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시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그리고 해제에서도 밝혀 놓았다시피 필리아의 용법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기 때문에 이 대화편의 주제를 전문적으로 꼼꼼히 보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어지기 쉬울 것이다. 오랫동안 플라톤을 연구한 학자들도 이 대화편은 이해가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번역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라는 것도 짐작할만 하다.

 

일천한 깊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대화편은 사랑과 우정의 대화편이기도 하지만 플라톤의 변증법이 가지는 근원적인 '아포리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논변들은 참다운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위로 회전하는데, 그것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는 와중에 적절하게 내세워진 답변의 후보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방식(소거법)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마지막에 와서는 결국 처음에 제거된 대답으로 돌아 오고야 만다.

 

렇게 해서 플라톤은 사랑과 친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아포리아로 던져 놓는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논변에 ‘욕구’를 도입하는 순간이다. 앞서 욕구는 반대되는 것 사이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시오도스에 대한 반박을 통해 마무리했고, 말미에 이르러 욕구란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라고 결론짓는다. 문제는 이 욕구가 결코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이것을 애초에 기각하면서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을 후보자로 내세운 것에서부터 문제가 잠재되어 있다.

 

이 논변의 과정은 내 생각에 ‘자족’과 ‘결핍’ 사이를 진동한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제거하면서 결국 아포리아로 빠지는 것이다. ‘차 있지도 비어 있지도 않은 상태’가 규명될 경우에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인데, 플라톤의 논변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 관계’는 상정될 수 없다. 따라서 이때 주체는 항상 ‘헛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채우지도 포기하지도 못한 채 허상을 찾아 헤매는 유령과 같은 존재, 그것이 플라톤의 ‘사랑의 주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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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로스와 필리아[도입](203a-207d4)

(1) 에로스[형식적인 틀]: 에로스의 비상호성(203a-206e2)

[205e]그가 자네에게서 달아나 버린다면 자네가 애인에 대해 말한 찬사들이 더 대단한 것일수록 자네는 그만큼 더 멋있고 훌륭한 것들을 빼앗긴 자가 되어 우습게 보이게 될 것이네. 그러니 친구여, 사랑(연애)에 관한 일들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는 누구든지 자기가 사랑(연애)하는 자를 낚아채기 전까지는 장차 어떻게 될지 염려되어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네. 그리고 동시에 잘생긴 자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칭찬하고 추켜세울 때면, 자만심과 도도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네.

 

(2) 필리아[내용상의 도입]: 친구간의 상호적 필리아(206e3-207d4)

[207c]친구들의 것이야말로 공동의 것이라고 이야기되니까(1), 바로 이 점에서 자네들 두 사람은 전혀 차이가 없을 것이네.

 

(1) 이것은 피타고라스학파의 격률로 알려져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은 ≪국가(Politeia)≫4권, 424a; 5권, 449c;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8권, 1159b31 참고.

 

2. 필리아와 앎 혹은 유용성의 관계[예비적 탐구](207d4-211a1)

[210e]애인을 추켜세워서 우쭐하게 만들 게 아니라 깍아내려서 위축시켜야 한다는 말일세.

 

3.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친구의 두 후보](211a1-213d5)

(1) 메넥세노스의 능력[본격적인 논의 준비](211a1-211d6)

(2) 상호적 필리아와 비상호적 필리아[본격적인 논의 시작](211d6-213d5)

[212e~213c]그렇다면 메넥세노스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는 자에게 친구인 것 같네.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든, 아니면 미워하기까지 하든 말일세. (...) 이 말에 따르면 사랑하는 자가 친구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가 친구이네. (...) 그렇다면 또한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움받는 자가 적이네. (...) 그렇다면 이것 보게. 많은 사람들이 적들에 의해 사랑받고 친구들에 의해 미움받으며, 적들에게는 친구지만 친구들에게는 적이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친구인 것이라면 말일세. 그런데 말이네, 친애하는 벗이여, 자기 친구에게 적이고 적에게 친구라는 건 아주 불합리하네. (...)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의 친구가 될 것이네. (...) 그렇다면 미워하는 것이 미움 받는 것의 적이네. (...)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의 것들에 대해서 했던 것과 똑같은 합의를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네. 즉 친구 아닌 것의 친구가 있는 경우가 자주 있고, 심지어 적의 친구마저 있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기까지 하는 것을 사랑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 그리고 적 아닌 것의 적이 있거나 심지어 친구의 적마저 있는 경우도 자주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는 것까지도 미워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 말일세. (...) 그러면 우리는 이걸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하지? 사랑하는 사람들도, 사랑받는 사람들도, 사랑하기도 사랑받기도 하는 사람들도 친구가 아니고 오히려 이것들 말고 아직 서로에게 친구가 되는 다른 어떤 사람들이 있다고 우리가 말하데 된다면 말일세.

 

4.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셋째 후보](213d6-214e1)

[214c-214e]내가 보기에 (...) 훌륭한 자들은 서로 비슷하고 친구인 데 반해 나쁜 자들은 (그들에 관해 흔히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게 바로 이것이기도 한데) 도대체 서로 비슷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 자신이 자신들과 비슷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다는 것이네. 그리고 그 자체가 자신과 비슷하지 않고 어긋나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 비슷하거나 친구가 되는 일이 좀처럼 없을 것이네. (...) 그럼 이제, 벗이여, 내가 보기에는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라고 말하는 자들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네. 즉 훌륭한 자만이 오직 훌륭한 자에게만 친구인 반면, 나쁜 자는 훌륭한 자와도 나쁜 자와도 도대체 참된 사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지. (...)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누가 친구들인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이네. 누구든 훌륭하기만 하면 그들이 바로 친구들이라는 것을 우리 논의가 보여주고 있으니 말일세.

 

5. 훌륭한 자의 자족성[셋째 후보 논의의 심화와 비판](214e2-215c2)

[215a-215c]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서로에 의해 존중될 수 있을까? (...) 훌륭한 자는 훌륭한 자인 한에서는 스스로 충분할 것 같은데? (...) 그리고 충분한 자는 자기의 충분함 덕택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자일 것이네. (...) 그리고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는 뭔가를 존중하지도 않을 것이네. (...) 뭔가를 존중하지 않는 자는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네. (...)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자야말로 친구가 아니네. (...)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 어떻게 훌륭한 자들이 애당초 훌륭한 자들에게 친구가 되겠는가? (...) 적어도 그들이 서로를 대단히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적어도 친구는 아닐 것이네.

 

6. 비슷하지 않은 것이 비슷하지 않은 것에게 친구[넷째 후보](215c3-216b9)

[215e]그[헤시오도스]는 아직도 자기 논의를 계속, 더욱 호기 있게 펴나가고 있었네. 그러니까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라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사실은 이와 정반대라고 말하면서 말이네. 그건, 가장 반대되는 것이 가장 반대되는 것에게 가장 친구니까 그렇다는 거네. 각 사물은 자기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것을 욕구하니까 말일세.

(...) [그런데]‘그렇다면 적대적인 것이 친구인 것에게 친구(인 것)인가, 아니면 친구인 것이 적대적인 것에게 친구(인 것)인가?’ (...) 그럼 정의로운 것이 부정의한 것에게, 혹은 절제된 것이 제멋대로인 것에게, 혹은 훌륭한 것이 나쁜 것에게 친구인가? (...) 반대됨에 의거해서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에게 친구라면, 이것들도 친구일 수밖에 없네. (...) 그렇다면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인 것도 아니고, 반대되는 것이 반대되는 것에게 친구인 것도 아니네.[216b]

 

7.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다섯째 후보](216c1-218c3)

[271a]그렇다면 이것 보게. 오로지 훌륭한 것에게,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만이 친구가 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네.

 

[271c]“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세. 누군가가 금발인 자네 머리카락들을 백연으로 문지른다면, 그때 자네 머리카락들은 흰가, 아니면 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일까?” (...) “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테지요.” (...) “그렇지만 그때 그것들에게 흼이 와 있을 것이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더 희지는 않을 것이네. 오히려 흼이 자기들에게 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조금도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네.” (...) “하지만 친구여, 실로 노령이 그것들에다 바로 이 똑같은 색깔을 가져다주게 되면, 그때는 그것들이, 자기들에게 와 있는 것과 꼭 같은 유의 것이 되어 버리네. 즉 흼이 자기들에게 와 있음으로 해서 희게 되네.” (...) “자, 그러니까 바로 이게 내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이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에게 와 있을 때마다, 와 있는 그것을 가진 것은 와 있는 것과 같은 유의 것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 와 있을 때는 그렇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안 그렇게 될 것인가?” “오히려 후자 쪽이죠.” (...) “그렇다면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는 것 역시 때로는 나쁜 것이 자기에게 와 있는데도 아직 나쁘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미 자기에게 와 있는 것과 같은 유의 것이 되어 버린 때도 있네.” (...) “그렇다면 나쁜 것이 와 있는데도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이 아직 나쁜 것이 아닐 때, 이 와 있음은 그것이 훌륭한 것을 욕구하도록 만드네. 반면에 그것을 나쁘게 만드는 와 있음은 그것에게서 훌륭한 것에 대한 욕구도 사랑도 빼앗아 버리네. 그때는 그것이 더 이상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니까 말일세. 그런데 앞의 논의에서 훌륭한 것은 나쁜 것에게 친구가 아니었네.” (...) “무지를 가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그것으로 인해 분별없거나 무식하게 되지는 않고, 다만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이든 그것들을 알지 못한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자들이 남아 있네. 그러니까 바로 그 때문에, 아직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네. 반면 나쁜 자들은 지혜를 사랑하지 않으며, 훌륭한 자들도 마찬가지네.(...)” (...)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이 나쁜 것의 와 있음 때문에 훌륭한 것의 친구라고 우리는 주장 하니 (...)”

 

8. 첫째 친구[다섯째 후보 논의의 심화와 비판](218c4-220e6)

[220c-e]그러면 훌륭한 것이 사랑을 받는 게 나쁜 것 때문인가? (...) 그렇다면 우리에게 친구인 저건(즉 다른 모든 것들이-바로 그것들이 다른 친구를 위해서 친구라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데-바로 그것으로 귀결된다고 할 때의 그것)은 정말로 이것들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네. 이것들은 친구를 위해 친구라고 불려 왔지만, 참으로 친구인 것은 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타고난 것임이 분명하니까 말이네. 그것은 적을 위해서 우리에게 친구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으니 말일세. 그런데 적이 떠나가 버리면, 참으로 친구인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친구가 아닌 것 같네.

 

9. 욕구가 필리아의 원인[여섯째 후보로의 이행](220e6-221d6)

[221d]욕구가 참으로 사랑의 원인이고, 또 욕구하는 것이 욕구 대상에게, (욕구하는 바로 그때) 친구인 반면에, 이전에 무엇이 친구인가에 관해 우리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마치 길게 늘어진 시처럼 어떤 허튼 이야기 (...)

 

10. 가까운 것이 가까운 것에게 친구[여섯째 후보](221d6-222e7)

[222a]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욕구하거나 사랑(연애)할 때, 만약 그가 혼에 있어서든, 아니면 혼의 어떤 습성에 있어서든, 아니면 기질이나 모습에 있어서든, 어떤 식으로든 사랑(연애)받는 자에게 가까운 자가 아니라면, 도무지 욕구하지 못할테고, 사랑(연애)도 사랑(친애)도 못할 것이네.

 

[222d]그렇다면 여보게들, 우리가 사랑에 관해서 우리가 맨 처음에 거부했던 그 논변들에 다시 빠져 들어가 버렸네.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인 것 못지않게 부정의한 자는 부정의한 자에게, 그리고 나쁜 자는 나쁜 자에게 친구일 것이니 말일세.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사랑과 친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아포리아로 던져 놓는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논변에 ‘욕구’를 도입하는 순간이다. 앞서 욕구는 반대되는 것 사이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시오도스에 대한 반박을 통해 마무리했고, 여기서는 욕구라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라고 결론짓는다. 문제는 이 욕구가 결코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이것을 애초에 기각하면서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을 후보자로 내세운 것이다.

이 논변의 과정은 내 생각에 ‘자족’과 ‘결핍’ 사이를 진동한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제거하면서 결국 아포리아로 빠지는 것이다. ‘차 있지도 비어 있지도 않은 상태’가 규명될 경우에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인데, 플라톤의 논변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 관계’는 상정될 수 없다. 따라서 이때 주체는 항상 ‘헛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채우지도 포기하지도 못한 채 허상을 찾아 헤매는 유령과 같은 존재, 그것이 플라톤의 ‘사랑의 주체’라고 할 수 있겠다.

 

11. 아포리아[파장](223a1-223b8)

[223b]우리가 스스로 서로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나 자신도 자네들 무리 가운데 속한다고 치고 있으니 하는 말이네만) 아직 친구가 무엇인지 발견해 내지 못했다고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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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네 대화 편 -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3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 / 서광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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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수록된 네 대화편은 흔히 '역사적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는 저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파이돈]의 연대기가 논쟁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소크라테스라는 서양철학의 위대한 영혼을 접하기에는 다른 어떤 2차서보다 이 대화편들이 더욱 실감나는 것은 사실이다. 무릇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원전을 독파해 나가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이 대화편들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박종현 선생의 원전번역은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니 큰 의심을 할 필요는 없다.

 

소위 '플라톤의 문제'라는 것은 굳이 촘스키의 언어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의 저작은 스승과 자신의 일체감이 완연히 묻어나는 초기편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이 완성되는 후기 철학편에  이르기까지 읽는 사람에게 시대를 초월한 물음들을 던지게 만든다. 포스트 구조주의가 꽃피면서,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한때는 누가 플라톤주의니, 또는 반플라톤이니 하는 말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 또한 플라톤주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품었던 철학의 문제가 지금까지도 해결불가능한 아포리아라는 것, 아니 철학 자체를 아포리아로 정의하고 보편적 정의(horismos katholou)를 희구했다는 것에 있다.

 

과연 '보편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 즉 보편학은 가능할 것인가? 형상과 이데아는 어떤 자체(auto)로 존재하는 대상을 적중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는 정신사적 상황 속에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일정정도의 비난을 무릅쓸 각오를 하지 않으면 상식을 벗어나 '보편성'을 주장할만큼 배짱 있는 철학자는 이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신없음의 한켠에는 과학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고, 또다른 한켠에는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과학은 철학의 사유를 어떤 망상증으로 치부하기 일쑤고 정치는 철학의 형이상학적 비현실성을 비웃기 일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둘 모두 자신의 기반이자 전체 생존의 전제로 '철학적 물음'을 비켜가기는 힘들다. 즉 '존재'(einai)에 대한 물음, '정의'(dikaiosyne)에 대한 물음은 과학이나 정치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바로 그 '본질'을 의문에 부치는 작업이며, 이 작업자체와 과정은 철학만이 이끌어갈 수 있다. 과학자와 정치가들 자신도 이런 의문을 던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근거를 다시 캐묻는 것이고 그것이 곧 철학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기만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플라톤은 아마 미래에도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그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한평생 지혜를 갈고 닦은, 그래서 스스로 영혼을 돌본 자는 불멸의 영애를 가질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성'이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진리'를 지키고자 했던 그 '의지'의 위대함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리에의 의지'가 사소해진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그 의지가 위대하다는 것은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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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3

 

플라톤 (Platon, BC.427-347)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귀족 출신. 40세경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열어 교육에 임하였으며, 또한 많은 저작(30권이 넘는 대화편)을 썼다. 그의 철학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당시의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사상과 대립하였다.

 

그는 유명한 이데아설을 제창, 이데아(혹은 eidos=형상)는 비물질적, 영원, 초세계적인 절대적 참실재이며 이에 대하여 물질적, 감각적인 존재는 잠정적, 상대적이고, 이 감각에 호소하는 경험적인 사물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모상(模相)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 영혼이며, 인간의 영혼은 세계 영혼이 주재하는 이데아계에 있던 것으로 이 영혼은 불멸(不滅)이며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에서 진정한 인식이 얻어진다고 하였다.

 

감각적 지식은 단순한 '억견'(doxa)에 지나지 않고 영혼에 의한 지적 직관으로써 상기되는 것이 참지식으로, 이들 양자 사이에는 합리적 지식인 수학적 대상의 지식이 있다. 이때 그는 개념적 인식에 대하여 변증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점차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진하여, 가장 일반적인 것에 이르는 과정과, 이 발전적 개념으로부터 점차 일반성의 낮은 단계로 하향(下向)하는 2개의 과정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는 육체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영혼에 의해 이데아계를 인식하는 곳에 인간의 최고의 기쁨이 있으며, 철학자는 현실 세계를 이 이상에 근접(近接) 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아테네 귀족의 대표로서 이상적 귀족국가의 구상을 내놓고 철학자에 의한 지배를 제창하여 이 지배자 아래에 군인이 있고 그 아래에 상인이 있는 계층을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가 영혼에는 이성적, 의기적(意氣的), 욕정적(欲情的)인 것이 있다고 한 것에 대응한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 후 계속 관념론 철학에 강력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철학사전], 중원문화

 

 

차례

 

머리말

일러두기

 

<에우티프론> 편

해제

대화자들

목차

 

I. 시작하는 대화(2a~5d)

1. 에우티프론이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이유를 들음(2a~3e)

 

2. 에우티프론이 자기 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하게 된 경위를 소크라테스가 들음(3e~4e)

 

3. 소크라테스가 에우티프론에게 ‘경건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청함(4e~5d)

 

II. '경건함‘에 대한 첫 번째 강의: 사례 열거를 통한 의미 규정의 잘못(5d~6e)

1. 에우티프론이 살인, 성물 절취 따위의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한 기소와 같은 사례를 들어, 이를 ‘경건한 것’이라 말함(5d~6c)

2. ‘경건함’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한두 가지 사례가 아닌, 그것의 ‘특성’ 자체에 대한 것임을 환기시킴(6c~11b)

 

III. 두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6e~11b)

1. ‘경건함’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 이에 대한 검토(6e~9c)

2. ‘경건함’은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것’; 이에 대한 검토(9d~11b)

3.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경건함’의 우유성일 뿐 본질이 아님이 지적됨(11a~b)

 

IV. 맥이 빠진 에우티프론에게 소크라테스가 협력을 약속하며 성원을 함(11b~e)

 

V. 세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11e~14a)

1. 올바름의 한 부분인 경건함(신성함): 최근류(最近類)와 종차(種差)(12c~e)

2. ‘경건함’은 신들에 대한 섬김이다.

 

VI. 네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14a~15c)

1. ‘경건함’은 신들한테 제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 데 대한 일종의 앎이다.

2. ‘경건함’은 신들에게 만족스런 것(마음에 드는 것)들을 말하고 행하는 것: ‘신들한테 사랑받는 것’이라는 두 번째 정의로 되돌아감.

 

VII. 대화의 종결(15b~16a)

1. ‘경건함’이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고찰할 것을 소크라테스가 제의함.

2. 이를 에우티프론이 훗날로 미룸.

 

 

<소크라테스의 변론> 편

해제

목차

I.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17a~35d)

1. 법정에 처음 서는 늙은이의 말투에 대한 이해를 구함(17a~18a)

2. 고발인들을 두 부류로 나눔(18a)

3. 법정 고발 이전에 자신에 대한 선입관을 갖게 한 최초의 고발인들과 이들에 대한 변론(18b~24b)

1) 자신을 자연에 대한 탐구자로 잘못 말함(19a~d)

2) 자신을 소피스테스로 잘못 앎(19d~20a)

4. 자신에 대한 비방들을 생기게 한 특이한 일과 그 이후의 행각(20c~24a)

1) 델피 신탁의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응답을 전해 들음(20c~21a)

2) 신탁의 응답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러 나섬(21b~22e)

(1) 정치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1c~e)

(2) 시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2a~c)

(3) 장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2d~e)

3) 이들에 대한 캐물음으로 증오심을 사는 한편으로 자신이 현자로 소문이 남(23a)

4) 신탁의 응답이 뜻하는 바를 확인함: 무지의 자각이 곧 지혜임을 깨달음(23b)

5) 한가로운 젊은이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어 잘난 사람들에게 캐묻고 다님(23c)

6) 이로 인해 망신당한 자들이 자기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신들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함(23d~e)

5. 멜레토스 등 나중의 고발인들에 대한 신문(24b~28a)

1)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과 관련하여(24b~26a)

2)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과 관련해서(26b~27e)

6. 신이 지시한 사명에 대한 의식(28a~34b)

1) 자신에게 부과된 여러 가지 사명(28a~31c)

2) ‘영적인 것’ 또는 ‘영적인 알림’에 대하여(31c~d)

3) 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저항(32a~e)

4) 자신의 행각에 대한 증언을 요구함(33b~c)

7. 자신의 변론 태도와 관련해서: 무죄 판결을 애걸하지 않는 까닭(34b~35d)

 

II. 사형 구형에 대한 반대 제의를 벌금형으로 하는 것과 관련된 진술(35e~38b)

 

III. 최후진술(38c~42a)

1. 사형판결의 결과에 대해(38c~39b)

2. 유죄판결을 내린 이들에 대해(39c~d)

3. 무죄 방면을 위해 투표한 이들에 대해(39e~41d)

4. 모두를 향한 부탁과 작별(41d~42a)

 

 

<크리톤> 편

해제

목차

I. 대화의 시작(43a~44b)

 

II. 크리톤이 탈옥을 종용함(44b~46a)

1. 친구를 잃고 돈이 아까워 친구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많은 사람(다중)이 나쁜 평판도 듣게 될 일을 걱정하여(44b~45a)

2. 다른 나라로 가는 일이 다 잘될 것임을 말함(45b~c)

3. 자식들의 양육과 교육 문제를 생각할 것을 권유함(45c~d)

4. 친구를 어떻게든 구해내지 못한 소심함을 탓할 사람들의 평판을 두려워함(45e~46a)

 

III. 소크라테스의 대답(46b~54e)

1. 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46b~49a)

1) 최선의 것으로 판단되는 원칙의 준수를 말함(46b~c)

2) 많은 사람의 의견들(평판들)에 대하여(46c~47d)

3) 건강과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의 의견 아닌 한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함을 강조함(47d~48a)

4)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이에는 많은 사람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님을 말함(48a~b)

2. 이에 근거하여 판단할 두 가지 준칙(49a~50a)

1) 어떤 식으로든 고의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949a~e)

2) 합의한 것이 올바른 것인 한, 이는 이행해야만 한다(49e~50a)

3. 소크라테스와 의인화된 법률 및 시민 공동체 사이의 대화(50a~54d)

대화자들

 

 

<파이돈> 편

해제

목차

I. 대화에 들어가기에 앞서(57a~61c)

1. 소크라테스와의 담화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선 첫머리 대화957a~59c)

2. 감옥으로 소크라테스를 찾아간 친구와 제자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눔(59c~61c)

 

II. 죽음과 관련된 논의(61c~69e)

1. 자살에 대해 논의함(61c~62e)

2.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와 죽음(63a~69e)

1) 죽음이 몸에서 혼이 벗어나는 것인 한, 그리고 철학자가 몸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한, 그는 죽음을 추구해 온 것임을 환기시킴(64a~e)

2) 혼 자체만으로 얻게 되는 지혜와 참된 훌륭함(덕): 혼의 순수화: 사후의 문제와 관련된 낙관적 희망(65a~69e)

 

III. 혼의 불멸성에 대한 논의(69e~107b)

1. 케베스가 혼의 불멸성이 증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함(69e~70c)

2.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논변(70c~77d)

1) 대립되는 것들은 대립되는 것들에서 생긴다는 원리 또는 윤회설에 입각한 논변(70c~72e)

2) 상기설에 입각한 논변: 배움은 상기함이며, 그 앎의 대상들은 ‘아름다움 자체’나 ‘좋음 자체’와 같은 형상들이다(72e~77a)

3) 시미아스와 케베스는 이를 반쪽의 논증이라 하며 나머지 논증까지 요구함; 태어나기 전의 혼이 있었다 해서 사후에도 그것이 있다는 게 논증되는 것은 아니라며(77b~78a)

3.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논변: 닮음, 유사성에 의한 논증(78b~84b): 있는 것들의 두 종류 중에서 형상을 닮은 혼은 죽지 않는 것임을 말함.

4. 두 번째 논변에 대한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의문 제기(84d~88b)

1) 시미아스의 의문 제기: 조율된 조화 현상에 빗댄 혼(85b~86d)

2) 케베스의 의문 제기: 여러 차례 거듭나더라도, 마지막 몸보다는 오래가지 못할지 모르는 혼(86e~88b)

5. 막간(88c~91c)

6. 시미아스의 의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91c~95a)

7. 케베스의 의문(95b~96a)

1) 그 요지의 재정리:혼은 전적으로 죽지 않으며 파되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 달라는 요구(95b~e)

2)케베스의 요구는 결국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 전반에 관련된 원인 구명을 요구하는 것이 됨(95e~96a)

8. 케베스의 요구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자연 탐구와 관련된 자신의 편력과 자신이 택한 차선의 방법에 대해서 말하게 함(95e~102a)

9.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논변: 형상 이론에 입각해 논변을 함(102a~107b)

 

IV. 신화: 저승 또는 참된 지구에 대한 이야기(107c~115a)

 

V. 소크라테스의 최후 장면과 그의 죽음(115a~118a)

 

 

관련 사진

참고 문헌

고유명사 색인

내용 색인

   

<에우티프론> 편

 

해제

대화자들

 

I. 시작하는 대화(2a~5d)

1. 에우티프론이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이유를 들음(2a~3e)

 

2. 에우티프론이 자기 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하게 된 경위를 소크라테스가 들음(3e~4e)

 

3. 소크라테스가 에우티프론에게 ‘경건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청함(4e~5d)

 

II. '경건함‘에 대한 첫 번째 강의: 사례 열거를 통한 의미 규정의 잘못(5d~6e)

1. 에우티프론이 살인, 성물 절취 따위의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한 기소와 같은 사례를 들어, 이를 ‘경건한 것’이라 말함(5d~6c)

 

2. ‘경건함’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한두 가지 사례가 아닌, 그것의 ‘특성’ 자체에 대한 것임을 환기시킴(6c~11b)

 

III. 두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6e~11b)

1. ‘경건함’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 이에 대한 검토(6e~9c)

[8c]소크라테스: 에우티프론,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걸 시인하면서도, 그래 그걸 시인해 놓고서도, 그렇더라도 자신들이 처벌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오?

에우티프론: 결코 그리 하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들이 온갖 짓과 온갖 말을 다 하지는 않소. 자신들이 비록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처벌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걸 감히 말한다거나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오. 다만 자신들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단는 게 내 생각이오. 아니 그렇소?

에우티프론: 참된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자가 벌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그 주장을 그들이 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이걸, 즉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쪽이 누구이며 무슨 짓을 했고 또 언제 했는지를 두고 말다툼을 하는 것일 게요.[8d]

 

[R-Commentary] 다시 말해 ‘올바름’이라는 실체적이고 불변하는 ‘기준’(idea)이 있으며, 사람들은 보통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스스로는 그것을 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데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고 그것에 대한 ‘잘못된 정당화’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여기서 horismos katholou로서의 보편적 정의를 내리기 위해 ‘행위’와 ‘판단’ 쪽에 오류 가능성을 두는 셈이다. 과연 그럴 것인가?

 

2. ‘경건함’은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것’; 이에 대한 검토(9d~11b)

[10a]소크라테스: (...) 우리는 ‘운반되는 [어떤] 것’과 ‘운반하는 [어떤] 것’, ‘이끌리는 것’과 ‘이끄는 것’,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거니와 (...)

(...)

[10b]그러니까,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그것은 보이는 것이오. 또한 그것이 이끌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그것이 이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끌리기 때문에, 이 때문에 그것은 이끌리는 것이오.

(...)

[10c]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오. 즉 만약에 어떤 것이 생성되거나(무엇으로 되거나) 무엇을 겪는다면, 그것이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생성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생성되기 때문에 생성되는 것이오. 또한 그것이 겪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겪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겪기 때문에 그것은 겪는 것이오. (...) 즉 그것이 사랑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한테서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사랑받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받는 것이라는 게 말이오.

(...)

[10d]그러니까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 그것이 사랑을 받기 때문에 즉 이 이 때문에 경건하지는 않겠소? (...) 그렇다면 에우티프론! 당신이 말하듯,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경건한 것이 아니고, 경건한 것이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니니, 둘은 서로 다른 것이오.

 

[R-Commentary] 생성과 주체, 또는 겪는 것과 겪음을 당하는 것, 그것은 다르다. 이 복잡한 논변은 뒤에 이어질 ‘본질’과 ‘속성’(우유성)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플라톤이 각각의 현존에 대해 실체(ousia)를 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

(...)

[10e]경건한 것은 이 때문에, 즉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받게 되지, 그것이 사랑받기 때문에 경건하지는 않다는 데 우리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오. (...) 반면에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신들한테서 사랑을 받기 때문에, 즉 바로 이 ‘사랑받음’(phileisthai)으로 인해서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지, 그것이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즉 이 때문에 사랑을 받게 되는 게 아니라는 데도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오.

 

3.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경건함’의 우유성일 뿐 본질이 아님이 지적됨(11a~b)

[11a]당신은 경건함(경건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고서는, 내게 그것의 본질(ousia)을 밝히려고 하지는 않고, 그것과 관련된 어떤 성상(性狀, 偶有性, 속성: pathos)을, 말하자면 이 경건함이 처한 상태를, 곧 모든 신한테 사랑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소.

 

☞ ousia와 pathos를 대비 진술한 것은 플라톤의 문헌 중 이곳이 처음이다. ousia는 이전에는 ‘자산’이란 뜻의 일상어였는데,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플라톤에 이르러 완연한 철학적 의미를 띄게 된다. 이 낱말은 ‘자산’(property, substance)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본질’(essence), ‘실재성’(reality), 존재(being) 등을 의미한다. 이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의 중기 이후 대화편과는 달리 ‘실재성’이나 ‘존재’의 의미보다, ‘본질적 정의’의 단면을 드러낼 뿐이다. 흔히 ‘실체’로 번역되는 substance는 라틴어 substantia에서 유래되고, 이는 바로 ousia에 상응한다.

 

IV. 맥이 빠진 에우티프론에게 소크라테스가 협력을 약속하며 성원을 함(11b~e)

 

V. 세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11e~14a)

1. 올바름의 한 부분인 경건함(신성함): 최근류(最近類)와 종차(種差)(12c~e)

 

2. ‘경건함’은 신들에 대한 섬김이다.

 

VI. 네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14a~15c)

1. ‘경건함’은 신들한테 제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 데 대한 일종의 앎이다.

[14d]그렇다면 옳게 청을 한다는 것은 그들한테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들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하오? (...)

[14e]그와는 달리, 옳게 바친다는 것은 우리한테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들에게 보답으로 바치는 것이겠소? 어떤 사람에게 전혀 필요로 하지도 않은 그런 것을 그에게 선물로 바친다는 것은 어쩌면 제대로 알고서 하는 짓(technikon)이 아니겠기 때문이오.

(...)

그렇다면, 에우티프론! 경건은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일종의 거래 기술(교역술: emporikē, technē)일 것이오.

 

2. ‘경건함’은 신들에게 만족스런 것(마음에 드는 것)들을 말하고 행하는 것: ‘신들한테 사랑받는 것’이라는 두 번째 정의로 되돌아감.

 

VII. 대화의 종결(15b~16a)

1. ‘경건함’이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고찰할 것을 소크라테스가 제의함.

 

2. 이를 에우티프론이 훗날로 미룸.

 

<소크라테스의 변론> 편

 

해제

 

I.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17a~35d)

1. 법정에 처음 서는 늙은이의 말투에 대한 이해를 구함(17a~18a)

 

2. 고발인들을 두 부류로 나눔(18a)

 

3. 법정 고발 이전에 자신에 대한 선입관을 갖게 한 최초의 고발인들과 이들에 대한 변론(18b~24b)

1) 자신을 자연에 대한 탐구자로 잘못 말함(19a~d)

 

2) 자신을 소피스테스로 잘못 앎(19d~20a)

 

4. 자신에 대한 비방들을 생기게 한 특이한 일과 그 이후의 행각(20c~24a)

1) 델피 신탁의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응답을 전해 들음(20c~21a)

[20d]아테네인 여러분! 제가 이 이름(명성)을 얻게 된 것은 어떤 지혜(sophia)로 인해서랍니다. 그러면 이건 어떤 지혜이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지혜일 것입니다.

 

2) 신탁의 응답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러 나섬(21b~22e)

(1) 정치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1c~e)

(2) 시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2a~c)

(3) 장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2d~e)

 

3) 이들에 대한 캐물음으로 증오심을 사는 한편으로 자신이 현자로 소문이 남(23a)

 

4) 신탁의 응답이 뜻하는 바를 확인함: 무지의 자각이 곧 지혜임을 깨달음(23b)

 

5) 한가로운 젊은이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어 잘난 사람들에게 캐묻고 다님(23c)

 

6) 이로 인해 망신당한 자들이 자기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신들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함(23d~e)

 

5. 멜레토스 등 나중의 고발인들에 대한 신문(24b~28a)

1)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과 관련하여(24b~26a)

[26a]그러나 내가 본의 아니게 그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면, 법은 그런 잘못들로 이리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붙잡고서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오. 내가 알아듣게 될 경우에는, 내가 본의 아니게 하는 것이면 그만두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2)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과 관련해서(26b~27e)

[26d]보시오, 멜레토스! 그대는 자신이 아낙사고라스를 고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대는 그래 여기 이분들을 그처럼 무시하여, 클라조메나이 사람인 아낙사고라스의 책이 그런 주장들로 꽉 차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문맹이라고 생각하오?

 

6. 신이 지시한 사명에 대한 의식(28a~34b)

1) 자신에게 부과된 여러 가지 사명(28a~31c)

[29a]여러분! 실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현명하지도 않으면서 현명한 것으로 행각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왜냐하면 아무도 죽음을 모르며, 그것이 인간에게 좋은 모든 것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것인지조차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나쁜 것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찌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는 그 비난받을 무지가 아니겠습니까?

 

[R-Commentary] 이 진술은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의 언급과 너무나 닮았다. 과연 [파이돈]의 소크라테스와 [변론]의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은 왜 다른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루크레티우스의 다음 언급 참조: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

정신의 본성이 필멸적인 것으로 드러나 있는 한.

(...)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서로 하나로 합쳐져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때는 분명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우리에게,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도 감각을 일으킬 수 없으리라

(...)

죽음 속에는 우리가 두려워할 게 전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비참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또 일단 불멸의 죽음이 필멸의 생명을 데려가버리면,

그가 언젠가 태어났었든,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었든, 이제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830~869행)

 

[30c]만일에 여러분께서 제 스스로 말씀드리고 있는 그런 사람인 저를 사형에 처하신다면, 여러분께선 저를 해치시기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을 더 해치시게 될 것이라는 걸 잘 아시고 계십시오. 멜레토스도 아니토스도 전혀 저를 헤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30d]저는 한결 나은 사람이 한결 못한 사람에 의해서 해를 입는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2) ‘영적인 것’ 또는 ‘영적인 알림’에 대하여(31c~d)

 

3) 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저항(32a~e)

[32c]제가 구금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여, 올바르지 못한 결정을 내리려는 여러분 편이 되느니보다는 오히려 법(nomos)과 올바른 것(to dikaion)의 편이 되어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이 나라가 아직은 민주 체제였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R-Commentary] 소크라테스의 이 언급 마지막 문장을 잘 봐야 한다. nomos는 민주체제일 때 위험을 무릅쓰고 지킬만 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아테네’에서 nomos는 불합리할 경우 지킬만한 권위를 시민들에게 제기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새겨야 한다.

 

4) 자신의 행각에 대한 증언을 요구함(33b~c)

 

7. 자신의 변론 태도와 관련해서: 무죄 판결을 애걸하지 않는 까닭(34b~35d)

 

II. 사형 구형에 대한 반대 제의를 벌금형으로 하는 것과 관련된 진술(35e~38b)

 

III. 최후진술(38c~42a)

1. 사형판결의 결과에 대해(38c~39b)

[38d]죽음을 피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비천함(poēria)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보다도 더 빨리 내닫기 때문입니다.

 

2. 유죄판결을 내린 이들에 대해(39c~d)

 

3. 무죄 방면을 위해 투표한 이들에 대해(39e~41d)

[40c]죽는다는 것은 둘 가운데 하나이겠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를테면, 아무 것도 아닌 것(mēden)이어서, 죽은 자는 아무 것에 대한 아무 감각(aisthēsis)도 갖지 않거나, 또는 전해 오는 바대로, 그것은 일종의 변화(metabolē)이며 혼(psychē)에는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주(metoikēsis)일테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정녕 아무 감각도 없는 상태이기는 하나, 그것이 이를테면, 잠자는 사람이 아무 꿈도 꾸지 않을 경우의 수면상태(hypnos)라면, 죽음은 놀라운 이득일 것입니다. (...) [40e]그러므로 만약에 죽음(thanatos)이 그런 것이라면, 저로서는 그것을 이득이라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간이란 것도 바로 이처럼 하룻밤보다 전혀 더 길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죽음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리고 전해 오는 말이, 즉 죽은 자들이 그래서 모두 거기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재판관 여러분, 이보다 더 크게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41a]만일에 누군가가 스스로 재판관들이라고 주장하는 이곳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저승(하데스)에 이르러, 진짜 재판관들을, 즉 그곳에서도 재판을 한다고 하는 바로 그 재판관들인 미노스와 라다만티스 및 아이아코스 그리고 트리프톨레모스를, 그리고 또 그 밖의 분들로, 반신 반인들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일생을 통해서 올발랐던 분들을 그가 보게 된다면, 그런 경우에도 이 떠나감이 하찮은 것일까요? 또는 이번에는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 헤시오도스 그리고 호메로스와 접하게 되는 대가로 여러분 가운데 누구라면 얼마를 지불할까요? 만약에 이것이 진실이라면, 몇 번이고 죽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 [41b]그리고 무엇보다도 굉장한 것은, 제가 이곳 사람들한테 했듯, 그곳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지혜롭고 또 누가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지, 그들에게 캐묻고 시험을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4. 모두를 향한 부탁과 작별(41d~42a)

[41d]재판관 여러분! 여러분 또한 죽음에 대해서는 희망차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한 가지는 진실이라고 생각해야만 하고요. 즉 선량한 사람에게는, 그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간에 그 어떤 나쁜 일도 없으며, 또한 이 사람의 일들을 신들이 소홀히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크리톤> 편

 

해제

[200]“정녕 이런 조건으로[철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저를 방면하려 하신다면, 저는 여러분께 말할 것입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반기며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신께 복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리고 할 수 있는 동안까지는,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것도, 여러분께 충고를 하는 것도, 그리고 언제고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 만나게 되는 사람한테 이 점을 지적하는 것도 그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29c~d) 그는 여기서 당당하게 나라에 대한 불복종을 공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더 상위의 것이라 할 델피의 신에 대한 복종을 내세우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Santas는 지난 1세기 동안 제기되어 온 문제로서, 《변론》편과 《크리톤》편 사이에 어떤 불일치가 있지 않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걸로 말하며, 퍽 재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한 구절을 보자. “우리는 《변론》편에서의 가정적(假定的)인 경우와 《크리톤》편에서의 현실적인 경우를 대하는 데 잇어서 소크라테스가 일관성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변론》편에서는 가정적인 경우에 있어서의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시민적 저항, 또는 양심적 거부의 한 사례이다. … 반면에 감옥에서 [201]탈출함은 법률에 대한 은밀하고 회피적인 불복 행위이며, … 법률과 나라를 해치는 행위이다. … 무엇보다도 우선 두 작품의 극적인 계기들이 매우 다른다. 《변론》편에서는 그가 자기의 온 생애이기도 했던 자기 일에 대한 공개 재판을 받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는 오랜 세월 동안의 그에 대한 모든 비방에 대항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같은 시민들에게 자기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던 이 일에 가치를 부여하게 될 … 적절한 때며 아마도 마지막 시점이다. … 그러나 《크리톤》편에서는 이 모든 것이 지난 일이다. 그의 일이 옳고 좋은 것이라는 걸 아테네인들에게 납득시키는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그의 일과 그의 삶이 의거했던 그 원칙들과 그가 온 생애에 걸쳐 택하였던 그리고 법정에서 택하였던 선택들을 지키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54~5면)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그런 원칙의 준수와 그런 선택은 현실의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일생을 통해 개선하여 이룩하고자 한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R-Commentary] 이 문제는 아마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박종현 선생은 여기서 인용한 Santas의 의견과는 좀 다르게 소크라테스가 ‘조국의 실정법’보다 ‘자신이 원하는 어떤 법’을 원했다고 본다.

 

대화자들

I. 대화의 시작(43a~44b)

 

II. 크리톤이 탈옥을 종용함(44b~46a)

1. 친구를 잃고 돈이 아까워 친구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많은 사람(다중)이 나쁜 평판도 듣게 될 일을 걱정하여(44b~45a)

[44c]소크라테스: 하지만 여보게 크리톤! 왜 우리가 많은 사람의 의견(평판)에 대해서 그처럼 마음을 쓰게 되지? 더 종중해야 할 가장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 일이 의당 그렇게 되어야 하듯, 그런 식으로 처리되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일세.

 

2. 다른 나라로 가는 일이 다 잘될 것임을 말함(45b~c)

 

3. 자식들의 양육과 교육 문제를 생각할 것을 권유함(45c~d)

 

4. 친구를 어떻게든 구해내지 못한 소심함을 탓할 사람들의 평판을 두려워함(45e~46a)

 

III. 소크라테스의 대답(46b~54e)

1. 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46b~49a)

1) 최선의 것으로 판단되는 원칙의 준수를 말함(46b~c)

2) 많은 사람의 의견들(평판들)에 대하여(46c~47d)

3) 건강과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의 의견 아닌 한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함을 강조함(47d~48a)

4)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이에는 많은 사람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님을 말함(48a~b)

[48b]그리고 이것 또한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사는 것(to zēn)이 아니라 훌륭하게(잘) 사는 것(to eu zēn)이라고 함이 우리에게 있어서 여전히 타당한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 다시 생각해 보게나.

(...) ‘훌륭하게’(잘: eu)는 ‘아름답게’(훌륭히, 멋지게: kalōs) 및 ‘올바르게’(dikaiōs)와 동일한 것 (...)

 

2. 이에 근거하여 판단할 두 가지 준칙(49a~50a)

1) 어떤 식으로든 고의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949a~e)

2) 합의한 것이 올바른 것인 한, 이는 이행해야만 한다(49e~50a)

 

3. 소크라테스와 의인화된 법률 및 시민 공동체 사이의 대화(50a~54d)

[51e: 의인화된 법률의 대사]그대들 가운데 누구든, 우리가 재판을 하거나 또는 다른 일들에 있어서 나라를 경영하는 방식을 보고서도 머무른다면, 우리는 이미 이 사람이, 우리가 시키는 것들은 이행하기로 우리와 사실상 합의한 것이라고 보아, 또한 복종하지 않는 자는 삼중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보고, 그건 자기를 태어나게 한 우리에게 불복한 때문이요, 자기를 양육한 우리에게 불복한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복종하기로 합의하고서도 복종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우리가 무언가 잘못할 경우에 우리를 납득시키지도 않기 때문이지.

(...) [52d]시민생활을 함에 있어서 그대가 따르기로 우리와 맺은 계약(synthēke) 사항들과 합의사항들을 어기고서 도망하려 함으로써, 그대는 가장 미천한 노예나 함직한 바로 그런 짓거리들을 하고 있느니라.

 

[R-Commentary] 소크라테스가 의인화한 이 ‘법률’의 대사를 살펴보자면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결코 국가와 법에 대한 ‘맹목적 복종’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더 명백히 알 수 있다. ‘합의’나 ‘계약’을 깨는 것은 ‘미천한 짓’이라는 전제가 이 대사에는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실상 이 합의는 ‘암묵적 합의’로서 그것의 근본적인 정당성 여부는 소크라테스가 이 순간에 더 이상 묻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충분히 ‘납득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이 논변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와 논변의 중요한 근거 하나를 누락하고 있는 게 되는 샘이다. 고의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54b]자식들도, 사는 것도, 또는 그 밖의 어떤 것도 올바른 것(to dikaion)보다 더 귀히 여기지 말라.

 

<파이돈> 편

해제

목차

I. 대화에 들어가기에 앞서(57a~61c)

1. 소크라테스와의 담화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선 첫머리 대화957a~59c)

 

2. 감옥으로 소크라테스를 찾아간 친구와 제자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눔(59c~61c)

[60e]지나간 나의 생애에 있어서 똑같은 꿈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내게 나타나서는,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똑같은 것들을 말하는 거야. ‘소크라테스여, 시가를 지어라, 그리고 이를 일삼아 하라’고 말하는 거야. (...) 그래서 이 꿈은 이처럼 내가 해 오던 이 일을, 즉 시가를 짓도록 나에게 성원을 해주었네. 철학(philosophia)은 가장 위대한 시가(megistē mousikē)인데,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기 때문이지.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철학과 시가를 동일시하고 있지만 이 뒤에 곧 ‘통속적인 시가’를 지어 보았노라고도 한다.]

 

II. 죽음과 관련된 논의(61c~69e)

1. 자살에 대해 논의함(61c~62e)

 

2.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와 죽음(63a~69e)

1) 죽음이 몸에서 혼이 벗어나는 것인 한, 그리고 철학자가 몸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한, 그는 죽음을 추구해 온 것임을 환기시킴(64a~e)

[63e]진정으로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 philosophia)으로 생애를 보낸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죽음에 임하여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는 저승에서 최대의 좋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을 것이 당연하다 (...)

[64a]철학에 옳게 종사하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다름 아닌 죽는 것[apothenēiskein=to die=dying]과 죽음[tethnanai=to be dead=being dead]을 스스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으이. 그러니,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며, 온 생애를 통하여 다름 아닌 그것을 열망해 오다가, 오래도록 스스로 열망도 하며 추구하여 오기도 하던 것이 막상 자기에게 닥쳐왔을 때는 성을 낸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짓일 것이네.

 

2) 혼 자체만으로 얻게 되는 지혜와 참된 훌륭함(덕): 혼의 순수화: 사후의 문제와 관련된 낙관적 희망(65a~69e)

[65c]적어도 혼이 가장 훌륭하게 추론을 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즉 청각도 또는 어떤 고통이나 즐거움도 혼의 주의를 돌려놓으면 괴롭히는 일이 없고, 혼이 몸과 결별하여 최대한으로 그 자체로만 있게 되며, 혼이 가능한 한 몸과 관계하지도 접촉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진실: to on)에 이르고자 하는 그때일 걸세.

 

[67c~d]순수화(정화: katharsis)는 (...) 혼을 몸에서 되도록 분리하고(chōrizein), 몸이 모든 부분에서 혼이 그 자체로만 합쳐 모이고 결집되게 하여, 현재에 있어서나 이후에 있어서나, 마치 사슬에서처럼 몸에서 혼을 풀려나게 해서, 가능한 한 혼이 그 자체로 홀로 살아가게끔 버릇을 들이는 것 (...)

 

[67d]이것이 실은 죽음이라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몸에서의 혼의 풀려남(lysis)과 분리(chōrismos)가 아니겠는가?

(...) 혼을 풀려나게 하는데 언제나 가장 열심인 사람들은, 우리가 주장하듯, 오직 제대로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사람들(hoi philosophountes)뿐이거니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들: philosophoi)의 수련(meletēma)이란 것도 바로 이것, 즉 몸에서의 혼의 풀려남과 분리이겠지?

(...) [68a]누군가가 참으로 지혜(phronēsis)를 사랑하고, 같은 이 기대를, 즉 저승에서가 아니고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제대로 지혜를 접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죽게 되매 성을 내며 그곳으로 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을까? (...) 그런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아주 불합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 [68c]그러니까 절제(sōphrosynē)도, 많은 사람(다중: hoi polloi) 또한 그렇게 일컫는 것으로서, 욕망들과 관련해서 몹시 흥분한 상태로 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절도를 유지한다는 것도, 이 사람들만에, 즉 누구보다도 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 속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지 않겠는가?

 

III. 혼의 불멸성에 대한 논의(69e~107b)

1. 케베스가 혼의 불멸성이 증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함(69e~70c)

2.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논변(70c~77d)

1) 대립되는 것들은 대립되는 것들에서 생긴다는 원리 또는 윤회설에 입각한 논변(70c~72e)

[70c]대립되는 것들(ta enantia)은 대립되는 것들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도 생기지 않는 것인지 (...)

(...)[71d]살아있음에 대해 죽어있음이 대립되는 것 (...) 그것들은 서로한테서 생기고 (...)

 

2) 상기설에 입각한 논변: 배움은 상기함이며, 그 앎의 대상들은 ‘아름다움 자체’나 ‘좋음 자체’와 같은 형상들이다(72e~77a)

[74a]상기함은 닮은(유사한) 것들(homoia)로 해서 성립되기도 하지만, 닮지(유사하지) 않은 것들(anomoia)로 해서도 성립하는 게 아니겠는가? (...) 그러나 닮은(유사한) 것들로 해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아무튼 상기하게 될 때는, 그가 이런 걸 아울러 겪게(경험하게) 되는 게, 즉 상기함의 실마리가 된 것이 그가 상기하게 된 것과 그 유사성(닮음: homoiotēs)에 있어서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또는 아니한지를 생각하게 되는 게 필연적이지 않겠는가? (...) 짐작건대 우리는 같은(동일한: ison)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겠지? 나는 나무토막이 나무토막과, 돌이 돌과 같음을, 또 그런 등속의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를, 즉 같음(동일함) 자체(auto to ison)를 말하고 있는 걸세. (...) [74b]우리는 이것에 대한 앎(지식: epistēmē)을 어디에서 얻게 되었는가? (...) [74d]누군가가 뭔가를 보고서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할 경우에, 즉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다른 어떤 것과 같은 그런 것으로 되려고 하지만, [74e]그것과 같은 그런 것으로 되기에는 부족하기도 하고, 또한 될 수도 없거니와 훨씬 하찮은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경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은, 이것이 닮기는 했으되(proseoikenai) 훨씬 모자란다고 그가 대비하여 말하고 있는, 그 대상을 먼저 알고 있었을 것임이 어쩌면 필연적일 거라는 데 대해 우리는 동의하고 있는가? (...) 그와 같은 일은 우리 또한 같은 것들(ta isa)과 같음 자체(auto to ison)와 관련해서도 겪었을(경험했을) 게야. (...) 따라서 우리가 처음에 같은 것들을 보고서, 이것들 모두가 같음(to ison)과 같은 그런 것으로 되려고 하지만 훨씬 모자란다는 생각을 하게 된 때의 그 시간보다는 이전에 우리가 같음을 먼저 알고 있는(proeidenai) 게 필연적일세.

 

3) 시미아스와 케베스는 이를 반쪽의 논증이라 하며 나머지 논증까지 요구함; 태어나기 전의 혼이 있었다 해서 사후에도 그것이 있다는 게 논증되는 것은 아니라며(77b~78a)

 

3.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논변: 닮음, 유사성에 의한 논증(78b~84b): 있는 것들의 두 종류 중에서 형상을 닮은 혼은 죽지 않는 것임을 말함.

[80e]바르게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것 (...) 가벼운 마음으로 죽는 것 (...) 죽음의 수련 (...)

 

[81a]혼은 자기와도 닮은 것인(to homoion) 보이지 않는 것(to aides), 즉 신적이며 죽지 아니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이 있는 데로 떠나가, 이곳에 이른 혼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니 (...) 그렇다면 이들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자들은 그리고 가장 좋은 곳으로 가는 자들은 평민적이고 시민적인 훌륭함(덕)(hē dēmotikē kai politikē aretē)을 닦은 이들이 아니겠는가? [82b]바로 이것을 사람들이 절제(건전한 마음 상태; sōphrosynē) 및 올바름(정의: dikaiosynē)이라 일컫는데, 이는 철학이나 지성(nous)을 거치지 않은 채 습관(ethos)과 단련(수련: meletē)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네만.

 

[84a]오히려 그[철학자]의 혼은 추론(헤아림: logismos)을 따르며 언제나 이에 열중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해 평온함을 갖추고, 참된 것(to alēthes)과 신적인 것(to theion), 그리고 의견(doxa)의 대상이 아닌 것(to adoxaston)을 바라보며, 이런 것에 의해 양육되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할뿐더러, 죽어서도, 동류의 것(to syngenes)과 그와 같은 것한테로 가서, 인간적인 나쁜 것들에서 해방될 것으로 생각하네. (...) 그의 혼이 (...) 사방으로 흩날리어 날아가 버리고 아무 것도 어디에고 남아 있지 않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혼이 두려워할 위험한 사태는 전혀 없으이.

 

4. 두 번째 논변에 대한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의문 제기(84d~88b)

1) 시미아스의 의문 제기: 조율된 조화 현상에 빗댄 혼(85b~86d)

[85e][시미아스의 반론]어쨌든 제게는 이런 점에서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리라와 현들의 조화(harmonia)에 관련해서도 같은 주장을 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죠. 즉 조율된 조화란 볼 수 없고(aoraton) 물질적이지 않으며(asōmaton) 아주 아름다운(pankalon) 어떤 것이며 조율된 리라에 있어서 신적인 것(theion)이지만, [86a]리라 자체와 현들은 물체들(sōmata)이며 물질적인 성질의 것들이고 복합적인 것들이요, 지상의 것들이며 죽게 마련인 것(to thnēton)과 동류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 현들이 툭 끊기면, 리라와 현들이, 사멸하는 성질의 것들인 터에, 여전히 존재할 아무런 방도도 없지만, [86b]신적이며 사멸하지 않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며 동류의 것인 조율된 조화는 소멸해버리니까요. 그것도 사멸하는 것에 앞서 소멸해버리는 겁니다.

 

2) 케베스의 의문 제기: 여러 차례 거듭나더라도, 마지막 몸보다는 오래가지 못할지 모르는 혼(86e~88b)

[88a][케베스의 반론]이런 것들[영혼의 윤회와 불멸]에 동의해 줄지라도, 다음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동의해주지 않는다면, 즉 혼이 여러 번의 태어남을 견디어내다가 마침내는 죽음들 가운데서 어느 한 차례의 것에서 아주 소멸해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동의해 주지 않는다면, [88b]그러면서도 이 죽음과 혼에도 파멸을 가져다 줄 이번의 몸과의 분리(dialysis)를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 혼이 전적으로 죽지 않는 것이며 파괴도리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죽음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 없이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고서야, 누구에게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지가 못하다면, 죽게 될 사람이 자신의 혼이 몸에서의 이번의 풀려남에서 완전히 소멸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두려워할 게 필연적입니다.

 

5. 막간(88c~91c)

[89d]우리가 논변(논의)을 싫어하는 사람들(misologoi)로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지.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misanthrōpoi)이 되듯이 말일세. 이것보다, 즉 논의(논변)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더한 나쁜 일을 누군가가 겪게 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네. 한데, 논변 혐오(misologia)와 인간혐오(misanthrōpia)는 같은 식으로 생기지.

 

[90e]지금으로서는 나 스스로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세로 임하지 않고 마치 아주 교양 없는 사람들(hoi apaideutoi)처럼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어서네. 왜냐하면 교양없는 사람들도 뭔가에 대해 논쟁을 하게 되면, 그 논변이 다루고 있는 것들의 진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내세운 것들이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데에 열을 올리기 때문일세.

 

6. 시미아스의 의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91c~95a)

 

7. 케베스의 의문(95b~96a)

1) 그 요지의 재정리:혼은 전적으로 죽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 달라는 요구(95b~e)

 

2)케베스의 요구는 결국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 전반에 관련된 원인 구명을 요구하는 것이 됨(95e~96a)

 

8. 케베스의 요구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자연 탐구와 관련된 자신의 편력과 자신이 택한 차선의 방법에 대해서 말하게 함(95e~102a)

[98b]나로서는 이 기대들을 아무리 큰 대가를 받을지라도 단념할 수가 없었거니와, 오히려 그 책들[아낙사고라스의 책들]을 몹시 서둘러 입수해서는, 최대한으로 빨리 읽었는데, 이는 가장 좋은 것(to beltiston)과 한결 못한 것(to kheiron)을 되도록 빨리 알기 위해서였네. 여보게! 정말이지 이 굉장한 기대에서 나는 내침을 당했네. 그건 내가 책을 읽어 나감에 따라 그 사람이 정신(지성: nous)을 전혀 활용하지도 않고, 또한 사물들에 대한 질서 부여(diakosmein)와 관련된 어떤 원인들을 그것에는 돌리지 않으면서도, 공기와 에테르, 물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상한 것들을 원인으로 주장하는 걸 보게 되었기 때문이네.

 

[100d]내가 단순히 그리고 솔직하게 또한 어쩌면 순진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일세. 즉 그것을 아름답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 아름다움의 나타나 있게 됨(parousia)이거나 결합(koinoia)이거나 또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건 간에 말일세. 왜냐하면 내가 아직은 이것이다 하고 자신 있게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to kalon)으로 해서라는 건 자신있게 단언하는 바이기 때문일세.

 

☞ parousia: 영어로는 presence, 불어로는 présence, 독일어로는 Anwesenheit. 플라톤에게 이는 ‘관여’(methexis)와 더불어 이데아 또는 형상이 사물과 관련되는 다른 방식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사물들에 아름다움(아름다움 자체)의 모습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 있게 됨’을 의미한다.

koinoia: 공동체, 협력, 관계, 공동 관여, 공동 관계, 공유, 함께 함, 교합, 결합, 교류, 관계 맺음, 관여 등을 뜻한다.

※ ‘메텍시스’는 사물 쪽에서의 관계 맺음이며, ‘파루시아’는 형상 쪽에서의 관계 맺음, ‘코이노이아’는 상호적인 관계 맺음이다. 남녀의 성적인 관계를 일컫기도 한다.

 

[101b]하나에 하나가 더하여질 경우에 이 더함이 둘로 됨의 원인이라든가 [101c]또는 하나가 나누어질 경우에 이 나눔이 둘로 됨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걸 자네는 조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자네는 큰 소리로 외치겠지. 각각의 것이 ‘생성되는 것’(…로 되는 것: gignomenon)이, 그것이 관여하게 될 각각의 것의 고유한 존재(본질:ousia)에 관여하는 것 말고, 달리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걸 자네는 알지 못한다고 말일세. 이 경우들에 있어서도 자네는 알지 못한다고 말일세. 이 경우들에 있어서도 자네는 둘(dyo)로 됨(to dyo genesthai)의 원인으로 둘인 것(둘임: dyas)에 대한 관여(metaskhesis) 이외의 다른 어떤 원인도 댈 수 없다고, 그래서 둘이고자 하는 것들은 이에 관여해야만 한다고, 그리고 하나(hen)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인 것(하나임: monas)에 관여해야만 된다고 말일세.

 

⇒‘생성’을 ‘본질’에 관련시킴으로써 생성을 목적론에 종속시키는 이 방식이 플라톤의 관념론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데아의 위계가 형성되는 것도 당연할 것이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하고자 한 지점도 이곳이다.

 

 

9.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논변: 형상 이론에 입각해 논변을 함(102a~107b)

 

[102d]그러고보니 내가 문서를 작성하듯 말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실은 내가 말한 대로일 게야.

 

⇒‘문서를 작성하듯 말’한다는 이 고백은 유심히 봐야 한다. 이 고백은 데리다도 자신을 일컬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화의 protocol은 고유한 철학적 스타일이다. 어째서 철학이 가지는 parol에 대한 이 제국주의적인 욕구들.

 

[103b]자네는 방금 말한 것과 그때 말한 것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네. 왜냐하면 그때는 대립되는 사물에서 대립되는 사물(to enantion pragma)이 생긴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대립되는 것(대립자) 자체(auto to enantion)가 자기와 대립되는 것으로 결코 될 수가 없다는 말을 한 것이기 때문일세. 그게 우리 안에 있는(우리에게 있어서의) 것이건 또는 그 본질(본성)에 있어서의 것이건 간에 말일세. 그때는 대립되는 것(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을 그것들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며 이것들과 관련해서 우리가 말했던 것이지만, 방금은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사물들 안에 있게 됨으로써 이것들로 하여금 그런 이름을 갖게끔 해 준 저것들 자체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니까. 그러나 저것들 자체는 상호간의 생성(됨: genesis)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걸세.

 

⇒형상(이데아) 자체는 생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 언급은 플라톤이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106b]죽지 않는 것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면, 혼에 죽음이 닥친다해서, 그것이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거니와 죽은 상태의 것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네. 마치 셋이 짝수일 수 없고, 또한 홀수도 짝수일 수 없고, 불이 찬 것일 수 없으며, 불 속에 뜨거움 또한 찬 것일 수 없다고 우리가 말했듯이 말일세.

 

IV. 신화: 저승 또는 참된 지구에 대한 이야기(107c~115a)

[107c]혼이 과연 죽지 않는 것이라면, 그 보살핌이야말로 비단 우리가 살고 있다(to zen)고 하는 이 기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때를 위해서 요구되네. 그리고 만약에 누군가가 이를 소홀히 한다면 그 위험은 이제 곧 무서운 것일 것으로 생각되네. 만일 죽음이 실은 모든 것에서의 벗어남(apallagē)이라면, 나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천행일 것이니, 이들은 죽음으로써 몸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혼과 함께 자신들의 나쁨(나쁜 상태, 사악: kakia)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 [107d]그러나 실은 혼이 죽지 않는 것인 것 같으므로, 혼이 나쁜 것들에서 벗어나는 길이나 구원책으로는, 혼이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훌륭해지고 지혜롭게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없으이. 왜냐하면 혼이 저승(하데스)으로 가면서 지니고 가는 것으로는 교육(교양: paideia)과 생활방식(trophē)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인데, 이것들이야말로 그곳으로의 여정의 바로 시작 단계에서부터 망자를 가장 크게 이롭도록 해주거나 해롭게 하는 것들이라고도 하네.

 

☞여기서 ‘교육’(교양)은 지혜(phronesis)를 얻은 상태고, ‘생활방식’이란 후천적으로 습관화된 것이다.

 

[113d]거기에서 그들이 기거하면서, 일찍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들에 대해 벌을 받음으로써 정화가 되면, 용서를 받게 된다네. 만약에 누군가가 죄를 지은 일이 있다면 말일세. 또한 선행들에 대해서는, 저마다 거기에 상당하는 보답을 받게 된다네. 그러나 저지른 잘못들의 광범함으로 해서 교정(치유)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자들은 (...) 마땅한 운명(moira)이 이들을 타르타로스 속으로 던지는데 여기에서 영영 이들이 빠져 나오지 못한다네.

 

⇒‘심판’의 주제. 그러나 여기에 어떤 ‘원죄’는 보이지 않는다.

 

[114d]그렇다고 이것들이 내가 이야기한 그대로라고 자신있게 주장한다는 것은 지각 있는 사람에겐 적절치 않으이. (...) 그게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삶에게 있어서는 그게 적절하고도 모험을 할 가치가 있다고 내게는 생각되거니와, 이 모험은 훌륭한 것이니까 이와 같은 것들은 자신에게 주문을 외듯 해야만 해. (...) 바로 이런 이유들로 해서 누구든 이런 사람[혼의 불멸성과 심판을 아는 자]은 자신의 혼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만 하네. 즉, 생애를 통해 몸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hēdonē)들이나 치장(kosmos)들에 대해서는, 제 것 아닌 낯선 것들이며 이롭게 하기 보다는 해롭게 하는 것이라 여기고서, 결별을 하되, 배우는 것(to mathanein)가 관련된 즐거움에 대해서 열의를 보이며, 혼을 낯선 것이 아닌 혼 자체의 장식물(kosmos), 곧 절제(건전한 마음상태: sōphrosynē)와 올바름(정의: dikaiosynē), 용기(andreia), 자유(eleutheria) 그리고 진리(alētheia)로 장식하고서, 이처럼 저승(하데스)으로의 여행을, 정해진 운명이 부를 때는, [115a]떠날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말일세.

 

V. 소크라테스의 최후 장면과 그의 죽음(115a~118a)

[115b]자네들이 자네들 자신들을 돌본다면, 자네들이 뭘 하든, 자네들은 나를 위해서도 내 가족을 위해서도 그리고 또 자네들 자신을 위해서도 기쁠 일을 하게 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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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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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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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희랍어와 라틴어 원전번역을 하는 분들을 꼽자면, 이 책을 번역한 강대진 박사가 속해 있는 '정암학당'의 중견 연구진들과, 서울대 박종현 선생, 그리고 단국대 천병희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열악한 학문적 환경(이 정권 들어와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속에서도 '원전번역'이라는 거의 '고행'에 가까운 길을 걷고 있는 이분들이 있기에 나같은 보잘것 없는 학인들도 공부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유물론자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원전을 접함으로써 그 사실이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명확함'이라는 것은 어쩌면 철학사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초래되는 어떤 부정확한 명확함일수도 있다. 루크레티우스의 경우에 그가 원자론, 그것도 에피쿠로스의 그것을 취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쉽게 오해에 노출되거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

 

흔한 말로 헤도니즘은 '쾌락주의'지만, 조금이라도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번역용어가 매우 심상한 함축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쾌락주의는 '섭생'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특유한 시각이며, 난 그것을 들뢰즈적인 의미에서 '괴물의 시각'이라고 본다. 헤도니즘은 결코 인간중심적인 철학이 아니며, 오히려 '원자'또는 '기초' principium의 철학이다. 세계의 '바닥' 또는 '허공'을 응시하는 괴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을수록 좋다. 괴물들은 바로 우리 자신일수도 있는 것이다.

 

괴물로서의 우리, 세계를 형성하고, 또한 그것의 일부분이 됨으로써 시공간을 하나의 '필연적 우발성'으로 바라보는 그 존재는 따라서 무한한 변화의 잠재성을 장착한 무시무시한 폭탄과 같다.  이런 이유로 헤도니즘은 그 많은 권력자들의 억압대상이 되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정체된 체계, 또는 역사의 종말로서의 현체제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것을 전복할 무한한 가능성을 설파하는 철학이자 삶의 원리, 중심 없는 아나키즘이면서 신없는 세상의 카오스모스를 추구한 이들은 당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자신-다중-민중 외에 다른 누구도 아니다.

 

쏟아지는 '사랑의 미약'에 취한채로 원자의 빗속에 서서 한 세계의 바닥없음과 몰락을 예견하고 다음 세계를 미리 추동하는 그 힘, 그것이  루크레티우스-괴물의 모습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

 

 

루크레티우스 (Titus Lucretius Carus) : 기원전 90년대 초반에 태어나 기원전 50년대 중반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어떤 여인이 준 사랑의 미약을 먹고 정신 이상이 되어,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기록한 것이 현재 전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주장도 있으나, 믿기 어렵다. 이 작품 외에 다른 저술은 전해지지 않는다.-알라딘 저자소개

 

시인ㆍ철학자. 생애에 관하여는 확실치 않고 부유한 생활을 했으나 우울성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유일 작품 《자연에 관하여 De rerum natura 6 권》라는 철학적 교훈 시가 있다. 이것은 그가 속해 있는 에피쿠로스파의 철학 사상에 기초하여 물리적ㆍ논리적 교의(敎義)를 설명하려 한 것, 베르길리우스 등에 비하면 시로서는 떨어지나, 그 착상의 위대함에 있어서는 그 이상이며, 당시의 시계의 큰 영향을 주었다. 일체의 현상을 인과 관계에 기초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그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철학사전, 중원문화

 

로마의 시인ㆍ철학자. 생애에 관하여는 확실치 않고 부유한 생활을 했으나 우울성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유일 작품 《자연에 관하여 De rerum natura 6 권》라는 철학적 교훈 시가 있다. 이것은 그가 속해 있는 에피쿠로스파의 철학 사상에 기초하여 물리적ㆍ논리적 교의(敎義)를 설명하려 한 것, 베르길리우스 등에 비하면 시로서는 떨어지나, 그 착상의 위대함에 있어서는 그 이상이며, 당시의 시계의 큰 영향을 주었다. 일체의 현상을 인과 관계에 기초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그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인명사전, 민중서관

 

이 책의 번역 대본으로 쓰인 C. Baily 판본은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 http://archive.org/details/onnatureofthings01lucruoft

 

 

 

 

차례

 

옮긴이 서문

 

제1권

A. 일반적 원칙들

B. 기원들은 견고하고 영원하며 나눌 수 없음

C. 다른 이론들에 대한 논박

D. 세계와 그것의 두 구성 요소는 무한함

 

제2권

A. 원자의 운동

B. 원자의 형태의 다양함과 그 결과

C. 원자들은 이차적 성질을 지니지 않음

D. 세계의 무한함,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

 

제3권

A. 영혼의 본성과 구조

B. 영혼의 필멸성에 대한 증명들

C.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리석은 것이다

 

제4권

A. 영상(影像)들의 존재와 성질

B. 감각과 사고

C. 심리상태와 연관된 신체의 기능들

D. 사랑의 열정에 대한 비판

 

제5권

A. 우리의 세계에 대하여

B. 천체에 대하여

C. 땅에 관하여

 

제6권

A. 대기의 현상들

B. 지상의 현상들

C. 아테나이의 대역병(大疫病)

 

옮긴이 해제

찾아보기

 

 

 

 

 

 

 

 

옮긴이 서문

※‘[ ]’의 숫자는 원전의 행수 표시임.

제1권

[44]왜냐하면 신들의 본성은 자체로

최고의 평화 속에, 우리의 일들로부터 나뉘어 멀리 떠나

불멸의 세월을 즐기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본성은 모든 슬픔을 벗어난, 위험들을 벗어난,

스스로 자신의 풍요함으로써 권능을 지닌, 우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제물로써 환심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분노와 접촉하지도 않는 것이니까요.[49]

 

[55]사물들의 기원 (...)

자연은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사물들을 자라게 하고 키우며,

또한 같은 것들을 사멸하도록 다시 거기로 헤쳐 보내도다.

이것들은, 우리가 이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재료라고, 사물이 될

생산적인 몸이라 부르고, 사물의 씨앗이라고

지칭해 버릇하던 것이며, 같은 이것들을 첫 번째 알갱이라

칭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것인 이것들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기 때문이다.[62]

 

A. 일반적 원칙들

*아무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음

[149]그것의 첫 원리 (...)

즉 그 어떤 것도 신들의 뜻에 의해 무(無)로부터 생겨나진 않았다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가, 그 어떤 것도 무로부터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때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좇는 것을 더 제대로

보게 될 것이다, 어디서 각 종의 사물들이 생성될 수 있는지도,

어떤 방식으로 각각이 신들이 애쓰지 않고도 만들어지게 되는지도. 왜냐하면 만일, 이것들이 무로부터 만들어졌다면, 모든 것들로부터 모든

종이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이고, 어떤 것도 씨가 필요치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160]

 

*아무것도 무로 돌아가지 않음

 

*사물들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음

[322]마지막으로, 무엇이든 날과 자연이 사물들에

조금씩 덧붙이는 것, 절도 있게 자라도록 시키는 것은

애써 살피는 눈들의 그 어떤 날카로움으로도 볼 수가 없다.

더욱이, 무엇이든 세월과 쇠함으로 낡아가는 것들이,

또한 바닷가에 매달려, 침식하는 소금기에 갉아 먹힌 바위들이

매 순간에 무엇을 떨구어 보내는지 그대는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보이지 않는 알갱이들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다.[328]

 

*빈 공간이 존재함

 

*다른 모든 것은 이 두 요소의 성질임

[459]시간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사물들로부터

그것의 감각이 유래한다, 세월 속에 무엇이 지나가버렸는지,

어떤 사물이 현재 남아 있는지, 또 어떤 것이 그 다음에 나올 것인지.

누구도 결코 시간을, 사물의 움직임과 고요한 정지에서 분리된

자체적인 것으로 지각하지 못함이 인정되어야 한다.[463]

 

B. 기원들은 견고하고 영원하며 나눌 수 없음

*첫 번째 네 가지 증명: 원자의 견고함, 영원함, 단순함

 

*원자의 견고한 단순성

 

*원자의 불변성

 

*원자의 최소 부분들

[615]최소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각각의 가장 작은

몸체들은 무한한 부분들로 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반의 절반은 항상 또 절반을

가지고 있을 터이고, 어떤 사물도 끝을 한정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물들의 총합과 최소의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혀 차이 날 게 없으리라. 왜냐하면 아무리 철저하게 전체

총합이 무한하다 해도, 가장 작은 것이

마찬가지로 무한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622]

 

☞이에 관해 로이드의 언급 참조: “그들[원자론자들]은 원자가 물리적으로 분할불가능하듯이 수학적으로도 분할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원자는 확실히 물리적으로 분할불가능하지만 원자론자들은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도 분할불가능한 것-즉 부분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텍스트(예를 들어 《생성소멸론》315b 28 이하)는 원자론자들이 물리적인 분할가능성의 한계와 수학적 분할가능성의 한계를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을 아주 잘못 해석하고 있지 않는 한, 만일 원자가 형태상 다르다면 그것은 원자가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수학적으로 분할가능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것 같다.”(『그리스 과학사상사』 G. E. R. 로이드 지음, 이광래 옮김, 지성의 샘, 1996, pp. 73-74) 로이드의 이 언급과 루크레티우스의 위 발췌문을 보면, 루크레티우스가 ‘무한한 부분’들이라고 하는 것이 수학적이면서도 물리적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로이드는 대체로 바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C. 다른 이론들에 대한 논박

*헤라클레이토스의 단일론에 대한 반박

 

*엠페도클레스의 다원론에 대한 반박

 

*아낙사고라스의 학설에 대한 논박

 

*루크레티우스의 사명

 

D. 세계와 그것의 두 구성 요소는 무한함

*우주와 공간의 무한함

 

*공간의 무한함

 

*원자수의 무한함

 

*잘못된 이론에 대한 논박

[1068]공허한 오류가 어리석은 자들에게 이런 거짓들을 천거하였도다.

이들이 뒤집어진 논리로 된 것을 껴안아 가졌으므로.

왜냐하면, 세계는 무한하게 되어 있어서, 한가운데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한가운데가 있다 해도, 무엇이든 간에

그 사실 때문에 거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어떤 다른 이유로 해서 거기서 다시 멀리 밀려나기보다.

왜냐하면 우리가 빈곳이라고 부르는 모든 장소 또는 공간은,

한가운데를 통해서건 한가운데 아닌 곳을 통해서건, 운동이 어느 방향으로

진행하든 간에 항상 무게를 지닌 것들에게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1076]

(...)

[1081]그러므로 사물들은 그런 방식으로 중심에 대한 욕망에

굴복하여 집합을 이루도록 붙잡혀 있을 수가 없다.[1082]

제2권

A. 원자의 운동

[75]그렇게 해서 사물들의 총체는 항상

새로워지고, 필멸의 존재들은 서로 차례 바꿔 산다.

한 종족은 늘어나고, 다른 종족은 감소한다,

짧은 간격 속에 동물들의 세대는 교대하며,

마치 주자들처럼 생명의 횃불을 전해주고 있다.[79]

 

*원자는 쉼없이 운동하며, 여러 밀도를 가진 사물들 속에 결합되어 있음

[90]당신이 꿰뚫어 볼수록, 모든 것의 총체에는 가장 깊은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기본적인 몸체들이

정지해 머물 곳이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 공간에는 경계도 한도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방으로 전 부분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은

내가 여러 말로 보여주었으며, 확실한 논증에 의해 입증된 바이다.

이것이 확정되어 있으므로, 확실히 깊은 허공을 두루 다니는

기본적인 몸체들에게는 어떤 휴식도 주어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쉼 없는 여러 방향의 운동으로 요동되어,

일부는 충돌하여 큰 거리를 되튕겨 나가고,

일부는 또 부딪힌 데서 짧은 간격만큼 이동한다.[99]

 

*원자 운동의 속도

 

*무게에서 비롯되는 아래 방향의 운동

 

*원자들의 비껴남

[217]물체들이 자체의 무게로 인하여 허공을 통하여 곧장 아래로

움직이고 있을 때,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의 장소에서 자기 자리로부터 조금,

단지 움직임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할 수만 있을 정도로, 비껴났다는 것을.

하지만 만일 그들이 기울어져 가 버릇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아래로

마치 빗방울처럼, 깊은 허공을 통하여 떨어질 것이고,

충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타격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들에게는, 그래서 자연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219]

 

*질료와 운동의 영원함

 

*멈춰 서 있는 사물 속의 움직임

 

B. 원자의 형태의 다양함과 그 결과

*원자들은 형태가 다양하다

[335]얼마나 많은 종류의 형상으로써 [원자들이] 다양하게 되어 있는지 알라.

이것은 몇몇 것들만 비슷한 형상을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두가 모두와 같이 않아서이다.

이런 상황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양이 그토록 많아서

한도도 없고, 내가 이미 가르쳤듯 총합도 없을 정도이므로,

그것들은 당연히 모두가 모두와 곧장 같은 실로써,

유사한 형상으로써 만들어져 있지 않아야 한다.[341]

 

*원자들의 형태가 달라서 생기는 결과들

[434]접촉, 바로 접촉이, - 아, 신들의 신성한 능력이여! -

신체의 감각이니 말이다. 외부의 사물이

밀고 들어올 때나, 몸 안에서 생긴 것이 해를 끼치거나,

베누스의 생산적인 일을 통해 나가면서 즐거움을 줄 때,

또는 외부 타격으로 해서 몸 자체에서 씨앗들이

요동되고 서로 간에 자극되어 감각을 혼란케 할 때에,

(...)

그러므로 시초들은 형태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감각을 산출할 수 있도록, (...)[443]

 

*원자의 형태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음

[512]사물들에게 주어진 특정의

한계가 전체를 양끝에서 잡고 있으므로, 질료 역시

한정된 형상들에 따라 다르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

그러므로 그것들은 한정된 방식으로 다르게 만들어져 있다.

한쌍의 끝점에 의해 양쪽에서 표시되어 있으므로,

이쪽에서는 불길에 의해, 저쪽에서는 뻣뻣하게 만드는 서리에 의해 포위되어.

 

*같은 형태를 가진 원자의 숫자는 무한함

 

*생성과 파괴의 균형

 

*사물들은 섞인 형태들로 이루어져 있음

[585]시초적인 것의

한 가지 종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씨앗들로 이뤄진 것은 없다는 사실이,

그리고 무엇이든 자신 안에 더 많은 힘과 가능성을

지닌 것이 있으면, 그것은 그만큼 더 많은 시초들의 종류와 다양한 형상들이 자신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588]

*지모신 숭배 의식

 

*흙 속에 있는 형상들이 여러 성질을 설명해줌

 

*모든 방식의 연결이 가능한 것은 아님

[700]하지만 모든 것이 모든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대는 도처에서 괴물들을 발견할 테니까,

반은 짐승인 인간의 종이 생겨나는 것을, 때로는

살아 있는 몸에서 높은 나뭇가지가 돋는 것을, (...)

[711]왜냐하면 각자에게 그 자신의 알갱이들이 모든 음식물로부터 나와

지체 속으로 분해되어 들어가고, 그것이 연결되어 적절한

운동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720]왜냐하면 마치 각각의 태어난 사물들이 전체적 성질에 있어서

서로 간에 다르듯이, 각각의 것은 시초들의

서로 다른 형상으로 되어 있어야 하니 말이다.

너무 적은 수가 같은 형상을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같지 않게 되어 있어서다.

나아가 씨앗들이 서로 다르므로, 간격, 행로,

연결, 무게, 타격, 만남, 움직임도

달라야 한다.

 

C. 원자들은 이차적 성질을 지니지 않음

*색깔에 대하여

[747]<근원적인 몸체들은 언제나 그 어떤 색깔도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모든 색은 변화하며, <색을 변화시키는>

모든 것은 <그 자신도 변화하므로>.

하지만 기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는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834]그대는 모든 몸체가 소리나 냄새를 발한다고는

인정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그대는 모든 것에게

소리와 냄새들을 부여하진 않게 된다.

(...)

그럼에도 이것들을 민감한 정신이 인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성질들을 앗긴 것들을 알아보는 것 못지않게.

 

*원자가 지니지 않은 다른 이차적 성질들

 

*원자들은 감각이 없음

 

*이차적인 성질과 감각에 대한 요약과 결론

 

D. 세계의 무한함,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

*증명들

[1059]씨앗들 자체가 저절로 우연히 거듭 마주쳐

여러 방식으로 공연히 헛되이 성과 없이 몰렸다가,

마침내 저것들, 즉 갑자기 만나서

이후로 계속 거대한 것들[세계들]의 시작이 될 것들,

땅의, 바다의, 그리고 하늘의, 또 생명체들의 종의 시작이 될 것들이 모였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또다시 질료들의 그와 같은 다른 모임이

다른 곳에서도 있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신학적 견해에 대한 반박

 

*세계들의 성장과 쇠락

[1173]하지만 그는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조금씩 스러진다는 것, 그리고

세월의 오랜 지속에 지쳐 무덤으로 간다는 것을.

 

제3권

[65]왜냐하면 아주 수치스러운 모멸과 쓰라린 궁핍은

안락하고 안정된 삶으로부터 격절된 듯 보이며,

마치 이미 죽음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짓된 공포에 몰려 도망쳐버리고자,

또 자기를 멀리멀리 떼어놓고자 원하여,

시민의 피로써 재산을 부풀리고, 탐욕스레

부를 배가한다, 살인에 살인을 덧쌓으면서.

 

A. 영혼의 본성과 구조

*영혼은 신체의 일부이다

 

*정신과 영혼의 관계

[136]이제 나는 정신과 영혼이 서로 연결되어

스스로 하나의 본성을 이뤄내지만,

숙고 능력이 말하자면 머리이며 말하자면 전체 몸속에서 지배한다는 것을 이르노라.

한데 그것을 우리는 정신이자 이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가슴이라는 가운데 영역에 자리 잡고 붙어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전율과 공포가 뛰며, 이 자리 주위에서

행복감이 위로를 준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성과 정신이 있다.

영혼의 나머지 부분은 온몸에 흩뿌려져

복종하고, 정신이 고갯짓과 그것이 기우는 데에 맞춰 움직인다.

정신은 홀로 자체로서 스스로 음미하고, 스스로 기뻐한다,

(...)

[158]우리는 본다. 이로부터 누구든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정신의 힘에 의해

뒤흔들리면, 곧장 육체를 밀치고 때린다는 것을.

이 동일한 추론이, 정신과 영혼의 본성이

육체적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

[168]또한 그대는 정신이 육체와 더불어 동일하게 고통을 겪고,

우리 몸 속에서 함께 동일한 감각을 갖는 것을 본다.

(...)

[175]그러므로 정신의 본성은 육체적이어야만 한다.

육체적인 무기와 타격에 괴로워하니까.

 

*정신과 영혼의 구조

[179]우선 나는 그것[영혼]이 매우 섬세하다는 것을, 그리고 극히 미세한

몸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노라.

(...)

[182]즉, 아무것도, 이성이 할 일을 자신 앞에 떠올리고, 또 스스로 행동을

시작하는 것만큼, 그토록 빠르게 이뤄지는 건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눈 앞에 분명히 보이는 것보다 더빨리 스스로를 자극한다.

한데 그렇게 민활한 것은 극히 둥글고

극히 미세한 씨앗들로 이뤄져 있어야 한다.

 

[214]죽음은 모든 것을 보존한다.

살아 있는 감각과 따뜻한 열기 이외에는.

그러므로 영혼 전체는 매우 작은 씨앗들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영혼의 네 가지 요소

 

*네 요소 간의 관계

[386]영혼의 힘보다는 정신이, 생명을 붙잡아 두는 데

더 중요한 빗장이고, 삶을 위해 더 중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과 정신 없이는 그 어떤 영혼의 부분도

아주 짧은 시간의 부분 동안도 지체들에 두루 걸쳐 머물 수가 없고,

오히려 동반자로서 쉽게 그것을 따라가 버리고, 공기 중으로 떠나가

차가운 사지를 죽음의 싸늘함 속에 남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성과 정신이 그에게 머물러 있는 존재는 삶 속에 계속 머문다.

아무리 둘레의 사지가 잘리어 동체가 손상되어도,

둘레의 영혼이 앗겨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도

그는 살아 있고, 삶을 주는 천상의 숨결을 받아들인다.

 

☞‘심신문제’: http://en.wikipedia.org/wiki/Mind%E2%80%93body_problem

B. 영혼의 필멸성에 대한 증명들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들

 

*영혼이 출생 전부터 있었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들

 

*일반적 논증들

 

C.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리석은 것이다

*죽음은 감각의 정지다

[830]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

정신의 본성이 필멸적인 것으로 드러나 있는 한.

(...)

[838]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서로 하나로 합쳐져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때는 분명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우리에게,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도 감각을 일으킬 수 없으리라

(...)

[866]죽음 속에는 우리가 두려워할 게 전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비참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또 일단 불멸의 죽음이 필멸의 생명을 데려가버리면,

그가 언젠가 태어났었든,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었든, 이제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살아남는 것이 있다는 가정에서 오는 착각들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하여 1

[964]왜냐하면 낡은 사물은 새로움에 밀려 물러서고

어떤 것은 다른 것들로부터 새로 만들어지는 게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심연이나 어두운 타르타라로 넘겨지지 않는다.

이후의 세대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재료들이 있어야만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삶을 마치면 그대를 뒤따른다.

그래서 그대 못지않게 이런 세대들도 이전에 스러졌고, 또 앞으로도 스러질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기를 그치지 않으며,

삶은 누구에게도 완전히 소유되지 않고, 모든 이에게 그저 대여될 뿐이다.

 

*죽은 뒤의 징벌에 대하여

[982]현실에서 신들에 대한 공허한 두려움이 필멸의 인간들을

더 짓누르고, 그들은 각 사람에게 운수가 가져다 떨어뜨릴 것을 더 두려워한다.

(...)

[1020]그러면서 괴로움의 어떤 한계가 있을 수 있는지,

또 징벌의 어떤 끝마침이 있을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같은 이 고통이 죽은 후에는 오히려 더 중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마침내 이승에서도 어리석은 자들의 삶은 아케론과 같은 것이 된다.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하여 2

 

*불행의 원인

[1073]그것[원인]을 제대로 본다면, 각 사람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우선 사물들의 본성을 알고자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멸의 인간들이,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들이 죽은 후에

남은 모든 세월 동안 그 상태에 처하리라고 예상해야 마땅한 것이다.

*결론

 

제4권

A. 영상(影像)들의 존재와 성질

*영상들의 존재

[42]그러므로 나는 말하노라, 사물들의 영상과 섬세한 형상은

사물들로부터, 그것들의 몸체 표면에서 발산된다고.

(...)

[51]그것들은 마치 막이나 껍질 같다고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은, -우리는 이 상이 어떤 몸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떠돈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몸과 유사한 모습과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들의 조직은 섬세하다

 

*영상들은 공기중에서 저절로 형성되기도 한다

 

*영상들은 매우 빠르게 형성된다

 

*영상들은 빠르게 움직인다

 

B. 감각과 사고

*시각, 그리고 그와 연관된 현상들

 

*거울과 연관된 문제들

 

*시각의 특성들

 

*정신의 잘못된 추론들

[379]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눈이 조금이라도 속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384]이런 문제는 결국 정신의 추론이 분별하여야 하며,

눈들이 사물의 본성을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신의 이 악덕을 눈들에게 꾸며 붙이려 하지 말라.

(...)

[463]그 모두가, 말하자면 감각에 대한 신뢰를 깨뜨려보려는 것들이다.

하지만 쓸데 없는 짓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 덧붙이는

의견들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니 말이다.

감각에 의해 관찰되지 않은 것을 관찰된 것으로 여김으로써.

왜냐하면 명백한 것들, 정신이 즉석에서 스스로 덧붙이는바

불확실한 것들로부터 분간해내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감각은 틀릴 수 없음

[471]따라서 나는 이 사람에 맞서서 소송 다투기를 피하리라,

스스로 자기 머리를 거꾸로 발 둘 곳에 놓는 사람과는.

 

*청각의 문제

 

*미각의 문제

 

*후각의 문제

[686]그러므로 무엇이든 코를 자극하는 이 냄새 자체가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멀리 퍼질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떤 것도 소리만큼, 목소리만큼

멀리 이동하지 않는다.

 

*사고의 문제

[724]사물의 많은 영상들이

도처에서 사방으로 여러 방식으로 떠돌아다닌다는 것을.

이들은 섬세하여, 그들이 서로 마주치게 되면, 거미줄이나 금박처럼

바람 속에서 자기들끼리 쉽게 결합하는 것들이다.

(...)

[730]이들은 몸의 조직의 성긴 부분으로 뚫고 들어가, 안에서

정신의 섬세한 본성을 자극하고 감각을 일깨우니 말이다.

 

[802]그것들[영상들]은 섬세해서, 보려고 애를 쓰는 것들 이외에는, 정신이

정확하게 분간할 수 없다. 그래서 정신이 그것을 향해

스스로 준비하고 있던 것들 이외에는, 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

나아가 정신 자체가 스스로 준비하고, 있게 될 것을 기대한다.

(...)

[807]또한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눈들이 섬세한 것들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 스스로 긴장하고 준비하는 것을,

(...)

[812]만일 그대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마치 그 시간 동안 내내

그 대상이 물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으리라는 점을.

그러니 무엇이 놀라운가, 정신이 자신이 몰두해 있는

사물들 이외의 다른 것들을 잃어버린다 해도?

더욱이 우리는 작은 표지들로부터 아주 큰 것을 추측하며,

스스로 기만의 속임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C. 심리상태와 연관된 신체의 기능들

*목적론에 대한 반박

[825]눈의 밝은 빛이 만들어진 게, 우리가 앞을 볼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라고는

그대가 생각하지 말기를, (...)

[832]사람들이 내세우는 이런 종류의 다른 주장들은

모두가 뒤집힌 추론으로 인해 앞뒤가 바뀌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몸에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생겨난 그것이 용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눈이 빛이 생겨나기 전에는 본다는 것이 없었으며,

혀가 생겨난 사건이 연설을 멀리 앞질렀으며,

소리가 들리게 되는 것보다 훨씬 전제

귀가 생겨났고, 내 생각으로는 결국 모든 지체가,

그것의 활용보다 먼저 있었다.

 

[881]나는 말하노라, 우선 우리 정신에 걸어가는 것의 영상이

생겨나, 전에 우리가 말했던 대로 정신을 때린다는 것을.

그러면 욕구가 발생한다. 누구도 정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보기 전에는 아무 행위도 시작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신이 미리 보는, 저 사건의 상이 있게 된다.

그래서 정신이, 걸어가기를 원하도록 자신을

자극하면, 그것은 즉시 사지와 지체들을 통해

온몸에 흩어져 있는 정신의 힘을 때린다. (...)

[890]그 다음엔 이것이 나아가 몸을 때린다. 그러면 조금씩

전체 덩치가 앞으로 밀쳐지고 움직여진다.

*잠의 문제

 

*평소 생활과 꿈의 관계

 

*사랑의 물리적 근원

 

D. 사랑의 열정에 대한 비판

*사랑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의 해악

[1135]어쩌다 가책받은 정신 자체가, 스스로 나태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삶이 방탕 속에 스러지고 있다고 후회하는 경우에나,

아니면 그녀가 말을 던져 모호함 속에 남겨놓았고,

그것이 갈망하는 가슴 깊이 박혀 불처럼 살아 오름으로 해서,

아니면 그녀가 눈길을 너무 자주 던지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듯

생각될 때, 그리고 그 얼굴에서 웃음의 흔적을 보았을 때에.

 

*사랑이 일으키는 환각

 

*남녀 모두에게 공통된 쾌락이 있다

 

*자식의 모습과 성이 결정되는 방식

 

*불임의 원인들

 

*태도와 습관이 효과

 

제5권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

 

*이제까지의 논의의 요약, 앞으로 나올 논의들의 개요

 

A. 우리의 세계에 대하여

*세계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신학적 세계관에 대한 논박

[132]그러므로 정신이 본성은 육체 없이 혼자는 생겨날 수 없으며,

힘줄과 혈액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

 

*세계에는 시작이 있었으며, 앞으로 끝도 있을 것이다

[393]서로 간에 대제국을 두고 전쟁을 판가름 지으려 투쟁한다.

그 사이 한 번은 불이 우위에 섰었고,

또 한 번은, 소문에 따르면, 습기가 경작지들은 다스렸었다.

 

*세계의 형성

[419]확실히 사물의 기원들 각각이 현명한 정신에 의해

계획을 따라 자신들을 그 질서 속에 놓은 것도 아니고,

각각이 어떤 운동을 할 것인지 진정으로 협의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물들이 수많은 기원들이 수많은 방식으로,

무한한 시간으로부터 이제까지, 타격들에 동요되고

자신이 무게에 시동되어 옮겨지고,

온갖 방식으로 만나고, 무엇이건 자신들 사이에 만나서

낳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 버릇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 세월을 통해 널리 퍼져서

모든 종류의 만남과 운동을 시험하고서,

마침내 갑작스런 충돌로써, 자주 큰 사물들,

즉 땅, 바다 그리고 하늘과 생명체들의 종족의

시초가 되는 저것들이 만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B. 천체에 대하여

*천체들의 움직임

 

*땅의 위치

 

*천체들의 크기

 

*태양의 빛과 열

 

*천체의 궤도

 

*밤과 낮의 원인

 

*새벽의 원인들

 

*밤과 낮의 길이가 변화하는 이유

 

*달과 빛과 그 모양

 

*일식과 월식의 원인들

 

C. 땅에 관하여

*식물과 동물의 발생

 

*땅이 지닌 생산성의 한계

 

*자연의 창조실험

[404]그리고 그때 땅은 또한 괴물들도 만들기를

시도했었다, 놀라운 얼굴과 사지를 지닌 것들,

남녀추니, 둘 사이에 있으나 어느 쪽도 아닌 것, 양쪽으로부터 동떨어진 것,

 

*생존능력 있는 것만이 살아남음

 

*신화적 존재들

[920]지금도 풀들의 종류과 과실들과

행복한 나무들이 땅으로부터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에 뒤얽혀서는 생겨날 수 없고,

오히려 각 사물은 자신의 방식에 따라 나아가고, 모든 것이

자연의 정해진 규율에 따라 경계를 지키니 말이다.

 

*원시인간의 생활

 

*원시인간의 죽음

 

*초기의 공동체들

[1011]그후, 그들이 집과 가족과 불을 마련하고,

남자와 결합된 여자가 한 <집으로> 물러나고, <혼인의 법이>

알려지고, 자신들로부터 자손이 태어나는 것을 본 뒤에,

그때에 인간 종족은 처음 약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불은, 이제 차가워진 몸이 하늘의 지붕 밑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도록 그렇게 돌보았고,

베누스는 그들의 힘을 줄여, 자식들이 부모의

오연하던 의지를 애교로써 쉽게 꺾었기 때문이다.

또 그때에 이웃들은 서로 간에 해를 끼치기도 침해를 당하기도

원치 않아서 우정을 맺기 시작했고,

아이들과 여성의 세대들을 돌보도록 맡겼다,

 

*언어의 기원

[1087]그러므로 다양한 감정들이 동물들을, 그들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다양한 소리를 발하도록 몰아간다면,

그때 필멸의 인간이 서로 다른 상황들을 이런저런 소리로써

표시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얼마나 더 당연할 것인가!

 

*불의 발견과 이용

 

*왕이 생겨나고 부가 발견됨

 

*도시국가의 성립, 법에 대한 두려움

 

*종교의 기원

[1083]더욱이 그들은, 하늘의 이치와 일 년의 다양한 시간들이

정해진 질서에 따라 돌아가는 것을 보지만,

어떤 원인에 의해 그것이 이뤄지는지 인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을 신들에게 넘기고, 저들의 고갯짓에 의해 모든 것이

방향을 바꾼다고 생각하는 걸 도피처로 여겼다.

 

*금속의 사용

 

*동물의 사용

 

*직조의 기술

 

*과수원 가꾸기

 

*음악의 발달, 물질적 발전과 도덕적 타락

[1430]그러니 인간의 종족은 공연히 헛되이 항상

애쓰고, 공허한 걱정 속에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그들은 소유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고, 참된 쾌락이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 전혀 모르니까.

그리고 이것이 조금씩 조금씩 삶을 높은 곳으로 데려갔고,

바닥에서부터 전쟁의 거대한 흐름으로 충동해갔다.

 

*다른 지식과 기술의 발전

[440]이와 같이 세월은 각각의 것들을 조금씩 한가운데로

끌어내고, 이치는 그것을 빛의 해안으로 올려 보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에 이어 다른 것이 점차 명확해지는 것을 정신으로써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로써 꼭대기 정상에 당도할 때까지.

제6권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

 

A. 대기의 현상들

*천둥

 

*번개

 

*벼락

 

*용오름과 회오리바람

 

*비

 

*그 밖의 대기현상들

 

B. 지상의 현상들

*지진

 

*바다의 크기는 일정함

 

*화산

 

*나일강의 홍수

 

*아베르누스 호수

 

*기이한 샘들

 

*자석

 

*풍토병과 전염병

 

C. 아테나이의 대역병(大疫病)

*질병의 근원과 증상

 

옮긴이 해제

※여기서부터 ‘[ ]’ 안의 숫자는 페이지 수임.

 

1. 루크레티우스의 생애

 

2.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

[527~540: 강대진(옮긴이)의 상세 소제목들-원출처는 M. F. Smith의 번역 소제목이며 이것을 약간 변형했다고 역자가 밝히고 있다.]

 

제1권

서문

베누스를 향한 기원(1~43)

신들의 참된 본성(44~49)

멤미우스에게 요청함, 시의 주제(50~61)

에피쿠로스가 종교에 대해 승리함(62~79)

종교가 오히려 죄악을 낳음: 이피아낫사의 경우(80~101)

 

☞이피아낫사: 『신화집』, 아폴로도로스 지음, 강대진 옮김, 민음사, 2005, p. 94.

“아크리시오스에게는 라케다이몬의 딸 에우뤼디케로부터 다나에가 태어나고, 프로이토스에게는 스테네보이아로부터 뤼십페와 이피노에, 그리고 이피아낫사가 태어난다. 그런데 그녀들은 장서하였을 때 미치게 되었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디오뉘소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아서이고, 아쿠실라오스가 말한 바에 따르면, 헤라의 목상을 헐뜯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미쳐서 온 아르고스를 방황했다. 나중에는 아르카디아와 펠로폰네소스를 두루 다니며 온갖 곱지 못한 모습으로 황야를 내달렸다. 그런데 아뮈타온과 아바스의 딸인 에이도메네 사이에 난 아들이면서 예언자이고, 약물과 정화 치료법을 처음 발견한 자인 멜람푸스가 그 처져들을 치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만일 나라의 3분의 1을 준다면 그러겠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토스가 그렇게 큰 보수로는 치료를 맡기지 않으려 하자, 처녀들은 더욱더 광기가 심해졌고, 이들에 더하여 나머지 여자들까지 그렇게 되었다. 그녀들은 집을 버리고 자기 아이들을 죽이고 황야를 헤맸다.”

 

미신적 믿음과 싸울 필요성에 대하여(102~135)

시인의 과업과 어려움(136~145)

 

원자론의 기본 원리

아무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음(146~214)

아무것도 무로 돌아가지 않음(215~264)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물체들로 이루어져 있음(265~328)

빈곳이 있음(329~417)

원자와 공간만이 궁극적인 것임(418~448)

다른 모든 것은 원자와 공간의 성질이거나 사건임(449~482)

원자가 존재함: 논증의 도입(483~502)

원자들은 견고하고 영원하며 단순함(503~550)

원자는 나눠지지 않음(551~583)

원자는 변화를 겪을 수 없음(584~598)

원자에는 부분이 있으며, 이것이 연장의 최소단위임(599~634)

 

다른 이론들에 대한 반박

일원론: 불이 궁극적 존재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635~704)

제한적 일원론: 이원론과 4원론(엠페도클레스)(705~829)

극단적 다원론: 아낙사고라스(830~920)

 

시인의 사명

자신이 영감을 얻은 원천, 시를 쓰는 목적(921~950)

 

우주의 무한함

공간과 물질과 우주의 무한함(951~1051)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이론에 대한 반박(1052~1113)

 

덧붙이는 발

멤미우스와 독자들을 격려함(1114~1117)

 

제2권

서문

계몽되지 못한 자와 비교할 때 에피쿠로스학파의 상대적 행복(1~61)

 

원자의 운동

들어가는 말(62~79)

모든 원자는 항상 운동함(80~141)

원자의 속도는 엄청남(142~166)

곁 이야기: 신들이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린다는 믿음에 대한 반박(167~183)

모든 것은 원래 아래로 움직임(184~215)

어쩌다 비껴가는 운동이 생겨 충돌과 자유의지가 있음(216~293)

물질과 운동은 언제나 있음(294~307)

사물들 속의 운동이 감지되지 않는 이유: 우리 감각으로 느끼기에는 너무나 작은 운동임(308~332)

 

원자의 모양

원자들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음(333~380)

모양이 다르면 영향도 다름: 감각에 미치는 영향(381~477)

원자 모양의 수는 한정되어 있음(478~521)

각각의 모양을 갖는 원자 수는 무한함(522~568)

보충설명: 생성과 소멸의 힘은 균형이 잡혀 있음(569~580)

한 가지 종류의 원자만으로 구성된 사물은 없음(581~599)

곁 이야기: 대지모신 숭배(600~660)

원자들의 모양 차이에서 사물들 사이의 차이가 생김(661~699)

원자들은 아무 방식으로나 결합할 수 없음(700~729)

 

원자들은 이차적인 성질을 갖지 않음

원자에는 색깔이 없음(730~841)

원자에는 열, 소리, 맛, 냄새가 없음(842~864)

원자들은 감각이 없음(865~990)

요약과 결론(991~1022)

 

세계들의 수는 무한함

들어가는 말(1023~1047)

증명들(1048~1089)

곁 이야기: 자연은 신들의 징벌을 벗어나 있음(1090~1104)

세계는 성장하고 쇠하여 소멸함(1105~1174)

 

제3권

서문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1~30)

3권의 주제 소개: 죽음의 공포를 없애는 것이 중요함(31~93)

 

정신(사고와 감정의 자리)과 영혼(감각의 자리)의 본성

정신과 영혼은 육체의 일부임(94~135)

정신(가슴에 자리 잡음)과 영혼(온몸에 퍼져 있음)은 하나로 묶여 있으나, 정신이 주도적임(136~160)

정신과 영혼은 물질적인 것임(161~176)

정신과 영혼은 네 요소(숨결, 열, 공기, 이름 없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231~257)

네 요소가 결합하는 방식들, 결합 방식의 차이가 사람과 동물들의 기질 차이를 설명해줌(258~322)

영혼과 욕체는 서로 연결되어 상호 의존함(323~349)

육체 자체가 감각을 가짐: 감각기관은 입구일 뿐이라는 이론에 대한 반박(350~369)

영혼과 육체의 원자가 교대로 정렬되어 있다는 데모크리토스 이론을 반박함(370~395)

생명에는 정신이 영혼보다 더 중요함(396~416)

 

정신과 영혼이 생성, 소멸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들

들어가는 말: 영혼의 필멸성이 증명되면 이것은 정신에도 적용됨(417~424)

영혼은 육체를 떠나면 공기 중에 흩어져야 함(425~444)

육체가 태어나고 자라서 쇠하므로, 정신도 육체와 함께 죽어야 함(445~458)

정신적 질병과 고통은 정신의 필멸성을 보여줌(459~462)

정신이 육체의 질병의 영향을 받으며, 약으로 치료된다는 사실도 그것의 필멸성을 보여줌(463~525)

사람이 죽어갈 때, 영혼이 점차적으로 떠나간다는 사실은 그것이 분할 가능하며 필멸임을 보여줌(526~647)

정신은 육체의 일부이며, 육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548~557)

정신과 육체는 연결되어서만 존립할 수 있음(558~579)

영혼이 해체와 죽음을 겪는다는 것에 대한 다른 증명들(580~614)

정신은 육체 속 특정한 자리에 있음(615~623)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는 감각을 가질 수도 존재할 수도 없음(624~633)

영혼은 분할 가능하고 따라서 필멸적임(634~669)

영혼이 불멸한다면, 우리는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어야 함(670~678)

정신과 영혼은 인간이 태어날 때 들어와서, 죽을 때 나가는 것이 아님(679~712)

영혼의 일부는 죽은 후에도 육체 속에 남아 있으므로, 분할 가능하며 필멸적임(713~740)

종들의 특성이 영속적인 것을 보면 정신과 영혼은 다른 존재로 옮겨가는 것도 아니며, 불멸적인 것도 아님(741~775)

불멸하는 영혼들이 필멸의 육체를 놓고 다툰다는 것은 우스운 논리임(776~783)

정신과 영혼은 육체 밖에서 존재할 수 없으며, 필멸의 육체아 불멸의 영혼은 결합할 수 없음(784~805)

 

죽음에 대한 공포는 비논리적임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님(830~869)

사후의 육체가 당할 일에 대한 두려움은 이치에 맞지 않음(870~893)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말들은 정당하지 않음(894~911)

죽은 후에는 어떤 욕구도 없음(912~930)

죽음에 대해 불평하는 자를 향한 자연의 꾸지람(931~977)

저승과 징벌은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함(978~1023)

이전의 위대한 인물들도 죽었으므로, 죽기를 억울해 하는 것은 옳지 않음(1024~1052)

불안과 권태는 사물의 본성을 알면 쫓아낼 수 있음(1053~1075)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영원하므로, 삶에 집착해봐야 소용없음(1076~1094)

 

제4권

서문

시인의 사명(1~25)

4권의 주제(26~53)

 

사물에서 나온 얇은 영상의 존재와 속성

영상들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54~109)

영상들은 섬세한 성질을 지녔음(110~125)

영상들은 힘도 없고 감각도 일으키지 않음(127~128)

어떤 영상들은 공기 중에 저절로 형성됨(129~142)

영상들은 매우 빠르게 형성됨(143~175)

영상들은 놀랍게 빠른 속도로 이동함(176~216)

 

감각과 사고

영상들은 시(視)지각을 일으킴(217~238)

영상으로 인해 우리는 거리를 판단할 수 있음(239~268)

거울에서 일어나는 현상(269~323)

시각의 여러 문제들(324~378)

착시 현상들(379~468)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논박: 감각은 틀릴 수 없음(469~521)

소리, 맛, 냄새에 대한 논증 도입부(522~523)

청각은 귀를 때리는 소리 입자에 의해 발생함(523~548)

목소리와 메아리에 대한 설명(549~594)

보는 것을 막는 방해물들을 소리가 뚫고 지나가는 이유(594~614)

맛의 원인(615~632)

같은 음식이 동물마다 다른 영향을 끼치는 이유(633~672)

냄새의 원인(673~686)

냄새가 소리나 영상만큼 멀리 가지 못하는 이유(687~705)

동물마다 다른 형태와 색깔을 싫어함(706~721)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음 속에 그려지는 이유(722~748)

꿈 속에 나타나는 영상들이 움직이는 이유(749~776)

마음속 영상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777~822)

 

여러 가지 생명의 기능들: 영양, 섭취, 운동, 수면, 꿈, 짝짓기

감각기관과 사지가 현재의 쓰임에 맞도록 설계되었다는 믿음에 대한 반박(823~857)

생명체들은 잃어버린 질료를 보충하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고, 내불의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마심(858~876)

육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설명(877~906)

수면에 대한 설명(907~961)

꿈에 대한 설명(962~1036)몽정(1030~1036)

남성의 성욕의 원인(1037~1057)

성적인 사랑은 혼란을 일으키며, 만족을 모르고, 헛됨(1058~1120)

성애는 건강과 부, 명성을 헤치고 사람을 불행하게 함(1121~1140)

성공적이지 못한 사랑의 질병: 좋아하는 여자의 단점을 보지 못함(1141~1191)

성적인 쾌감은 남녀에게 공통임(1192~1208)

유전에 대하여(1209~1232)

불임의 원인과 처방(1233~1277)

평범한 여자가 사랑을 얻는 법(1278~1287)

 

제5권

서문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1~54)

앞에 나온 내용의 요약과 5권 주제 소개(55~90)

 

우리 세계의 성질과 그 구성방식

이 세계는 조만간에 파괴됨(91~109)

땅과 천체들은 신적 존재가 아님(110~145)

신들은 이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음(146~155)

신들은 인간을 위해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음(156~234)

세계의 4대 원소(흙, 물, 공기, 불)는 필멸적임(235~323)

세계에는 시작이 있으며, 이 세계는 아직 젊은 상태임: 역사 기억은 그리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며, 기술과 학문은 아직 발전 중에 있음(324~350)

이 세계는 불멸적 속성을 갖지 못했음(351~379)

요소들 간의 다툼이 어느 한 요소의 승리로 끝날 때, 그것이 세계의 종말임(380~415)

세계 각 부분이 형성된 과정(416~508)

 

천문현상들

천체들의 움직임(509~533)

땅이 세계 한가운데 머물러 있는 이유(534~563)

해, 달, 별들의 크기(564~591)

작은 태양이 큰 빛과 열을 줄 수 있는 이유(592~613)

천체들의 궤도(614~649)

밤과 새벽이 오는 이유(650~679)

밤과 낮의 길이가 변하는 이유(680~704)

달의 모습이 변하는 이유(705~750)

일식과 월식의 원인들(751~770)

 

생명체의 발생에 대하여

들어가는 말(772~782)

어머니 대지가 동식물을 낳음(783~836)

처음에 땅은 불완전한 생명체들도 낳았음(837~854)

생존능력 있는 것들만 살아남음(855~924)

서로 다른 종이 복합된 것은 존재할 수 없음(878~924)

원시인의 생활(925~1010)

 

문명의 발전

문명의 시작(1011~1027)

언어의 기원(1028~1090)

불의 기원과 그것의 사용(1091~1104)

군주정의 발생, 부의 발견과 나쁜 결과들(1105~1135)

왕들의 몰락, 행정관 선출, 법 제정(1136~1160)

신에 대한 믿음의 원인들(1161~1193)

신들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비참한 상태들(1194~1240)

금속의 발견과 사용(1241~1280)

철의 사용(1281~1296)

전쟁에 말과 코끼리를 사용함(1297~1307)

황소, 멧돼지, 사자를 전쟁에 이용하려는 시도와 그 결과(1308~1349)

직조술의 발달(1350~1360)

음악의 기원, 소박한 것에 대한 싫증, 불필요한 소유를 향한 어리석은 욕망(1379~1435)

계절의 순환에 대한 지식91436~1439)

기술의 발달(1440~1457)

 

제6권

서문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1~42)

6권의 주제 소개(43~95)

 

대기의 현상들

천둥과 그 원인들(96~159)

번개와 그 원인들(160~218)

벼락의 성질(219~238)

벼락의 형성과정(239~322)

벼락의 속도와 위력(323~356)

벼락의 주로 봄, 가을에 떨어지는 이유(357~378)

벼락을 신들이 던진다는 믿음에 대한 논박(379~422)

용오름과 회오리바람(423~450)

비와 무지개(495~526)

다른 대기현상들(527~534)

 

지상의 현상들

지진의 원인들(535~607)

바다의 영역이 일정한 이유(608~638)

아이트나 산의 분출(639~702)

나일 강이 여름에 범람하는 이유(712~737)

그 위로 지나가는 새를 죽게 하는 아베르누스 호수 같은 장소들(738~839)

우물물의 온도변화에 대한 설명(840~847)

낮에는 차고 밤에는 따듯한 암모 성역의 샘(848~878)

쏘시개에 불을 붙이는 도도나의 샘(879~905)

자석(906~1089)

풍토병과 전염병(1090~1137)

아테나이의 대역병(1138~1286)

 

3. 루크레티우스가 사용한 자료의 문제

 

4. 집필순서에 대한 논의들

 

5. 작품의 시작부분

[565]요약하자면, 루크레티우스는 호메로스 전통과 헤시오도스 전통을 모두 받아들이는 한편,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엠페도클레스의 틀에 얹어 작품을 썼고, 그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이가 베르길리우스라는 것이다.

 

[566]이런 추측[미완성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은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의 요약 중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가지 치유책(tetrapharmakon)’이라는 것에서 다른 것들은 다 언급되었는데, 마지막 하나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가르침(Kyriai Doxai)’의 첫 네 항목을 요약한 그 치유책이란 이렇다. “신은 두려움을 주지 않으며, 죽음은 걱정을 주지 않는다. 좋은 것은 얻을 수 있고, 나쁜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러니까 마지막 ‘나쁜 것’의 사례로 아테나이의 전염병이 나왔다는 것이다.

 

☞‘테트라파르마코스’에 대한 위키 설명: http://en.wikipedia.org/wiki/Tetrapharmakos

그리고, 이건 이 격언이 적힌 최초의 파피루스조각

 

 

6. 작품의 끝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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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영혼 폴 리쾨르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8
칼 심스 지음, 김창환 옮김 / 앨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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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는 기독교 좌파 철학자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면, 그의 후기 철학의 철저성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철학자려니 ... 하면 그만이다. 1968년 당시 낭떼르의 학교 당국자였던 리쾨르가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히면서 학생들이 던진 쓰레기통을 뒤집어쓴 것은 당시의 가치기준 안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리쾨르는 말년에 다시 낭떼르로 돌아 간다. 그의 넓이다. 그게 바로 해석과 함께하는, 크리스찬으로서의 넓이다.

 

리쾨르를 읽으면, 거기서 토마스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궤적을 느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리쾨르가 자주 <그리스도교 교양>의 해석학적 원칙들을 말하는 것은 그가 토마스가 기반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의 이념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것은 그리 과도한 해석은 아니다. 좌파 지식인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처럼 실천의 측면에서 유물론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플라톤은 70의 고령을 이끌고도 시라쿠사로 가서 그의 이상국가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조금 위악적으로 해석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닥쳐올 정치적 보복을 피해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피신했다. '정면 대결'이라는 정치적  행동원칙이라는 측면에서 누가 더 유물론적인가? 나는 기꺼이 플라톤의 손을 들 것이다.

 

리쾨르도 마찬가지다. 그가 비록 해석학이라는 보수적인 철학적 방법론을 택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정의'를 희구했다는 것은 그의 말년 저작들(주로 정치철학)에서 드러난다. 이 책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리쾨르가 끝내 드러내지 못한 그의 올곶은 그 '좌파 기독교인'의 정체성이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어떤 이일까? 지금의 우리 '자랑스런'(?) 사찰 정부, 쥐일당은 아닐 것이다. 리쾨르의 시각에서 그들은 교회를 모독했으며, 마땅히 지옥의 후견인들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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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해석의 영혼》

칼 심스 지음, 김창환 옮김, 앨피2009,

옮긴이의 글_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 폴 리쾨르

왜 리쾨르인가?

협력과 믿음의 사상가

[21]어떤 소재를 다루든지 간에 리쾨르는 항상 종교적 믿음의 가치와 사회정의를 방어한다. (...) 그는 결코 유행을 따르는 경박한 사람이 아니다. 침착하고 끈기 있는 문체로 씌어진 리쾨르의 작품들은 학문적 담론을 통해 그가 사회에 바라는 바, 곧 협력을 추구한다. (...)[22]그는 자신의 사유가 다른 사상가들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소리 높여 주장하기보다 조용히 유사성을 끌어내는 유형이다.

리쾨르의 이력

이 책은

[29]리쾨르는 자신의 사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다. 194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무게만큼 사유를 계속 축적해 온 그의 작품에는 그 이면에 어떤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의 사상 하나 하나는 이전 사상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발전이다.

[R-Commentary] 이 ‘연속성’은 리쾨르가 말년의 인터뷰뷰에서도 말했다시피 ‘주체성의 복원’이다. 과연 이에 대해 들뢰즈는 뭐라 할 것인가? “그건 해서 뭐하게?” 또는 ...

01_선과 악

인간 삶의 변증법

[33]초기 사유에서 삶은 ‘변증법적’인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다. 나는 선택하고 내가 나아갈 바를 정한다.(이것이 의지적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나의 통제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지닌 채로 세계 내적 존재의 필연성에 종속된다. (...)나는 내 존재의 필연성과 더불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 성격이 나의 의지를 거스르는 무의식적인 정신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이러한 존재가 ‘비의지적인 것’이다.)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지와 정념

[35]의지에는 ‘결정’, ‘움직임’, ‘동의’라는 세 가지 ‘양태’ 혹은 방식이 있다. 내가 ‘결정할 때’ 내 의지의 목적은 ‘내가 구성한 ...... 내 능력에 맞게 내가 수행한 기획’이다(Ricoeur 1966: 7) 내가 ‘내 몸을 움직일 때’ 행동이 실행된다. 내가 ‘동의할 때’ 나는 필연성에 승복한다. 즉 사물은 본성대로 존재하고 나 또한 생물학적 몸을 지니고 산다는 필연성에 묵묵히 순응한다.

리쾨르에 의하면 의지의 세 차원은 의지의 반대, 즉 비의지적인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첫째, 내가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은 결정의 특정한 목적이 기획뿐 아니라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동기와의 근원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Ricoeur 1966: 7) (...) 결정을 내릴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이유들은 비의지적인 것의 형식이다. 이 이유들은 리쾨르는 ‘동기부여’라고 부른다. 둘째, ‘내 몸을 움직일 때’ [36]나는 내 몸이 의지에 지배당하는 만큼이나 [호흡과 같은] 비의지적인 움직임에도 지배당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지하게 된다. (...) 셋째, 내가 ‘동의할 때’ 나는 나보다도 내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나 자신을 양도한다. 이는 필연성의 형식이다.

[40]리쾨르는 내가 몸을 지니는 것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비라고 주장한다. (...)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비’는 우리가 답을 몰라도 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코기토는 나 자신을 정립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는 무엇[41]보다도 코기토를 가능케 만드는 조건, 즉 몸을 지녀야 한다는 조건에 참여해야만 한다. (...)

내가 몸을 지닌 세계 내적 존재라는 필연성이 없이는 자유의지도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자유의지는 필연성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

[R-Commentary] 자유는 그래서 ‘몸’을 놓고 의지와 사유가 벌이는 하나의 ‘내기’일 것이다. 만약 몸이 변용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자유의 승리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몸의 승리가 된다. 둘 모두 패배하지 않는 주체의 내기인 것이다. 낙관론 또는 의지의 낙관론.

[42]인간의 자유는 욕구, 감정, 습관, 필연성 등의 부정적 개념들로 제한되는데, 이때 부정적 개념들은 자신을 거절할 수 있는 의지의 가능성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결정한다. 리쾨르는 그것들을 ‘한계 개념’이라고 불렀다.

오류를 면치 못하는 인간:실수, 불균형, 연약성

상상력

성격

[46]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관점을 선택하더라도 나는 동일한 성격을 가질 것이다. (...) 근본적인 변화라 하더라도 그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결정이 필요한데, 그 결정은 ...... 당연히 내 성격에서 도출될 것이다.

필수불가결한 것인 성격은 내 유한성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내 자아의 모든 것은 아니다. 나는 성격 외에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 이때 인간성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덕과 악덕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인간성이 [47]성격의 역(逆)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성격은 ...... 특정한 각도에서 본 인간성이다.’(Ricoeur 1965a: 93)

감정

[49]철학적으로, 지향과 감정을 분리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유의 영역에서 ‘현상학적 환원’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에서는 동일한 책략이 통하지 않는다. 감정의 대상을 내적 대상과 분리시켜 보라, 그러면 그 대상은 감정의 분리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50]우리는 어떤 것도 중립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선호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더 좋아한다. 이때 직관으로서의 ‘좋음’과 ‘나쁨’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단순히 좋은 것을 좋다고 ‘느끼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느낀다. (...) [51]충분함, 즉 좋음과 나쁨에 관한 도덕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감정과 인식을 종합하는 것이다.

[R-Commentary] 그렇다고 해서 충분할 것인가? 알고서 좋아하는 것, 좋아하고 아는 것. 어느 것이 더 충분한가? 다른 식으로 물어 보자. 알기 위해 믿는 것(credo ut intelligam), 믿기 위해 아는 것(fides quaerens intellectum) 어느 것인가?

갈등과 창조성

[51]리쾨르는 ‘갈등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갈등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아와 타자의, 성격과 인격의, 그의 사유와 감정의 갈등이다.

리쾨르는 각각의 대립 쌍 중 후자를 선호한다. 다시 말해 타인, 인격, 동료라는 감정은 인류 공동체로 진입하는 경로이며, 주관적 자아가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는 특징에 참여하는 지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리쾨르는 인간의 내적 갈등 자체가 필연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창조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악의 상징성

인간은 [오류의 필연성, 실수, 깨지기 쉬움으로 인한] 악에 대한 수용 능력을 공언함으로써 (...) 타락한 존재로 넘어간다.

고백의 현상학

[53]악은 적어도 악을 고백할 가능성이 의식에 떠오르기 전까지는 악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보면 고백의 가능성은 이미 악한 행위 속에 담겨 있다.

[53]리쾨르는 고백, 곧 실수와 관련된 우리의 행위가 세 가지 원천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흠, 죄, 허물이 그것이다. 흠은 죄보다 더 근본적이다. [이때 흠은 더러움, 부정함이 아니라 불순함과 오염에 대한 윤리적인 두려움이다]

[54]흠의 상징이 ‘고대적인’ 것이라면, 죄의 상징은 사회가 신의 개념을 가진 다음에야 발생한다. 흠의 상대역이 정의라면, 죄의 상대역은 구속이다.

허물

[55]허물과 죄 혹은 흠의 차이는, 허물이 주관적이라면 흠과 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점이다. 흠은 외부의 몸의 개입으로 발생한다. 죄는 여러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실수에 대한 공식적인 상징화이다. 한편 허물은 실수를 내면화한다. (...)

허물은 우리 자신의 악행에 따라붙는, 처벌받을 것이라는 ‘우리의’ 예측이다. (...)

허물은 정말로 흠이나 죄와 달리 그 방법에서 고백적이다. 흠은 내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다. 죄는 내가 비난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허물은 내가 나 자신을 비난한다. (...)

허물은 나쁜 선택을 하기 위해 자신을 속박함으로[57]써 부자유하게 된 자유의지를 가리키는 궁극적 표현이다.

[R-Commentary] 자유의지는 자신의 허물을 통해 부자유하게 되는 것이지 신에 의해 부자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죄는 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플로티노스적 악의 관념. 칸트까지. 과연 ‘죄’는 존재하는가? 스피노자-들뢰즈는 그렇게 물을 것이다.

신화들

[57]네 가지 유형의 신화란 창조신화, ‘비극적’ 인간관의 신화, 타락한 인간의 신화, 유배당한 영혼의 신화를 말한다.

(...)모든 창조신화는 세계의 탄생을 말하기 전에 신의 탄생을 말한다. (...) 본질적으로 창조신화들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안적 답변이다. (...)

[58]비극적 인간관의 신화는 악한 신 개념에 의존한다. (...)창조신화와는 달리 비극적 관점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장면 보기를 지향한다. (...)

타락의 신화[는] ‘아담의 신화’ 즉 ‘탁월한 인간학적 신화’이다.(Ricoeur 1967: 232) (...) 아담신화의 특수성은 악의 기원을 인간 안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

[61]유배된 영혼의 신화[는] 자신을 ‘영혼’과 ‘몸’보다는 ‘영혼’과 ‘나머지’로 이해한다는 것이다.(Ricoeur 1967: 279) 이에 관한 탁월한 예가 오르페우스이다. (...)[이 신화는] 몸을 종말론적인 힘으로 만든다.

근대성 속의 신화들

[63]리쾨르는 (...) 아담의 신화를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는다. (...)

[64]‘아담의 신화가 뛰어나다고 해서 다른 신화들은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Ricoeur 1967: 309) 오히려 아담의 신화는 다른 신화들을 전유함으로써 그것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다.

[R-Commentary] 이 ‘새로운 생명’이란 분명 설명되어야 할 무엇이다. 리쾨르의 신화해석이 그렇게 광범위한 예들을 취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그가 다른 예들을 몰라서라기보다는 그의 신화해석이 겨냥하는 바, 즉 기독교 신화해석의 이 ‘전유’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들이 불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해석의 잔여’는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02_해석학

세계를 텍스트로 삼는 해석학

[71]리쾨르의 해석학은 상징적 의미에 집중하고자 의미론적 의미에 괄호치기를 한다. 즉 그의 구호는 ‘상징은 해석을 불러일으킨다’이다.(Ricoeur 1967:352)

상징 해석

언어와 텍스트

지향적 의미

이해

해석학적 순환

내기

거리 두기

[87]텍스트성(텍스트가 되게 하는 것)은 이중적으로 거리 두기를 한다. 즉 텍스트성은 작품을 생산수단에서 떼어 놓는다. 그리고 청중들에게서도 떼어 놓는다. 텍스트는 저자의 심리적인 ‘의도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저술 시기를 지배하고 있던 사회적 조건들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더 나아가 텍스트는 그것이 말해진 사람들에게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읽힐 수 있다. 리쾨르는 이러한 텍스트 해방의 ‘자율성’을 발견했다. 이 같은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텍스트는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 세계에 거주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

독자는 작품과 결합함으로써 자기 이해를 획득하는데, 이는 저자의 의도에서 작품을 떼어 놓을 수 있는 글쓰기의 거리 두기 효과를 통해 가능하다. (...)

[88]바르트와의 유사성 (...) 리쾨르는 인간 역사의 한 시점에서 글쓰기는 ‘단순히 전대(前代)의 구전 담론을 고정시키는 것’이기를 그치고, 대신에 ‘인간 사유는 직접적으로, 구어의 매개 단계 없이 바로 글쓰기가 되었다’고 말한다.(Ricoeur 1976: 29)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씌어진 담론’ 또는 새긴 글자를 갖게 되면서부터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의 의미는 서로 부합하기를 그친다.(Ricoeur 1976: 29) 이로서 텍스트는 해석자 혹은 독자의 관점을 통해 ‘의미론적 자율성’을 획득한다.

[R-Commentary] 문자에 대한 긍정. 플라톤에 대한 비판. 이것은 곧 리쾨르가 히브리 전통에 속한 해석학자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당연하다. 노장과 불교에서는 오히려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사상을 실천철학에까지 밀어붙인다. 그것이 선(禪)이다.

03_정신분석

상징 해석이라는 연결 고리

정신분석 대 해석학

[96]해석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 언어는 왜곡된 언어이다. 무의식이 (꿈)재료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기[97]실 이 억압은 꿈 재료가 의식에 들키지 않도록 감추는 것이다. 반면 신화를 다루는 대목에서 보았다시피, 리쾨르가 보기에 담론은 우리를 속이려 하지 않는다. (...)

[R-Commentary] 이 chapter는 상당히 미심쩍다. 주로 정신분석과 리쾨르 해석학의 대조점을 찾고 있는데, 이는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 취지(종합과 화해)와도 맞지 않으며, 또한 그가 프로이트에 대해 한 작업(《해석에 대하여》, 《해석의 갈등》)의 결과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R-Commentary]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만약 이 ‘상징’이 오류의 상징이라면 어떻겠는가? 우리는 과연 리쾨르처럼 담론의 진리를 무한정 신뢰해야 하는가? 아니, 혹시 심스는 해석학의 ‘해석’이라는 것에서 어떤 ‘의심’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보기에 리쾨르는 충분히 ‘담론을 의심’하고 있다. 그것은 ‘믿기 위해 안다[인식한다]’라는 것에도 충분히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리쾨르와 프로이트 사이에 있는 해석의 강은 루비콘 강처럼 아득한 것은 아닐 것이다.

[98]두 번째 차이는, 전자[프로이트]가 무신론을 향한다면 후자[리쾨르]는 기독교 신앙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정신분석에 의하면 양심은 초자아의 기능[이며] (...) 단순히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것의 이름이 되고 사회의 명령에 순응하기 위해 이기적인 정신이 따라야 하는 유일한 모티프가 된다. (...) 선악을 측정할 수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은 없다. 대신 ‘선’과 ‘악’은 상대적으로 ‘허용될만한 행동’과 ‘허용될 수 없는 행동’으로 축소된다.

(...) 이 모든 것은 리쾨르의 사유와 상반된다. (...) 리쾨르에게 악은, 설령 그것이 사람의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작용하는 외적인 힘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재이며 영원히 그러하다. (...) [99]리쾨르가 인간의 선을 향한 자연적 기질을 견지하는 한편, 프로이트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프로이트 자신이 ‘자연’이라고 부른 것)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리쾨르에게 악은 우리가 가장 연약한 순간,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념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두는 순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어떤 것인 반면, 프로이트의 사유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정념이 이끄는 대로 개방적으로 내맡길 때 세계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R-Commentary] 초자아의 기능은 정념을 통제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사회구성체’가 형성,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이 부분은 심스가 실수하고 있는 듯 보인다.

(...) 세 번째 차원은 (...) [해석학의 시초인] 현상학은 의식철학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리쾨르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없애 버렸다. 다시 말해서 리쾨르는 정신을 몸과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다루지 않고, 정신은 몸에 대한 성찰 없이 자신을 사유할 수 없다는 현상학적(그리고 기독교적 실존주의자의) 관점을 공유한다. 이 주장에서 현상학자는 존재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정신의 일부인 무의식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R-Commentary] 내가 보기에는 리쾨르의 ‘몸’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리쾨르는 분명 《의지의 철학 1》에서 몸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비의지적인 것’의 범주에 무의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100]정신분석적 관점은 현상학의 데카르트적 확실성에 관한 탐구와 일치하지 않는다. (...)

[R-Commentary] 리쾨르가 현상학에만 머물지 않았던 것은 데카르트적 확실성이 의식의 직접성이라는 맹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직접성을 우회하여 주체를 충전하기 위해 해석학적 순환(반성철학)이 필요했다. 따라서 리쾨르의 작업을 현상학으로 뒤늦게 환원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이드가 있는 곳에 에고가 있을 것이다’라는 공식으로 대체한다(1973: 112). (...) 주체, 즉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은 해석학이다

[101]정신분석학과 해석학의 첫 번째 유사성은 둘 다 어느 정도 성스러움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 [프로이트에게는] 인간이 어떻게 종교를 경험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한편 해석학은 철학적으로는 현상학에서 나온 것이지만, 읽기 경험으로 보면 성경 해석의 전통인 ‘성경해석학’에서 나온 것이다. (...) 정신분석은 세속적인 고백과 유사하다는 말을 종종 듣고 있으며, 해석학도, 최소한 리쾨르가 실천한 해석학은 인간 조건 안에서의 실수 분석과 관련된다.

[R-Commentary] 이렇게 되면, 리쾨르의 것만이 아니라 그 어떤 해석학도 프로이트의 분석과 유사하게 된다. 단지 ‘관심’만으로 리쾨르와의 유사성을 파악한다 ... 글쎄 이건 꽤나 실수투성이처럼 보인다.

[102]정신분석은 환자들에게 무의식의 감추어진 의미가 드러나면서 파악된 진리에 입각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 해석학은 텍스트의 감추어진 의도 속에서 세계 속에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발견한다.

정신분석 이론과 현상학적 태도

반대 방향의 에포케

오이디푸스

종교

04_은유

리쾨르의 ‘살아 있는 은유’

은유, 미메시스, 행동

[124]미메시스는 (...) 어떤 것을 재현하고자 신중을 기한 창조이다. (...) 즉 은유와 직유의 관계는 미메시스와 모방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 미메시스는 행동의 모방이다. 달리 말하면, 미메시스는 플롯muthos을 수반한다.

은유는 비유다

[129]비유론은 전통적으로 ‘의미론적 탈문lacuna’ 개념에 의존한다. 탈문은 의미의 틈이다. 의미론적 탈문은 작가가 채우기 원하는 문장 속의 틈이다. 그 틈은 다른 담론 영역에서 빌려 온 변칙적인, 혹은 상궤를 벗어난 단어로 채워진다. 빌려 온 낯선 용어는 문장 속에 부재하는 용어를 대신하게 되는데, 이는 작가의 선호 문제이기도 하고 작가의 어휘에 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의 선호는 작가 고유의 수사를 낳고 어휘의 틈은 비유의 남용을 낳는다.

[R-Commentary] 이 ‘틈’은 의미론적 ‘잔여’와 같다. 이 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잔여가 작동할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반복된다. 해석학적 순환의 심층에는 이 ‘차이나는 것들의 반복’이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들뢰즈와 리쾨르가 처음 조우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 ‘은유’가 아닐까?

[132]퐁타니에의 결론과 달리, 리쾨르는 은유가 명제를 가리키며 개별단어의 층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퐁타니에는 자기 이론의 귀결을 보지 못했다. 예를 들면, 그의 맹목은 알레고리를 확장된 은유로 보지 못하게 방해했다. 반면 리쾨르에게 알레고리는 명제의 층위에서 명시적으로 작동하는 은유이다. 실제로, 일단 은유가 단어에서 자유로워지면 그 다음에는 모든 기술description이 은유적[133]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133][익숙해진 은유와 달리] 새로운 은유는 언어 속에서 자유를 실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 속에서의 자유는 리쾨르가 보기에 인간 창의성의 표지이다.

은유와 의미론

I. A. 리처즈: 리처즈의 이론은 노골적인 컨텍스트적 이론이다. 다시 말해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에 의거하여 단어가 나타나는 매 순간마다 독자 혹은 청자가 ‘추측해야 하는’ 것이다. 사전의 정의는 그저 한 단어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투박하게 안내하는 것에 불과[135]하다.

[R-Commentary] 추측하는 것, 이념이 작동하는 것.

막스 블랙:

먼로 비어즐리:

로만 야콥슨:

은유와 해석학

[142]은유는 청자나 독자들에게 해석을 강요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해석 작업(다시 해석학이다.)은 은유적 과정의 고유한 부분이다. 하나의 과정인 은유는 단어의 연결을 단어가 위치하고 있는 전체 문장의 문맥 속에 연관시킬 뿐 아니라, 그 문장이 위치한 담론의 문화적 맥락과도 연관시킨다. 이것이 바로 은유가 살아 있다는 말(곧, 해석하는 존재가 된다.)이 뜻하는 바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은유적 차원이 언어 가운데 가장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R-Commentary] 또 하나. 은유는 ‘강요’한다. 즉 은유는 어떤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사유를 불러 일으키는 그 ‘기호’ 들뢰즈-스피노자의 ‘기호’가 아닐까?

[144]그러면 시적 은유란 무엇인가? 시적 언어는 물론 그것이 시 안에서 번번히 발견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시의 언어일 필요는 없다. 리쾨르는 은유가 자기 발견적 허구를 생산하는 언어, 달리 말하면 우리가 뭔가를 파악하도록 혹은 발견하도록 이끄는 허구라고 말한다. 언어의 시적 기능은 우회로를 통해 실재에 대한 재서술을 추구한다. 실재를 기술하는 경로를 간접적으로 만듦으로써 은유는 재서술의 수단이 된다. 언어가 은유를 통해 직접적인 기술이라는 제 기능을 스스로 벗어 버릴 때(Ricoeur 1977: 247), 언어는 발견의 기능에서 해방되어 신화적 차원을 획득한다.

[R-Commentary] 이 신화는 아폴론의 것인가? 디오뉘소스의 것인가? 아니면 미노타우로스의 것인가?

은유와 철학

05_이야기

은유와 이야기의 생산적인 창안

이야기와 해석학

건강한 순환

시간

[156][아리스토텔레스-칸트로 이어지는 시간에 관한 이론과는 다른] 시간에 관한 두 번째 이론은 (...)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으로 개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근대의 현상학에 대해 몰랐지만, 그의 이론은 시간에 관한 ‘현상학적’ 이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20세기의 후설과 하이데거가 그의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만일 시간이 ‘현재들’의 연속이라면, 언제나 내가 지금을 말할 때 그 지금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된다. (...) 시간 개념은, 더 엄밀히 말해서 현재 시간 개념은 항상 현재 시간, ‘지금’에 뒤쳐져 있다. 이 역설은 현재를 가리키는 ‘지금’이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현재를 가리킬 수 없다는 데 있다. (...) [157]수학적 용어로 말해서 현재의 지금-점noe-point은 연장이 결여되어 있다. 즉, 무한히 작은 점이다. (...)

[158]아우구스티누스의 역설에 대한 해결책은 ‘세 겹의 현재’라는 개념이다. 과거와 미래는 한편으로 기억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기대를 통해 마음속에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려면 정신은 반드시 이완되어야, 확장되어야 한다. (...) 현재의 연장의 결여는 정신의 이완을 통해 극복된다는 것이다. 사실 사유는 정신의 이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신이 사유인 한 그것은 하이데거가 ‘현전’이라고 부른,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매개된 현재의 지속적인 펼쳐짐으로서의 사유이다. 정신이 이런 방식으로 연장되는 한, 지속적인 현재는 그 안에 과거와 미래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유가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시간과 영원성의 대조를 가능케 한다. 영원성은 ‘매우 긴 시간’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시간의 바깥이다. (...) [159]신은 시간을 창조했고, (...) 신은 영원하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 시간은 정신의 움직임으로 생긴다고 선언했다. (...)

신의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하다. 만약 사람의 정신이 ‘움직이지 않게 고정된다면’ 영원성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신과 달리) 창조된 존재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고선 정신을 정적인 상태로 유지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영원성이 어떤 것처럼 보이는지 간신히 상상할 수는 있다. 우리는 마음의 지향성intentio을 가질 수 있다.

아우[160]구스티누스의 시간 이론은 리쾨르가 이야기에 의존하는 시간을 기술할 때 받아들인 모델이다. 리쾨르의 공식은 팽창 속의 마음의 지향성, 즉 고요를 향하는 정신의 지향과 그 움직임을 시간 속에서 구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지각하게 만드는 정신의 팽창이 만들어 내는 변증법이다.

마음의 지향성의 ‘지향’은 리쾨르에게 현상학적 지향, 혹은 현상학적 지향성이다. 의미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정신의 동기부여하는 힘이다. 만약 의미가(문장 속에서의 단어의 펼쳐짐 그리고 담론 안에서의 문장의 펼쳐짐. 고립된 채 의미를 갖는 단어는 없다.)에 기인한 것이라면, 의미는 시간 속에서 생산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세 겹의 현재’라고 이해한 인간적 시간이며, 영혼을 가지도록 북돋워 주는 인간적 의미이다. 이야기는 플롯에 의존함으로써 인간적 의미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담론의 형식이 된다. 이야기의 의미를 발견하라. 그러면 인간 영혼의 영원한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R-Commentary] 의미가 과연 ‘본질의 펼쳐짐’인가? 본질이 의미를 통해 오는 것이라면, 시간은 이야기를 ‘해석’하는 그 정신의 지향성으로 인해 오히려 굴절되거나 비껴가지 않겠는가? 여기!! 현상학의 지향적 시간성 대 들뢰즈의 수동적 시간성.

미메시스1, 미메시스2, 미메시스3

줄거리 구성

역사

[169]역사는 의사플롯인 것이다. (...) 요컨대 역사의 사건은 의사사건인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서 의사플롯, 의사인물, 의사사건은 리쾨르가 다른 어떠한 형식의 담론과도 대비되는 ‘역사의 지향성’이라고 부른 것, 즉 역사가 되기 위해 역사 이면에 있는 ‘의미-의도’라고 부른 것을 이룬다.

[R-Commentary] 그렇다면 진정한 사건, ‘실재로서의 사건’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리쾨르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리쾨르에게는 역사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의 실재성 여부는 당장 인간의 삶 또는 종교적 비의와는 관계 없어 보이는 것 같다.

허구

[171]허구 이야기는 언술statement(말해진 것)과 언술행위utterance(말할 때의 방식)의 구분을 강요하며 동사 시제 사용함으로써 구분한다. 담론은 ‘나는 상점에 갈 생각이다I am just going to the shops’처럼 전형적으로 현재시제를 변형(예를 들면 진행형과 함께 사용) 하거나 (미래시제가 있는 언어들에 대해서는) 미래 시제를 변형해서 사용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야기narrative는 ‘그 남자는 독양을 마신 후 죽었다The man drank the hemlock and then he died’처럼 전형적으로 과거시제, 특히 ‘아오리스트aorist’(한정 단순 과거)와 ‘단순 과거 시제preterite’를 사용한다. 여기서 동사 시제는 시간을 과거, 현[172]재, 미래로 구별하는 것과 필연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175]허구 이야기의 이러한 특성은 작가의 시점과 (작가가 만들어 낸) 화자 그리고 작중 인물 사이에 즉각적인 거리를 만들어 내고,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해 혹은 이데올로기인 작가의 시점을 쉽사리 드러나게 한다. 작가는 화자의 입을 통해 작중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혹은 그 반대로 평가함으로써, 아니면 독자가 승인한 작[176]중인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냉담한 화자를 통해서 어느 쪽이라도 자신의 시점을 드러낼 수 있다.

[R-Commentary] 픽션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작가는 작품의 공간(이를 ‘topos phantasmata’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전일적인 위치에 있게 되며, 반대로 작품에 부재하게 된다. 과연 블랑쇼와 바르트 이래 ‘작가의 죽음’이 진정 허무주의를 내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작가는 본래 부재하면서 허구의 공간 안에 유령처럼 떠돈다.

역사와 허구를 함께

[179]명백한 차이는 허구적 과거의 비실재성과 대조적인 역사적 과거의 실재성이다. (...)

‘역사적 실재’는 순진하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 역사적 과거는 (...) 한때 실재했다. 하지만 그 실재성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 리쾨르에 따르면 역사적 과거의 실재성은 증언, 기록, 목격담 등 리쾨르가 ‘흔적’이라고 부른 것들 속에, 그리고 개인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흔적이란 현재에 남아 있는 자취를 통한 과거의 지속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 자체의 지속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지속이다. 전형적으로, 과거의 흔적은 사람들의 업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엄밀히 말해서, 역사는 이러한 흔적들을 재작업해서 우리의 현재 속에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다.

[180]리쾨르에게 이 심연[역사와 허구]을 이어 주는 것은 읽는 행위인데, 이것은 전략적 지점에서 역사와 허구의 결정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저자의 층위에 연결고리가 있다. 역사의 저자는 그가 다루는 사실들로써 제한된다. 저자는 그럴듯하게 사실들을 배열하는 한도 내에서만 (역사를) 구성한다. 그는 사실을 창안하지 않는다. 반면 허구 작가는 창안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것이 단지 ‘~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을 위한 자유’라고 지적한다. 리쾨르는 ‘예술적 창조의 법칙’은 역사적 사실의 규칙이 역사가에게 그런 것처럼 예[181]술가에게도 엄격하다고 주장한다. 창조의 법칙은 예술가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세계관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되돌려 주는 것이며, 역사가와 그 독자가 죽은 자들에게 진 빚에 정확하게 상응한다.

[181]텍스트는 독자가 불신을 잠정적으로 중지할 것을 알고 있다. 리쾨르가 주장하는 것은, 텍스트를 수용하는 것과 텍스트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 사이의 협상 구조는 역사와 과거의 실재성의 관계가 ‘의미하는’ 구조와 같다는 것이다.

[182]리쾨르는 그저 역사와 허구는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와 허구가 ‘상호 직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R-Commentary] 문제는 이 ‘상호직조’의 과정에서 역사와 허구가 조우할 때, 어떤 융합, 분열이 일어나는가이다. 미궁에 빠진 역사적 실재 쪽으로 가는 문턱과 독자와 작자 모두를 ‘허구의 실재적 효과’(Deleuze) 쪽으로 몰고 가는 문턱이 존재한다. 과연 이런 문턱들의 구별이 가능할 것인가? 들뢰즈라면 그렇게 물을 것이다.

06_윤리학

덕의 윤리학

이야기 정체성:IDEM과 IPSE

성격과 약속 지키기

스토리 대 삶

삶의 스토리

‘나 여기 있어!’

[199]이야기 정체성으로서의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삶 속에 자기-항구성을 정착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해된 자기-항구성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나는 타자들에게 한 나의 말, 나의 약속이 변함없음을 통해 나의 자기-항구성을 입증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타인들의 삶의 이야기 가닥과 내 삶의 이야기 가닥의 서로 얽힘이 윤리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200]idem에서 ipse로의 이동이 ‘나는 무엇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로의 이동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 [이 둘의] 간격은 이야기 정체성을 이룬다. ‘나 여기 있어!’라고 선언하는 것과 관련된 도덕적 항구성은 도덕적 정체성을 이룬다. 이야기 정체성과 도덕적 정체성 사이에서 리쾨르가 ‘생산적인 긴장’이라고 부른 것이 생긴다. 즉 이야기 정체성이 자아를 의문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도덕적 정체성의 근원이 된다. 반면 도덕적 정체성은 자신감에 가득 찬 단언처럼 보인다. 이야기 정체성의 질문은 계속해서 도덕적 정체성의 단언을 견제한다. ‘나 여기 있어’는 허풍쟁이의 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임의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준 한 개인이 표현한 겸손함이다. ‘나 여기 있어!’는 배려의 표현이다.

[R-Commentary] 국가폭력은 이러한 ‘겸손’과 ‘배려’에 흔히 죽음으로 답한다. 특히 타자가 약자로서 노출되어 있을 때, 국가폭력은 국가폭력 혐의자들의 개인 이익을 위해 희생양을 찾는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건물은 그러한 반동적 작용이 무고한 타자들을 화염 속에서 던져 넣은 날을 애도하는 기념비적 토포스다. 그리고 그 화염은 경찰폭력에서 사법폭력으로 변용되어 지금도 죽은 후손들의 몸을 태우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범인인 김석기는 지금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07_정치와 정의

‘정치의 모순’

[210]‘5개년 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주의 국가는 ‘사물을 지배하는 것’과 ‘사람을 통치하는 것’을 혼동한다. (...) 국가가 노동자의 생산물에서 획득한 부를 분배함으로써 노동자의 ‘의욕을 고취하지’ 않고 위협, 폭력을 통한 협박, 강제 이주 같은 방식으로 ‘동기부여’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와 비슷했다. (...) 사회주의 국가는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미래를 보았다. (...)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국가가 현재 세대를 함부로 다루게 되고 (...)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소외’를 재도입했다. (...) 사회주의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다. (...) 다른 말로 하면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들의 외적 환경 뿐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통제하려 한다.

[R-Commentary] 이 모든 리쾨르의 비판은 사실상 ‘고전적’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연 현재 구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이 물음에 대꾸할 근거가 ‘스탈린주의’나 ‘국가자본주의’라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까? 판은 새로 짜여져야 한다. 어떻게? 내가 보기에 그 철학적 기초는 리쾨르-들뢰즈-스피노자-맑스에 있다.

사회주의국가 없는 사회주의

[211]국가를 소멸시키는 것에 대한 대안은 국가를 통제하는 것이다.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만 통제될 수 있지, 소비에트 시절에 볼 수 있었던 ‘현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통제될 수 없다는 것이 리쾨르의 논점이다. 리쾨르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인 지적 이동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 안에 사회주의 경제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리쾨르의 주장이다. 그의 사회주의는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이다.

[R-Commentary] 굳이 정확성을 기하자면 리쾨르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라고 하겠다. 이 방면에서 그의 사상적 궤적을 탐구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과격파에서 온건파로의 이 변화양상. 이 변화 와중에 68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사실 리쾨르를 반마르크스주의자라고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가 생각하기에] 사회주의 국가의 흠 혹은 악은 그 안에 여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 자유주의 국가는 ‘다원적인’ 국가이며, 사회주의는 타자, 즉 상반된 견해를 가진 자를 허용하는 정치적 구조 안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R-Commentary] 자유주의적 다원주의가 표면적으로 보면 의견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구조인 것처럼 여겨진다. 리쾨르는 이 함정 안에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측면에서는 맑스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법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통치 이념이며, 그것은 평등하지 않고, 따라서 다원성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법은 정치의 연장이며, 더 신랄하게 말한다면 ‘전쟁’(계급투쟁)의 연장인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법이 국가의 도구인 것과는 반대로] 자유주의국가에서 법은 (...) 국가보다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은 국가가 불합리하게 힘을 행사하려고 할 때 이에 맞서 법에 호소할 수 있다. (...) [212]국가는 야만적 자유와 안전의 교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법을 통해 시민적 존재로 가는 길을 제공한다.

정의 대 복수

공리주의에 맞서

황금률과 새 계명

[218]사랑과 정의는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니라 가장 약한 자의 희생을 허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정의는 그것을 통해 사랑이 표현되는 매체이다. 나는 정의로운 사회제도를 통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사랑은 에로스(관능적 사랑)에 대립하는 아가페(형제의 사랑)적 의미의 사랑이다. (...) 왜냐하면 형제의 사랑은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할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넘침의 윤리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관능적 사랑은 욕망에 기초한 것이다. (...) 욕망은 동등한 양자 간의 호혜적 관계를 요구한다. 이에 반해 우정은 행위자가 수동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R-Commentary] 욕망과 윤리를 갈라놓는 순간 그 욕망은 윤리를 훼손하면서 우정의 당사자들에게 거래를 강요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욕망을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기쁨의 윤리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관능적 사랑은 윤리의 다른 가능성이며 윤리가 상호성이라는 약한 만남을 넘쳐흐르도록 만드는 진정한 동인이다. 내 생각에 (기쁨의) 욕망이 없는 우정은 2인칭의 우정에 머물 뿐이다. 그것이 3인칭으로 또한 공통체적으로 확대, 전염되기 위해서는 욕망이 반드시 필요하다.

선물과 용서

[219]피해를 입은 측에서 가해자가 자기들이 당한 만큼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것임으로, 다시 말해 처벌이 그들이 당한 범죄에 상응하지는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복수가 될 것이다. (...)

그렇다면 모든 정의는 적어도 범죄의 [220]희생자에게 일정정도의 용서를 요구한다. 용서는 이처럼 사랑과 비슷하다. 혹은 사랑 자체의 한 국면이거나 사랑이 표현이다. ‘왜냐하면 용서는 선물 경제, 즉 용서를 명확히 표명하고 정의를 지배하는 등가성의 논리에 맞서야 하는 넘침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R-Commentary] 용서는 우월성의 표현인가? 거리의 표현인가? 우월성의 표현일 때, 그것은 ‘감옥’과 ‘처벌’이 될 것이고, 거리의 표현일 때 그것은 ‘추방’과 ‘유배’가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를 탈출(exodus)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다중의 쪽에서 탈출은 자발적인 유배며,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이다. 이는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용서하고 용서 받는 것이다. 다중의 탈출은 그래서 부르주아의 사법적 판결로 인한 처벌을 넘쳐 흐르면서 사법적 지향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거리의 윤리’ 이것이 다중의 윤리다!

사면

[222]범죄자에 대한 사면은 범죄자들에게 남아 있는 범죄에 대한 책임감을 제거한다. 이 같은 책임감의 제거는 범죄자들이 그들의 희생자들을 비인간화했던 것만큼이나 범죄자들을 비인간화한다. 왜냐하면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행위자가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정의(定義)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범죄자와 희생자 간의 법적 거리를 설정하는 제3자인 판사 역시 희생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 만일 정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희생자가 복수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적어도 희생자는 정의를 얻어야 한다. 범죄가 사면을 통해 잊혀진다면 희생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은 복수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R-Commentary] 부르주아 사법은 희생자의 포기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그렇게 함으로써 사면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사면의 부정의에 대한 논의는 은폐하거나,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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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마티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레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1917년 당시에는 크렘린 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리무중인가? 이 책의 저자들이 레닌의 손가락을 열심히 보는 동안 혹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지금/여기 발 아래는 아니었던가?

 

일정한 현장성을 상실하면서도(이를테면 그것이 복고적 취향이라거나 아니면 레닌의 혁명적 일대기에 대한 회고라는 식의 비판을 어느정도 수용하면서) 레닌이 지금 중요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 바퀴 돌아 다시 1917년이 되는 것인가? 이 책의 필자들을 일렬로 세워 보면 거대한 산맥들을 마주대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 산맥의 면면을 살펴 보면 이런저런 '절박함'이 먼저 묻어난다. 산맥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막대한 권위는 아닌 것이고, 오히려 레닌의 정체성에 신들린 듯한 모습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레닌을 불러 오는 주술은 매우 강력해 보인다. 레닌의 정당성은 이렇게 불러 오는 자들이 얼마나 '이론적 열정'을 투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레닌'이라는 저 이름, 아니 이제 이름이 아니라 '혁명의 구호'이자 '명령'이 된 명사는 신자유주의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공교롭게도 유령이 되어 버린 좌파들의 둔해진 대뇌에 강력한 아드레날린을 주입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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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비교 발췌]

Lenin Reloaded-Toward a Politics of Truth

Duke Univ Pr, 2007

《레닌 재장전-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이재원 외 옮김, 마티, 2010

옮긴이의 글 -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과 더불어 무엇을 할 것인가? - 이재원

[16]결국 우리는 언제든 옳게 정세를 읽을 수 있는 주체라기보다는 그저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인 정세 속에서 ‘결단’과 ‘선택’을 감행하고, 스스로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모든 결과에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책임’을 떠안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17]그렇다면 레닌이 말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서의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흔히 논리학에서 말하는 인식(진술)과 사실(사물)의 일치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주어진 사태나 상황, 즉 정세의 ‘본질’에 대한 진술로서의 진리이다. 예컨대 제2인터네셔널의 붕괴를 가져온 1914년의 상황에서 자국 노동자들의 전쟁 참전을 지지한 이른바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상황판단도 모두 정세의 일면을 포착했다는 의미에서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우선은 조국을, 동지를, 가족을 지켜야 한다 등등). 그러므로 세계전쟁의 물꼬를 혁명을 위한 내전으로 돌려야 한다는 당시의 레닌의 테제는 거짓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진리가 아니라 ‘개개의 사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진리였다. 레닌의 진리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상대적 진리가 아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개개의 사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주어진 정세의 전체 판도를 반영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의미에서 레닌의 진리는 차라리 보편적 진리라고도 불림직하다.

그런데 이 말은 곧 주어진 정세를 구성하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그런 보편성을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파성’이다.

서문 - 레닌을 반복하기 - 세바스티앙 뷔쟁, 스타티스 쿠벨라스키, 슬라보예 지젝

[22/2]포스트 모던의 정치 사유는 정확히(precisely)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탈-마르크스주의(post-Marxist)이다. 레닌에 대한 참조는 이러한 두 개의 함정(pitfalls)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개입(intervention)을 구분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마르크스와 관련해 레닌의 외부성(Lenin's externality with regard to Marx)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레닌은 초기 주동자들(the initiated)로 이루어진 마르크스 내부 서클의 회원이 아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만난 적도 없다. 게다가 “유럽문명”의 동쪽 끝에 위치한 땅에서 왔다. 이렇게 해서 이 외부성은 레닌에 반대하는 표준적인 서양의 인종주의적 논의의 한 부분이 된다. ... 레닌은 마르크스의 위치를 격렬하게(violently) 전치시켜(displace) 놓았다. 다시 말해, 원래의 문맥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떼어내 다른 역사적 순간에 이식함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실질적으로 보편화한 것이다.

두 번째로, 오직 이러한 격렬한 전치(violent displacement)를 통해서만 원래의 이론은, 정치적 개입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면서, 작동할 수 있다. ... [23/3]레닌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인 오늘날, 여느 때보다 더 실효성이 있는 진리와 편을 드는 태도인 당파성partisanship이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서로의 조건이라는 데에 내기를 걸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편적 진리란 오직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을 통해서만 표명될 수 있다. 진리는 정의상 한쪽 편이다. 물론 이는 충동하는 다수의 이해관계 속에서 중도를 찾는 타협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나아간다.

우리에게 “레닌”은 낡은 독단적 확실성을 향한 향수어린 이름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되살리려는 레닌은 생성 중인 레닌Lenin-in-becoming, 그의 근본적인 경험이 파국적인 새 성좌 속으로 던져지고 그 속에서 오래된 참조점들이 아무런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버려 할 수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재발명해야 했던 레닌이다. 묘비석을 찾거나 그림을 바라보는 것처럼, 레닌으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은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repeat하고 재장전reload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 이 귀환은 ...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24]

PART ONE 레닌을 복구하기

1.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 - 알랭 바디우

[28/8]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이트 독재(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일반의 문제 뿐 아니라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에까지 개입하고 싶어 했다. 러시아에 국한된 전술적인 결정이라는 근거를 내세워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배신의 본질이었다. 원칙을 어기기 위해 전술적 상황 운운하는 것. 원칙의 문제로 정의되는 정치 개념을 개량주의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부차적인 모순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배신의 본질이다.

[29/8]결국 이론은 문제의 국면을 사유 속에 통합하는 것이다.(So theory is precisely what integrates in thought the moment of a question.) 민주주의라는 문제의 국면은 부자들과 착취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과 같은 전술적이고 지엽적인 결정이나 혁명의 특수성과 관련된 결정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국면은 일반적인 승리를 쟁취한 혁명들의 국면에, 착취자들을 실제로 무너뜨린 국면에 있다. ... 이론가는 결정된 국면의 내부(the inside of the determined moment)에서부터 민주주의의 문제에 접근한다. 반면 배신자는 국면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순전히 자신의 정치적 분노를 위해 특정한 에피소드를 기회로 이용한다.

[30/9]이 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떻든 간에 이 세기는 약속이 아니라 실현의 세기(not a century of promise, but of accomplishment)라는 것이다. 그것은 선언과 미래의 세기가 아니라 행동과 실행의 세기이고 절대적인 현재(absolute present)의 세기이다. 이 세기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의 밀레니엄 이후, 승리의 세기로 살아오고 있다. 20세기의 주역들은 헛됨, 숭고한 시도, 이데올로기에의 예속 등에 대한 숭배는 이전 세기 즉 19세기의 불행한 낭만주의의 것이라고 치부했다. 20세기는 말한다. 패배는 끝났다. 이제는 승리의 시대다! 이 승리감에 찬 주체성은 모든 명백한 패배에서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주체성은 경험적이라기보다는 구성적이기 때문이다. 승리는 패배까지도 조직해 내는 초월적인 동인이다.(Victory is the transcendental motive that organizes even the defeat.).

[33/11]만일 하나를 향한 욕망으로, 주관적인 공식으로 여겨지는 종합의 준칙(둘은 하나로 통합된다)이 우파적이라면, 중국 혁명가들의 눈에 비친 이런 견해는 전적으로 미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준칙의 주체는 최종에 이를 때까지 둘을 극복해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완전하게 승리하는 계급투쟁이 무엇인지를 끝내 알지 못한다. 이 입장을 따를 때, 욕망을 산출하는 하나는 사유할 수조차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이는 말하자면 종합을 빌미로 고전적인 하나(즉, 일자)를 요청하도록 만들게 된다. 그래서 변증법에 대한 이런 해석은 복고주의적이다. 오늘날 보수주의자가 되지 않고 혁명적인 행동가가 된다는 것은 의무적으로 분열을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새로움의 문제는 그 즉시 상황의 특이성 속에서 분열을 창조하는 문제가 된다.(Not to be a conservative, to be a revolutionary activist nowadays, means obligatorily to desire division. The question of the new immediately becomes the question of the creative division in the singularity of the situation.)

[36/13]그렇다면 때때로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폭력은 어떠한가? ... 정치가 만일 부자들, 권력과 권력가들, 학문과 학자들, 자본과 그 하수인들에게 사회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영원한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런 정치가 자애로우면서 진보적이고 평화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 총체적 해방total emancipation이라는 주제는 현재 속에, 절대적 현재의 열광 속에서 실행으로 옮겨지면서 언제나 선과 악 너머에 위치하게 된다.[37] 왜냐하면 행동의 와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선은 기존 질서가 자신의 영속성을 명명하는 데서 나온 귀중한 명칭인 일자the one일 뿐이기 때문이다.(The theme of total emancipation, when put into practice in the present, in the enthusiasm of the absolute present, is always situated beyond good and evil, because in the middle of the action the only good that is known is the one that bears the precious name whereby the established order names its own persistence.) 그래서 극단적 폭력은 극단적 열광이 가진 상대적인 상관물이고, 정말로 시급한 것은, 니체식으로 말해보자면, 모든 가치들의 가치전환이다. 실재를 향한 레닌주의적 열정은 사유를 향한 열정이기도 하며, 어떤 도덕도 알지 못한다.(The Leninist passion for the real, which is also a passion for thought, knows [14]no marality)

[38/14]정치적인 것은,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실재와 관련해서 자신의 원칙을 세우며, 자신을 제외한 다른 어떤 필요도 가지지 않는다. ... 확실히 실재를 향한 열정은 항상 가상semblance의 증식을 동반한다.(Certainly the passion for the real always accompanied by a proliferation of semblance) 혁명가에게 세계는 기만과 타락으로 가득 찬 구세계이다. 그는 베일 아래 가려진 실재를 폭로하면서 끊임없이 다시 정화작업을 시도한다.

[39/15]이 세기가 그려온 또 다른 방식, 즉 테러의 발작적인 매력에 굴하지 않고 실재를 향한 열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방식을 나는 공제의 방식the subtractive way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공제의 방식은 진짜 지점을 현실의 파괴가 아니라 최소한의 차이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기가 드러낸 또 다른 방식은 아주 작은 차이, 즉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소멸항vanishing term을 간파하기 위해 외견상의 통일성으로부터 이 항을 뽑아냄으로써 현실을 정화하는 것이지 현실의 표면 속에서 그것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벌어진 일은 그것이 벌어진 장소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모든 충격the affect이 위치한 곳은 바로 이 “거의” 의 안, 내재적인 예외 안이다.(it means to exhibit as the real point not the destruction of reality but a minimal difference. The other way set forth by the century is to purify reality, and not to annihilate it in its surface, by subtracting it from its apparent unity in order to detect the tiny difference, the vanishing term that is constitutive for it. What takes place "hardly" where all the affect is, in this immanent exception.이 세기에 의해 제기되는 다른 방식은 작은 차이, 즉 그것을 구성하는 소멸항을 파악하기 위해 외견상의 통일성으로부터 그것을 빼냄으로써 현실을 정화하는 것이며, 그것을 표면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40/16]새로운 인간은 모든 범주화와 특성화에 저항한다. 특히 가족과 사적 소유, 민족-국가에 저항한다. ... 마르크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특이성universal singularity은 범주화에 저항하며, 어떤 특성들도 지니지 않고, 특히 가장 중요한 점으로는 개별적인 민족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41]

[42/17]이 세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테마들 주위로 이끌리고 있다. 불가능한 주체적 혁신과 안락함 그리고 반복(impossible subjective innovation, comfort and repetition).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강박관념(obsession)이다. 이 세기는 안전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끝나고 있으며, 실제로는 보다 더 비참한 다음과 같은 하나의 준칙 아래서 종결되고 있다. 즉 당신이 숨쉬고 있는 이곳은 사실상 그렇게 나쁘지 않다. … 더 최악인 것들이 존재해 왔으며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강박관념은 프로이트와 레닌이 모두 이해했던 것처럼 히스테리의 파괴, 행동주의, 타협하지 않는 군국주의라는 기표 아래 탄생한 이 세기와 완벽하게 대립적으로 진행된다.(And this obsession goes completely against the century that, as both Freud and Lenin understood it, had been born under the sign of devastating hysteria, of its activism, and its intransigent militarism. 그리고 이러한 강박관념은 프로이트와 레닌이 모두 이해했던 것처럼, 파괴적인 히스테리와 그러한 행위양식 또한 그것의 완고한 군국주의[적 경향이]라는 기표 아래에서 탄생했던 그 세기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2. 21세기의 레닌주의? 레닌, 베버 그리고 책임의 정치 - 알렉스 캘리니코스

[48/21]1919년 1월에 이루어진 「직업으로서의 정치」 강연은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사심 없고 공평한 학자적 논평이 결코 아니었다.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났고, 베를린 좌파 봉기 실패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비명횡사한 것을 상기해 보라. 페리 앤더슨의 지적처럼 위에 인용한 글에는 혁명에 반대하는 국가주의적 수사가 차고 넘친다. 베버는 신념의 윤리를 채택한 대표적 사례로 혁명적 좌파를 든다. ... 결국 그들은 이 세계와 실질적 성공을 포기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무결한 원리(신념)를 실현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정치에 있어 고유한 폭력에 의존하고, 결국 “모든 폭력에 숨어 있는 악마적 힘”과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취해진 정치적 행동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혁명 운동 자체도 물질적 이해관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 [49/22]베버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신념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를 대비시겼다. ... [50]「직업으로서의 정치」의 전체 구조와 수사를 통해 우리는 베버가 이런 윤리적 입장을 선택했고, 자신의 적들인 볼세비키와 스파르타쿠스단의 해악적 아마추어리즘에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젝이 베버와 아주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걸 지켜보는 일은 정말이지 기묘하다.

[50/23]책임의 윤리와 신념의 윤리(the ethic of responsibility and of conviction)를 구분하는 작업은 사실과 가치를 신칸트주의적으로 분류하겠다는 구상에 기반하고 있다.[51] 후자의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규범적 목표들의 절대적 특성은 그 목표들이 일체의 실질적 과제 상황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 책임의 윤리에 수반되는 결과 평가는 현실의 정치관행(활동)으로 구성된다.

[51/23]앤더슨이 베버의 “결정론”(결단주의, decisionism)이라고 적절하게 지칭한 것은 레닌의 정치 이해 방식과는 아주 동떨어진 세계이다. ... [53/25]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실상은 레닌이 엄청나게 다급한 환경에서조차 이론과 실천 사이의 끊임없는 진동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한발 뒤로 물러서 상황을 이론적으로 재검토했다는 사실이다. ... [54]레닌이 1917년에 한 일을 살펴 보면 그의 정치 사상의 두 가지 핵심 테마를 발견할 수 있다. (1) 역사의 복잡성과 예측불가능성(the complexity and unpredicability of history), (2) 정치적 개입의 필요성(the necessity of political intervention). ... 레닌은 1917년 2월에 결합되었던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한다. 1차 대전이라는 “강력한 가속기”, 열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의 부추김 속에서 로마노프 왕조가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결론 내린 보수파 및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음모, 노동자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서 점증하던 불만 등등. 요컨대 “아주 독특한 역사적 상황의 결과로서 전혀 다른 흐름들, 완전히 이질적인 계급 이해관계, 완전히 상반되는 정치적, 사회적 쟁투들이 합쳐졌다. 그것도 아주 ‘조화롭게’ 말이다.” ... [55/26]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도 2월 혁명에 허를 찔렸고, 깜짝 놀랐다. 당대의 사유는 메를로-퐁티가 칭한 역사의 모호성을 인정하면서 대개 정치 행동을 회피했고, 아주 복잡한 사회 세계가 제시한 얄궂은 결과를 수수방관했다. 레닌은 그렇지 않았다. 역사의 그 예측불가능성이 우리가 개입해서 역사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적 개입은 맹목적이고 무모한 짓이 아니다. 무엇이 핵심 고리인지 파악하려면 주의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또 그러려면 “전체 사슬”(whole chain)을 이해해야 한다.

[56/27]물론 세력균형에 대한 그 어떤 평가도 부분적으로나마 잘못으로 판명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견지에서 레닌의 나폴레옹 인용(또는 잘못된 인용, (mis)quotation)을 해석해야만 한다. “일단 해 보면 알게 된다.”(On s'engage et puis ... on voit) 혁명가들은 가능한 최상의 분석을 바탕으로 개입한다. 그렇게 개입함 - 혁명가들에게 사슬의 핵심고리로 비친 것을 부여 잡기 - 으로써만 그들은 자신들의 분석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있다.

[57/28]역사의 예측불가능성(the unpredictability of history)은 역사의 불확정성(its indeterminacy)과 다르다. 이론적 분석은 특정한 상황을 구성하는 구조와 경향을 파악한다. 그러나 그렇게 밝혀진 구조와 경향이 상황을 남김없이 규명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개념화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혁명가는 상황과 관련해 할 수 있는 최상의 분석을 바탕으로 사태에 개입한다. 상황의 결정적 요소들(로 비치는 것들)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최고의 이론이라도 어쩔 수 없는 한계 - 맞다고는 해도 상황을 철저하게 규명할 수 없는 한계 - 로 인해, 내가 앞서 레닌의 정치적 실천이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주장한 내용, 곧 분석과 개입 사이의 끝없는 진동(분석과 행위 사이의 끝없는 상호 추적the constant tracking backward and forward between analysis and action)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태가 잘 풀리면 (정말이지 많은 경우 그렇게 되지 않지만) 그 결과는 상호계시(상호조명mutual illumination)의 과정이 된다. 그 속에서는 성공적인 개입으로 이론이 정련되고, 더 나은 실천으로 되먹임된다.

[59/29]지젝이 관심을 집중하는 결과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해 줄지 모르는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그는 이 세계에서 착취와 억압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되어야만 하는 불쾌한 과업을 우리가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런 훈계는 희망적 사고를 교정해 줄 때에만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런 훈계가 적절한 맥락에서 신중하게 채택되지 않을 경우 변명에 동원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5/34]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의 완결이기보다는 레닌주의와 단절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가 부상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이 최종적으로 패배하면서 볼셰비키가 처했던 상황의 우발적 결과가 스탈린주의의 부상이었던 것이다.(its emergence was not inevitable but was a contingent outcome of the circumstance in which the Bolsheviks found themselves, particularly as a result of the final defeat or the German Revolution in October 1923.)

[69/36]오늘날의 레닌주의... 1. 자본주의를 전략적으로 분석하는 것의 중요성. 레닌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 사상가가 결코 아니었다. ... 레닌이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확연하게 보여 준 게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따라 정치적 행위자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것(strategically situating political actors)의 중요성이다. ... 좌파는 자본주의의 현 시기 발전 단계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70]이와 관련해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훌륭한 책 『제국』은, 사람들이 그들의 분석에 얼마만큼 동의하고 또 의견을 달리하는가와는 무관하게, 당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가진다. 『제국』이 발전시키려고 하는 종류의 이해 방식이 없다면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행동하게 될 것이다.

2. 정치의 구체성과 중심성(The specificity and centrality of politics). ... 대다수의 평자들은 경제가 전지구화되면서 민족 국가가 약화되었다고 믿고 있다. 나는 그 입장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선 첫째로 전지구화의 촉진자로서 국가 권력의 행사가 결정적이었다. 국가 권력은, 크게 보아 여전히 국가 단위로 구성된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주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로서 여전히 건재하다. ... 하트와 네그리는 레닌의 가장 약한 고리 개념이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형성된 “제국”에서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제국은 모든 지점이 취약하다는 것이다.[71] 그러나 자본의 힘과, 자본이 착취하는 사람들의 힘이 이 세계에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면 선전과 선동의 우선순위를 밝히려는 노력은 절대적으로 불가피해 보인다.

3. 정치조직의 필요성. ... 자본가의 권력이 국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맞서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에너지 역시 한데 모아야 한다. ...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수가 그런 중앙 집중화된 조직의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 그러나 그런 전략이 각오해야 할 혼란과 탈진의 위험성은 제쳐 놓는다 하더라도 효과적인 급진 운동이라면 구체적 불만을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에 관한 보다 포괄적인 그림으로 통합 수렴해 내는 방법과, 그런 비전을 현실로 바꿔낼 수 있는 정연한 수단을 요구할 것이다. / 현대의 정당은 그런 강령적,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출현한 제도적 형태이다. 그런 형식이 진부해져서 쓸모가 없다는 널리 유포된 관념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데 실패한 대중 운동들의 운명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72]자본주의 사회가 야기하는 그 모든 불만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반화하는 사회주의 정치조직이라는 정당의 문제는 당대의 좌파와 관련해서 레닌의 양도할 수 없는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3. 포스트모던 시대의 레닌 - 테리 이글턴

[78/42]포스트모던 시대는 경제주의의 어설픈 환원론에 저항한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선호하는 권력모형은 중앙집권적인 것이 아니라 복수적인 것, 산재하고 편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협소하게 계급이라는 개념에 기반한 정치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대신 민족 간의 차이와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에 주목하는 정치를 갈망한다. / 한마디로 말해 포스트모던 시대가 추앙하는 것은 곧 … 레닌주의인 것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시대가 말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레닌주의에 전부 들어맞는 사실이기 때문이다.(What a postmodern age admires, in short, is ... Leninism. For all this is true of Leninism too.)

[79/43]염세주의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우리는 우리 시대에 사회주의로부터 무관심이나 반동으로 옮겨 갔던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사회주의로부터 반자본주의로 이동해 왔다. 이는 물론 커다란 변화가 전혀 아니며, 최근 현실 사회주의의 운명을 고려했을 때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하나의 퇴보이다.

[81/44]문학과 혁명은 둘 다 물론 또한 예술 형식이다. 특히 혁명은 한없이 복잡한 실천의 작용이며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맥주 마시기보다 뇌수술에 더 가깝다. 누구나 혁명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성공적인 혁명을 완수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언제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또 성공적인 혁명에서는 이런 이들이 전면에 부각되기 마련이다. 전위의 문제란 이렇듯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 전위의 문제란, 예를 들자면 그러한 종류의 전문가들이 대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산출되는 것인가, 아니면 잘 훈련된 개인으로서의 혁명가가 이미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치적 위기의 시기에 대중이 그를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85/47]전위가 우둔한 대중에 대해 사회적, 영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선다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전위라는 고전적 레닌주의의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할 필요는 없다. / 첫째로, 엘리트는 자기 영속적인데 반해 전위는 자기 파괴적이다. ... [86]해방적인 종류의 권위라면 거기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일단 그러한 권위의 경험이 일반화되고 그 기능을 다하게 되면 전위는 그 임무를 마치고 사그라질 수도 있다. 확실히 전위는 엘리트주의로 경직될 수 있는데, 레닌주의로부터 스탈린주의로의 이행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적절하지 못하다. ... 광부들, 여성 참정권 지지자들, 미래주의자들, 초현실주의자들은 일종의 전위였지만, 그들이 모두 빠짐 없이 엘리트로 변모하지는 않았다.

[86/48]혁명이란 비일상적이며 비정상적인 사건(unusual, aberrant affairs)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혁명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혁명적 운동이 유토피아의 전조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일상생활의 소우주처럼 여겨져서도 안 된다. 사실 혁명은 그 행위와 관계를 통해 추구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들을 예시해야 하는데, 이는 단순히 도구적이기만 한 볼셰비키주의에는 없는 차원이다. ... 혁명은 유토피아에 대한 이미지도 아니다. ... [87]혁명이 응당 강조하는 투쟁과 갈등과 엄격한 자기부정 등의 규율을 자유, 번영, 평화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미래의 정치상으로 오해할 일은 점점 줄어든다. 이는 아마도, 혁명 운동에 가장 활발히 참여하는 사람들이 ... 그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뜻일 것이다. 브레히트가 「후손들에게」라는 시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아, 우리는 / 친절함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 우리 스스로 친절할 수는 없었다.”(Ach, wir / Die wir Boden bereiten wollten für Freundlichkeit / Konnten selber nicht freundlich sein)

[88/49]우리는 동인 집단을 정의상 원래 그리고 독자적으로 전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전위란 존재할 수 없다. 엘리트는 그 정의상 보통 사람들을 경멸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다면 전위는 활동하지 못할 것이다. 기호학적으로 말하자면, 전위와 군대 사이의 관계는 은유적이라기보다는 환유적이다. 이 관계를 은유적으로 보는 것은 아마도 대체주의라는 이단이 될 것이다. 볼셰비키 자체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는 주변적이고 격하된 지시대상 위에 내걸려 있었던 것처럼, 전위 또한 떠다니는 기표가 될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전위 개념은 레닌주의와 자주 혼동되곤 하는 단순한 폭동주의나 블랑키주의와는 매우 다르며, 이는 또한 레닌 자신이 언제나 거부했던 것이기도 하다.

[93/52]벤야민이 모스크바에 대한 글에서 관찰했던 것처럼, 그 결과는 “기술적 삶의 양태와 원시적 삶의 양태 사이의 완벽한 상호침투”(a complete interpenetration of technological and primitive modes of life) 인데, 말하자면 이 두 경우에서 모두 일직선적인 시간성은 내부에서 폭발하고 위대한 고전적 역사주의들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폭로되며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은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 되고 공허한 동질적 역사의 흐름은 벤야민이 “지금시간”jetztzeit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갑자기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의 시간이 무르익는 순간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계급이 들어가게 될 좁은 문이 되며, 또한 이 순간은 절대주의의 역사, 부르주아와 민주주의의 역사,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 지방 프티부르주아의 역사, 국가의 역사와 세계시민의 역사 등 여러 다양한 역사들이 순환하고 새로운 배치 안에서 직조되는 지금시간이 된다. 벤야민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처럼, 혁명은 과거의 쓰레기더미에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면서 미래로 떠밀려 간다.[94] 그리고 일반적으로 혁명의 시간이 자기동일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순전히 산만하지도 않은 것처럼, [/53]모더니즘의 시간과 볼셰비키 실험의 시간 또한 그렇다. 한편에서는 한 국가의 문화가 잡종, 혼합어, 세계시민적 자본 - 여기서는 새로운 공통어(lingua franca)나 세계적인 은어(argot)가 예술 그 자체인데 - 에 치욕적으로 자리를 내주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적 혁명에 의해 해방된 권력이 자본주의의 세계적 공간을 왜곡하고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국제주의적 접합들을 형성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국가적 혁명을 터뜨려 국가 자체라는 시간적 연속체로부터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blasting the national revolution out of the temporal continuum of the nation itself into another space altogether)이다.

[96/54]레닌은 당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를 일소하고 제거하는 가차 없는 결벽주의자였지만, 정치적 혁명이라는 실제적 과업에 있어서는 결벽주의자가 아니었다. ... 순수한 혁명에 대한 희망 속에서만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러한 순수한 혁명을 보지 못할 것(whoever lives in hopes of a pure revolution will never see one)이라는 이유에서이다.

[97/55]레닌이 포스트모던적인 틀에 순응하기를 완고하게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문화와 관련된 지점에서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레닌은, 비록 문화라는 용어의 의미는 다를지라도, 문화의 가치 자체는 높게 평가했다. ... 실제로 그는 문화를 러시아 혁명의 실행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로 봤으며, 또한 동시에 문화를 러시아혁명을 위협했던 유일하게 중요한 요인으로 보기도 했다. ... 러시아에서 혁명의 실행이 가능했던 것은 문화가 취약했기 때문에, 곧 시민사회가 결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정교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부족했기 때문에, 따라서 또한 “문명화되고” 통합된 노동계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강력했던 것이다.그러나 혁명의 지속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 또한 과학, 지식, 교양, 기술, 노하우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부재하는 문화 때문이었다.(ironically, the Russian working class was ideologically stronger just because it was culturally weaker. But it was the relative absence of culture, in the alternative sense of science, knowledge, literacy, technology and know-how, which made it so hard to sustain.) 기대치 않게 혁명이 탄생할 수 있도록 했던 똑같은 일이 반대로 혁명을 망칠 수도 있는 위협이 되는 것이다.

[99/56]레닌의 가장 대담한 전위적 텍스트는 확실히 『국가와 혁명』인데, 이 책은 정치적 신랄함의 정점에 서 있다는 의미에서 전위적일 뿐만 아니라 형식의 정치를 촉발한다는 보다 기술적인 의미에서도 또한 전위적이다. [100]사회주의 권력은 단순히 하나의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 양태로부터 또 다른 권력 양태로의 이행(not simply from one class to another, but from one modality of power to another)을 내포하는 것이라는 『국가와 혁명』의 논지는 마르크스의 생각에서 파생된 것이다.

[101/57]결국 볼셰비키는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만큼 노동계급을 신뢰하기에는 단지 너무 두려움이 많았고, 그들의 가차 없는 전위주의(relentless vanguardism)는 결국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스탈린주의에 토대를 제공하는 결과를 빚었다. 만약(말하자면,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서) 순전한 연속성을 설정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이라면, 몇몇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들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심연을 설정하는 것 역시 똑같이 형이상학적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이며 포스트모던적인 형태의 레닌주의로 통하는 기괴한 희화화(grotesque travesty)는 도전 없는 회피이기에 허용될 수 없다.

[102/58]그 체제는 인민을 총으로 위협한 채 모더니티 속으로 행진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만약 자본주의의 강력한 반대자인 레닌이 너무 서구 자본주의의 한쪽 면만을 봤다면, 오늘날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반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저 “전위적” 부정을 잊고 있다. 그들은 동시에 사회주의가 위대한 혁명적 부르주아의 전통과 그 물질적 발전에 대해 지고 있는 빚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하며, 도덕주의적 독선에 사로잡혀 단순히 그 빚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연속주의가 없다면 부정도 없다. 레닌의 결점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모더니티의 이익을 향유하는 이들만이 동시에 그러한 모더니티를 경멸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Whatever his failing, Lenin stands as a perpetual reminder that only those who enjoy the benefits of modernity can afford to be so scornful about it.)

4. 레닌과 수정주의-프레드릭 제임슨

[107/60]여기서 나의 전제는 레닌이 여전히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 무언가가 결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The premise is that Lenin still means something: but that something, I want to argue, is not precisely socialism or communism.) 공산주의에 대한 레닌의 관계는 절대적 믿음에 속하는 것이며[108] 레닌은 이를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기에 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이에 관해 새롭게 생각할 것은 따로 없을 것이다. 맑스는 하나의 대타자이자 유일한 대타자인 것이다.(Marx is a big Other, the big Other. 맑스는 하나의 대타자, 즉 바로 그 대타자인 것이다.)

[110/62]레닌은 항상 정치적으로 사유했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레닌이 쓴 글도, 그가 행한 연설도 [111] 그가 초안한 시론이나 논문도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으며, 더구나 이 모두는 동일한 종류의 정치적 충동(political impulse)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 [/63]정치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이것이 전통적인 개념의 정치나 정치학적 이론과도 별 상관이 없으며 또한 최근 프랑스에서 le politique[정치적인 것]와 la politique[정치] 사이에 행해지고 있는 저 번역할 수 없는 구분과도 별 관계가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114/65]나는 보다 깊은 구조적 문제(deeper structural issue)를 지적하고 싶다. 나는 언제나 하나의 사유체계로서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정신분석처럼 하나의 독특한 “이론과 실천의 조합”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특수성 - 그리고 또한 그 독창성이 - 두 개의 완벽한 스피노자적 양태가 서로 겹쳐지고 공존하는 방식에 있다고 느껴 왔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양태(capitalist economics)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계급과 계급투쟁(socail class and class struggle)의 양태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 두 어휘는 어떤 메타언어를 통해서도 상관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번역translation - 나는 트랜스코딩transcoding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은데 -을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각각 군림한다. 그렇다면 레닌의 지배적인 코드는 확실히 계급과 계급투쟁의 코드일 것이며 경제학의 코드는 훨씬 덜 지배적일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또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어떤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심급으로서 경제학이 지니고 있는 우위를 주장하고 싶다.(If this is so, then Lenin's dominant code is clearly that of class and class struggle, and only much more rarely that of economics. But I also want to insist on the priority, within Marxism, of economics as some ultimately determining instance) ... [115/66]내가 말하는 것은 분명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경제학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를 다른 주제로 대체하거나 추가적이고 병행적인 다른 주제 - 전통적인 의미에서 권력이나 정치 등의 주제 -를 제시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지닌 독창성과 힘을 구성했던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를 정치로 대체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든 부르주아의 공격이 취했던 표준적인 모습이었다.

[115/66]{마르크스의 ‘경제’와 관련하여}우리는 성이 프로이트주의의 중심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성이라는 사실로부터 후퇴하는 것은 일종의 수정주의를 열어 젖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 자신이 언제나 재빠르고 기민하게 비판하고 비난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이는 죽음충동이라는 프로이트의 후기 개념이 그의 신경제정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116/66]어떤 형태로든 권력이라는 수사학은 언제나 수정주의의 근본적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The rhetoric of power, then in whatever form, is always to be considered a fundamental form of revisionism.) 나는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이 대중적이지 못한 의견이 이전 시대(냉전시대나 제3세계 해방의 시대)보다 오늘날 더 합당하지도 모른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분명 모든 것이 다시금 경제적이 되어 버린 시기이며, 특히나 가장 속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더욱 확실한 것은, 전지구화 안에서, 곧 전지구화의 국가 내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그것의 외적인 역학 관계 안에서, 순전히 정치적이거나 권력적인 문제로 보였던 것들조차도 그 배후에 어느 정도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이 훤히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117/67]내가 만약 이러한 미래의 철학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을 개략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여기서 나는 두 가지 다른 층위들을 주장하고 싶다. 이 두 층위는 어쨌든 혁명의 순간에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서로 하나로 통합되고 합치될 것이다.[118] 하나는 사건(Event)의 층위인데, 우리는 이것이 어떤 절대적 분극화polarization를 성취한다고 말해야 한다. ... 이러한 분극화는 계급에 대한 이분법적 정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구성한다. / 혁명은 또한 인간의 삶이 지닌 집단적 층위가 하나의 중심적 구조로서 표면에 부상하게 되는 독특한 현상이기도 한데, 이러한 혁명의 계기 속에서 하나의 집단적 존재론은 개인적 실존에 귀속되는 부가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혹은 시위나 파업 등의 도취적 순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포착될 수 있다. ... 그러나 이러한 모든 특징들은 여전히 폭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고전적인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기 쉬운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곧 혁명적 상황에서는 폭력이 처음에는 우파로부터, 곧 반작용으로부터 출현하고, 그리고 다시 좌파로부터 폭력이 그러한 반작용에 대한 또 다른 반작용으로서 등장한다고 말이다. ... [119/68]이 때문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혁명이 그만큼 본질적인 또 다른 얼굴 혹은 또 다른 층위를 갖는다고 주장해야 할 텐데, 그것은 곧 (사건과는 반대되는) 과정 자체(process itself)의 층위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혁명은 체제 변화라는 길고 복잡하며 모순적인 전체 과정을 의미하며, 또한 망각, 고갈, “도덕적 동인”이라는 절망적 발명품인 개인적 존재론으로의 후퇴에 의해 위협 받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혁명은 무엇보다 집단적 교육법pedagogy의 긴급성을 요청하고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집단적 교육법이란 수많은 개인적 사건과 위기들이 그 자체로 어떤 거대한 역사적 변증법을 이루는 방식들을 하나하나 지형도로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변증법은 개인이 위치한 각각의 지점에서는 감각적 지각과 마찬가지로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그 변증법의 전체적 운동만이 그 지점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부재하는 것과 현전하는 것의 통합,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통합, 세계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의 통합이다. ... 이는 곧 혁명이 그 각각의 실존적 일화들 안에서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어떤 집단적 자각을 매 단계마다 요구한다. ... 레닌의 진정한 의미는 오히려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저 과정으로서의 사건과 사건으로서의 과정 안에서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혼재하는 형태에 있다.(The true meaning of Lenin is the perpetual injunction to keep together in that Event-as-process and process-as-Event we call revolution) 레닌의 진정한 의미는 혁명을 살아 있는 것으로 유지하라는, 심지어 혁명을 그것이 일어나기 전의 어떤 가능성으로 살아 있게 하라는, 일상화와 타협과 망각 등으로 실패하고 악화될 위협 속에서도 혁명을 매 순간마다 과정으로서 살아 있게 하라는, 그런 영속적인 명령인 것이다.

[121/69]우리가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민주주의의 불가피한 실패가 진정한 좌파의 어떤 기본적인 교훈과 근본적인 교육법(the basic lesson, the fundamental pedagogy) 을 구성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여기서 사회민주주의가 전 세계를 통틀어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을 덧붙이려고 한다. ...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 곧 모든 것을 바꾸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one cannot change anything without changing everything.) 이것이 바로 체계의 교훈이며 ... 동시에 혁명의 교훈임을 알게 될 것이다.

[122/70]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혁명적 경험 또는 실험은 그 혁명 지도자의 이름으로 대표되어 왔고 또한 종종 그 지도자 개인의 운명과 생물학적으로 동일시되어 왔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떤 수치스러움(scandalous)을 느껴야만 한다. 무엇보다 하나의 집단적 운동이 한 인간 개인의 이름으로 대표된다는 것은 우의적으로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125]『제국주의』는 세계시장의 부분적 등장을 이론화하고자 했던 레닌의 시도를 대변했다. 현재 그러한 세계시장은 전지구화를 통해 그때보다 더 완전한 형태로 혹은 최소한 경향적으로는 완전한 형태로 등장했으며, 또한 질과 양의 변증법을 통해 레닌이 묘사했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게 변모했다. 일견 그 고리를 끊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전지구화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globalization)은 우리의 정치적 사유가 천착해야 할 우리의 “결정적 모순”(determilnate contradiction)인 것이다.

5. 오늘날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포퓰리즘의 유혹에 맞서 - 슬라보예 지젝

[128/74]여기서 진정한 과제는 10월 혁명의 비극을 사유하는 것이다. 곧 그 위대성, 그리고 유례없는 해방적 힘과 함께 스탈린주의로 귀결된 역사적 필연성을 동시에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두 가지 유혹에 맞서야 한다. 하나는 스탈린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우발적인 일탈(contingent deviation)에 불과하다고 보는 트로츠키식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기획이 본질적인 차원에서 전체주의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132/77]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구-공산권 국가들로부터의 이주노동자 유입이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78]그것은 실상 노동자들의 요구를 통제하기 위한 자본의 한 전략이다. 미국에서 부시가 노동조합의 발목이 잡힌 민주당보다 멕시코 불법 이민자의 지위 합법화에 더 열성적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여기서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 전치된 계급적 내용을 간과하고 다문화적 개방을 명분으로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를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호의적 의도에서라 하더라도 단순히 다문화주의적 개방만을 고집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가장 기만적인 형식이다.

[133/78]기성의 탈정치적 좌표계에서 벗어난 어떠한 사고도 “포퓰리즘적 선동”이라고 자동적으로 기각해 버리는 것은 우리가 실상 새로운 사고금지Denkverbot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가장 순수한 증거이다.

[134/79]포퓰리즘은 특수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즉 그것은 어떠한 정치적 내용도 취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의 “굴절부”inflection이다. 포퓰리즘의 요소들은 순수하게 형식적이고 초월적이며,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포퓰리즘은 일련의 특수한 “민주주의적” 요구(더 나은 사회적 안전, 의료 서비스, 낮은 세금, 전쟁 반대 등)가 등가적 요구의 사슬로 엮여서 보편적 정치 주체로서의 “인민”을 생산할 때 발생한다. 포퓰리즘을 특징짓는 것은 이런 요구들의 실체적 내용이 아니라, 그 사슬을 통해서 “인민”이 정치적 주체로 출현하고 다른 모든 특수한 투쟁과 적대가 “우리(인민)”와 “그들” 사이의 총체적인 적대적 투쟁의 부분으로 나타나는 형식적 사실이다. 거기서 다시금, “우리”와 “그들”의 내용은 미리 규정될 수 없으며, 그것은 정확하게 헤게모니 투쟁에 달려 있다. “그들”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야만적인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조차도, 포퓰리즘이 등가적 요구의 사슬에 엮여 들어갈 수 있다.

[136/81]포퓰리즘에서 적은 존재론적인 실체로 외부화되거나 구체화되며(비록 이 적이 허깨비더라도), 그것의 제거는 균형과 정의를 회복시키게 된다. 이에 상응하여 포퓰리즘적 정치의 행위자로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 또한 적의 공격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In populism, the enemy is externalized or reified into a positive ontological entity (even if this entity is spectral), whose annihilation would restore balance and justice. Systematically, our own - the populist political agents -identity is also perceived as preexisting the enemy's onslaught.)

[137/81]포퓰리스트가 보기에, 문제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타락시키는 침입자이다(예컨대, 자본가 자체가 아니라 금융투기자), 즉 구조 자체에 기입된 치명적 결함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어떤 요소이이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보기에(프로이트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병리적인 것(어떤 요소의 일탈적 비행)은 정상적인 것의 증상, 곧 “병리적인”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는 구조 그 자체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해주는 지시자이다. 마르크스에게서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서 히스테리의 폭발 같은 병리적 현상은 “정상적인” 주체 구성(과 그 작동을 지탱하는 숨겨진 적대)의 열쇠를 제공해 준다.

[139/83]포퓰리즘은 정의상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의 최소 형식, 기본 형식을 포함한다. 비록 포퓰리즘이 실상 서로 다른 정치적 변형(반동적 민족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 등)이 가능한 정치적 논리의 형식적 틀, 혹은 모체이지만, 그럼에도 내재적인 사회적 적대를 통합된 “인민”과 그 외부의 적 사이의 적대로 전치시킨다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최종심급에서는” 장기적, 원형적 파시즘의 경향을 품는다. / 이것은 또한 어떤 종류이든 공산주의 운동을 포퓰리즘의 한 변형으로 간주하는 것이 미심쩍은 이유이다. 공산주의를 “포퓰리즘화”하는 데에 맞서, 우리는 정치가 주어진 각 국면에 개입하는 기술이라는 레닌의 개념에 충실해야만 한다. 레닌에게서 이 국면들은 “주요” 모순(적대)이 특수하게 집중되는 방식으로 정립된다.(the art of intervening in the conjunctures that are themselves posited as specific mode of concentration of the "main" contradiction(antagonism).) 진정한 “급진적” 정치와 여타의 모든 포퓰리즘을 구별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 “주요” 모순에 대한 지속적인 참조(persisting reference to the "main" contradiction)이다.

[141/85]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주된 위협은 이런 양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상품화를 통한 정치적인 것의 죽음(the death of the political through the commodification of politics)에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기본적으로 [142]상품처럼 포장되고 판매된다는 데 있지 않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선거 자체가 상품(이 경우엔 권력)을 구입하는 행위로 간주된다는 데 있다. 선거는 서로 다른 상인-정당 사이의 경쟁이며, 우리의 표는 우리가 원하는 정부를 구매하기 위한 화폐와도 같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구입하는 또 하나의 서비스 상품으로 보는 관점이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관련된 이슈나 결정에 대한 공적인 논쟁의 공유로서의 정치이다. / 그래서 민주주의는 적대를 포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대를 요청하고 전제하며 제도화하는 유일한 정치적 형식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 시스템이 위협(권력의 “자연스런” 계승자가 결여돼 있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긍정적 조건으로 고양시킨다. 권력의 자리는 비어 있고 그 자연스런 청구자는 없으며, 폴레모스polemos 또는 투쟁은 해소불가능하며, 모든 실정적 정부는 자웅을 겨루는 투쟁을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

[143/85]만약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내기가 적대적 투쟁을 규칙에 따라 제어되는 경쟁으로 바꿈으로써 그것을 제도화된 차별적 공간으로 통합하는 것이라면, 파시즘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 파시즘은 그 활동 양태로 보면 적대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이지만(자신과 적 사이의 “목숨을 건 투쟁”을 말하고, 비록 실현하지는 않더라도 복잡한 법적-제도적 경로를 무시하고 “인민의 직접적 압력”과, [/86]제도 바깥의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위협을 언제나 견지한다), 정반대로 극도로 위계화된 사회적 체제를 정치적 목적으로 삼는다. ... 민주주의는 적대적 투쟁을 자신의 목적... 으로 인정하지만 그 절차는 규제적-체계적이다. 반대로, 파시즘은 고삐 풀린 적대란 수단을 통해서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조화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향한다.

[147/88]우리는 여기서 엄격히 구분되는 보편성의 논리(two opposed logics of universality to be strictly distinguished 엄격히 구분되는 보편성에 관한 두 가지 대립적인 논리)를 다루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의 보편적 계급(혹은 더 넒은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경찰로서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편적 수호자로서의 미국)으로서의, 혹은 전지구적 질서의 직접적인 대행자로서의 국가 관료 체제가 있다. 다른 한편으론, “정원 외적(surnumerary)” 보편성, 곧 기존 질서에서 빠져나온 요소에 구현된 보편성이 있다. 이것은 그 질서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그 안에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다(자크 랑시에르가 “자기 몫이 없는 부분”("part of no-part) 이라고 부른 것이다). 문제는 이 두 보편성이 단지 서로 다르다는 것 정도가 아니다. [/89]투쟁이 궁극적으로 보편성의 특수한 요소들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이 두 보편성 사이의 투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내용이 보편성의 빈 형식에 대한 헤게모니를 쥘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이라기보다는 보편성 자체의 상호 배제적인 두 형식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working clas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구분했다. “노동계급”은 실상 특정한 사회집단인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체적 입장을 가리킨다. 그리고 레닌은 여러 사회적 실천 가운데 정치적 차원이 갖는 특수성에 대한 깊은 감수성에서뿐만 아니라, 고도로 이질적이며 [148]모순적인 것으로서의 “계급”에 대한 인식과 이런 계급과는 차별화된 것으로서 당에 대한 그의 “비유기체적”(non-organic)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를 따르고 있다.

[150/91]더 나아가 우리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용어 자체가 지시하는 바를 잊지 말아야 한다. 경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때문에 우리는 정치 투쟁을 단순히 보다 기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과정의 부수효과 내지는 이차적 효과로 축소시킬 수 없다. 이것이 마르크스에게 “계급투쟁”이란 말이 의미했던 바이다. 경제의 바로 그 핵심에 정치적인 것이 존재하며, 이것이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을 직접 다루고자 할 때 『자본론』3권의 원고가 중단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이 중단은 단순한 누락이나 실패의 신호라기보다는 사유의 방향이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이미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차원으로 회귀한다는 신호이다. “정치적” 계급투쟁은 처음부터 모든 분석을 관통한다.(The "political" class struggle permeates the entire analysis.) 정치경제라는 범주는 (가령,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 혹은 이윤율)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데이터가 아니라 언제나 “정치적” 투쟁의 결과를 보여주는 데이터이다.[151]

[151/92]“자본주의”는 단순히 실제적인(positive) 사회 영역을 구획하는 범주가 아니라 사회 공간 전체를 구조화하는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모체, 문자 그대로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다. 자본주의의 힘은 바로 그 약점에서 나온다. 자본주의는 자체의 근본적인 적대, 구조적인 불균형과의 조우를 회피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역동적 상태로 항구적인 긴급 상태로 밀어 넣어진다. 그런 한에서 자본주의는 존재론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것은 항구적인 자기-극복을 통해서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미래로부터 빌려와서는 그 청산일을 영원히 유예하는 [152]식으로 자본주의는 자신의 미래에 빚을 진 것처럼 보인다.

[152/92]그것의 기본 태도는 상황의 복잡성과 대면하기를 회피하고 그것을 유사-구체적인 적의 형상(pseudo-concrete enemy figure)(브뤼셀의 관료들에서부터 불법이민자까지)과의 분명한 투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정의상 부정적인 현상, 거절(refusal [진실에 대한] 거절)에 기반한 현상, 심지어는 무력함의 암묵적 승인이다. 우리 모두는 가로등 아래에서 흘린 열쇠를 찾는 한 남자에 대한 오래된 농담을 알고 있다. 어디서 잃어 버렸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캄캄한 구석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는 왜 여기 불빛 아래서 찾고 있는가? 왜냐하면 여기가 훨씬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포퓰리즘에는 항상 이런 종류의 속임수가 있다.

주10]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체제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은 차베스의 현란하다 못해 때로는 어릿광대 같은 스타일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실각했을 때 놀랍게도 다시금 그에게 권력을 되찾아 준 가난하고 배제된 사람들의 대중적인 대규모 자가-조직운동을 대조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관점의 오류는 전자 없이 후자가 가능하다고 보는 데 있다. 대중운동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라는 동일시 형상을 필요로 한다. 차베스의 한계는 다른 곳에 있다. 그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인 바로 그것, 오일머니다. 석유는 당장의 저주는 아니더라도, 언제나 길흉이 뒤섞인 축복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오일머니 덕분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정말로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않고서도 그는 자신의 포퓰리즘적 태도를 계속 견지해 나갈 수 있다. 돈은 실제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행위, 곧 근본적인 변화를 연기하면서 (포퓰리즘적인 반자본주의적 조치들을 취하면서 동시에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는) 모순적인 정책들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반미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와 미국 사이의 협약이 정기적으로 체결되도록 꽤 신경을 쓴다. 그는 실로 “석유를 갖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다.)

PART TWO 철학에서의 레닌

6. 레닌과 변증법의 길 - 사바스 미카엘-마차스

[165/103]계속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의 성장, 확장, 반복이 [166]아니다. 계속성은 하나의 모순, 스스로 예리해지고 절박해진 나머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모순을 향해 그 자신을 초월해가는 그러한 모순이다. 그래서 계속성은 그 필연성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계속성이 이뤄질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열매이기도 한 것이다.

[177/111]레닌이 라이프니츠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은 그동안 거의 완벽하게 무시되어 왔다. ... 라이프니츠에 대한 이 새로운 관심은 포이어바흐의 책을 읽으면서 생겨난 우연한 일탈이 아니다. ... 마르크스가 라이프니츠를 어떻게 평가했든지 간에, 레닌은 이 『모나드론』의 사상가에 의해 물질을 외부에서 오는 생명 없는 덩어리로 보던 데카르트적 관점이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에게 신체적 실체corporeal substance는 “그 내부에 역동적 힘, 결코 소진되지 않는 활동성의 원리”[178]를 갖고 있는 무엇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신학을 통과해, 물질과 운동 사이에는 분리 불가능한 (그리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는 원리에 도달하였다”고 레닌은 쓰고 있다. ... 그것은 기계적 유물론과는 대립되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현대의 비-뉴턴 물리학이 발견한 물질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185/116]요컨대 변증법은 교훈적 사례들의 총합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의 발견이다. 달리 말해, 변증법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식론”이며 “사태의 본질(the essence of the matter 물질의 본질)이다. 플레하노프는 그것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알튀세르와는 달리 레닌에게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 아니다. 단지 어떤 조건하에서만, 이를테면 어떤 인식론적 허약함이라는 조건, 특히 부분이 전체로부터 분리되거나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그런 조건 하에서만, 철학은 우리를 “수렁 속으로” 이끌게 되며, “거기서 그것은 지배계급의 계급적 이해에 닻을 내리게 될 뿐이다.”

[187/117]문제를 현재의 시점까지 끌고 내려와 보면,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스탈린주의가 붕괴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들, 무엇보다도 변증법적 방법이 그 잔해 아래 함께 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모든 모순이 폭발하는 시기에, 냉전-이후의 세계를 특징짓는 난폭한 이변과 첨예한 불연속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 바로 이 시기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평화롭고 점진적인 진보라는 진화론적 관념에 빠져 거의 순응주의자가 다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수치스런 아니러니가 또 있을까. ... 변증법은 무엇보다 이행에 대한 연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위기 속에서의 이행에 관한 이론이 결여돼 있다. 가로막힌 역사적 이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저 차단벽들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오직 혁명적 초월만이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If we are to escape the blocked historical transition in which we exist now, we can only achieve it by a revolutionary transcendence of the impasse. 만약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꽉막힌 역사적 이행을 벗어 나고자 한다면, 오직 이 교착상태의 혁명적 초월에 의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7. “변증법은 살아 있다”-철학과 세계정치에서 변증법의 내구성과 생명력에 대한 재발견(The Rediscovery and Persistence of the Dialectic in Philosophy and in World Politics 철학과 세계 정치에서 변증법의 재발견과 지속성) - 케빈 B. 앤더슨

[192/120]레닌의 사상에는 몇몇 결정적 취약점들이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 같다.(Since this chapter will stress Lenin's theoretical achievements, I would like to state at the outset that I also see some serious weaknesses in Lenin's thought. 이 장은 레닌의 이론적 성취를 강조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레닌의 사유에 있어서 몇몇 심각한 약점들을 찾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전위당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레닌의 지지는 마르크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각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혁명조직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빈곤하게 만드는 짐이 되어왔다. [/121]둘째, 1917년 이후 레닌의 행보들, 특히 일당 지배 국가를 만들고 노동자 소비에트를 붕괴시킨 점 등은 결코 혁명적 민주주의의 모델로 간주될 수 없다. 셋째 ... 변증법 사상에 대한 레닌의 기여는 아주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고른 일관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같은 저작은 거칠고 기계적이다.

[194/122]서구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이론의 역사에 대한 표준적인 해설들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빠뜨리고 있다. [195]첫째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더라도, 헤겔에 관한 레닌의 중요한 저작인 헤겔 노트는 1914~15년에 작성된 것으로 1923년에 나온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비해 거의 10년이나 앞선다. ... 이러한 사정으로 미뤄보건대, 레닌이 루카치를 위해 앞길을 닦아 놓았다는 것은 분명하다.(Thus Lenin helped pave away for Lukács. 따라서 레닌이 루카치의 앞길을 도운 것이다.) / 1960년대 서독의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 둘째, 전문적인 수준에서 보았을 때도, 서구 마르크스주의 또는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에 끼친 레닌의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는 프롬의 에세이 말고도 꽤 많이 있다.

[199/125]변증법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 책{『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은 두 개의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첫째,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객관적인 현실의 모사, 현실에 근접한 모사”로 보는 조야한 반영이론을 내비친다. 둘째, 레닌은 모든 형태의 관념론을 “윤색된 유령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199/125]... 본격적인 헤겔 연구가 시작된 1914년의 지적 위기 동안 ... 제2인터네셔널의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으로 결별 ...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립을 요청 ...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자고 요청 ... 혁명적 패배주의 ...

[200]그런 의미에서 레닌이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재점토했던 기간은 정치적 과업에서 풀려나 조용히 침잠했던 시기가 아니라 자신의 근본 원칙들을 송두리째 재조직할 것을 요구받은 소란스런 시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와 노동자 계급을 배신하고 그들을 전쟁의 참호라는 도살장으로 내모는 데 일조하고 있던 제2인터네셔널의 지도자들이야말로, 레닌 자신도 이제껏 추종해 왔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126]전쟁이 시작되던 1914년 10월에서 이듬해인 1915년 1월에 이르는 몇 달 동안 레닌은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헤겔을 파고들었다.

첫 번째 변화는 레닌이 조야한 유물론에서 벗어나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레닌은 곧이어, 철학을 관념론과 유물론의 “양대진영”으로 나누는 엥겔스의 이분법을 넘어서 다른 무언가로 나아가게 된다. ... [201]레닌은 “속류 유물론”(vulgar materialism)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처음 도입하고 있다. ...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두말할 것고 없이 레닌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발언은 통상 ‘정통 레닌주의’라 일컬어지는 어떤 것보다 차라리 ‘비판적 마르크스주의’라 불리는 것에 더 가깝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02/127]레닌은 어디선가 헤겔의 변증법을 “자기-운동과 생명력의 내적 충동”(the inner pulsation of self-movement and vitality)이라 불렀다. 레닌은 관념론을 거부한 예전의 태도로부터 점차 거리를 두게 되며, 이제 문제는 [관념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론을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접속시키는 것이 된다.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양대 진영으로 구분했던 엥겔스에 맞서, 레닌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변증법적 종합(dialectical unity between idealism and materialism)이라 불릴 만한 어떤 입장에 접근해 가기 시작한다. 레닌은 알지 못했지만, 비슷한 변화가 1844년 마르크스에게서도 나타났었다. 그즈음 마르크스는 “관념론과 유물론 모두로부터 구분되는 또한 동시에 그 둘의 통일적 진리를 구성하는” “일관된 자연주의 또는 인간주의”("a consistence naturalism or humanism" that was "distinguished from both idealism and materialism")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03/127]두 번째로 나는 레닌이 투박하고 조야한 반영이론으로부터 차츰 거리를 두었으며 1908년의 관점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러한 변화의 분명한 증거는 헤겔 노트의 거의 말미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인간의 의식은 객관적 세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창조해 내기도 한다.”(Man's cognition not only reflects the objective world, but create it) 이는 헤겔의 관념론을 혁명적, 능동적,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한 사례이다. 인식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사회적 관계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향해 현재의 물질적 조건 너머로 나아간다. 여기 이 “최종 분석”의 자리에서는 [인식의] 유물론적, 혹은 반영적 측면이 우선권을 가질 수 없다. 그와 반대로 레닌의 문장은 우리를 “관념이나 개념들이 객관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 쪽으로 이끈다. ... “(레닌에게서) 변증법은 단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단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을 주체와 객체의 영원한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여기서 둘 중 어떤 것이 절대적 우선권을 갖는다는 식의 주장은 변증법의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다”(콜레하노프)

[207/130]레닌은 지구를 뒤덮은 제국주의에 의해 억압당하는 수천만의 민중들과 해방을 향한 그들의 열망에 관해 쓰고 또 썼다. 그는 억압된 민족들 내부에서 움튼 해방적 민족운동과 지배민족들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유럽, 미국, 그리고 일본과 같은 열강들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지탱했던 반면, 약소민족들의 민족 해방 운동은 지구적 제국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대립물이었던 것이다.

[216/136]오늘날 과거와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이전에 식민과 점령의 고통을 당했던 민족들도[217]일단 독립한 다음에는, 지구적 자본주의하에서 그들이 지속적으로 대면하는 지배관계에 따라, 국경 안에든 밖에서든 다른 민족적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어떤 특정한 형태의 민족주의가 반동적 성격을 띨지 아니면 해방적 정치를 활성화하게 될지에 관한 레닌의 요점이 있다. 레닌은 민족주의가 반동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영국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219]“ ... 객관적인 태도로 그의 글들을 읽어본다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과 헤겔 노트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헤겔 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레닌의 사유는 유연하고, 생동감 있고 … 한 마디로 변증법적이 되었다. 레닌은 1914년 제2인터네셔널이 붕괴하기 이전까지는 변증법을 참되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르페브르는 각주에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내세우면서 헤겔 노트는 뒤로 밀쳐 주었던 스탈린주의자들의 저 오랜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 뒤늦은 이 고백이 핵심적인 문제를 짚고 있지만, 그의 주요 저술이나 레닌 관련 논문이 아니라 두꺼운 자서전 한 귀퉁이에 나오는데다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되는 형편이어서 1960~70년대에 루이 알튀세르와 그의 학파들이 반변증법적이고 반헤겔적이며 마오쩌뚱-근본주의적인 해석들 - 특히 알튀세르의 『레닌과 철학』에 잘 드러나 있는 -을 쏟아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39]『레닌과 철학』의 표제 논문은 1968년에 행해진 대중 강연의 원고인데 『유물론과 경험비판론』과 레닌의 경제 관련 저술들만 언급하고 있지 헤겔 노트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장 이포리트가 이 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나서야 알튀세르는 마침내 헤겔 노트에 집중한 논문을 한 편 제출했는데, 거기서나 다른 곳에서나 알튀세르가 레닌과 헤겔에 관해 논평하는 것을 보면 실은 정반대인 두 사람의 텍스트를 한데 비비꼬아서 헤겔에게 해야할 비판을[220] 레닌에게 겨누면서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221/140]{두나예프스카야는} 레닌의 헤겔 복귀를 마르크스의 헤겔 복귀와 함께 다루기도 했다. “『자본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먼저 헤겔의 『논리학』 두 권을 열심히 다 읽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속뜻은 분명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레닌이 낡은 개념을 가지고 어떤 중요한 돌파구를 열었다는 것인데, ‘인식은 세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다’는 말보다 그 점을 더 예리하게 표현해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 레닌은 헤겔에게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통일성에 관해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획득하게 됐으며[222] 1915년 이후 레닌의 저작들에 지속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새로운 이해이다.”

[222/140]두나예프스카야는 레닌의 헤겔 전유에 대해 몇몇 설득력 있는 비판을 전개하기도 했다. 첫째 그녀는 레닌이 헤겔 변증법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사고를 보다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 유산을 모호한 상태로 남기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 [/141]두나예프스카야가 보기에 이 모든 문제는 레닌이 1920년에 러시아에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재출간되도록 허용했을 때부터 뒤엉켜 버렸다. 공식적으로 레닌은, 『제국주의』와 『국가와 혁명』을 완성함에 따라, [이 저작들과 철학적 바탕을 달리하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번역 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차츰 스탈린주의적 성향을 띠어가던 기관들이[223] 1927년에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여러 언어로 번역해 광범위하게 출판했고 국제 공산주의 정당들도 관념론에 대한 이 책의 투박한 공격들을 마음껏 활용하기 시작했다. ... 두나예프스카야의 두 번째 비판은 레닌이 매우 중요한 결절점에서 변증법의 실천적, 행동적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그 이론적 측면을 축소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헤겔 『논리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나오는 ‘선의 이념’을 다루는 레닌의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 세 번째로 그녀는 레닌이 여러 곳에서 헤겔을 너무 협소한 유물론적 시각에서 해석했으며, 특히 『논리학』의 마지막 장인 ‘절대적 이념’을 다룰 때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레닌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6)에 나오는 엥겔스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깨뜨렸던 것은 사실이다. ... 레닌은 엥겔스와는 다른 길을 택해, ‘절대적 이념’ 장이 관념론적이라기보다 유물론적이어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전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나예프스카야는, 레닌이 엥겔스보다는 깊이 있게 파고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결정적 실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레닌은 ‘부정성’negativity이라는 헤겔의 핵심 개념에 무게를 두지 않고, 대신 ‘모순’에 초점을 맞추었다.[224] 여기서 그는 제2인터네셔널 문서고에 방치된 채 잊혀져 있던 『1844년 수고』에 나오는 부정성의 변증법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와 친숙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 확실히 레닌은 『논리학』 마지막 장을 끝맺는 문단에서 헤겔이 ‘논리에서 자연으로의 이행’에 관해 쓰고 있음을 파악했으며, [/142]그 대목에서 헤겔이 “유물론 쪽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LCW 38: 234)고 썼다. 하지만 두나예프스카야는 레닌이 이 부분 바로 뒤에 이어져 있는 헤겔의 논의를 무시했다고 지적한다. 거기서 헤겔은 또 다른 이행을 말하고 있으니, ‘논리에서 정신으로의 이행’이 바로 그것이다. /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두나예브스카야는 제국주의와 민족 해방 사이의 모순을 통해 세계 정치를 변증법적으로 재해석한 것은 레닌의 위대한 업적이지만, 그가 전위당이라는 엘리트적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재해석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 그녀는 이러한 전위당 개념을 대신해, 그녀가 조직과 철학의 변증법이라고 부른 새로운 조직의 개념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헤겔 뿐 아니라 마르크스가 1840년대 공산주의 연맹 이래로 1860년대 제1인터네셔널과 『고타강령비판』(1875)에 이르기까지 조직 활동 속에서 확장했던, 그러나 종종 무시되었던 조직 문제에 관한 저술들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 할 것이다.

8. 도약! 도약! 도약! -다니엘 벤사이드

[234/149]마르크스는 헤겔의 국가철학에 관한 1848년의 주석에서 “국가가 모든 것에 유효한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이는 관료국가를 추상적 보편성의 구현으로 만들어 버리는 지극히 과장된 정치적 요인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일방적인 열정을 넘어 마르크스는 억압된 자들의 정치가 출현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정치는 비국가적 정체(政體)의 구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국가를 [총체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으로 약화시키는데 필요한 방법을 준비하는 것이다. / 중대하고도 시급한 문제는 아래로부터의 정치라는 문제, 곧 지배계급의 국가정치에 의해 배제되고 제거된 사람들을 위한 정치의 문제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그 반복되는 비극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 [235]강요된 노동이라는 비자발적 예속상태 때문에 육체적이고 도덕적으로 일상생활에 고착되어 있는 하나의 계급은 어떻게 인간해방의 보편적 주체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이 점에 관한 마르크스의 답변은 어떤 사회학적 내기(sociological gamble)에 기대고 있다. 산업의 발전은 수치상의 성장과 노동계급의 집결을 가져오고, 이는 다시 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에서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논리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구성”해 준다는 말이다.

[235/150]레닌의 정치적 사유를[236] 전략으로 파악하는 사유이며 또한 약한 연결고리에서 유리한 계기를 찾아내는 사유이기도 하다. ... 레닌은 정치를 투쟁으로 가득찬 시간으로, 위기와 좌절의 시간으로 생각했다. 레닌에게 정치의 특수성은 혁명적 위기의 개념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이러한 위기란 사회운동의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가 총체적으로 맞게 되는 위기를 뜻한다. 그리하여 이 위기는 국가적 위기로 정의된다. 이러한 위기는 상품이라는 신비한 환상에 의해 가려져 있던 전선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작용을 한다. 그때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 본연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소위 필연적으로 무르익게 되는 역사적 단계의 시기(inevitable historical ripening)와는 무관한 것이다.

[237/150]레닌의 접근법은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조잡한 노동자주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레닌은 계급의 문제를 당의 문제와 뒤섞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계급투쟁은 단지 노동자와 그 고용주 사이의 적대라는 문제로만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이란 자본주의 생산의 총체적 과정이라는 층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가 계급 전체에 대립시키는 것인데 ... [/151]따라서 레닌에게 하나의 정당으로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란 단지 몇몇 고용주들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모든 계급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도, 그리고 조직된 권력으로서 국가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도 또한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 [237/151]레닌주의적 전략에서 적절한 계기로 여겨지는 시간은 더 이상 선거의 시간이 아닌데 ... 오히려 레닌에게 알맞은 시간이란 투쟁에 [238]어떤 리듬을 부여하는 시간, 위기에 의해 중단된 시간이다. 이 시간은 필연과 우연, 행위와 과정, 역사와 사건이 서로 함께 맺어지는 독특한 접합의 시간, 알맞은 계기의 시간인 것이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것을 어떤 단독적인 행위의 형태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혁명은 다소 깊은 고요의 상태와 다소 폭력적인 분출들이 빠르게 번갈아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레닌에 따르면 이러한 까닭으로 당의 본질적 활동은 그 활동의 본질적 중심은 가장 폭력적인 분출의 시기와 고요의 시기 양쪽 모두에게 가능하고 필요한 작업이 되어야 한다. 곧 당의 본질적 활동은 그 두 시기에서 모두 통합적 정치 선동의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혁명은 가속과 감속으로 특징지어지는 그 자신만의 박자를 갖고 있다. 또한 혁명은 직선이 두 갈래로 나뉘고 급작스럽게 선회하는 그 자신만의 기하학도 갖고 있다. 이렇게 하여 당은 새로운 관점에서 부각된다. ... 당은 전략의 작동자, 일종의 변속장치이자 계급투쟁의 대표자가 된다. 발터 벤야민이 명확히 인지했던 것처럼, 정치의 전략적 시간은 계급 역학의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어떤 불연속적인 시간, 곧 사건들을 잉태하는 여러 매듭과 원천들로 가득차 있는 시간인 것이다.

[240/152]“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운동”이 그 스스로 어떤 독립적인 이데올로기를 구상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반대로 노동계급 운동의 순전히 자발적인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의 종속”만을 부를 뿐이다. 왜냐하면 지배 이데올로기란 의식의 조작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상품 물신성의 객관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오직 혁명적 위기와 당의 정치적 투쟁만이 그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철권통치가 강요하는 예속 상태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있다. [/153]바로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대한 레닌주의적 답변인 것이다. / 레닌은 정치를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되는 침입(the invasion whereby that which was absent becomes present)으로 개념화한다. 확실히 계급구분은 최후의 보루로서 정치적 결집의 가장 핵심적인 기초가 되는데, 이러한 최후의 보루는 오직 정치적 투쟁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말 그대로 사회적 삶의 모든 지점들로부터 분출하는 것이며 확실히 그 꽃은 모든 곳에서 피어난다. 만약 그러한 배출구들 중 하나가 특별한 조처로 막혀 있다면, 공산주의의 전염력은 때때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출구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불씨가 불꽃을 점화하게 될지 알 수 없다.

[242/154]레닌이 카우츠키의 정전과 같은 텍스트를 바꾸어 말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카우츠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왜곡시켰음을 알 수 있다. 카우츠키는 “과학”이 “계급투쟁의 외부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태되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도래한다고 썼다. 특이할 만한 어구상의 변화를 통해 레닌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다르게 옮겨 적는다. “계급의 정치의식”은 (“과학”이 아니라!) “경제적 투쟁의 외부에서”(사회적인 만큼이나 정치적이기도 한 계급투쟁의 외부에서가 아니라!) 그리고 더 이상 사회적 범주로서의 지식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영역을 특정하게 구성하는 한 작용자로서의 당에 의해서 배태되어 도래한다고. 이 두 문장의 차이는 매우 본질적이다.

[244/155]레닌은 자신만의 고유한 논리를 통해 의회제도도 없고 민주적 전통도 없는 한 나라에서의 다원성과 대표라는 문제를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레닌은 프랑스 혁명을 사례 삼아, 일단 압제자가 제거되고 나면 인민(혹은 계급)의 동질화는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156]인민들 내부의 모순은 오직 타자(이방인)로부터, 반역으로부터 도래한다는 것이다. 둘째, 정치와 사회적인 것 사이의 구분은 치명적 전도를 막아주는 보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을 사회화하지 않는 대신 [245]자칫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사회적인 것을 관료적으로 국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6/157]모든 영역을 선동하라! 가장 예상할 수 없는 해결책들에 주의를 기울여라! 급작스런 형식의 변화에 대비하라! 모든 무기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하라! / 이것이 바로 정치를 예기치 못한 사건들의 기술art로 파악하는, 그리고 또한 정치를 결정적 접합의 효력을 지닌 가능성들의 기술로 파악하는 격언들이다. / 정치에서의 이러한 혁명은 「제2인터네셔널의 붕괴」에서 체계화했던 혁명적 위기의 개념을 상기시킨다. 혁명적 위기의 개념은 한 상황 안에서 몇 가지 가변적인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정의된다. 상부의 요소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군림하지 못할 때, 하부의 요소들이 예전처럼 억압 받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할 때, 그리고 이러한 이중의 불가능성이 대중들의 급작스런 비등으로 표출될 때가 바로 그때이다.

[249]며칠! 한 주 1917년 9월 29일에 레닌은 혁명을 결행할지 망설이고 있던 중앙위원회 앞으로 글을 써 보냈다. “위기가 무르익었다.”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죄악이었다. 10월 1일에 레닌은 “당장 권력을 쟁취”하고 “당장 봉기에 돌입”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며칠 후 그는 재차 주장했다. “나는 이 문장들을 10월 8일에 쓰고 있다. …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의 성공이 2~3일 동안의 싸움에 달려 있다.” 그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나는 이 문장들을 [250]24일 저녁에 쓰고 있다. 상황은 극도로 중대하다. 봉기를 연기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 될 거라는 점이 이제 실로 분명해졌다. … 이제 모든 일이 경각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바로 오늘 저녁, 바로 오늘 밤에”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251/160]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환상이 남아 있는데, (오늘날 권력이 특정한 지역적 범위와는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따라서 도처에 산재해 있는, 곧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는 명목으로) 우리가 대항권력(counterpower)이라는 수사학을 통해 정치권력의 쟁취라는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저 응답의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권력은 아마도 더욱 광범위하게 산재하게 되었지만, 또한 그러한 권력들은 어떤 면에서 그 이전보다 더욱 집중화되기도 했다. 우리가 권력을 모른 척할 수는 있을 테지만, 권력이 우리를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권력을 취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우월한 듯 행동할 수는 있겠지만, 1937년의 카탈루냐로부터 치아파스와 칠레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경험들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권력은 주저 없이[252] 우리를 가장 난폭한 방식으로 취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 대항권력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중의 권력과 그 해결이라는 관점에서뿐이다. 누가 승리할 것인가?

[252/161]공산주의의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피상적으로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닌을 비방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스탈린 시대의 당이 가장 나쁜 형태로 예시하고 있는 극단적인 관료중심주의를 문제 삼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반대되지 않는 어느 정도의 집중화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존속하기 위한 본질적 조건이다. 왜냐하면 당의 경계를 한정짓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분쇄 책동에 저항하는 수단이며 또한 당원들 사이에서 어떤 평등을 목표로 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253/161]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이 [/162]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한다. 그러한 정치는 사회적 운동의 자발성을 향한 맹목적 추수주의일 수도 있고, 엘리트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전위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일 수도 있으며, 또한 미학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결국 정치적인 것을 억압하게 되는 일일 수도 있다.

PART THREE 전쟁과 제국주의

9. 헤겔의 독자 레닌: 레닌의 헤겔 『논리학』 노트를 독해하기 위한 몇 개의 가설적 테제들 - 스타시스 쿠벨라키스

[264/166]모든 것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으며, 무엇보다 노동운동이 그러했다. 제2인터네셔널의 붕괴, 제국주의적 갈등의 폭발 앞에서 제2인터네셔널이 보여준 총체적 무능은 사실상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뿌리 깊은 경향, 즉 운동 조직들(그리고 운동의 사회적 기반 대부분)을 제국주의 중심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지지하는 쪽으로 타협해 가던 “통합”의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레닌의 표현을 쓰자면, 이 “붕괴”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적 실천 전반의 붕괴를 의미했으며 그들 모두가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재검토를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계대전이 우리의 투쟁 조건들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쓰고서 “숨이 끊어져 가는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에 생명을 불어넣을” “가차 없는 자기-비판”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270/170]레닌의 행위는 무엇보다 먼저 헤겔과 변증법에 대한 평가절하 혹은 헤겔 억압이라 불릴 만한 시류에 대한 거의 본능적 반작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반헤겔적 태도는 일반적으로 제2인터네셔널의 마르크스주의를 변별해주는 특성이었고, 더 특정해서 말하자면 러시아에서 철학적 문제에 관한 한 제2인터네셔널을 대표하는 인사이며 인터네셔널 내에서도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았던 ... 플레하노프 마르크스주의의 성격이기도 했다.

[273/172]사실 플레하노프가 억압하고자 했던 대상은 정확히 헤겔 자체가 아니라(어떤 의미에서 러시아 지식인들은, 플레하노프도 주장했듯이,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헤겔을 훨씬 덜 억압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에 들어 있는 변증법이라는 문제, 레닌이 『논리학』을 읽고 난 후 플레하노프에 대해 철학적 평가를 내리면서 썼던 표현을 빌리자면, “사태의 본질”(essence of the matter)에 관한 문제였다.

[274/173]레닌은 헤겔의 체계에서 진짜 문제가 대두되는 곳은 헤겔의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텍스트나 역사를 다룬 텍스트라기보다는 가장 추상적인 텍스트,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레닌은 후기 엥겔스로부터 상속되어 제2인터네셔널 전체에 의해 축성되었고, 레닌 자신의 “이전의 철학적 의식”도 거기에 포함돼 있던,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던 어떤 방식과 돌이킬 수 없이 [275]결별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 방식이란 철학을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서로에 대해 기본적으로 외재적이고, 상호 적대하는 계급의 이해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두 개의 대립적 진영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 [275]레닌은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제3의 길, 중도적이거나 융화적이거나 혹은 둘 사이의 대립을 넘어서는 어떤 범주 같은 것들을 언제나 정언적으로 거부했다. 그런 류의 태도는 일괄적으로 제거해 버려야만 할 이론적 메커니즘의 잔재를 존속시킬 뿐이다. 그와 달리, 레닌의 시도는 “단지” 헤겔을 유물론자로 읽는 것(Lenin "simply" attempted ... to read Hegel as a material) - 그러나 이 단순한 시도 속에 모든 어려움이 엉켜 있다 - 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길을,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의 진정한 재정초를 위한 길을 열게 되었다.

[276/174]레닌이 집필한 『그라나트Granat 백과사전』의 ‘마르크스’ 항목 ... 이 텍스트에는 “속류” 유물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욕망이 도드라져 보이는데, 이 “속류” 유물론이라는 정식화는 제2인터네셔널의 시각에서는 상당히 수상쩍은 것이었다. 우리는 제2인터네셔널이 어떠한 유물론이든 그것이 유물론이기만 하면 족하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레닌은 그러한 유물론을 “변증법에 반한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이런 고발은 플레하노프의 머리에는 떠오를 수가 없는 생각이었다. 플레하노프에게 낡은 유물론이란 그저 “일관성 없는” 유물론, “물질” 일원론이나 사회자연적 “환경”에 의한 결정론에 충실하지 않은 유물론, [277]요컨대 충분히 유물론적이지 않은 유물론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기껏해야 “일면적인” 유물론을 뜻했을 뿐이었다. / 같은 글에서 레닌은 진화와 혁명의 문제 양쪽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진화에 관한 현재의 생각들”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진화”를 구분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진화는 “비약, 파국, 혁명”(여기서 핵심어는 “파국”catastrophe이다)에 의한 진화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의 통상적인 생각들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 특히 의미심장한 것은 레닌이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절을 “혁명적 실천 행위”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며 끝맺고 있다는 점인데, 이 “혁명적 실천 행위”(revolutionary practical activity)는 정통파들의 결정론적 진화론에 의해 엄격하게 폐기되어 온 생각이었다.

[282/178]헤겔을 향한 레닌의 경로는 그리하여 우리가 되돌아가 보아야 할 세 개의 서로 다른 경로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서로 구분되는 다른 양태들을 가지고 있으나 각각 나름의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으며 상호 독립적이지만 넓게 보자면 동일한 이론적 줄기에서 나온 세 개의 가지이다. 게르첸과 마르크스가 풀어야만 했던 것은 동일한 정치적 수수께끼였다. 그것은 그들 각각이 마주한 사회 구성체들의 비-동시성(non-contemporary of their respective social formation)이라는 수수께끼, 다시 말해 그 사회구성체의 지체를 뒤집어 한발 앞선 진보로 바꾸는 것, “너무 이른” 그리고 “너무 늦은”이라는 용어를 변형시켜, 결정된 정세 속에서 혁명적 과정의 특수한 현실성으로 바꾸는 주도적 힘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변증법의 문제이며, 레닌은 자신의 길 위에서 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283/178]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논의를 시작해야만 한다. ‘헤겔 『논리학』에 대한 레닌의 노트라는 텍스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 말하자면 그것들은 사적인 용도로 작성된 필기들일 뿐이며, 혹은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출판될 것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어떤 것들이다.

[284/179]헤겔 『논리학』에 대한 레닌의 노트는 아주 기이한 텍스트로,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도 전례 없이 독특하다. 헤겔의 저작에서 발췌한 인용문들과 주석들을 모아 놓은 이 텍스트는 무슨 책이 이런가 싶을 정도로 콜라주의 외관을 하고 있고, 애초부터 파편적이고 이질적이도록 구성돼 있으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다수의 텍스트들이 여러 층위에서 서로에 대해 하위 텍스트로, 상호 텍스트로 기능하면서 끊임없이 뒤섞이게 되어 있다. 또 파편적 텍스트 각각은 끝없이 다른 텍스트들을 지시하며, 특히 어떤 부재하는 (하위) 텍스트, 즉 『논리학』으로부터 베낀 것이 아닌 모든 텍스트들을 가리키게끔 작용한다.

[285/180]대상에 대해 외재적인 “방법” 혹은 (후기 엥겔스의 공식에서처럼) “체계”로부터 떼어낼 수 있는 것으로서의 변증법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파악된 사물의 자기-운동의 내재성의 정립(the very positing of the immanence and self-movement of things, 말 그대로 내재성의 정립이면서 사물들의 자기-운동)이자, 동일한 운동을 가로질러 자신에게로 귀환하는 사유로서의 변증법. 각개의 사물은 그것 자체이며 동시에 그것의 타자이므로, 그러한 자신을 자기 안으로 반영함으로써 통일성이 깨지고 쪼개지게 되며, 다시 차이의 계기 자체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바로 그 자기-매개의 운동 속에서 그것의 “절대적” 자기동일성을 주장함으로써 그것[차이의 계기]을 취소하는 어떤 방식을 통해 다른 것이 된다.

[287/181]슬라보예 지젝은 “반영”에 들어 있는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정식화한 바 있다.

레닌의 “반영이론”이 지닌 문제점은 그것의 암묵적인 관념론(implicit idealism)에 있다. 의식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현실에 대한 레닌의 강박적 요청은, 의식 자체가 그것이 “반영하는” 현실 바깥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 가정을 은폐하는 일종의 증상적 전치(symptomatic displacement)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 [/182]거울이 오직 거울 바깥에 있는 대상만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 오직 세계 바깥에서 현실을 관조하는 의식만이 “실제 있는 그대로의” 현실 전체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요점은 저 바깥에, 나의 외부에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여기 바깥에”, 현실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헤겔의 논리학의 언어로 다시 말해 보자면, 이 논의에서 레닌이 보지 못한 것은 존재와 의식의 [서로에 대한] 이 최초의 외재성은 주체적 행위에 의해 - 그 개념이 정확히 바로 그러한 사태를 지시하고 있듯이 - 초월된다는 것, 그리하여 폐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반영” 혹은 더 낫게 말해, 반성(독일어 Reflexion은 “숙고함”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은 외적 현실의 복사가 아니라 매개의 계기, 부정성의 계기로 이해될 수 있다.

[289/183]그러므로 우리가 처음부터 강조해야만 할 사실은 “반영”이라는 개념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보게 되겠지만, 이중의 행위를 내장하는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그 자체가 “변증법화”된다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헤겔 논리학의 참된 내용으로 하여금 “정통”에 의해 강하게 억압되었던 헤겔-마르크스 관계를 다시 구축하게 하는 것, 그리고 같은 조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혁명적 추진력, 즉 그것의 변증법적 핵심을 되살려내는 것이었다. [290]이러한 과정에서 “반영”은 의식에 대한 사물의 외재성 혹은 자연의 정신으로의 환원불가능성 등, 처음(『논리학』에 관한 레닌의 노트가 시작될 때) 주장되었던 바와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 된다. ... 레닌이 도달한 결론은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전복”하는 과제가 ... ‘개념론’에 개진된 ‘주체적 활동성’을 관념론적인, 따라서 전도된 혁명적 실천의 “반영”으로 읽어내는 데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은 “물질”이 아니라 혁명적 실천으로서의 물질적 이행의 선차성(the primacy ... of the activity of material transformation 물질적 변형이라는 현실성의 선차성)을 주장하는 새로운 유물론,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더 가까우며, 그런 점에서 정통 “유물론자들”보다 (혹은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보다) 한없이 더 유물론에 가까이 있다.

[294/186]본질의 외관, 즉 “반영”은 (단지 모사하고 있을 뿐인 어떤 참된 물질적 존재로 그것을 되가져다 놓음으로써) 환원되어야 할 환영이 아니라, 외적 운동의 투사된 이미지이다. 그것은 실재를 현실성Wirklichkeit으로 이끄는, 그래서 자기 결정의 과정을 시작하게 해주는 계기이다. ... 헤겔적 ‘운동’의 참다운 내재성 ... 외부의 자리에서 관조된 우주의 흐름, 만유유전이 아니라, 자기-운동selbstbewegung이다. “운동과 ‘자기-운동’(이것에 주의하라! 자주적인, 자립적인, 자발적인, 내적 필연적 운동) … 이것이 ‘헤겔 풍’의, 즉 추상적이고 난해한 … 헤겔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을 그 누가 믿겠는가?? 이 핵심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살려내고hinüberretten, 알맹이를 가리고, 정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바로 그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수행하였다.”

[300/190]이상적이거나 합목적적인(목표에 정향된) 행위에 대한 헤겔의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레닌이 끌어내고자 하는 결론은 이중적이다. 첫째 레닌은 “진리”를 향한, 개념과 객관의 절대적 동일성을 향한, 자기 안에 주관성의 작업을 포함하며 또한 그것을 인지하는 객관적 진리를 향한 매개로서의 인간 활동에 대한 헤겔의 분석의 중요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헤겔이 역사유물론과 “매우 가까워” 보이는 것은 (단지 주관적 목적의 합리성의 매개화의 첫 번째 형식에 불과한 도구에 대한 복권의 제스처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이어바흐에 관한 두 번째 테제의 언어로 규정하자면, 실천의 우선성에 의해서이고 “인간이 자신의 실천을 통해 이념, 개념, 지식, 과학의 객관적 정확성을 입증한다는 견해”에 의해서이다. 이때 “정확성”은 이러한 실천들에 내재적이며, 그러한 실천은 자신의 타당성의 척도를 스스로 생산한다. / 같은 이유에서 헤겔에 대한 “유물론적 전복”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자연과 정신, 존재와 사유, 혹은 물질과 관념이 아니라 논리와 실천적 행위 사이의 관계, 그 둘의 “동일성”이다.[/191] 헤겔이 내놓은 [301]사상의 “대단히 심오하고, 순수하게 유물론적인 내용”이 찾아져야 하는 곳도 바로 여기이다. “유물론적 전복”은 이제 [객관의 우선성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속에서 논리학의 여러 식들을 “수십억 번”을 반복함으로써) 논리 그 자체의 공리들을 생산하는 실천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데 있게 된다. ... 논리를 실천의 과정적 성격의 기반 위에서 외화의 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

[304/193]엥겔스가 『포이어바흐』에 썼던 것과 반대로, 절대적 이념은 고집불통처럼 앞뒤가 꽉 막힌 “독단적 내용”이 아니라, 인식의 궁극적 목표로서의 ‘헤겔의 체계’와 동일시될 수 있으며 자기-준거적 지점에서 포착된 과정 자체(the process itself taken to its point of self-reference)이다. 이는 관점의 전도가 일어나는 빛나는 순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이론 자체 “안에” 언제나 이미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이 존재함(안토니오 그람시가 비범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테제)을 이해하게 되며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이라는 문제는 그 자체가 형식의 문제, 그것 바깥에서는 어떠한 내용도 존속할 수 없는 “절대적”형식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306/194]절대적인 방법으로서의 변증법은 그것이 생산하는 효과들의 총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레닌이 헤겔 독해를 통해 획득한 새로운 철학적 입장 ... 그러한 입장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1차 대전 발발 이후 레닌이 보여준 철학적 개입들(실천들)에 잘 드러나 있다. ... 첫 번째는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이행’이라는 테제이며, 거기에는 억압된 민중들이 식민지에서 벌이는 민족해방투쟁과 대도시에서 벌이는 반자본주의 투쟁이라는 이중적 차원이 있다. ... 전쟁을 고전적인 국가 간 갈등이 아니라 적대의 과정으로 이해 ... “총력전” 안에서의 대중들의 분출을 무장봉기로 “전환”하는 것, [/195]달리 말해 대량살상 산업 쪽으로 쓸려 들어가는 대중들의 힘을 돌려 세워, 식민세력과 부르주아 지배라는 내부의 적에 대항하는 쪽으로 뒤집는 것이다. / 두 번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의 이행이라는 테제이다. ... 문제는 혁명적 과정이라는 모순의 내재성 속에, 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 그리하여 ... [307]사회민주주의적 정통파의 “단계론적” 전망과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과제를 수행할 수 없는 러시아 부르주아의 무능력이라는 추상적인(추상적으로 올바른) 전망, 이 정반대로 대립하는 두 전망 사이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 슬라보예 지젝이 힘주어 강조한 바 있듯이, “2월이라는 계기에서 10월이라는 계기로”의 전환은 결코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전진일 수 없으며, “최대주의”라는 증상의 발현이나, 혹은 조건의 “미성숙”을 주의주의적으로 뛰어넘는 것일 수도 없다. 그것은 차라리 “단계”라는 통념의 기준을 규정하는 근본적 좌표 그 자체의 전복(but rather a radical questioning of the very notion of "stage", a reversal of the fundamental coordinates that define the very criteria of the "maturity" of a situation차라리 “단계”라는 바로 그 통념에 대한 근본적 질문, 즉 상황의 “성숙”이라는 이왕의 기준을 정의하는 근본적 좌표의 역전)을 뜻한다.

10. 전쟁이 규정한 정치에서의 철학적 계기: 1914~16년의 레닌 - 에티엔 발리바르

[323/323]엄밀하게 볼 때 레닌에게는 단 한 번의 철학적 계기가 있었는데, 그 계기를 규정한 것은 바로 전쟁(전쟁과 관련된 쟁점들, 전쟁의 즉각적인 결과)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철학의 대상과 정치의 대상이 분리될 수 없다면, 이 사실은 철학에 중요할 수 있다.

[325/208]레닌이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하련다. 레닌이 자기 식대로 생산한 것은 기존의 철학적 논쟁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노트』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등에 대한) 이런 비판적 독해는 철학적 담론에는 이르지 않았고, 또 그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1915년 이후 레닌은 더 이상의 철학적 저작을 결코 집필한 적이 없다.

[329/211]1915-16년 레닌이 쓴 텍스트들은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역사적 “경향들”로부터 나온 추정에 기초한 경제적 진화주의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점진적 형태(자본주의의 점진적 변환)였든 파국적 형태였든(자본주의의 갑작스런 붕괴) 제2인터네셔널 시기의 사회주의 사상을 지배해 왔던 이 경제적 진화주의는 레닌이 새롭게 제시한 “전술”과 갈수록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진화주의는 혁명의 순간이 다가오기 직전인 1916년 말~1917년 초의 분석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수정된다. 이제는 모든 역사적 발전이 “불균등한”(uneven) 것으로 이해됐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영역의 복잡성을 “경향들”의 논리로 환원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루이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며, 우리는 이 사실을 이론적 영역과 전략적 영역에서의 계급적대에 내재하는 중층결정의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31/212]우리는 레닌이 1915년 이후, 특히 자신의 투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연루되어 있던 세 개의 잇따른 혁명(1917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그리고 이후의 신경제 정책 혁명)을 거치며 끊임없이 변해 왔음을 볼 수 있다. “전술”에서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당의 역할(또한 그 구성 자체)에 대한 분석에서도, 그리고 그에 따른 “혁명적 주체”의 정체성에 대한 분석에서도 그렇다. 이제 [레닌에게] 계속 문제가 될 이 혁명적 주체는 (의식화, 즉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변형”되어가는 형태까지 포함해) 이미 확보된 사회경제적 전제조건(an established socioeconomic presupposition)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구성과정(the result of a complex political construction)의 결과로 등장하게 된다. 내 견해로는 전쟁이 제기한 질문들로 인해, 그리고 전쟁이 자극한 철학적 사유로 인해 혁명적 주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전쟁 와중에 이미 레닌의 사유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 질문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소멸”("disappearance of the proletariat)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것이다(그것도 극적인 형태로 말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더 이상 단순한 응용 관계가 아니라 미리 결정되지 않은 구성의 관계(the relationship ... of non-predetermined construction)로 여겨지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33/214]레닌이 헤겔의 정식과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결합하려 했던 것은 “총력전”(total war) 이론의 의미에서 계급 투쟁이 총력전의 특정한 형태라고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사실은 이런 결합 자체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레닌은 클라우제비츠가 “헤겔의 신봉자”였을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몇 차례씩 반복하면서 이런 결합을 회고적으로 역사에 투영한다). 그러나 레닌은 이중의 정정이라는 맥락에서 헤겔과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결합시킨다. 한편으로는 클라우제비츠의 실용주의를 갖고 헤겔의 사변(혹은 이성Vernunft)을 정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헤겔의 변증법을 갖고 클라우제비츠의 실용주의(분석적 오성Verstand의 응용으로서의)를 정정한다.

[334/214]레닌이 헤겔에게서 정정하는 것은 정세와 독립되어(independently of the conjuncture) “상대 속에 절대”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변증법적 모순 개념과 대중 동원이 “우연적인” 형태로 이뤄진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역사변증법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레닌은 단지 마르크스를 통해 헤겔을 읽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를 통해서도 헤겔을 읽는다. 이 실천적 해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전쟁 자체에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이 존재한다(즉, “다른 수단에 의해”, 그리고 “다른 형태”로일지라도 계급투쟁은 부단히 그 효과를 생산한다[전쟁에 영향을 끼친다]). 그에 따라 계급투쟁의 복잡성은 군사적 계기가 강제하는 “단순화”를 늘 넘어설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를 단순한 “충동”인 양 여기는 단순화된 표상도 늘 넘어선다. 이렇듯 (정세에 개입하기 위해서) 정세를 사유한다는 것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중의 단순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전쟁이 계급정치를 일시적으로 “분쇄하면서” 강제하는 (또는 전쟁이 실현하는 듯한) 단순화, 그리고 이런 단순화에 관념적으로 맞서서 민족전쟁을 계급전쟁으로 그저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여기에는 룩셈부르크처럼 자기 진영을 배반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포함된다)의 단순화.

[335/215]레닌은 전쟁이 이중성을 지닌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216]즉,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대결일 뿐만 아니라 각 교전국이 “자신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굴복시키기 위해 적대국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힘 자체는 결국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프롤레타리아트화된 대중으로 만들어진다.따라서 전쟁의 고통을 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갈등의 객관적, 주관적 여건을 변형시키게 될 전쟁의 지속기간이 결정적 요인이 된다. ... [336]일단 전쟁에 연루되면 대중은 조작가능한 단순한 “대상”이 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통제불가능한 힘이 된다는 이중적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336/216]사회주의는 전쟁을 막을 수 없었는데 전쟁은 어떻게 사회주의를 “생산”할 수 있을까, 라는 골치아픈 질문으로 되돌아가면, 우리는 이 질문의 답변이 열려 있음을 알게 된다. 경제의 사회화, 그리고 전방과 후방에서 대중이 일으킬 잠재적 반란은 단지 혁명적 상황을 규정할 뿐이다. 이 상황은 실제적인 단절 쪽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전쟁이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전쟁이 그 대립물로부터 어떤 유형의 “계급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알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적 분할을 분석하는 동시에 그 분할이 발전하는 방식을 따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 [338/218]결국 전쟁이 혁명적 상황이라는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킨 듯하다. 이제 혁명적 상황이란 더 이상 (전쟁이 그 징후인) 자본주의의 “성숙” 같은 개념과 연관된 가정이 아니라, (특히 러시아의 경우처럼) “선진국들”과 “후진국들”이 공존하며 상호침투하는 변별적인 세계구조에 전쟁이 끼치는 효과 자체를 분석해서 나오는 결과가 된 것이다.

11. 제국주의에서 전지구화까지 - 조르주 라비카

[353/228]아직도 우리에게는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에 있어 그 효과를 상실하지 않는 몇 가지 용어들이 있다. 제국주의는 바로 이런 용어들 중 하나로[354] 수많은 개념들의 성좌를 계속해서 지배해 왔으며, 자본주의와 착취, 소유, 계급들과 계급투쟁, 사회민주주의와 혁명적 이행이라는 개념들은 그 속에서 완전한 의미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355/229]다시 말해 유럽과 일본은 지배 권력인 미국에 대해 하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날은 완전히 속국화되어 하도급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지구화는 오직 하나, 미국화Americanization - 또는 미합중국화 - 와 동일한 것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확하다.[356]

[360/232]“전지구화”의 핵심 단계라고 알고 있는 투기자본과 관련된 사례 하나만을 들어보기로 하자. [/233]브레튼 우즈 협정의 포기와 금본위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통화제도의 종식 이후로, 이미 불안한 것으로 여겨졌던 1969년의 500억 유로달러는 8조 유로 달러로 치솟았는데, 그럼에도 이는 단지 “세계 금융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예전의 “새로운 제국주의”에서는 알지 못했던 요소들을, 당시에는 그저 존재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몇몇 사례에서 그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던 그런 요소들을 최종적으로 고려해 본다면, 국제적인 통화 기구들이 조절하는 부채의 압력은 이제 대륙 하나(아프리카)를 통째로 파멸로 이끌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며, 우리는 이런 압력을 핵무기의 위험이나 환경파괴, 식수의 고갈위험이나, 장기 매매와 대규모 아동매춘으로까지 확장되는 상품화 같은 것처럼 지니고 있다.

[364]모든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들이 꿈꿔온 진정한 의미의 전지구화는 여전히 쟁취해야 할 어떤 것으로 남아 있다. 제국주의의 비밀을 파헤친 로자 룩셈부르크의 다음과 같은 판단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본주의는 전지구화를 성취할 수 없다. 내적 모순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자본주의를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지구화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주의뿐이다.

주 52)“(자본주의는) 보편이 되려고 몸부림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런 그 자신의 경향성 때문에 붕괴되고 만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내재적으로 생산의 보편적 형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신의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는 자체로 모순적이며, 그래서 그것의 축적 운동은 갈등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이 갈등을 악화시킨다. 발전의 특정한 단계에서는 사회주의의 원칙들을 적용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축적이 아니라 전 세계의 생산력을 발전시킴으로써 고통 받는 인류의 바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바로 그 자신의 본질에서 조화롭고 보편적인 경제 시스템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Rosa Luxemburg, The Accumulation of Capital(London: Routledge, 1963), 467.

12. 레닌과 ‘지배민족’[Herrvolk] 민주주의 - 도메니코 로쉬르도

[375/242]대도시에서의 법치는 식민지에서의 계엄 상태, 경찰과 관료조직의 폭력 및 자의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 미국 역사에서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유럽의 역사에서도 있었다. 다만 유럽의 경우엔 식민지 사람들이 대도시가 아니라 대양 건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덜 또렷하게 보였을 뿐이다.

[379/245]국제적인 언론에는 이스라엘을 찬양하거나, 적어도 정당화하려는 논조와 기사들로 넘쳐난다. 어쨌든, 중동에서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있고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작동하는 유일한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시적인 디테일은 은폐된다. 법과 민주적인 보증에 의한 정부는 오직 주인종족을 위해서만 유효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살던 땅에서 쫓겨날 수 있으며, 재판 없이 체포되고 투옥되고 고문받고 죽을 수 있다. 하여튼 군사정권 아래서 매일같이 인간의 존엄성이 모욕당하고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이기보다는 인식론적인 대안 앞에 서 있다.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약탈할 이스라엘의 권리, 식민주의적이거나 반(半)식민주의적인 억압을 가할 권리를 용일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에 의지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지배와 약탈, 억압의 현실로부터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고려해야 하는가?

[380/246]봉쇄(embargo)는 강제수용소의 포스트모던식 버전이다. 전지구화의 시대엔, 더 이상 사람들을 쫓아내야 할 어떤 필요도 없다. 이라크에서처럼, 약간의 식료품과 의약품의 유입을 차단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약간의 “지능폭격”만으로 상수도관, 하수 시스템, 공중위생 기간시설을 파괴하는데 성공할 수 있다.

[382/248]“새로운 국제질서”의 윤곽이 분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한편에서는 “국제적인 경찰활동”에 나서야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 나라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 불법적인 행동을 때려눕혀야 할 “깡패국가”, 불량국가, 더 정확히는 비국가가 있다. 여기서 환기되는 세계국가의 종류에 관해서, 서구는 배제당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정당한 폭력의 독점을 완성한다.[383] 그리고 이는 탈해방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PART FOUR 정치와 그 주체

13. 레닌과 정당, 1902~17년 11월 - 실뱅 라자뤼스

[392/255]20세기 정치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조직이다. 조직적이지 않은 정치활동은 없으며, 실제로 정당이라는 단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 1871년에 구성되었던 파리코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세기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지형이 펼쳐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 활동의 기본은 봉기(insurrection)였다. ... [/256]이 과정에서 정당들의 계급관계이데올로기적, 강령적으로 바뀌었다. 계급문제는 더 이상 당원들의 사회적 출신 성분에 따라 판단되지 않았다. 당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강령에 따라 모든 사회계급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393]19세기 말에 정치를 담는 유일한 그릇이었던 계급이라는 범주가 몰락했다. 20세기 말에는 국가 정당이라는 정당형태가 몰락했다. / [/257]그렇게 해서 이제 우리는 정당 없는 정치 활동(politics without party)이라는 명제를 부여잡게 되었다. 이 메커니즘은 권력과 국가를 겨냥하지 않으며 인민을 지지하고 편든다(on the side of the people). 국가를 규정할 능력이 있지만, 국가의 주변에서 입장을 취하면서도 외부에 존재하고, 동시에 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Hence we have these theses on a politics without party, and a mechanism not aiming at power and the state but on the side of the people, though still capable of prescribing for the state, that is, taking a position in its vicinity while remaining external and radically heterogeneous to it. 그러므로 여전히 국가에 대해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주제들을 정당 없는 정치의 측면과 권력과 국가를 겨냥하지 않고 인민의 편에 서기를 원하는 어떤 메카니즘에서 취한다. 다시 말해 국가에 대해 외재적이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남는 반면, 그 부근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395/258]『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자생적으로 출현한다는 『공산당 선언』(1848)의 명제와 결별했다. [/259]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하는 곳에 공산주의자가 존재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에 반대했다.[396] 레닌은 자생적인 사회민주주의 (곧 혁명적) 의식이 말도 안 되는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반대 입장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397/260]1917년 2월에서 10월에 이르는 시기의 저술을 살펴보면 레닌이 정치와 역사를 명백히 분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역사는 명백했고(전쟁분석), 정치는 불투명했다(1917년 3월에 레닌은 발동이 걸린 혁명의 장래가 미결정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역사와 정치가 그렇게 위상이 달라졌다. ... 이 단계에서 정치는 철학과 그리하는 것처럼 역사와 끝없이 토론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둘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정치는 내재적인 자체 사상을 가져야만 했다. 정치가 존재하려면 그래야 했다. 둘 사이의 분리가 요구된 시점도 바로 그때였다.

[398/261]그렇게 정당의 정치적 유효성이 1917년 11월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부터 우리는 혁명이 키워드로 등장하는 정치학의 역사주의적 문제 상황에 진입하게 된다. 레닌주의는 그렇게 최종적으로 두 가지 논점을 제기했다. 정당형식의 정치적 소멸과 혁명이란 범주의 진부화(the political lapsing of the party form and the obsolescence of the category of revolution).

[399/291]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 나는 국가와 정치를 구별했고, 그에 따라 국가의 구조가 바뀌는 것이라는 혁명의 개념을 폐기했다. [/262]정치 활동의 방식, 그러니까 일련의 연속적 상황에 관한 이론 속에서는 결국 “혁명”이 의식과 주체성을 가리키는 용어일 때에만 역명을 언급할 수 있다. 혁명적 방식 말이다. / 둘째, 그 용어는 일반적으로 역사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나한테 “혁명”은 역설적이게도 정치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여기서의 논쟁이 정치와 혁명의 관계뿐만 아니라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아는 것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402/264]이론적이고,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당대의 유일한 과제는 국가와 역사주의가 불필요하게 정치를 포박한 상황을 풀고, 혁명의 개념을 해방하는 것이다.

[404/266]적어도 프랑스에서는 “혁명”은 1968년에 쓸모없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때 혁명이 핵심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봉기나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과 의문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에 의문을 더 이상 제기하지 않은 것은 국가가 더 이상 공통의 유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405] ... 계급주의는 1968년에 사망했다. ... 다시 말해 계급의 견지에서 정치에 접근하는 태도는, “계급”과 “계급정당”이 국가와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제출하지 못하고 외부적이거나 내부적인 사건을 목표로 삼지도 못하면서 쇠퇴했다. ... 국가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더 이상 정치의 핵심이 아니었다.

[405/266]첫째, “혁명들”(revolutions)은 정치와 동일시된다. 놀라운 창의력과 독창성이야말로 모든 혁명의 특징이다.("revolutions"are identified by politics, and each one by a remarkable inventiveness. “혁명들”은 정치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각각의 혁명은 놀라운 창의성과 동일시된다.) 혁명들(Revolutions)은 복수로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이 보통의 사건으로서 정부와 국가에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를 의미한다는 부적당한 개념에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오히려 모든 혁명은 아주 구체적이고 독특한 특성을 갖는 특이성의 무대가 될 것이다.(but each time with singularities of an extremely specific character. 오히려 각각의 혁명의 시간은 극적으로 특유한 특성을 가지는 특이성들을 의미한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는 『무엇을 할 것인가』, “4월 테제,” 봉기 결정, 직업 혁명가들, 단독 강화가 발명이자 발견이었다. 우리는 확실히 여기서 단절(break)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력과 활동의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 둘째 “혁명”이 정치적 역량을 낳는다는 엄격한 의미를 적용할 경우에는 단 한 가지 사건만이 존재한다. 프랑스 혁명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 주체성에 관한 사상이 만개한 유일한 혁명이었다. 반면 1917년 10월은 사상이 범주화된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전락한 혁명이었다. ... [407/268]셋째, 정치는 역사적 사실에 앞서고 그것을 만들어 내며, 운반하고 지원한다. 우리는 역사주의를 끝낼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그 과정을 재개봉해서 (혁명, 정당, 국가 등의) 술어를 재조사하고, 우리의 이름으로 선언해야만 한다. 역사주의는 더 이상 필요가 없고, 그 확인과 종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14. 정확함의 사도 레닌, 혹은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 장 자크 르세르클

[409/269]레닌은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형, 더 정확하게는 근본적으로 만회하기가 불가능한 마르크스주의(a form of Marxism that is radically irrecuperable)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413/271]언어철학에서도 레닌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곧 이 점에 대해서 다룰 텐데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언어철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둘째 레닌이 체화하고 있는 덕목은 마르크스주의가 (완전히 행방불명인 게 아니라면) 기껏해야 주변부에만 머물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적 국면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413/271]레닌의 첫 번째 덕목은 엄격함(hardness)이다. 레닌은 간단없고 단호한 논객이다. 레닌에게는 어딘가 냉혹한 면이 있는데, 그의 특별한 텍스트들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세를 퍼부어야할 때 레닌은 주저하지 않는다. 괴팍함을 타고나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표현대로 전쟁 중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정세,즉 마르크스주의가 묽게 희석된 채로 혹은 소심하게 재활용되고(watered-down or faint-hearted) 있는 정세(이런 정세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강함으로 착각한다)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다.[414] 공세적인 마르크스주의(Marxism on the offensive)(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레닌주의의 원칙은 이렇다. 늘 공세를 취하라!),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갖가지 위선을 폭로할 수 있고, 기꺼이 폭로하는 마르크스주의 ... 를 말이다. ... [/272]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끊임없이 주장했고, 프티부르주아의 도덕을 동정하지 않았다. / 레닌의 두 번째 덕목은 확고함(firmness)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전략적 힘을 정확히 이해했다. ... 다시 말해서 교조주의자 레닌은 자신이 확고한 이론적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함을 결코 잊지 않았다. 여기서 레닌주의의 또 다른 원칙이 나온다. 혁명이론 없이 혁명운동은 없다. ... /레닌은 세밀함(subtlety)을 세 번째 덕목으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하라는 이론이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슬로건 등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여한 주요 공로도 바로 이런 부분에 존재한다.

[415/272]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이에 따른 마르크스주의의 후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언어의 문제를 주제로 삼거나 언어이론을 제시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가장 중요해진 이 시대에 무장해제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언어철학과 관련해 보면,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의 진면목은 슬로건 이론을 통해서 드러난다.

[417/273]이 구체적인 힘의 중심성은 마르크스주의 언어철학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에 관해서 무척 중요하다. ... {“On Slogans”의} [/274]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미의 개념은 발화가 이뤄지는 정세와 연결되어 있다. 의미는 힘 관계(rapport de force)의 결과물, 즉 상호협력적인 언어게임이 아니라 정치적인 투쟁의 결과물이다(여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다. 혹은 정세가 변할 때마다 재검토되어야 하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규칙이 있을 뿐이다). 둘째, 이렇게 보면 결국 발화는 정세의 사태에 대한 기술(記述)이 아니라 개입(intervention)이 된다. 발화는 발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의 관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변형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슬로건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된다. ... 셋째, 올바른 슬로건은 정확한 슬로건, 정세 속에서 작동하며 정세와 일치하는 슬로건을 의미한다. 정세의 적합한 계기를 명명하는 슬로건과 슬로건을 의미있게 해주는 정세는 서로를 순환적으로 반영한다.[418] 이와 같은 의미의 정세성(conjuncturality)은 정확함(justness)이라는 개념으로 파악된다. 요컨대 올바른 슬로건은 진실은 아니지만 정확하다. 넷째, 그러나 이 팸플릿에서 레닌은 인민이 “진실을 들어야만 할” 때, 즉 당면 정세에서 국가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계급의 대표자이든, 한 계급의 하위집단이든)를 인민이 알아야 한다고 말할 때 진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진실은 슬로건의 정확함에 따라 엄격하게 좌우된다. 진실은 정확함의 결과, 그도 아니면 그 영향이라는 것이다. 발화-행위 이론의 개념으로 설명하면, 발화수반적 정확함(illocutionary justness)이 발화효과적 진실perlocutionary truth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 내는 의미의 효능을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진실과 정확함의 결합(combination of truth and justness)이다. 마지막은, 이 팸플릿이 주장하는 것은 담론, 즉 개입으로서의 담론이라는 정치적 개념이다. 지극히 정치적으로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 팸플릿은 프티부르주아지의 도덕성 운운하는 것은 환상이며 “사태의 본질”(the substance of the situation) 운운하는 것은 상황을 호도할 뿐이라고 부장한다. ... 이런 질문은 대중이 혁명에 배반당해 왔음을 대중에게 알려줬다. 정치와 도덕의 대립은 구체와 추상의 대립이다. 여기서 레닌주의의 또 다른 원칙이 나온다. 혁명의 시기에 혁명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악하고 위험한 죄는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the substitution of the abstract for the concrete)이다.

[419/275]『천 개의 고원』에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레닌의 슬로건 이론을 해석한 구절은 잘 알려져 있다. ... 슬로건의 힘은 수행적(performative)일 뿐만 아니라 슬로건 자체가 호명하는 계급을 탄생시킬 수 있을 만큼 구성적(constitutive)이라는 것이다. ... 이들이 말하는 언어학적 결합체nexus, 기호체계(regime of signs), 기호계적 기계(semiotic machine)등은 발화(utterance)(이 경우에는 슬로건), 함축적인 전제(슬로건이 노리는 효과를 수행하는 행위), (수행성이나 슬로건이 명명하는 힘에 영향을 받는) 비물체적 변형의 혼합물이다. 슬로건이 핵심부분을 이루는 언표행위의 아상블라주assemblage에 존재하는 내적 변수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420/276]가타리의 첫 번째 에세이 모음집 『정신분석과 횡단성』의 서문으로 기고한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자신이 ‘레닌주의적 단절’(Leninist break)이라고 부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 유일한 문제는 이 승리의 가능성, 혁명으로 이어진 이 전환이 혁명과 당의 주체를 부르주아 국가와 경쟁하는, 따라서 그 모습을 본뜬 [또 하나의] 국가장치로 만들어 버리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뤄졌다는 것이다. ... 들뢰즈는 이 문제, 역병처럼 늘 공산주의 운동을 따라다녔던 (지금도 따라다니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한다. 가타리가 제시했듯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종속집단groupe assujetti과 (언젠가는 스스로 소멸되어야 함을 늘 주장하는) 주체 집단groupe sujet을 구분함으로써 말이다. / 나는 들뢰즈의 이 해법이 정치적으로 타당할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이 해법은 뭔가 도움이 되기에는 소비에트 권력 초기에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보인 편향과 지나치게 비슷하다(레닌은 팸플릿이나 글을 쓸 때마다 이런 편향을 격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와 언어가 연결되어 있으며, 언어가 혁명적 사회변혁에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들뢰즈의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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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5-05-2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식 남겨둡ㄴ다 두고 읽어봐얄텐데 자신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