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나에게 쉼표 - 정영 여행산문
정영 지음 / 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맞는 여행책이 있다. 여행지의 정보 따윈 나오지도 않는 불친절한 책이다. 공감을 하며 마구 밑줄을 그으댄다. 문득 왜 나는 그런 여행책을 좋아하는 거지? 생각해본다. 여행은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런 기회에서 여행자가 얻는 색다른 경험은 여행지의 정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행지에서의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이런 것들을 보아야 하고, 저런 것들을 감상해야 하며 요런 맛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아도 글의 분위기에서 그런 정보보다도 더 멋진 그곳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거다. 그런 여행책, 바로 시인 정영의 여행산문집 『때로는 나에게 쉼표』이다. 간만에 내 마음을 쿵쿵! 울리는 글들이다.  

지금,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당신에게 외친다. 당신이 있어 내가 여기 있다고,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문득 지구 반대편이 궁금해지거든 거기서 손 한번 흔들어 달라고. 갓 구운 빵처럼 갓 누른 두부처럼 우리 그렇게 순하게 살다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뿐이지, 뭐가 더 필요하겠냐고. 

정영은 세계 곳곳의 여행지를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일상의 행복함을 맛보고 세상살이의 위안을 얻는다. 윈난성에서 하얀 라면을 끓여주던 난감한 그녀를 만나고, 경주 기차역 앞에서 정물처럼 앉아 오렌지를 파는 여인을 만난다. 독일 플렌스부르크의 공동묘지에서 최고의(!) 사진 작가를 만나기도 하고 베네치아에서 가면을 만드는 장인을 만나기도 한다. 또 터키 셀축의 거리에서 듣던 음악으로 인해 김광석의 <거리에서>를 떠올리며 눈물 찔끔 흘리기도 한다. 그런 세계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정영만의 여행지도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지금 현재의 고단함을 벗어버리고 싶은 까닭이다. 여행지의 유명한 볼거리가 아니라 내 삶의 쉼표를 찍고 싶은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건 정말 멋진 여행이다. 정영의 글엔 그런 멋진 여행의 기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여행지에서 정영이 느낀 수많은 느낌들이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들과 분위기에 어울려 시인의 감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참 좋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의 손을, 녹슨 냄새를 풍기는 그리움이란 말을, 난 그쯤에서 슬며시 놓아주었다.(…) 늘, 내가 손을 뻗었을 때 날 붙잡아준 것은, 멀리 있는 그리운 존재들이 아니었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늘 곁에 있었던 당신의 손이었다. 결국엔 그런 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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