 구조물이 라캉에 와서 심대한 반발에 부딪히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흄은 그가 상정했던 경험적 지각의 '다발'이 관념을 형성하는 과정과 필연성에 의문을 던졌었다(이 아포리아는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극복된다고 철학사가들은 대체로 말하고 있다). 불교철학적으로도 이러한 기표-기의 관계는 때로는 부정적(라캉식으로 '미끄러짐'의 관계)으로 [중론]에서 거론되며, 때로는 교학적으로 중요한 붇다의 언설일 경우 차라리 더욱 의무적인 어조로 긍정된다(예를 들어, '이 경 중 사구계 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 운운<금강경>). 

 

6-1. '주체'는 더 이상 구체적인 성질을 갖춘 실체도 아니고, 나름대로 차원을 소유한 고정된 형체도 아니고, 경험에 의해 마련된 다양한 내용물을 기다리는 컨테이너도 아니다. 주체는 언어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며 곡절, 수사, 굴곡의 행진이다. '기표는 또 다른 기표로 주체를 드러내 주는 것'(<에크리, 819>)이라고 라캉은 여러 해 뒤에 말했다.(118)

 

6-2. 프로이트 이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실존적 명제를 정립시킬 단 하나의 안정된 '생각'(자아)은 이미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리고 라캉 이후 적합한 정신분석 명제를 내세우게 해 중 단 하나의 의미차원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기토는 단단히 거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조건이나 명제적 구조가 다음과 같은 풍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 내가 내 생각의 노리개인 곳에서는 내가 없다. /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의 존재를 생각한다.<에크리, 517;166>"(119~120)

 

7. 라캉이 재해석한 소쉬르의 용어(기표)는 모든 다른 언어의 문턱에 서서 이론가들을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일단 기표가 조화시키는 기능을 완수하면, 그것은 새로운 풍성한 의미-또는 색채의 풍성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를 정신분석의 언어 안에서 혹은 너머에서 생겨나게 해 준다. 분석자는 말의 세계에서 끝없이 방랑하는 기사가 되고, 그는 어디를 가나 무의식의 새로운 모델이 손짓하는 광경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22)

 

8. [라캉은 '기표'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호주체성의 변증법을 구조화하기 위해] 헤겔을 펼쳐 들었고 거기서 '타자'(Other)라는 개념을 찾아냈다.(123)

 

8-1. 이 헤겔이 [에크리]의 논의에 두 가지 뚜렷한 방식으로 도입된다. 첫째, 그는 개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욕망하는 거래에 대해서 많은 멋진 진술을 제공한다. 둘째 다른사람들이 주체의 형성에 처음부터(ab initio) 작용하는 구성적 역할에 대해서 진술한다.(123~124)

 

8-2. "...... 인간의 욕망은 다른 사람의 욕망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욕망의 대상을 입수하는 열쇠를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첫 번째 욕망의 대상이 남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에크리, 268;58> (124)

이러한 인용문에서 보면 주체와 타자의 만남은 언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응시와 반대응시 사이에서 벌어진다.

 

8-2-1. "그러므로 타자는 그(타자)와 함께 말하는 내가 구성되는 장소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하나의 대답이 되고, 그 말을 들어주는 타자는 내가 말했는가 혹은 말하지 않았는가를 결정한다.<에크리, 431;141>" 

"타자는 그것(타자)이 없으면 거짓말도 가능하지 않을, 내 속에 있는 진리의 보증자이다.<에크리, 524;172>"

말-진실된 혹은 거짓된 진술, 질문, 대답, 이름 등-은 이제 욕망의 필수불가결하고 필연적인 수단이 되었고, 주체와 타자가 서로 참여하여 서로에게 압박을 가하는 장소가 되었다.(125)

 

8-2-2. 그는 언어의 구조와 주체의 구조는 서로 친족관계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 두 구조는 차이의 언명이다. 두 구조는 중심이 없다. 두 구조 속에서는 끝없는 전치가 계속된다. 두 구조는 포화점이나 혹은 정지점이 없다.(126)

  

8-2-3. 언어는 물론 추상적인 체계로 간주되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내용이 배제된다. 그러나 언어가 말의 형태를 취하는 순간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특성을 다시 취하게 된다. 그것은 '제3의 장소'(<에크리, 525;173>)가 되는 것이며, 주체와 타자가 만들어지고 용해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무한히 유동하는 공간이 된다. (127)

 

8-3. 타자는 주체와 '그의' 욕망  대상 사이에 늘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선다. 타자는 그 대상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대상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타자가 욕망의 대상을 늘 바꾸어 놓기 때문에, 욕망은 결코 흡족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언어가 욕망의 토양-욕망이 생겨나고 변모하고 왜곡되는 최고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타자는 언어를 행동의 들판으로 삼는다. ...... 타자는 기표를 영원히 떠돌아다니게 만든다.(128~129)

 

8-3-1.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또 무엇을 하든지 기표는 이미 거기에 있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이 행사하는 힘 뒤의 힘이다. ...... [라캉의 이런 식의] 주장은 그를 위험스러울 정도로 언어의 근본주의자로 밀어 붙인다.(130)

 

9. [라캉-프리자파티의 메세지에서]'지계, 보시, 자비'는 건설적인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 세 가지 분석적 지침을 제시한다. 가령 이렇게 의미를 풀어볼 수 있다. "당신(분석자)은 언어가 정신분석적 면담에 가하는 압박의 냉혹한 틀을 잘 알고 그것을 지켜라(지계).", "당신은 환자에게 그의 소원과  일치되는 말을 해 주어야 한다(보시)." "당신은 그(환자)에게 자비를 가지고 대해야 한다."(133)

 

10. 라캉의 개척자적 논문["로마강연"]에서 내린 결론은 역시 라캉답게 애매모호하다. 상징계는 한편에서는 인간의 경험을 미리 규정하고 조직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경험을 취소시킨다. 그것은 의미를 창조하는가 하면 의미를 철수시킨다. 그것(의미)에 활력을 주는가 하면 굴욕을 준다. 라캉이 말하는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은 아주 위험스러운 조건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라캉이 이 표어에 갖다붙인 폭넓은 교훈은 종종 대단히 불편한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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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8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omadia 2007-01-28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렇습니다.
 
프랑스 비평사 (근대 / 현대편) 김현 문학전집 8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평점 :
품절


김현, [프랑스 비평사-현대편], 문학과 지성사 1981;1988, pp129~141

3장 바슐라르의 문학 비평
보유 3:

 

"바슐라르와 파농의 두 문단의 설명"

 

[프랑스 비평사]의 바슐라르를 위한 이 장의 보유를 통해 김현은 스위스 정신분석가 드조아이유에 대한 바슐라르와 파농의 견해를 비교함으로써 억압(식민)과 해방에 관한 두 사상가의 동형적이지만 이질적인 시각을 드러내고자 한다.

 

"두 사람의 주목할 만한 사상가들이 드조아이유 Robert Desoille의 상승 심리학 Psychologie ascensionnelle을 어떻게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두 가지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하나의 생각이 어느 정도까지 똑같은 논리성·타당성을 갖고 생생하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색가는 그가 아무리 보편적 초월적 가치를 논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역사적 정황에 갇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130 밑줄은 필자)

 

김현의 이러한 의도는 필자가 보기에 상대주의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상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발본적인 '동형성'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나중에 김현이 말하듯이 억압 또는 식민 상황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므로, 이 보유는 김현 비평의 어떤 관점, 즉 '자유'와도 상응하는 것이라고 보인다(→김현의 다른 비평과 비교).

 

바슐라르 문학비평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정신분석의 적극적인 도입이다. 특히 상상력의 창조적 역동성에 대한 이론은 프로이트를 거치면서 더욱더 풍성해 진다. 그런데, 바슐라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정신분석의 억압의 의식화를 통한 '치료'가 아니라, 억압을 상상력을 통한 새로운 이미지로 '승화'시킴으로써 그 당사자가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반해 파농은 정신분석이 가지고 있는 유럽중심주의, 식민주의를 간파하면서 드조아이유의 '상승의 심리학'을 비판하는데, 그러면서 그러한 식민주의의 극복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면, 김현이 직접 비교하려는 바슐라르와 파농의 두 문단을 제시해 보기로 하자.

 

"무의식적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존재에게 드조아이유의 방법은 고전적 정신분석이 그러하듯 '벗어남'의 방법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발동을 건다. 고전적 정신분석이 거칠고 적응이 잘 안 된 감정을 치유할 프로그램을 짜지는 않고서 '옛날의 어떤 감정을 현실화함으로써' 콤플렉스를 푸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비해, 드조아이유의 정신분석은 승화를 위한 상승로를 준비함으로써, 정의성(情意性)의 도덕화의 유형 자체인 '새 감정을 환자가 살게 함으로써' 승화를 최대한도로 실현한다. 고전적 정신분석은 인간성이 처음 형성될 때에 생긴 난점들을 분석한다. 그것은 과거에 충족되지 아니한 욕망을 둘러싸고 결정화된 것을 축소시켜야 한다. 종합적 심리분석이라고나 불러야 할 드조아이유의 정신분석은 새롭게 인간성을 형성하기 위해 종합의 조건을 특히 결정하려 한다. 인간성에 덧붙여지게된 감정상의 새로움, 우리가 보기에는 상상력에 고유한 기능인 새로움은 잘못 이루어진 과거를 스스로 교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드조아이유는 정신분석자와 교육자는 한 존재의 심리적 미래를 방해하는 것을 치워주어야 한다는 것을-하긴 이 점에서 정신분석의 작업이 유용하다-이해하고 있으나, 무거운 과거의 무게에서 벗어난 존재에게 미래의 형태를 가능한 한 빨리 제시하는 게 좋다.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속내얘기를 하게 하는 걸 꺼려해서 흔히 드조아이유는 상승의 이미지, 미래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바로 시작해 버린다. 확정되어질 미래에 대한 빠른 혹은 즉각적이기까지 한 암시가 없으면, 오랫동안 자신의 잘못과 과오 때문에 고통을 받아온 존재는 자기의 고통에 다시 사로잡혀 엉망인 삶을 계속할지 모른다. 정신분석의 치료를 받기 전에 그는 무거운 영혼이었다. 대번에 가벼운 영혼이 되지는 못한다. 쾌락이 자연스럽고 쉬운 것이라면 행복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사람을 가볍게 만드는 가치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이다."(130, 바슐라르, [공기와 꿈 L'air et les songes], 1943, pp131~32)

 

"유럽, 즉 문명화되고, 문명화되어가는 나라에서 니그로는 죄의 상징이다. 열등한 가치의 원형은 니그로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다. 똑같은 이율배반이 드조아이유의 백일몽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를테면 저급하고 하등한 성격을 표상하는 무의식은 검게 채색되어 있다는 사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장난이 아니라} 작품 속에의 상황은 보다 명백하다. 드조아이유에게 있어서 문제는 항상 상승하느냐, 하강하느냐이다. 내가 하강할 때 나는 미개인이 춤추고 있는 동굴과 암굴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로 하자. 예를 들면 드조아이유가 묘사하고 있는 백일몽의 진찰 도중에서 우리의 동굴 속에 있는 갈리아인은 아주 단순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동굴 속에 있는 뭔가 한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준다. 아마 우리들의 선조 갈리아인일 것이다 ...... "(131, 파농,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김남주 역, 청사, 1978, p189)    

 

김현이 인용하고 분석하는 이 두 문단에서 우리는 드조아이유를 바라보는 두 사상가의 심각한 관점의 차이를 처음에 인식할 수 있다. 바슐라르의 경우 드조아이유의 정신분석을 인간론적인 시각에서 긍정하고 있으며, 파농의 경우 정치적 측면에서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드조아이유가 행하는 정신분석 치료는 바로 '정의성의 도덕화'를 달성해 낸다. 그것은 고전적 정신분석이 억압의 내적 현실을 환자로 하여금 '괴롭게'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콤플렉스를 치료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상상력을 통한 '이미지'를 살게 만드는 방법이다. 김현은 바슐라르의 이러한 시각을 드조아이유의 '상승/하강'의 이항대립을 통해 근거 짓고 있다.

 

"바슐라르가 드조아이유에게 주목한 것은 새 이미지를 만들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모순의 과정이다. 새로운 상승의 이미지로 자신을 가득 채울수록, 무거운 과거의 짐에서 그는 자유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가득 채울수록 가벼워지는 사람! 바슐라르는 그 무거워질수록 가벼워지는 것에서 공기의 상상력의 모습을 본다. 그의 공기의 상상력은 새로움으로 잔뜩 무거워져서 가볍게 날으는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은 가볍게 날으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드조아이유가 환자들에게 미래의 밝은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살고 싶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듯, 혹은 그 역이듯, 바슐라르는 밝은 이미지를 낳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상상력을 행복하게 만든다."(134)

 

상상력이 곧 의지를 불러 일으키고 그 역도 타당하다면, 바슐라르의 드조아이유 해석은 스스로의 역동적 상상력 이론과 그로부터의 행복론에 대한 전거가 된다.  

 

이와는 달리 프란츠 파농에게 드조아이유는 그 이론 전체가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그것은 드조아이유의 정신분석에서 "상승은 하얗게, 하강은 검게"(135) 나타난다는 사실에 근거가 있다. 그러므로, 파농에게 드조아이유의 상승과 바슐라르의 상승으로 인한 행복한 이미지는 유럽/백인들에게만 해당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이 틀림없다. 파농에게 중요한 것은 '상승/하강'의 이항대립이 아니라 '문명/미개'의 이항 대립과 그것의 이데올로기 효과인 것이다. 이 부분은 바슐라르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바슐라르의 경우 '상승/하강'은 인간의 상상력이 삶에 작용하는 양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파농은 '상승/하강'을 사회적인 작동 메커니즘의 한 가운데 던져 놓는다. 그래서, "파농이 보기에는 드조아이유의 이항대립은 차원 높게 극복되어야 한다."(137) 이 극복의 열쇠는 바로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이다. 파농은 드조아이유를 해석하면서 흑인과 제3세계 민족주의를 실천으로 추동하고자 하는 정치적 슬로건을 제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김현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차이를 이렇게 해명한다.

 

" 바슐라르는 프랑스 내륙에서 태어나 식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그리고 유럽 중심주의를 진리로 받아들인 1차 대전 이전에 중등교육을 받은 사상가이며(1차 대전이 시작될 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파농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서인도 제도에서 태어나 식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유럽중심주의의 쇠퇴를 목격하며 배운 사상가이다(2차 대전이 시작될 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약 40년의 시대적, 지역적 차이가 그 이론적 차이의 뒤에 숨어 있다. 또한 그 차이는 문화의 중심에 있는 자와 주변에 있는 자의 차이이다 ...... 문화의 주변에 있는 지식인에게는, 문화의 중심이 강제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이 주변인의 토착적 성격을 억누른다는 느낌 사이의 갈등이 절대적이다. 파농식으로 설명하자면 그는 중심의 지식인을 대할 때와 주변의 토착인을 대할 때에 아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중인간이다. 바슐라르는 중심의 지식인으로서 그 중심의 인간관, 세계관을 더욱 철저힌 밀고 나가려 한 것이고, 파농은 그 이중인간의 찢김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138, 강조는 필자)

 

꽤 오랫 동안 프랑스에 유학했던 김현 자신의 경험적 진술이 상당히 엿보이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중인간'이라는 테제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파농의 것이면서도 김현의 것이다. 그리고 유럽중심주의는 바슐라르에게는 '진리'지만 파농에게는 '쇠퇴'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파농의 시대는 아직 유럽의 자장안에 있다. 이 조건 속에서 바슐라르는 민족적 일관성이 가능하지만, 파농에게는 이중적 태도만이 가능하게 된다. 더 비극적인 것은 파농이다. 그는 이중의 억압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 내부의 '찢김'과 함께, 외부의 '식민상태'가 다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현은 이 차이를 공통분모로 환원한다. 그것은 '사회/정치'의 누락을 통해 이루어진다. 김현의 말을 들어 보자.

 

"차이를 넘어서서 그 둘을 일치시키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억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이다. 바슐라르에게 억압적인 것은 미래로 향한 새로운 확장을 불가능하게 방해하는 이미지들이다. 파농에게 억압적인 것은 문화적 강제에 의한 문화적 이미지들이다. 바슐라르의 살아 있는 새로운 이미지는 파농의 새 문명의 이미지와 구조적으로 동형적이다."(138, 강조는 필자) 

 

사실상 바슐라르가 상정하고 있는 인간은 억압적 이미지를 넘어서기 위해 상상력을 단련하는 '개인(individual)'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파농에게 그것은 문화라는 집단적 이미지를 살고 있는 '사회적 개인성(social individuality)'이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는 '구조적 동형(homology)'이 아니라 '구조적 유비(analogy)'만이 가능하다. 파농의 억압은 바슐라르보다 더 거대하며, 발생적인 계보를 달리한다. 그것은, '사회기계' 속에서 작동하며, '혁명기계'를 통해 해결 가능한 어떤 것이다. 그러나, 바슐라르에게 억압은 '상상력'과 '이미지'의 정신분석이며, 드조아이유가 갇혀 있었던 방식 그대로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집착하게 된다. 김현은 구조적 동형성을 강제하기 위해 파농의 '사회/정치'를 누락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슐라르가 이 방식으로 더 멀리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바슐라르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해방인 것이며, 파농에게도 그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해방은 상상력의 반경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억압에 대해 혹독하다. 본질적으로 상상력이 반보수적이라면, 바슐라르의 개인들은 필연적으로 보수화시키는 모든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문학비평도 그 하나다.

 

"이 행복한 이미지를, 독자는 그것에 삶을 부여한 활동적 상상력의 방향에서 그것을 놀이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 이미지들은 유도적 삶, 유도된 삶의 도식이다. 상상력의 재능을 갖고 있는 작가는 그때 독자에게 긍정적 초자아가 된다. 미적 상상력의 초자아는 만일 시를 쓰면서 그걸 파악하자면, 유용적 합리적 교육 때문에 우리에게서 지나치게 제외된 방향을 정하는 힘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 시적 초자아는 문학비평이 사로잡고 있는 것을. 그 초자아가 억압자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문학비평이 거의 유보 없이 리얼리즘과 손을 잡고 모든 이상화의 시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놀랍지 아니한가. 승화를 돕기는 커녕, 문학 비평가는 쟝 폴랑이 잘 보여준 대로 그걸 방해한다. 이상적인 것의 억압, 억압의 현실에 지나지 않는 현실에 의거해 있다고 믿는, 또한 억압의 체계에 다름 아닌 이성에 의거해 있다고 믿는, 억압을 넘어서서, 그러므로 긍정적 시적 초자아, 넋을 불러내 자기의 시적 운명, 자기의 공기의 운명을 살게 하는 초자아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139, 강조와 밑줄은 필자, 바슐라르, 같은 책, 145)

 

바슐라르의 이 진술에는 문학적 관점에서 개인의 상상력을 옹호할 수 있는 다수의 코드들이 등장한다. '행복한 이미지들을 통한 놀이'라는 진술인데, 이것은 얼마 뒤에 나오는 '유보 없는 리얼리즘'과 대척점에 선다. 그와 함께 리얼리티를 벗어난 곳에 상상력이 있다는 바슐라르의 이론이 '놀이'라는 말을 통해 드러난다. 다시말해, 바슐라르에게 상상력은 '놀이'며 그것은 '행복한 이미지'를 가지고 '논다'. 놀이는 아마 '해방의 이미지'와 통할 것이다. 따라서,  해방된 개인들은 놀이한다. 그리고, '긍정적 초자아'는 결코 이 놀이를 방해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을 부박한 현실을 '승화'시킴으로써 북돋워 주어야 한다. 이 방면에서 '놀이'와 '긍정적 초자아'는 프로이트적인 '초자아'의 탈코드화다.

 

이러한 것을 김현은  알고 있다. "그 시적 초자아는 프로이트적 엄격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 초자아는 행복한 이미지의 생산성을 받아들여 그것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것은 독자에게 새 삶을 유도해 준다."(139)

 

이렇게 보았을때 우리는 김현이 해석하고 있는 드조아이유에 대한 바슐라르와 파농의 관점은 서로 겹치면서도, '동형적'이지 않다고 해야 한다. 만약 김현이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파농의 정치철학을 충분히 고려했다면, '억압/해방'이라는 이항대립이 단순히 속류적인 형이상학적 대립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개인성과 사회성의 지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현의 시대(이 책을 쓸 당시-1981년)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순진하지만 충분히 그럴 듯한 가정을 허용한다면, 또 그가 이 책 전체의 개정판 서문에서 80년 봄(광주무장투쟁)과 87년 가을(789 노동자 대투쟁)을 떠올리며, "특별한 날짜를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싶다"고 회한을 섞어 말한 것을 정말 '충분히' 고려한다면, 우리는 김현의 다음과 같은 평가를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의 이상적인 것을 억압하는 합리적 문학 비평가는 파농의 문화적 강제를 활용하는 식민주의자와 구조적 동형이다. 또한 바슐라르의 열린 상상력은 파농의 열린 민족주의와 구조적 동형이다. 바슐라르의 열린 상상력은 파농의 열린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가능케 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141, 강조는 필자)

    

언어는 얼마나 '노예적'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진실은 그것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가!  반어든 유비든 ... 

 

검열은 지하의 격정을 유발하지만, 보수주의는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 Gilles Deleu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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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바슐라르, 파농 서지(Bibliography)-이 논문 관련

 

1. G. Bachelard, L'air et les songes, Jose Corti, 1943.

2. 프란츠 파농,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1952), 김남주 역, 청사, 1978.

3. __________,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1961), 박종렬 역, 광민사, 1979.

 

 

 

 

김현, [프랑스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 1981;1988

제4장

 

"블랑쇼의 문학비평" 

 

프랑스 사상계에서 '은둔자'로, 그리고, 독특한 문체와 비평시각으로 여타의 프랑스 비평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사상가가 바로 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 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 사상계의 유행에 거의 휩쓸리지 않았으며, 이러한 스타일은 역으로 초현실주의와 다다, 그리고 신소설에 이르기까지 그 '유행'의 중심에 일정한 자장을 행사하게 하였다.

 

소설가 또는 비평가로서 블랑쇼의 시작은 말라르메에 대한 숭배다. 그리고, 회화에 있어서 세잔, 음악에서 드비시를 최고의 예술로 상정한다. 아니, 그는 그 이상으로 이 작가들 이후에 예술은 방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단지 소설가와 비평가로서 블랑쇼의 영향력은 사뮤엘 베케트로의 길을 준비하고 있지만, 이러한 예술 전반에 대한 이해로 인해서  그는 때로 현대예술과 문학에 가장 근본적인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말라르메와 세잔, 드비시 이후의 현대 예술이 어떻게 방계에 불과하게 되었는가 또는 그가 자주 인용하는 헤겔의 "예술은 오늘날 과거의 물건이다"(145)와 같이 그렇다면, 왜 이토록 많은 작품들이 말라르메와 세잔에서와 같이 예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가라는 것을 해명하고자 한다. 예술이 과거의 것일 뿐이라면, 헤겔 이후의 예술은 '죽음' 그 자체인가?

 

블랑쇼에게 그 현대 예술의 '죽음'은 1850년대 이후에 시작되어 줄곧 '다양성'이라는 괴물에 의해 점령당해 왔다. 연원은1848년 혁명에 있으며, 그때 비로소 예술에 대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가치 지배가 끝장이 난다. 갑작스러운 중심의 해체, 일원성이 분해되는 역사적 시점에서 현대 예술의 다양한 시도들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그러나, '중심'을 새로 새우는 작업이 아니라, 끝없는 방황의 시작이다.

 

"망각, 오류, 방황한다는 불행은 역사의 한 시기에 연결될 수 있다. 그 시기란 슬픔의 시기인데 거기에서는 두 번이나 신들이 부재한다. 한 번은 이미 신이 없으니까, 또 한번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텅빈   시기는 오류의 시기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현존에 대한 확신이 우리에겐 결핍되어 있으며, 진정한 여기 ici 의 조건들도 그러하기 때문이다."(147, 밑줄은 필자, [공간], 335~36)

 

이미 없는 신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신의 시대, 그것은 유럽 중심주의의 폐기다. 그런데, 이러한 '오류의 시기'에 예술이 고유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블랑쇼 예술론의 시작이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 본다.

 

"시인의 특성, 힘, 위험은 신이 없는 곳에 그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진실이 결핍된 지역에 말이다. 슬픔의 시기는 이 시기, 예술에 고유하며, 신이 없고 진실의 세계가 흔들릴 때 작품 속에 나타나는 시기이다. 작품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탄식 속에 외양의 밑에서 사라지는 것, 사라짐의 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 근본적인 전복의 위협 아래 완수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슬픔의 내면성이다. 그는 부재로 텅빈 시기를 산다. 그 속에서 오류는 방황의 깊이가 되며 밤은 다른 밤이 된다."(147, 강조와 밑줄 필자, 같은 책, 같은 페이지)

 

이것은 아도르노 미학에서 말하는 그 '전복적 힘'과 상동적이다. 그런데, 이 전복의 위협은 밤을 낮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밤'이 된다. 그것은 작품은 역사 속에 '참여' 하면서 대낮의 태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외부로 물러남으로써 '참여'를 완성한다는 역설에 의해 설명된다. 상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블랑쇼에게 이러한 인식은 매우 확실해 보인다. 그러므로, "가장 비참여적인 문학은 동시에 가장 참여적인 문학이다"(148)라고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진술이 싸르트르에게 문제가 되었음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에게는 교훈이었으리라. 바르트는 작품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솔직 담백하게' 고백한다. 이것은 블랑쇼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타당해 보인다.

 

이로써, 전복적 힘은 '부재'를 통해 자신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재의 공간은 작가의 언어가 상존하는 공간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힘'이 될 수 있겠는가? 블랑쇼가 말라르메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현의 설명을 들어 보자.

 

"블랑쇼는 흔히 말라르메의, 책이란 우리가 저자로서 우리 자신을 거기에서 떼어낼 때 비개성화되어 독자의 접근을 요청하지 않는다{149, 말라르메, 372}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때의 비개인성이란 개인적 일화의 부재, 고백적 속내얘기의 부재, 모든 심리주의적 관심의 부재를 뜻한다. 말라르메의 비개인성을 성적 외상에서 도피하려는 집념의 이상화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말라르메라는 개인의 내적, 심리적 갈등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비존재가 존재와 다르듯이 자신과 다른 전체를 만난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149)

 

여기서 '다른 전체'는 바로 말라르메의 언어다. 그것은 블랑쇼에게 극단적인 비개성으로 다가오는 '전체'며, '부재의 힘'의 알리바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말라르메가 언어에 부여하는 독립적, 절대적 존재의 공간, 비개성적 성격이다. 그 언어는 그것을 표현하는 자도 그것은 듣는 자도 상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말하고 쓴다. 그것은 일종의 주체 없는 의식이다."(149, 강조는 필자, [불꽃], 48)

 

이 '주체 없는 자족적 세계'가 바로 말라르메의 세계이며, 블랑쇼의 현대 예술 이해의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블랑쇼의 이해가 '작가의 죽음'이라는 심각한 주제를 제기하는 전제다.

 

"블랑쇼에게 있어,  책 livre은 작품 oeuvre 과 다르다."(149) 책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물리적 실재인데, 그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발설함으로써 작품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책은 발설하는가? 그것은 '영감 inspiration 을 통해 끊임없이 말함'(151)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것은 또한 현실적인 묘사의 말이 아니라, 암시적이며 시적인 말이다. 자연의 말 parole brute 이 아닌 시적 말 parole poetique,  이것을 통해 작가는 사물의 내면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그 사물의 내면은 언어와 관계할 때 황폐해지며 드러나는 것에서 좌절한다. 여기에 고통의 본질이 있다. 글쓰기는 이 고통의 인식에 의해 죽음과 관계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품을 통해 사물의 내면을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체없는 세계'다.

 

"둘 다 단호하게 원하나 그들이 원하는 것에 그들은 그들의 의지를 모르는 어떤 강요에 의해 결합된다. 둘 다 능숙함에 의해 가까이 가야 하는 한 지점을 향하지만, 그 지점은 그런 능숙함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온갖 성취와 무관하다. 둘 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잘못함으로써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두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결정적인 도약이 개입된다. 그 도약 saut 이란 죽음에 의해 우리가 미지의 것으로 넘어가며 죽은 후에 잴 수 없는 저편으로 가게 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죽는 행위 그 자체가 그 도약이라는 뜻에서이다. 죽는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뒤집음을 포함하는데, 그것을 통해 내 힘의 극단적인 형태였던 죽음은 시작하고 끝장을 내는 힘 밖으로 나를 내던지면서 나를 포기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 없는 것, 나에게 힘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 모든 가능성이 제거된 것이 된다."(151, 밑줄은 필자, [공간], 129~30)

 

여기서 '둘 다'라는 것은 작가와 작품일 수도, 작가와 독자일 수도, 또는 독자와 작품일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 만나야 하는데, 처음에 '책'으로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 '작품'을 통해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조우는 '작품'의 수준에서는 단지 '가능성'의 영역에서 일어날 뿐이다. 그들은 항상 뭔가를 잘못한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 이 '둘'은 항상 가능성조차 벗어나서 존재의 희박함 속으로, 또는 '죽음' 속으로 '도약'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블랑쇼가 뜻밖에 불교적인 '열반'을 말하고 있는 듯이 필자가 느낀다면 너무 멀리 가는 것인가? 차치하고, 여기서 '둘'은 비로소 '화합'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부재'를 통해서다. "글 쓰는 것은 그렇다면 편안하게 죽기 위해서이다."(151, [공간], 110) 그러나, 끝없는 말 속에서 포착하는 '사라짐', 그리고, 새로운 '접근'은 필연적으로 '방황'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소외된 세계에 집착하여 자신이 아니라 '그'를 존재하게 한다.

 

글쓰기가 이러하다면 책읽기도 마찬가지로 독자를 '죽음'과 '부재'로 인도할 때 성공적이다. 그것들이 바로 작품의 진정한 '내면성'이기 때문에, 책읽기는 그 내면성을 포착하고 모아야 한다. 뜻 sens 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의 저편과 이편에 놓인 것.

 

"문학적 책읽기란 의미에서 책읽기란 순수한 이해의 움직임이 아니라 그것의 저편에 혹은 이편에 있다 ...... 그것은 작품 자체에서 오는 침묵의 호소며 독자는 거기에 대답함으로써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호소에 접근해가는 공간이 책읽기이다."(152, [공간], 261)

 

"책읽기 책보기는 매번 내용의 무게와 전개된 세계의 다양한 길을 넘어서서 작품의 유일한 내면성, 작품의 계속적인 기원의  뜻밖의 나타남, 그 전개의 비상을 모은다."(152, [공간], 278)

 

대답함으로써만 들을 수 있는 작품의 호소는 그러나, 독자의 부재를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독자는 작품 속으로, 그 가능성의 사라짐 속으로 진입하면서 스스로도 사라진다. '공중에 매달린 작품이라는 종에 내리는 눈처럼'(152, [로트레아몽과 사드]) 독자는 작품을 체험하면서, 종소리를 울리면서 사라진다. 체험의 소리는 따라서, '판단'을 항상 유보한다. 그것은 책읽기의 잘못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항상 '판단'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이로써, 블랑쇼는 애초에 제기했던 '주체 없는 의식'이라는 자신의 주제를 재발견한다. 글쓰기는 이렇게 모든 주체가 사라진 상태에서의 '창조'며, '창조의 밤'이다. 그리고, 그 사라진 주체를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니라, '예언적 고립/고독'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주체성이지 않은가?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상당히 성서적이며 복고적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은 없다. 블랑쇼는 스스로가 붕괴되었다고 느끼던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또다시 그 신화를 재창조하려는 것인가? 김현도 어떤 설명을 해 주지 않는다. 문학의 도구성을 극복하고 주체없는 문학/예술의 창조성을 획득했음에도 블랑쇼에게 현실을 근본적으로 새로 규정짓는 힘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싸르트르의 해석처럼 블랑쇼는 수단이 목적을 흡수한 시대에 사물의 내면성을 통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자 한 것일까?(154) 그렇지만, '내면성'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애써 찾은 열쇠로 문을 열고 벽만을 발견'(154)하는 좌절은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김현이 싸르트르의 예를 빌어 "그 시대에 저항하는 것은 그 무도구성을 받아들이고 사물의 내면성에 다다른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구적 삶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 환상은 전반적 현실이 되는 것이다 ...... 블랑쇼에게 있어 현실 세계에서 잉여로 존재하는 것 같은 그 환상은 현실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킬 문화적 힘이다"(154)라고 말할 때, 그 '문화적 힘'의 '전복성'이 정말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글쓰기와 책읽기가 주체를 무화시켜 가는 과정이라는 블랑쇼의 전제는 그 상황을 해결할 그  '전복성'의 주체마저 '미리' 무화시키는 것은 아닌가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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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의 문제들 1.

토도로프 Todorov 의 블랑쇼 비판 : "그런데 타자의 이타성을 인정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그가, 왜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만 시선을 보내는 것일까? 그가 소설을 '꽉 막혀버린 예술'이라고 선언하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소설이 새롭고도 놀라운 변화를 이룩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왜 그는 못 본 것일까? 거기에서 소설은 자기 기원만을 찾는 자동사적 언어와는 거리가 멀다."(155, 토도로프, 140)

 

여기서, 김현은 토도로프가 블랑쇼의 문학이론을 '유럽중심주의의 한 극단적 표현'으로 보았다고 전제하고, 제3세계(아마도 김현이 속한 남한 사회도 포함하는)의 예술가들에게 이중의 성찰을 준다고 한다. 1)블랑쇼의 문학이론의 한계와 2)새로운 문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 내가 보기에 토도로프는 블랑쇼가 무화시킨 '주체성'을 유럽 외부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면 타당할 것이다. 만약, 이데올로기적 독법에 의해 블랑쇼를 바라본다면, 김현의 두 가지 성찰은 지나치게 손쉽게 해결될 것이지만, 두번째 성찰은 이데올로기 독법의 한계 밖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문학'이란 '뚜렷한' 주체성 없이도 생산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차라리 그런 문학은 새로운 주체성과 '함께'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것은 확정되지 않은 과정 안에 있다.

 

@@ 김현의 문제들 2.

블랑쇼의 문체 style 에 대한 세가지 이견들 : 1) 싸르트르-"그는 교묘하고 섬세하며 때로 깊이가 있다. 그는 말들을 사랑한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문체를 발견하는 일뿐이다."(156, 싸르트르, 142)

김현은 이러한 싸르트르의 평가를 "i) 블랑쇼는 아직 자기 문체를 갖고 있지 못하다"로 요약하면서, 싸르트르의 평가는 블랑쇼와 카프카와를 비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2) 풀레-"그에게 결여된 것은 문체를 발견하는 일 뿐이다라고 전에 싸르트르는 블랑쇼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보다 더 부정확한 것은 없다. 모든 문체적 특성은, 블랑쇼에게 지나친 어떤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체적 성질은 투명성을 제외하고는 조심스럽게 부재하고 있다."(156, 풀레, 154)

이것은,  ii) 블랑쇼의 문체는 의도적인 중성적 문체이다로 요약된다.

 

3) 마누엘 드 디에게즈-"블랑쇼 비평의 중요성은 그것이 완전히 문체의 문제에 매달려 있다는 데서 온다 ...... 블랑쇼의 장점은 문체라는 일반문제를 해결하려 애를 썼다는 데 있다."(156, 디에게즈, 154~5)

이것은, iii) 블랑쇼는 문체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비평가이다로 정리된다.

 

이 세가지 중, 김현은 디아게즈의 평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지움의 일이라는 블랑쇼 문체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글쓰기, 작품, 책읽기[책보기]의 개념을 깊은 의미에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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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1. '주체 없는 의식'의 문제

1-1. 싸르트르와의 link : "문학이 자기 자율성을 명백하게 의식하기에 이르지 못할 때, 그리고 일시적인 권력이나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하고 있을 때, 요컨데 문학이 자기를 무조건의 목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보고 있을때, 그러한 시기의 문학은 이미 독립성을 잃은 것이라고 나는 지적하는 바이다."(53, 상황 2, 190;247)

--->여기서 싸르트르는 블랑쇼와 비슷한 입장에 서는데, 그것은 문학의 도구화를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달리 말해서  대척점에 서는데, 그것은 도구화를 반대하면서 '자율성'을, 즉 주체성의 명확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1-1-1. "작자는 이와 같이 독자의 자유와 교섭하기 위하여 작품을 쓰며, 말하자면 그 작품을 존속시켜 줄 것을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그 밖에 자기가 독자에게 준 신뢰를 독자가 자기에게도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독자편에서도 작자의 창조적 자유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며,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독자측에서도 작가와 호응하는 호소를 해서 거꾸로 작자측의 자유를 환기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52, 상황 2, 101;92)

--->이 진술은 더 극적이다. 블랑쇼와의 이런 극적인 균열은 참여/비참여의 대립에서 연원하는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1-2. 바르트의 '백색기술'과의 연관성

 

2. '작가의 죽음'의 문제

2-1. 바르트, 데리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과의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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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블랑쇼 서지(Bibliography)

 

1) 비평집

    Maurice Blanchot, Lautreamont et Sade, Minuit, 1949.

    ________________, L'espace Litteraire, Gallimard, Idees, 1955.

    ________________, Le livre a venir, Gallimard, Idees, 1959.

    ________________, L'entretien infini, Gallimard, 1969.

    ________________, Comment la litterature est-elle possible,          ,1942.(Faux pass에 재수록)

    ________________, Faux pass,               , 1943.

    ________________, La part du Feu,                , 1949.

    ________________, Apres coup,              , 1983.

 

2) 소설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1941;1950.(김현은 이 책의 연구에는 초/재판의

                                  구별이 필요하다고 함-풀레는 재판을 걸작으로 평함)

  ________________, Aminadab,                  ,1942.(cf. 싸르트르, "아미나다브 혹은 언어체로 생각 되어진 환상적인 것에 대하여", [상황1],Gallimard, 1947.)

    _________________, Celui Qui ne m'accompagnait pas,                 , 1953.

 

3) 연구서/관계문헌

    Paul de man, "Maurice Blanchot," in Modern French Criticism, edited by John K Simonm,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2.

    Poulet, La conscience critique, Jose Corti, 1971.

    Mallarme, Oeuvres completes, Pleiade, 1945.

    Sartre, Situation 1, Gallimard, 1947.

    Picon, Ecrivain et son ombre, Gallimard, 1953.

    _____, [예술가와 그의 그림자], 유재호 역, 홍성사, 1985.

    Mannuel de Dieguez, L'ecrivain et son langage, Gallimard, 1960.

    Todorov, "La reflexion sur la littrature dans la France contemporaine," in La Poetique, n 38, 1979

 

 

 

 

@는 필자나 텍스트 상의 김현의 문제의식

 

 

김현, [프랑스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 1981;1988, pp158~197.

제5장

 

롤랑 바르트의 문학 비평

 

프랑스 문화의 전위로서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80)는 생전의 '대학비평'과의 논쟁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해체주의를 비롯한 포스트적 사조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가다. 김현은 [잠재태의 기술]이 쓰여지기까지 초기 바르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로 싸르트르와 블랑쇼를, 그 이후로 바슐라르를 들고 있다.

 

"싸르트르에게서 그는 언어란 순진한 innocent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이념적 색채가 가미된 것이라는 것을 배웠고, 다시말해 언어의 정치적 의미를 배웠고, 블랑쇼에게서 그는 침묵의 언어, 그가 백색의 기술 ecriture blanche 이라 부르는 것에 이르르는 문학적 모험의 의미를 배운다."(164) 

 

"내가 그[싸르트르-필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너무 큽니다. 당시 나는 그의 모든 작품을 읽었고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이환, 32)

 

그러므로, 바르트의 신화연구는 일정부분 싸르트르의 영향에 있었으며, 텍스트론의 중요한 모티브를 블랑쇼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자신의 비평, 특히 [미슐레 그 사름을]이 바슐라르와 관련되는 것에 대해서는 심난한 반응을 보인다.

 

"이 주제 분석은 바슐라르에게 빚진 게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바슐라르를 그때 안 읽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미슐레]를 바슐라르에 결부시킬 때마다, 항의조로 내세우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하지만 바슐라르를 읽었다면 왜 거부했겠는가?"(164, [텔 켈], 94)

 

심난하기는 하지만, 바르트 자신은 바슐라르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바르트의 이론에서 바슐라르를 읽어내는 김현의 시각은 전적으로 어긋났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잠재태의 기술]에 나타난 바르트의 개념에 대한 김현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1. 문학 litterature : 기본적으로 '문학'은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문학 언어의 역사, 문학 기호의 역사는 기술이 가능하다.

 

"i) 문학[이 말은 얼마 전에 생겨났다]이 결정적으로 객체로 확립된 것은 바로 그때이다[고전적 기술이 마멸된 1850년 경을 말한다-김현]. 고전주의 예술은 스스로를 언어체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언어체였고, 다시말해 투명성, 찌꺼기가 없는 유통, 두껍지 않고 책임감이 없는 보편적 정신과 장식적 기호의 이상적 일치였던 것이다. 언어체의 울타리는 사회적이었으며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19세기말에 이 투명성이 흐려지게 된다.[잠재태, 10; 이가림 1, 206]

 

ii) 문학은 내용과 개인적인 형식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환기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문학의 울타리인 것이며, 바로 그것에 의해서 문학으로 인정된다. 거기에서 사상, 언어, 문체와 관계 없이 주어진, 모든 가능한 표현 양태의 두꺼움 속에서, 의식적 언어체의 고독을 정의해야 하는 기호체가 생겨난다. 이 글로 씌여진 기호의 성화된 질서는 문학을 하나의 기호로 제시하며 그것을 역사에서 떼어놓으려는 경향을 띤다. 왜냐하면 어떠한 울타리도 영속성의 관념 없이는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가 아주 명료하게 움직이는 것은 역사가 거부된 곳에서이다.[잠재태, 9; 이가림 1, 205]" (165, 강조와 밑줄은 필자)

 

김현이 제시하고 있는 이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바르트가 다루고 있는 '문학'이 정확하게 1850년 이후의 현대문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문학이 '객체'로, 즉 기술 가능한 것으로 확립되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때 확립된 문학은 고적적 의미에서의 '투명성'을 제거하고, 정신과 기호의 일치를 버리게 된다. 그것은 이제 사회적이기를 그치고자 욕망하는 '언어체'가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에서, 사회에서 분리되었다고 스스로 규정하는 언어체는 문학의 내용과도 개인적인 형식과도 다른 '문학의 울타리'지만, 그 울타리가 견고하면 할수록 역사와 사회는 그 안에서 더욱 명료하게 움직인다. 이 모순적인 대상이 바로 현대문학이며, '제도문학'이다. 그래서, 비로소 문학은 '문학이라는 기호의 역사 histoire des signes de la litterature '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문학이 사회적 성격을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그러한 시도에는 부르주아적 초월관념의 이데올로기적 낙인이 더욱 쉽게 찍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과 기호의 일치는 그러므로, 문학이 스스로의 역사적, 사회적 성격을 인식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문학이 초월성 속에 머무르면 그것은 신비화된 문학일 뿐이며, 부르주아적이다. 고전적 투명성에 대한 적극적 회복을 바르트가 부르짖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향수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는 건 명료해 보인다. 후에 등장하게 될 그의 텍스트 비평은 이러한 문학의 탈신비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랑송류의 대학비평(박학비평)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2. 언어와 문체 : 바르트에 있어서 언어와 문체는 소쉬르의 랑그/빠롤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제도적이며, 문체는 무의식적이다."(166) 이렇게 보았을때, 바르트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고전적 투명성에 대한 즐거움에 천착하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물질화되는 문체는 그것이 아무리 역사와 사회에 무관심한 투명한 언어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신비화된 형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지드의 예를 들어 개인적 충동을 억제하고 단지 '기술-예술 art ' 에 전념하는 고전적 에토스의 전형을 발견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체가 전적으로 무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체는 결정적으로 언어와 다르지만, 그것은 작가의 은밀한 개인적 신화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사고의 수직적 차원"(166)이며, 성찰의 차원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그의 신화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기호학과 텍스트 분석에서 이 차원에 적극적으로 주목했는지는 의문이다. 이 방면에서, 바르트는 블랑쇼에게 빚지고 있지만, 블랑쇼가 작가에 천착해 가면서 그렇게 했다면, 바르트는 소쉬르의 업적에 기대 그것을 우회한다.

 

3. 기술 ecriture : 기술-글쓰기는 언어와 문체 사이에 있는 의도적 선택에 해당한다. 그것은 현격한 역사시기에서도 동일하게 관철될 수 있는 도구적 유용성이면서, 사회적 역사적 현실 일반에 고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체제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167) 있다. 체제로서의 글쓰기라는 이 주제는 그러나, 앞서 얘기된 바의 개인적 무의식으로서의 문체와는 다르다. 기술-글쓰기는 명확하게 의도적이며, 작가의 선택에 좌우된다. 정치적이든, 문학적이든, 철학적이든, 종교적이든 그것은 작가가 선택한 것이며, '창조적 상상력의 심리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언어와 문체가 대상 object 들이라면, 글쓰기는 기능이다."(166) 기능적 글쓰기는 이렇게 가능하다.

 

@글쓰기를 '기능'으로 보는 바르크의 시각은 글쓰기의 '상상력'을 축소시킨다는 혐의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구조주의적 시각의 공통항인 것 같다. 그렇다면, 주체의 상상력으로서 글쓰기는 바르트에게 불가능한가? 아니면 '사실'로서 주체적 글쓰기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비평'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각만을 '기능'으로 보는 것인가?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르트에게 문학 텍스트 생산은 사회적 기능연관 하에 놓여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전제는 필연적으로 주체의 '퇴화'를 그 분석 속에 설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 잠재태 degre zero : 바르트의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이 용어는 본래 음운론에서 나왔으며, 바르트의 백색기술 ecriture blanche 을 이해하는 데도 긴요한 개념이다. 잠재태라고 했을 때 바르트는 그것을 '무 neant' 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하는 부재 absence qui ' 로 이해한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지시한다. 의미론에서 이것은 시니피앙의 부재 속에서 시니피앙처럼 기능하는 것이다('잠재 기호 signe-zero). 논리학에서 이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A가 어떤 조건하에서 현실화될 때 그것을 '잠재상태 etat zero' 에 있다'고 말한다. 

 

이때, 잠재태의 기술 ecriture au degre zero 혹은 백색기술은 "i) 접속법, 명령법과 같은 법이 없는; ii) 판단이나 외침 속에 있으면서 그것에 관여하지 않고 그것의 부재로 이루어진; iii) 생동하는 말이나 문학어에서 벗어난 일종의 염기성의 언어 langage basique 이며; iv) 언어의 도구성에서 벗어난; v) 우아함이나 장식성에서 벗어난, 중성의 글쓰기이다."(167, 강조는 필자, [잠재태], 67 이하)

 

이러한 중성의 글쓰기는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일정한 사회역사적 배경을 가지는 것이 된다. 1850년대 프랑스에서의 부르주아적 가치의 붕괴와 "전체성의 상실"(168, 루카치)은 문학적 비극의 시작이다. 고전적 전체성, 사물과 언어의 일치관계는 여기서 그 확실성을 상실하며, 자연과의 연관성은 단지 잠재적일 뿐이다. 전체성의 상실이 나타나는 시점은 바르트에게 보들레르가 아니라 랭보 이후다. 이 시기에 작가들은 무너진 전체성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항상 실패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시기로부터 백색기술에 이르는 과정이 설정된다.

 

"그 발전의 국면은 다음과 같다. - i) 우선 고통스러운 섬세성, 불가능성의 고뇌에까지 이르는, 문학적 제작의 장인적 성격(플로베르); ii) 그 뒤 글로 씌어진 실체 그 속에 문학과  문학에 대한 생각을 쓸어 넣으려는  영웅적 의도(말라르메); iii) 그 뒤 계속해서 말하자면 문학을 내일로 미루어 두고, 오랫동안 글을 쓰겠노라고 선언하녀, 그 선언으로 문학 자체를 만들면서, 문학적 동어반복을 피하려는 희망(프루스트); iv) 그 뒤 의도적으로, 체계적으로, 한 없이, 단일한 의미에 머물지 않고 대상으로서의 말의 의미를 배가하면서 문학적 성실성을 소송해 보는 것(초현실주의); v) 마침내는 문학적 언어체이 현존재, 일종의 기술의 중립성을 얻으려는 희망으로, 그 의미를 희박하게 해버리면서 그렇게 해보는 것(로브-그리에)."(169, [선집], 106~07)

 

장인적 문학에서 문학기술의 중립성에 이르는 이 과정을 통해 부르주아 문학은 스스로를 신비화한다. 그러나 앞서도 얘기했듯이 그것은 허위며, 제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글쓰기가 이러하다면, 도대체 '혁명적 글쓰기'란 가능할 것인가? 바르트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두 가지로 대답한다. 하나는 "부르주아지[혹은 쁘띠 부르주아지]적 글쓰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무리 혁명적이라 하더라도 제도 앞에서의 무력감을 입증할 따름이다"(170)라는 상당히 비관적 대답이며, 또 하나는 "플로베르-말라르메 ...... 로 이어지는 문학적 탐구는 그 제도적 언어에서 문학을 해방시키려는 노력이다"(170)라는 다소 희망적인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에대한 양가적 시각은 문학을 '형태'와 '내용'으로 파악하는 바르트의 구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 형식성에 있어서 문학은 끊임없이 '파괴'의 권능을 행사하여 왔지만, '내용'은 차후적으로 그러한 파괴를 제도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식의 파괴는 항상 실패하는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패는 또한 파괴의 영구화를 자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의 '형태 파괴주의'는 '영구혁명론'과 닮았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의 영구혁명은 형식이 훨씬 더 자기보존 성향이 강하며, 그러므로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곧 내용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뒷받침된다.

 

@ 이때 '형태'의 우위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아니면, 그것은 어떻게 우위를 전제하는가? 바르트의 주관적 판단인가? 형태-내용의 위계가 생산되는 이론적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정치적 기술과 사실주의적 기술에 대한 비판이 가능해 진다. 그에게 정치적 기술은 경찰적 기술이며, 선악 판단적 기술이다. 이를 테면 그것은 가치의 언어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항대립을 생산하면서 그 글쓰기가 옹호하는 항이 아닌 대립적 항을 억압하는 방식이다. 맑시즘적 글쓰기는 스탈린에 이르러 이런 방식으로 극적으로 전환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글쓰기는 결국 '소외'로 귀착한다.

 

@맑시즘적 글쓰기가 '소외'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선악판단의 가치언어체가 될 때 그렇게 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역사적 과정이나 이론적 형성체계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결정적으로 바르트는 맑시즘적 글쓰기 전체를 '정치적'이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사실주의적 기술은 흔히 알고 있듯이 중성적이지 않다. 그것은 가장 조작적이다. 이 방식의 글쓰기가 바로 전형적인 쁘띠적 글쓰기인데, '잘쓴다'라고 하는 것은 보통 이것을 두고 말해 진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인위적인 기술로서, 단순과거, 간접문체, 리듬 있는 글 등의 문학의 형식기호와 민중어 방언 등의 리얼리즘의 형식기호의 결합이다."(171, [잠재태], 25)

 

@김현의 문제의식 : "정치적 기술이나 관습적 사실주의적 기술이 아닌 꿈의 언어가 가능할까? 소외되어 있지 아니한 기술이 소외되어 있는 사회에서 가능할까?"(171~172) 

 

[잠재태의 기술]에서 글쓰기와 문학의 본질에 천착했던 바르트는 [신화지 Mythologies]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적, 이데올로기적 영역으로 옮겨 오게 된다. 그것은 문학의 제도화와 이데올로기성에 대한 연구의 연장선이다. 이것은 일종의 허위의식에 대한 맑시즘적 분석과 흡사한데, 일종의 자명성으로 제시되는 문화적 상식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남용'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남용'은 '반복'되는 어떤 것으로 현상한다. 부르주아적 문화, 인간성, 예술, 도덕 등은 '반복'되어 주입됨으로써 '상식'이 된다. 이때, 부르주아지의 역사는 자연이 된다. 신화는 그래서 본래의 발생적 연원을 잃고, 탈정치화된다. 현실은 은폐되고, 허위가 난무한다.

 

@우리가 여기서 맑시즘 문화비평을 보는 것은 너무 멀리 가는 것인가? [독일이데올로기]는 그러한 방식의 비평에 대한 전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맑스의 정치저작 전체에 흐르고 있는 이데올로기 폭로적 성격은 바르트의 그것과 얼마나 닮았는가? 바르트는 맑스로부터 기호의 정치적 의미를 배웠다고 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신화지]에 대해 맑스의 영향을 말한다는 것이 무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좌파적 언어'는 비신화적이다. 왜냐하면, '생산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직접 생산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언어는 현실 그 자체를 직시한다. 다만, 그것이 '좌파적'이기를 그치고 '좌파'가 됨으로써 '신화'가 되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것은 우파에 비해서는 부분적으로면 그렇다. 그것은 본질적이지 않다. 좌파언어라 한다면, 그것은 직접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실을 드러내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언어는 "거짓말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본질적 불가능성이 신화를 만드는 것을 방해"(173)한다.

 

바르트는 부르주아 사회의 신화를 몇 가지로 유형화한다.

 

1. 예방접종 vaccine : 이것은 국부적인 혁명시도에 대한 용인이다. 일종의 '억압적 관용'(마르쿠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위'의 수용은 대표적인 것이다. 

 

@맑스의 '실질적 포섭' 개념, 또는 네그리의 그것의 적극적 수용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2. 역사의 제거 privation d'histoire : 이것은 신화의 발생적, 현실적 연관의 기화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분석과의 연관 :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

 

3. 동일화 현상 identification : 동일화는 타자를 현실적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쁘띠적 성향에서 유래한다. 이때, 타자는 무시, 배제 또는 흡수의 대상일 뿐이다.

 

4. 동어반복 tautologie : 이것은 발생적 연관을 상실한 신화가 자신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또 유사한 신화를 반복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세계의 죽음이다.

 

@보드리야르 '시뮬라크르' 또는 원본을 상실한 세계와의 연관이 보인다.

 

5. 부정적 도도주의 ninisme : 양비론이 대표적인 ninisme다. 이 언어는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여 그 현실을 분석하고 새로운 실천적 퍼스펙티브를 산출하지 않고, 다만, 두 개의 비교 가능한 대립물로 나눈 다음 그것을 모두 거부한다. 이것도 전형적인 쁘띠적 패배주의, 자유주의라 볼수 있다.

 

6. 질의 양화 quantification de la qualite : 질적으로 비교해야 하는 대상을 양화하여 비교한다. 통계, 생산비, 부르주아적 임금계산 등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7. 확실한 사실 constat : 펙트 fact 에 대한 숭배, 그러나, 그 펙트는 부분적이거나, 희박한 통계적 사실, 잘못된 계산에서 유래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것을 보편주의, 설명거부, 변경할 수 없는 위계 등으로 환원한다. 그래서, 이것은 부르주아의 속담, 경구가 된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바르트는 기호학을 구성해 간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기호학은 이러한 신화의 의미를 벗겨 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화는 말 parole 이며, 그러므로, 기호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의 기호학이 의사소통 communication 이 아니라, 의미작용 signification 에 방점을 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작용은 시니피앙, 시니피에, 기호의 세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이것은 의사소통 이전과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된다.(175, [신화지], 222)

 

                                                 언어 -- [1 Sa][2 Se]

                                                         -- [  3 S/ | Sa ][|| Se]

                                                 신화 -- [          ||| S            ]  

 

                                      (Sa-Signifiant, Se-Signifie, S-Signification)

 

이 도식에서 우리는 바르트의 기호학이 두 개의 기호학적 체계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대상으로서의 언어(언어학적 체계-1, 2, 3)고, 둘째, 신화(메타언어-|, ||, |||)다.

 

"신화에 있어서, 그것의 시니피앙은 의미이며 형태다. 시니피앙으로서는 비어있고, 기호로서는 의미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형태가 되면서 의미는 그 우연성을 잃는다.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거기에서이다. 신화의 시니피앙=형태는 1차 체계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신화의 시니피에=개념은 역사적이며 의도적이다."(175)

 

@@언어학적 의미가 기호학적 형태가 되는 메카니즘은 어떤 경로를 통하는가? 박탈? 이를테면, 토지(언어학적 의미)에 자본주의적 낙인(신화)을 찍는 과정은 토지의 기호학적 형태로의 전화라는 중간과정을 경유해야 한다. 이때, '종획운동'이라는 폭력적인 '박탈'의 과정이 개입한다. 그렇다면, 흥미있는 것은 이 메커니즘이 부르주아지의 본원적 축적과정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잠정적인 내 결론은 이렇다 : 기호학적 형태로의 전화와 신화의 생성은 기호 안에서의 영구히 반복되는 본원적 축적이며, 폭력적 과정이다. 여기서도 언어는 현실의 반영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장미'(1 Sa)라는 시니피앙은 언어학적 체계에서 '꽃으로서의 장미'(2 Se)라는 시니피에와 만난다. 거기에 나는 '내 사랑'(3 S)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것은 이제 기호가 된다. 기호가 될때 애초의 '내 사랑'은 시니피앙(| Sa-'내 사랑이 담긴 장미')으로 전화하고, 여기에 바로 신화적 조작이 끼어든다. 신화적 시니피에(|| Se)가 성립하고, 신화적 의미(||| S)가 생성된다. 그래서, 위의 도식은 신화적 의미작용의 형태와 개념이라는 차원에서 아래와 같이 재도식화된다.

 

                                                   언어 -- [1 Sa][2 Se]

                                                          -- [ 3 S/| 형태 ][|| 개념]

                                                   신화 -- [        의미작용           ]

 

이와 같이 형성된 신화가 받아 들여지는 메커니즘은 그렇다면 어떤 것인가? 김현은 세 유형으로 정리한다.

 

"i) 텅빈 시니피앙을 받아들여, 애매모호성이 없이 개념으로 그것을 가득 채우는 독법. 이것은 신화 제작자의 태도이다.[분석적 독법: 조소적-필자]

ii) 시니피앙을 의미가 충만한 것으로 받아들인 후, 그 속의 의미와 형태를 분간하여, 신화의 의미 현상을 굴절시켜, 그것을 사기로 받아들이는 독법. 이것은 신화학자의 태도이다.[분석적 독법: 탈신화적]

iii) 신화의 시니피앙을 의미와 형태의 결합으로 받아들여, 애매한 의미 현상을 읽는 독법. 그것은 단순한 독자의 입장이다.[역동적(소비적) 독법]"(17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iii)인데, 그것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생성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기호학은 다른 언어학/기호학과 어떤 변별점 또는 동형성이 있는 것일까?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바르트의 기호학은 의미작용의 기호학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언어학의 전통을 받아들이는데, 그래서 기호학은 구조언어학의 네 개의 항목으로 구성된다. "i) 랑그와 빠롤, ii)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iii) 통합체와 체계, iv) 데노테이션과 코노테이션."(185)

 

@바흐친의 '의미화 작용'과 많은 부분 연동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바흐친이 '화행론'의 측면에서 이것을 다루었다면(이때, 기본 단위는 '담론'이다), 바르트는 '기호학'(이 자체가 의미작용인)의 측면에서 이것을 다룬다(이때 기본단위는 '시니피앙/시니피에'다)는 것이다.

 

이들 바르트 기호학의 요소들은 다분히 전통적 용법의 계승이다. 랑그와 빠롤은 소쉬르의 중심개념이며, 지금까지 언어학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분석단위가 되고 있다. 랑그가 사회적 제도와 가치체계로서의 언어체라면 빠롤은 그러한 특성을 표백한 '행위'로서의 구체적 언어체며, 이 빠롤이 확대되어 담론 discourse 이 된다. 바르트는 소쉬르의 이 개념에 예름슬레우의 개념을 겹친다. 예름슬레우에 의하면 랑그에는 "i) 도식 schema [순수형태로서의 랑그]; ii) 규범 norme [물질적 형태로서의 랑그]; iii) 관용 usage [한 사회의 습관의 총체로서의 랑그]"( - )가 있게 된다. "규범은 관용과 빠롤을 결정하며, 도식은 빠롤, 관용, 규범에 의해 결정된다."( - ) 이렇게 되었을때 랑그/빠롤은 도식/관용으로 대치될 수 있다. 바르트는 이 대립을 모든 문화체계에 적용한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소쉬르에게 있어서는 같은 기호 signe 의 구성요소다. 그리고, 이것은 예름슬레우에 와서 '표현(시니피앙)'과 '내용(시니피에)'이 된다. 그런데, 예름슬레우에서 특유한 점은 이러한 내용/표현을 또다시 각각 형태 forme 와 실체 substance 로 나눈 다는 것이다.

이 표현과 내용, 또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결합하는 과정이 바로 '의미작용'이 된다. 그런데, 의미작용은 도식화하는 데는 김현에 의하면 학자들마다 특수한 방식이 있다.

 

"i) 소쉬르의 시도 : 의미작용 signification; semiosis Sa/Se라는 도식을 갖는다. 시니피앙 뒤에 시니피에가 있으며, 시니피앙을 통하지 않으면 시니피에는 다다를 수 없다.

 

ii) 예름슬레우의 시도 : SN은 ERC 라는 도식을 갖는다. 표현의 국면 E와 내용의 국면 C 사이에는 관계 R이 있다.

 

iii) 라캉의 시도 : SN은 S/s의 도식을 갖는다. 대문자 S는 시니피앙으로 시니피에와 유동적 관계를 맺고 있다. 시니피앙 S와 시니피에 s사이의 선은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억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iv) Sa#Se : 이 도식은 비동급적 체계 systeme non-isologue[시니피에가 다른 체계를 통해 물질화되는 체계]에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는 일치[=]의 관계가 아니라, 동치[#]의 관계이다[잠재태, 121]."(187, 강조는 필자)

 

김현의 이런 분류에서 우리는 iv)가 바르트의 것이며, 그 외의 것도 바르트가 유동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르트는 예름슬레우의 코노테이션 connotation , 데노테이션 denotation 개념을 자신의 의미작용 분석에 활용한다. 예름슬레우에 의하면 표현국면(E)와 내용국면(C) 사이에는 관계(R)가 형성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발전한다.

 

1)    E       R       C     -> 2차 체계(코노테이션)

   {ERC}                    -> 1차 체계(데노테이션)

2)    E       R       C     -> 메타언어체 

                     {ERC}

 

(ERC)RC로 약호화 시킬 수 있는 1)을 예름슬레우는 '코노테이션이라'이라 하고, 이때 1)의 (ERC)를 '데노테이션'이라 부른다. 그리고, ER(ERC)로 약호화되는 2)를 '메타언어체'라 한다.

 

예름슬레우의 이 도식을 이용하여 바르트는 자신의 도식을 발견한다.

 

                                         3 [            Sa            ][    Se    ] -> 코노테이션

                                         2 [    Sa    ][    Se    ]                 -> 데노테이션(메타언어체)

                                         1                 [Sa][Se]                 -> 실제체계

 

여기서, 1은 실제체계 systeme reel 며, 2의 시니피에가 될때 그것(2)은 예름슬레우의 메타언어체가 된다. 그리고, 그 메타언어체가 3의 시니피앙이 될때 그것은 데노테이션이 되고, 그때 3은 코노테이션이 된다.

바르트는 코노테이션의 시니피앙을 '수사학 rhetorique '이라 하고, 그 시니피에를 '이데올로기 ideologie '라 한다. 여기서 비로소 바르트는 자신의 기호의 이데올로기 분석, 즉 신화를 드러내는 방법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름슬레우의 '코노테이션' 개념에 힘입어서 그렇게 했다. 기호의 수사법과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형성되며, 분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기호학을 거친 문학 비평가로서의 바르트는 텍스트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의 "이야기의 구조적 분석 입문"과 [S/Z]에 잘 나타나 있다.

 

이야기의 구조를 바르트는 세 가지 층위로 구분한다. i) 기능단위의 층위 niveau des fonctions ; ii) 행위단위의 층위 niveau des action ; iii) 서술의 층위 niveau de la narration

 

기능단위라고 하는 것은 언어학에서의 내용단위며, 그 구성적 시니피에는 다른 시니피앙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이 기능 단위를 바르트는 '배열적 계층 class distributionnelles '과 '통합적 계층 class integratives '로 나눈다. 배열적 계층은 러시아 형식주의에서의 '기능단위'이며, 통합적 계층은 '징조 단위 indices '다. 배열적 계층(기능단위)은 다시 '주기능 단위 fonctions cardinales 혹은 핵단위 noyaux'와 '촉매단위 catalyse'로 나뉜다.

 

그리고, 통합적 계층(징조단위)은 순수한 의미의 '징조단위'와 '정보단위 informants' 로 나뉜다.

 

여기서, 우리는 촉매단위, 징조단위, 정보단위가 핵단위에 비해 '확장단위 expansion '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능단위들은 이야기 속에서 작은 무리를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시퀀스 sequenc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행위 층위는 인물들과 관계하는데, 여기서 인물들은 주인공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행위 시퀀스의 행위자다. 그러므로, 이들 각각의 행위자들은 이야기 속에서 구조화된다. 그것은 그레마스에 의하면, '주체/대상',  '발신자/수신자', '협조자/반대자'다.

 

세 번째 서술 또는 이야기의 층위가 있다. 이것은 바르트에게 전통적인 저자중심의 서술분석을 비판하게 하는 시점이다. 전통적으로 이야기는 저자의 전지적 시점을 기본적으로 가정해 왔으나, 바르트는 이야기 속의 인물이나 화자는 기본적으로 '종이 위의 존재'며 그래서, 화자의 전지적 관점은 그것을 '산 자' 취급하는 오류라고 주장한다. 바르트에게 화자 또는 저자는 '인칭적/탈인칭적 기호체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에서 일어나는 것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문자 그대로 무 rien 이며, 이야기에서 다가오는 것은 언어, 언어의 모험뿐이라는 그의 결론은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191)

 

이야기에 대한 이러한 구조적 분석을 통해 바르트는 '책읽기'에 접근하는데, 그것은 [S/Z]에 드러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책읽기는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어떤 복수태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분석 개념이 바로 코노테이션이다. 텍스트적 상관관계로서의 코노테이션은 그 텍스트가 어떠한 수사법을 사용하여 어떤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가, 또는 그러한 코노테이션의 응고적 공간 espace agglomeratif 을 형성하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응고공간에는 다섯개의 책읽기 약호가 있다. 1) 해석학적 약호 code hermeneutique  2) 의미소적 약호 code semique  3) 상징적 약호 code symbolique  4) 행위적 약호 code proairetique  5) 문화적 약호 code culturel 가 그것들이다. 이러한, 약호는 텍스트에 적용되어 텍스트 내의 복합체를 걸러내는 그물이 된다. 그래서, 이 약호들은 다섯가지의 목소리와 대응한다. 1) 진실의 소리 voix de la verite 2) 사람의 소리 voix de la personne 3) 상징의 소리 voix du symbole 4) 경험의 소리 voix de l'empirie 5) 과학(학문)의 소리 voix de la science.

 

이와 같이 바르트의 책읽기는 택스트와 벌이는 카드놀이와 같다. 그것은 책읽기를 통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다섯가지 패를 추출해내면서 그것의 이면을 간파하여 게임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방식은 바로, "리얼리즘이 현실의 모사가 아니라, 현실의 모사의 모사, 약호에 의한 모사라는 것[S/Z, 61]과, 책읽기의 시초에 욕망 desire 이 있듯, 이야기의 시초에도 욕망이 있다는"(195, 강조는 필자)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의 문제의식 : "그의 위반적 독법 lecture transgressive 은 소외된 사회를 개혁하려면 소외된 독법으로 모든 것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그 위반적 독법이 한없는 전위주의만을 가능케할 때, 그래서 소외된 사람들의 언어와 완전히 단절되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위반적으로 읽힐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위반 역시 사회에 편입되어 버릴때, 개조, 개혁 의지는 사라지고 역으로 자족적인 것으로 인지된 언어만이 남지 않을까? 다시말해 이론적 실천이 실천적 이론을 배반하지 않을까? 현실개혁은 유토피아를 실천적으로 이론화하고 이론적으로 실천화하거나, 억눌린 자들의 타동사적 언어와 일치해 가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의 후기의 즐거움의 미학이 과연 유토피아적일까? 나로서는 그가 문학 작품의 신화지를 더 폭넓게 과학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는 것이 유감스럽다."(195~196) : 김현의 이 문제의식은 바르트의 이론 전체의 계급적 한계를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르트의 비평은 '텍스트 뒤집기'의 한계 안에 있다. 그것은 '세계 뒤집기' 즉, '세상을 변혁하는 비평'이 아니다. 하긴, 바르트는 그런 비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만 말이다. 맑스에게 이것은 바로 정치적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글쓰기와 기호학 그리고 책읽기를 거쳐 가는 바르트의 비평론(이것은 차라리 비평을 넘어선 텍스트 철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은 문학 전반적 활동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간다. 글쓰기에 관해 바르트는 그 기능적 글쓰기를 통해 '세계의 의미를 뒤집는 활동'이라 정의한다. 이것은 바르트가 [신화지]를 통해 스스로 실천했던 바다. 이러한 활동은 필연적으로 작가의 주관성을 앞세우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관성의 제도화 institutionalisation de la subjectivite '라는 논쟁적인 개념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된다. 애초에 얘기되었듯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문학사는 문학창조사가 아니라 문학기능사이다. 부르주아 담론으로서의 문학은 그러므로 그것의 생산, 소통, 소비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하며, 작가나 독자 개인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이때, 문학은 충분히 사회적이다.

따라서, 비평은 기호해석이며, 의미작용의 해독이 된다. 골드만의 비평을 떠올리게 하는 바르트의 이 규정은 다시말해, 텍스트에 대한 이데올로적 해석이며, 해석자가 그것을 또한 충분히 감지하고 있는 비평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의 주요한 개념들을 살펴 보자.

 

작가와 지식서사 ecrivain/ecrivant : 지식서사는 바르트의 조어다. '글쓰다 ecrire '라는 동사를 변형하여 '작가 ecrivain '에 대응하는 의미로 '지식서사 ecrivant' 라고 만들어낸 것이다. 지식서사는 작가의 창조적 글쓰기의 역량을 가져다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작가는 기능을 완성하고, 지식서사는 활동을 완성한다."(179, [선집], 148)

 

"작가는 자기의 말에 달라붙어 작업하고, 기능적으로 그 작업 속에 잠긴다. 그의 활동은 두 종류의 규범을 내포한다. 구성, 쟝르, 글쓰기는 기술적 규범이며, 노고, 인내, 교정, 완성은 장인적 규범이다 ...... 작가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자동사인 것이다. 그러나, 지식서사는 타동사적이다. 그의 말은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는 말에 본질적 기술적 행위도 행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전언 message 이 그 자체로 폐쇄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의 기능은 그가 생각하는 것을 곧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기능과 반대된다."(179, 강조는 필자)

 

이러한 지식서사는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부언해야 한다.

@싸르트르 시인/소설가 대립과 비교

 

결핍된 참여 engagement manque : 이 개념 안에는 소외된 사회에 대한 문학적 참여의 한계를 나타내는 지표가 있다. 즉, 문학은 세계를 변혁할 수 없다는 한계의식. 그러나, 이 한계 내에서 문학은 스스로의 한계를 현실의 한계로 밀어 부친다. 이때, 문학은 적극적으로 정치적 실천으로부터는 탈정치화되지만, 정치적 제시 내에서는 충분히 정치적이다. 다시말해, 문학은 이 한계 속에서 자신의 온 몸을 통해 '지금 세계는 의미 있는가?'라고 제시하는데, 이 질문은 유토피아를 긍정하면서 현실에 대한 부정을 도출해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핍된'이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고려된다.

@싸르트르 '참여'와 비교

 

기호의 상상력 imagination du signe : 각각의 기호는 바르트에 의하면 세가지 차원에서 상상력을 도모한다. i)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말하는 내적 관계(상징적 관계), ii) 기호와 다른 기호의 특이한 잔여물의 결합관계(계열적 관계), iii) 기호와 진술된 것의 다른 기호와의 관계, 현재적 외적 관계(통합적 관계)가 그것들이다. 이 세 가지 관계는 다시, 깊이의(상징적) 상상력, 형식적(계열적) 상상력, 기능적(제작적, 도식적) 상상력과 연관된다.

 

이와 같은 바르트의 비평은 종합적으로 보았을때, 이데올로기 해석이면서 텍스트의 본질보다, 그것의 기능연관, 생산과정, 그리고, 유효성을 탐색하는 작업이 된다. 이러한 비평 방법이 당시의 랑송의 박학비평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다. 김현이 바르트 문학관의 요약이라고 말하는 본문을 인용해 보자.

 

"문학은 언어체의 비실제성에 대한 의식 자체이다. 가장 진실한 문학은 자기가 가장 비실재적인 것임을 아는 문학이며, 말과 사물 사이의 중재 상태의 탐구이며, 말에 의해 움직이고 한정되는 의식의 긴장이다. 리얼리즘이란 그러니까 사물의 모사일 수 없고, 언어체에 대한 인식이다. 가장 사실주의적인 작품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내용으로 이용하면서 가능한 깊게 언어체의 비실재적 실재성을 탐색하는 작품이다."(183, [선집], 164)

 

이상의 바르트에 대한 김현의 연구로 보았을때, 결국 바르트는 소쉬르 이후 지속되어온 '지시체로서의 기호'를 '의미작용으로서의 기호'로 전환시키면서, 그것을 비평에 적용한 것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소쉬르가 '사회심리학'의 한 분과로서 언어학을 상정했고, 또한 기호학을 언어학의 상위 분과로 예상했을때, 바르트적 기호학의 출현은 일찌감치 예견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언어학과 기호학의 위계를 뒤집으면서 소쉬르를 꺼꾸로 세우지만 말이다. 그러나, 보다 정직하게 보는 것이 비평의 최선이 아니라, 꺼꾸로 세우는 것,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뒤집는 것'이 비평의 참면목일 수 있다면, 우리는 바르트를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선 텍스트의 깊이와 상상력의 울림 그리고, 현대의 신화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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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바르트 서지*

 

-원전-

Roland Barthes, Le degre zero de l'ecriture, suivi des Elements de semiologie, Gonthier, 1965.

______________, Mythologies, Seuil, 1957.

______________, Sur Racine, Seuil, 1963.

______________, Essais critiques, Seuil, 1964.

______________, Elements de semiologie,         , 1964.

______________, Critique et verite, Seuil, 1966.

______________, S/Z, Seuil, 1970.

______________, Le plaisir du texte, Seuil, 1973.

______________, Roland Barthes par lui-meme, Seuil,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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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앵 골드만의 문학비평", [비평사] 6장, pp230~260

 

1. 골드만이 인문, 사회과학 연구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과학적, 실증적 방법이다. 과학적, 실증적 방법을 그는 간략하게 변증법적 방법 la methode dialectique 라고 부른다 ......

"[나는] 문화 창조 연구의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 즉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사회학의 길을 열려고 했으며, 그래서 인간 현실 전반에 대한 변증법적 역구의 길을 열려고 했다.[심적구조], xi" (237)

 

--->  골드만 비평의 목적: 지식사회학적 분과로서의 비평 또는 그것의 지향.

 

1-2. [변증법적 방법은] 우선 인간과 관계된 사실은 언제나 실체적, 이론적, 감성적 성격을 동시에 띠는 전체적 의미구조 structure significative globale 를 구성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숨은 신, 7]. 그 구조는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 그 구조가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변증법적으로 하나의 중간항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의미구조는 그 나름대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것보다 큰 구조 속에 삽입되어 설명될 수 있다. 그 구조가 중간항 mediation 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238)

 

1-3. 이해와 설명은 인식의 방법이며 부분과 전체는 그 인식의 결과이다. 골드만의 실증적 방법, 다시말해 변증법적 방법은 부분의 절단 decoupage 과 전체 속에 그것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정리 agencement 라는 구조주의적 방법이다 ...... 끼워넣기 inserer , 껴안기 embrasser , 감싸기 englober, 편입하기 integrer ...... (238~239) 

 

1-3-1. 그 감싸기의 결과로서 골드만은 문화창조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계급이라는 충격적인 결론에 이르른다. 작품을 이해하게 하는 행위는 작가의 행위가 아니라, 그가 속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 그룹의 행위라는 진술 ...... 개인의 일상적 삶과 창조적 상상력 사이에는 단절 rupture 이 있다는 인식 ...... 개인의 창조력은 집단 의식에 근거하고 있다.(239~240)

 

1-3-1-1. 한 그룹의 성원을 모아주며 다른 그룹에 대립되게 하는 한 그룹의 열망, 감정, 사고의 총체를 골드만은 세계관이라고 부른다[숨은 신, 17] ...... 루카치 ...... 골드만에 의하면, i) 모든 위대한 예술, 문학 작품은 세계관의 표현이며; ii) 세계관은 작가나 사상가의 의식 속에서 개념적, 감성적인 최대한도의 명확성을 얻은 집단 의식의 현상이고; iii) 사상가, 작가는 그 집단 의식을 작품 속에서 표현하는 예외적 개인 individu exceptionnel 이다. 동시에 iv) 세계관은 어떤 사회 그룹과 그들의 사회적, 자연적 환경 사이의 심적 표현 expression psychique 이므로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 골드만이 들고 있는 세계관은 플라토니즘, 신비주의, 경험주의, 합리주의, 비극적 세계관, 변증법적 사고 등이다.

 

2. ...... 발생론적 구조주의적 분석 l'analyse structuraliste genetique ...... 왜 소설에 문제적 인물이 나타나는가를 설명하려든다면 소설이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 정황 속에 소설을 끼워넣을 수밖에 없다.(244)

 

2-1. 소설 세계의 형태는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부터 발생된 개인주의의 사회에서 일상적인 삶이 문학적인 차원으로 뒤바뀌어진 것이라는 것 ......(244~245)

 

---> 사용가치의 몰락과 교환과치의 득세로 인한 문제적 인간의 출현; 루카치의 영향 ; Marx '물신화'

 

2-2. 발생론적 구조주의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그러므로 i) 과거의 구조화의 구조 파괴와 ii) 새로운 전체성의 구조화로 이루어진다.(248)

 

--->들뢰즈의 사유와 연결; 코드화 탈코드화 etc...

 

3. ...... 문학사회학의 원칙 ...... iii) 한 사회 그룹의 경험적 의식의 구조와 작품의 세계를 지배하는 구조 사이의 관계는 엄격하게 동형 homologie 을 이룩하나 흔히는 단순한 의미관계를 이룩하기도 한다 ...... iv) 문학 창조의 걸작물들도 그런 관점에서 범상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 v) 집단의식을 지배하는 범주구조가 예술가가 만든 상상 세계 속에 옮겨질 때, 그것은 억압을 상정하는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의식적인 것도 아니고 무의식적인 것도 아니며, 근육구조나 신경 구조를 지배하여 우리의 몸짓이나 움직임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과 여러 면에서 같은 유형의 비의식적 과정이다.(250~251)

 

--->골드만 '문학사회학'의 핵심

---> v) 는 다시 들뢰즈 사유와 연결; '기계', '몸체'개념; 들뢰즈가 기계적 표현이라면 골드만은 생체적 표현으로 '심리' 또는 '의식'을 상정; 골드만은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를 알았을까?

 

4. 그에 의하면 그가 전통적 문학 창조 연구 방법을 문제 삼은 것은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서는 전통적 문학 연구 방법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방법론적인 이유 때문에 문학적 사실에 대한 접근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 예외란 현상학적 접근 방법을 말하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이론가로 그는 청년 루카치와, 모리악과 지로두에 대한 연구를 한 싸르트르를 들고 있다.(252)

 

---> 언어학적 비평에 대한 골드만의 비평도 참조(252~253); 언어학은 랑그에 대한 연구며 사회화된 파롤인 문학에 대한 비평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요지.

 

5. 골드만의 발생론적 구조주의는 i)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에 의해 그 이론적 배경이 주어졌고, ii) 루카치, 피아제에 의해 이론적 보완이 이루어졌다[마르크시즘, 21 이하](256)

 

6. [두브로브스키의 골드만 비판에 대해] 페터 뷔르거[뷔르거, 76~91]에 의하면, 골드만은 마르크시즘과 부르주아적 학문을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관점으로 총체성을 든 루카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개념을 변형시키고 있다. 루카치는 총체성을 전체로서의 역사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골드만은 우선 작품 자체를 총체성으로 파악하고 있다.(259)

 

---> 텍스트, 세계관, 계급, 시대라는 심급의 상승과 상호작용을 골드만이 간과할 때가 있다는 것이 요지; 뷔르거는 그러나, 이러한 심급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이 쉽게 도식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골드만이 그것을 다루지 않았다고 말한다.

 

 

"제네바 학파의 문학 비평", [비평사] 7장, pp261~290

 

1. 의식의 비평 critique de la conscience동화의 비평 critique d'identification, 발생론적 비평 critique genetique, 주제비평 critique thematique ...... 넓은 의미의 실존주의롭부터 많은 전망을 획득한 비평인데, 그것이 극복하려고 애쓴 것은 ...... 논리-실증주의적 태도이다[랑송류의 비평과 미국식 뉴크리티시즘]. (269)

 

1-1. [키에르케고르, 후서를, 하이데거, 싸르트르, 메를로 퐁티를 통해 비판적 근거를 찾고 도외시되었던 바로크문학에 새 조명을 주며, 낭만주의 초현실주의가 계보의 연장선에 놓인다; 릴케, 카프카, 클로델, 쉬페르비엘, 샤르, 엘뤼아르, 페르스 등; 비평가로서는 N.R.F.지의 비평가들-쟈크 리비에르, 샤를르 뒤 보스; 독일의 빌헬름 딜타이, 프리드리히 군돌프.]

 

1-2. 의식의 비평이 바라는 두 의식의 일치란 엄격한 의미의 문학 비평이라기보다는 명상, 성찰, 몽상의 문학의 한 형태에 가깝[다].(270)

 

--->바슐라르/블랑쇼의 비평과 한 계보에 놓인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2. i) 문학은 대상이 아니라 행위, 경험이다; ii) 쟝르 사이의 엄격한 구분은 문학적 경험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iii) 같은 작가의 여러 작품을 잘 읽어 보면, 그것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개의 작품은 자율적 총체가 아니며, 작가의 문학적 경험의 단편들이다; iv) 비평이 탐구해야 하는 것은 문학내의 주제와 충동의 내적 유형이다; v) 단어란 특이한 인간적 전압을 운반하는 에너지의 마디이다.(270)

 

---> v)는 매우 특이한 규정이다; 문자의 다이나미즘?

 

2-1. 비평은 2차적 문학인 것이다 ...... 비평이 문학에 대한 문학, 의식에 대한 의식이라면 문학은 그러면 무엇인가. 문학이란 의식의 한 형태이다. 문학이란 시나 소설의 단어 속에 있는 의미의 객관적 구조가 아니라, 혹은 작가의 숨은 콤플렉스의 표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의 한 표현이다[힐리스 밀러, 278~80] ...... 가장 주관적인 비평 ......(270~271)

 

 

3. 마르셀 레이몽(1897~       )

 

3-1. [그는] 바로크-낭만주의-초현실주의의 문학적 전개가 프랑스 문학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반-합리주의, 반-고전주의자임을 나타낸다.

 

3-2. 그에 의하면, 문학 연구는 두 측면을 포함한다. 하나는 예술 작품의 언어적 연구이며-그것은 문예학 Literaturwissenschaft 과 관련되어 있다- 또 하나는 형태 속에 육화되어 있는 마음의 지각, 정신사 Geistesgeschichte 이다. 그가 역점을 둔 것은 ...... 정신사 ......이다.

 

3-3. 그 역사에서 중요시 되는 것은 문학은 통해 인간성을 표현하는 창조적 천재이다.  

 

3-3-1. 도비녜, 루소, 위고 ......(272)

 

--->골드만과 바르트의 텍스트관과 매우 대조된다.

 

3-4. 루소에 뒤이어 보들레르는 실존적 지각이 창조의 수단이며 목적이 된다는 예술관을 보여준다.

 

3-4-1. 보들레르의 넋의 비상한 복합성은 그를 두 개의 주된 현대시의 전통의 원천으로 만들고 있다. 그 두 개의 전통이란 보들레르에 뒤이어 말라르메와 발레리가 걸어간 장인으로서의 예술가의 전통과 랭보와 초현실주의자들이 걸어간 견자 voyant 로서의 예술가의 전통이다.

 

3-4-2. 진정한 예술가는 보들레르처럼 그 대립되는 경향을 통합, 조화로운 전체를 이룩해야 한다고 레이몽은 주장한다.(273)

 

4. 알베르 베겡(1901~1957)

 

4-1. 레이몽과 마찬가지로 베겡 역시 진정한 문학 비평이란 주석자가 저자가 창조한 세계의 내부에 자리를 잡아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비평가는 시인의 정신적 모험과 일치하여야 한다.

 

4-1-1. 베겡이 시인의 의식과 일치, 동화되려 한다면, 그것은 그 시인의 의식이 어떤 종류의 초월적 실재에 참여해 있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4-2. [낭만적 넋과 꿈] ...... 거기에서 그는 객관주의가 정신과학에서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자기의 태도를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객관성이란 묘사과학의 법칙일 수 있으며 법칙이어야 하겠으나, 그것이 정신과학을 유효하게 관리할 수는 없다 ...... 예술작품이나 사상적 작품은 사실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한 부분 ...... 과 관련되어 있다"[넋, x~xi].(276~277)

 

4-3. 베겡에 의하면 낭만주의자들의 낭만주의는 몇 개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첫째 신화는 넋의 신화 mythe de l'ame 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합리주의적 반인간주의적 성향에 대한 반동으로 낭만주의자들이 채택한 넋의 신화는 내적 중심의 존재 existence d'un centre interieur를 믿는다. 그 넋은 우리 삶의 원리이며, 우리의 확신의 자리이며, 소외되지 아니한 본질이다. 두번째 신화는 무의식의 신화 mythe de l'inconscient 이다 ...... 그러나, 이 꿈의 신화는 위험스러운 시도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무의식을 신화화할 수도 있으며, 삶의 다른 부분을 부정해 버릴 수도 있다. 광명을 향해 열린 출구로 나타난 것이 심연을 향해 열린 문일 수가 있는 것이다.(277~278)  

 

4-4. 시의 진실은 역사적 진실보다 우위에 있다. 시는 역사적 존재 속에 갇힌 피조물의 기본적 고뇌에 대한 유일한 가능한 대답이다. 보들레르와 랭보 이전에는 의식적으로 실천되지 않았던 이 시학은 직관과 형이상학적 신앙에 근거해 있다[넋, 398~401]

 

4-5. 자신을 드러내는 힘 force de presence 에서 시인은 피조물 어디에나 육화되어 있는 창조주의 드러남을 만난다. 베겡의 종교적 성향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은 이 드러남 presence 이라는 개념에서이다 ...... 그것은 사물의 물질적 현존성과 그 현존성 내에 신이 거주하심을 동시에 일컫는 개념이다.(279)

 

--->낭만주의가 결국 다다르는 것은 이러한 신비주의 또는 신학적 변증론인가? ; 그러나, '엘리아데'와 비교 가능.

 

5. 죠르쥬 풀레(1902 ~      )

 

5-1. 풀레는 그의 비평을 발생론적 비평이라고 ...... 설명하고 있다. 발생론적 비평이란 문학이 무의식에서 의식적 존재로 솟아오르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 비평이다 ...... 실증주의적 비평을 싫어하듯 그는 원초적 경험의 정신분석적 비평도 싫어한다 ......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발생론적 비평은 정신분석학적 비평이 아니라, 그의 의식의 비평의 한 측면이다.(282)  

 

5-2. 그의 의식의 비평, 발생론적 비평, 주제 비평은 의식에 대한 의식의 비평이라는 점에서 동화의 비평이다.(283)

 

5-2-1. i) 비평은 남의 경험을 되풀이 또는 연장하여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구성한다는 그 비상한 특수성을 지닌다. 그것은 한 타인의 느낌을 내 속에 다시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의 두 존재태, 그러나 다른 두 사람에 의하여 경험된 두 존재태의 합치이다. [이론, 199]

ii) 비평가는 어떤 일들을 직접 알아낼 수 없는 어떤 사람이어서 비평받는 타인의 행위 덕분에, 오직 간접적으로 중개를 통해서만 그것들을 알 수 있게 된다. 눈을 빌은 장님, 들을 능력을 획득한 귀머거리.[이론, 199]

iii) 비평한다는 것은 읽는다는 것이며, 읽는다 함은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에 놓인 다른 주체에 저 자신의 의식을 빌려 주는 것이다.[이론, 200]

iv) 여러 작품들 혹은 작품 속에서 나에게 드러나는 주체는, 작가의 외부적 생존의 무질서한 총체로 보거나, 또는 그의 글의 더욱 잘 조직되고 잘 집중된 전체로 보거나, 작가 자신이 아니다. 작품을 주관하는 주체는 오직 작품 속에만 있을 수 있다. [......] 그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작품과 오직 작품과 더불어 가지는 어떤 동일성의 관계를 사는 일이다. [......] 따라서 비평가란 저 자신의 독자적 삶을 없애고, 작품의 의식이라고 불리우는 다른 의식에 의하여 자기 의식을 점령하도록 동의하는 자이다.[이론, 201~02](284) 

 

6. 쟝 루세(1910~       )

 

6-1. 그의 비평은 형태주의적 비평이 아니라 형태적 실재에 민감한 미각적 비평 critique gustative 이다.

 

6-1-1. 루세의 형태는 작가의 행위와 글 속에서 저 자신을 찾는 사고의 작업에 연결되어 있지 텅 빈 형태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형태로서의 작품을 공들여 닦은 감수성으로 맛보는 것이 그의 비평이다.(285)

 

6-2. 그 형태는 내밀한 가담의 접근된 위치에서 그것을 느끼는 자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그 의미를 드러낸다. 작가와의 마주침에서 형태는 태어나는 것이다 ...... 이 마주침의 순간은 풀레의 발생론적 순간에 아주 가깝다.(286)

 

7. 쟝 스타로벵스키(1920~       )

 

7-1. 일반적으로 스타로벵스키는 두 개의 비평적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과학처럼 가능한 한 정확하려고 하는 비평이며, 또 하나는 문학이 되려는 비평이다. 현명한 비평은 언제나 다른 비평의 가능성을 믿는 비평이다. 분석을 하면서 자기 비평의 한계를 보여주고, 자신이 택하지 않은 작품과 비교해서 뭔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비평가에게는 필요하다. 현명한 비평가는 공개적으로 어떤 방법을 선택해서는 텍스트를 설명하는 동시에 자기 방법과 그것의 한계 역시 설명해야 한다.

 

--->매우 인상적인 대목; 그렇다면, 철학은?; 가능한한 정확하려고 하는 철학읽기와 바로 그 철학이 되려는 철학읽기가 가능할까?; 들뢰즈는 강단철학의 '정확함'으로 니체와 스피노자와 칸트를 읽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

 

7-2. 의식에 대해 스타로벵스키는 메를로-퐁티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다. 메를로-퐁티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스타로벵스키에 있어서도 인간은 육체, 몸짓, 말을 통해 자신을 인지하며 표현한다. 인간의 의식은 처음부터 육체와 경험적 정황 속에 갇혀 있다.[힐리스 밀러, 299](287)

 

8. 쟝 피에르 리샤르(1922~      )

 

8-1. 가장 탁월한 주제비평가 ...... 신비평 일반의 특성을 논한 [프랑스 문학 비평의 새로운 양상] ......

 

8-1-1. 신비평가들은 작품, 씌어진 것은 작품의 기원이며 지주인 작가보다 중요시한다. 그것은 설명적이 아니라 이해적 comprehensif 비평이다. 하나의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 그 대상이 표현함으로써 자기 안에 실현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양태를 재발견한다는 것이다. 비평은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이해적 기술, 작품의 해독이다 ...... 현상학적 비평 ......

 

8-1-2. [작가의] 무의식적 기도를 드러내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이다.

 

8-1-3. 현대비평은 전체적 비평이다. 그것은 작품을 혹은 작품 가운데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검토하려는 어떤 측면들을 그 작품의 전체 속에서, 그 작품의 통일성과 일관성 속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8-1-4. 문학의 본질적인 기능이 의식의 파악 prise de conscience 이라면 비평은 결론적으로 의식의 재파악 sur-prise de conscience 이다. 그 비평은 확고부동한 진리에 도달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과학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의 영역에 속해 있다.

 

2002. 8. 6~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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