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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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그를 처음 접했던 건 내가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그 무렵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수업을 들었으며, 종종 이 책에 대해 잘 안다고(?)하는 녀석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었다. 또한 선생님들 중에서도 내게 그런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분이 계셨던 것 같다. 충분히 곱지 않은 그런 시선이랄까.  


그때 당시 나는 헌책방이라는 곳에 눈을 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들고 다니면서 도무지 내 능력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메시지들에 대한 뜻 모를 집착에 휩싸였던 것 같다. <실락원>이나 <설국> 역시 내게는 버거운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책을 들고 다닌다는 바로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뭔가 의미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통해 느낀 점이랄까. 그것은 철저한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물론 줄거리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지금이지만, 분명 그것은 상실이었던 것 같다. 이해 능력이 부족했던 내가 그 상실의 무게를 이겨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또한 읽고 나서 도무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는지조차 가물가물 한 것 역시 그의 책이 상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전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테마로 한 짧은 소설을 쓰려고 했던 적이 있다. 결국 소설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동안 줄곧 인간의 ‘레종 데트르’에 대해서 생각했고, 덕분에 기묘한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수치로 바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버릇이었다. 약 여덟 달 동안 나는 그런 충동에 시달렸다. 전철에 타자마자 승객 수를 헤아리고, 계단 수를 전부 세고, 시간만 나면 맥박 수를 셌다. ······(중략)······ 그때 나는 그런 식으로 모든 걸 수치로 바꿔놓음으로써 타인에게 뭔가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할 뭔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 개비의 수나 올라간 계단의 수나 내 페니스의 크기에 대해서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는 자신의 레종 데트르를 상실하고 외톨이가 되었다.(p90~p91)』 

 

그렇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처럼,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내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어떤 확신이랄까, 어떤 이미지를 타인들에게 각인시키고자했던, 어쩌면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꽤나 진지하고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정당한 행위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집보다 소설책이 더 좋았던 그 때. 더군다나 <상실의 시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실락원>, <설국> 등을 오직 ‘들고만’ 다니면서 아마도 그것을 죄다 이해하는 척, 적어도 문제집이나 풀고 있는 너네와는 다른 ‘나’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난 너희와 같이 그런 구속적인 일상을 살진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아주 조금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뭔가를 전하려고 일탈적인 행동(일명 고답적으로까지 보이는 책들과 야자시간에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드는 행동 등)을 서슴지 않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콧방귀를 뀌듯, 그렇게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난 진실로 관심 받았다기보다, 한낱 소란쟁이로서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것, 그 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내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아직도 나는 내 존재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상실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말 자체가 상실의 한 자락일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 종종 하긴 한다. 하지만 ‘군중속의 고독’이라 했던가.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는 외톨이가 아닐까 싶다.  


무엇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엇인가를 상실해가는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그 상실감에 빠져, 군중들 속에서 마치 전혀 고독하지 않은 것처럼, 전혀 문제없다는 그런 얼굴로 살아가는 나, 우리, 사람들. 어쩌면 ‘바람의 노래’란 상실에 대한 메시지라기보다 ‘나’의 존재에 대한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가 세 번째로 잤던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죽었기에, 그들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반면에 살아남은 우리는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나이를 먹어간다. 때때로 나 자신은 한 시간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든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p94)』  


릴케와 이상 그리고 기형도는 영원히 젊은, 그런 산소(?)같은 시인이 아닐까. 이 시인들이 멋진 이유는 그들의 시를 읽은 후, 되물어 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인과 그 시를 애독하는 독자들 사이의 단절이랄까. 때론 이런 단절은 이처럼 멋진 것, 영원히 젊을 수 없는 우리를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젊은 애독자로 정체시켜 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위로받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여. 전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어. 자네는 다정하지만 뭐랄까, 모든 걸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뭐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야.”(p105)』

김영하의 <퀴즈쇼>의 민수가 그랬고, 이 책의 주인공 ‘나’ 역시 그랬다.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말이다. 나 역시 누군가 꼬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런 시선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니 똥 굵다는 표정으로, 애송이 같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조금 삐뚤어지게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내게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비밀을 너무 빨리 알려고 덤벼드는 그런 애송이, 젊은 피라서. 그렇게 생각하고픈 나 자신이 때론 너무나도 재수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썩소 한 방 날리고 여유로운 윙크 살짝 보태며 애써 당당한 척,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p143)』  


우리는 순간을 살아가는 것, 그 뿐인지도 모른다. 순간이란 눈 깜짝할 그런 순간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혹은 그 순간순간을 붙잡을 수도 거기에 매달릴 수도 없다. 거기엔 어떤 손잡이도 없기 때문이다. 스치듯 지나는 그 순간을 우리는 애써 기억하는 척, 붙잡고 있는 척 그런 착각 속에서 보낸다. 우리는 순간을 기억하고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상실 한 조각을 물고 있을 따름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늘 상실의 안은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청춘이든 노년이든 간에 어느 시절에나 내가 존재하는 순간, 내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상실의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상실이라는 도착지로 향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스치듯 그렇게 지나치는 상실의 조각들을 자신도 모른 채 수집하며 살아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상실을 채워가는 게 삶의 여정이라면 그 끝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도착하게 될 그곳을 뭐라 불러야 할까. 어쩌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생에 처음으로 가장 마음이 편안한, 그런 상태가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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