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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평점 :
《울지 않는 늑대》를 만나게 된 계기는 햇귀님께서 보내주신 영화《NEVER CRY WOLF》덕분이다. 컴퓨터로 영화보기를 시도했지만 ‘수입산’이라 그런지 좀 튕기는(?) 통에 고생을 좀 했다. 또 한글자막이 없음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 좌절 덕분에 번역본인《울지 않는 늑대》만난 것이다. 내 극심한 영어울렁증(?) 때문인지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아주 좋은 영화와 책을 만날 수 있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이야기;《NEVER CRY WOLF》】
많은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봤다. 낯선님과 함께 가게에서 한 번, 집에서 여러 번을 보았다. 도서관에서《울지 않는 늑대》를 빌려 읽고서 두어 번 더 영화를 봤다. 어차피 자막은 ‘해독불가’였으므로 없애버리고서 그렇게 영화에 빠져들었다.(어떤 수작(?)으로《NEVER CRY WOLF》한글자막버전과 프랑스어 더빙버전을 구하게 됐다. 자막 없이 몇 번을 보고 번역된 책을 보고 난 후여서 그런지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다.)
처음 본 영화의 느낌은 ‘다큐멘터리’ 같았다. 북극의 광활한 툰드라가 침묵함과 동시에 생동하고 있다는 소소한 증거들을 아주 잘 포착해 보여준다. 늑대는 우리가 늘 주변에서 보아오는 조금 큰 개처럼 친숙했으며, 카리부(순록)가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누이트족은 진정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듯했다. 자막이 없어도 느끼는 게 많은 영화다.
늑대에 대한 보고답게 그 습성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일러준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명쾌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존에 늑대로부터 가지고 있던 그 이미지들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게 아닐까 싶다. 늑대하면 떠오르는 폭력성·잔혹성·비열함 등등의 그 출처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인지에 한 번쯤 심사숙고해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늑대는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살육이 아닌 사냥을 한다. 그것도 건강한 카리부가 아닌 병이 들거나 약한 카리부만 골라서 사냥을 한다. 떠돌이가 아닌 일정한 정착형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사냥하기 어려운 시기에는 쥐를 먹으며 가족을 부양한다(때때로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일부일처제를 철저하게 지키며, 노총각(?) 노처녀(?) 혹은 홀로된 늑대들을 박대하지 않고 포용하여 화목한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이러한 믿을 수 없는(?) 모습들을 영화는 아주 상세히 전하고 있다.
대자연의 아름다우면서도 혹독한 환경,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생존의 이치, 내가 사는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치장함이 없는, 그래서 더더욱 아름다운 땅. 역시나 가장 포악한 동물은 인간이다. 늑대를 매도한 것도, 그 씨를 말리려고 음흉한 계략을 펼치는 것도 인간이다. 사냥을 가장한 살육게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늑대로 인해 매년 사냥감이 급속히 줄어든다는 허위보고서를 만들어 그 씨를 말리려는 악랄한 인간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늑대 이미지를 여태 왜곡·세뇌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명장면을 꼽으라면 두 장면을 뽑을 수 있다. 하나는 주인공이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거대하고 장엄한 카리부들의 물결 속을 헤엄치는 장면이다. 정말 늑대가 병들고 허약한 카리부를 사냥하는지 확인하겠다는 주인공의 의지도 의지지만, 그보다도 그 장엄한 카리부들의 물결 속에서 넋이 빠진 것 마냥, 마치 문명이 태어나기 이전에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였으며 어떻게 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대자연의 품속을 평화롭게 유영하던 태곳적 인류 조상들의 DNA가 주인공에게 스며든 것만 같은 환영을 보았다고나 할까.
또 하나의 장면은 주인공이 멋진 한방(?)을 날리는 장면이다. 늑대사냥을 하며 오직 돈을 위해 사냥이라는 살육게임을 즐기는 변심한(?) 비행사(주인공을 북극에 내려준)가 목적을 달성하고 떠나기 전, 비행기를 몰고 주인공을 위협하려 달려든다. 이때 주인공은 그놈(?)을 향해 총 한방 날린다. 그렇게 비행기는 거대한 산맥을 휘감아 넘으며 사라진다. 아마도,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고철덩어리와 함께 대자연의 품으로, 영원히.
【책이야기;《울지 않는 늑대》】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 책을 읽은 덕분인지 영상미(?)를 만끽하며 읽어나갔다. 조금 영화와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로 같은 모습이었다. 저자인 팔리 모왓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뼈가 있는 문장들에 매료됐다.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분이었으며, 같은 내용이지만 영화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보고였다고 할까.
『눈에 띄지 않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기분은 편치가 않았다. 그후로도 2주 동안 늑대 한두 마리는 텐트 앞길을 거의 매일 밤 이용했다. 그런데도 기억할 만한 딱 한 번을 빼놓고는 나에 대해서 털끝 만한 관심도 보이지를 않았다.
이 무렵에 나는 내 이웃인 늑대들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다. 드러난 사실 한 가지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유목형 떠돌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신 그들은 정착형 동물로서 아주 분명한 경계가 있는 영구 사유지의 주인이었다.(p83)』
위와 같이, 늑대의 습성에 대해서 이처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늑대에 대한 이미지와는 달리 일정한 경계(영역)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만행(?)을 일삼을 것이라는 우리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인간이 땅에 대한 맹목적인 지배권과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과 달리 늑대는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면서 그 이외의 영역을 존중한다. 자연이라는 품안에서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共存이라는 순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아가고, 살아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우리는 어떠한가. 오직 ‘내 것’에 대한 탐닉으로 타인들의 삶을 짓밟고 경쟁을 조장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라는 탈을 쓴 덕분에 그나마 체면상의 이유로 에둘러 ‘파괴본능’을 일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간이하·동물이하의 추악함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현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더 이상 ‘정착형’의 모습이 아닌지도 모른다. 자본은 이미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었으며, 우리의 의식은 한술 더 떠서 그 경계너머로 침략·정복의식으로 확장된 건지도 모른다. 늘 일상에, 지역에, 우리나라에 몸은 정착한 채로 살아가지만 이미 의식은 ‘유목형 떠돌이’가 되어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다. 파괴본능으로 똘똘 뭉쳐진 떠돌이로 말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라는 혼인 서약 구절이 인간들에게는 한낱 조롱거리일 뿐이지만, 늑대에게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이다. 늑대는 엄격한 일부일처주의자이다. 비록 내가 이것을 반드시 탄복할 만한 특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사실은 우리가 늑대에게 부여한 무절제한 난잡함이라는 평판이 꽤 위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p94)』
고착화된 편견이 벗겨지고 그 속에서 위선적이라는 자못 ‘불편한 진실’과 대면한다. 인간 공통의 잣대(그런 게 있다면 혹은 가능하다면)로 문명화된 모든 것들을 평하고 규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지만, 자연에 대한 몰이해와 이런 잣대가 빗어낸 그릇된 어떤 틀을 인간들이 학습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에 대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순리에 대한 몰이해를 다분히 경외 혹은 경탄으로 국한한 채로 살고 있는 건 아닐는지.
『늑대는 절대 재미로 죽이지 않는다. 아마 늑대와 사람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늑대에게는 큰 사냥감 동물을 하나 잡아서 죽이는 일이 힘든 작업이다. 성공하기 위해 밤새 사냥을 하며 일대를 50~60마일씩이나 답파하기도 한다. 늑대에게 이 일은 사업이나 직업 같아서 일단 자신과 가족을 위해 충분한 고기를 얻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쉬고, 사귀고, 노는 데 바치기를 더 좋아한다.(p194~p195)』
인간이 재미로 하는 것들, 즐기는 것들. 대표적인 게 사냥이 아닐까. 덫을 놓고 총을 준비하며 누구는 재미삼아, 누구는 돈벌이삼아 그런 살육게임을 즐긴다. 만약, 인간이 그만한 돈벌이가 되고 그만한 재미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쉽게 대답할지도 모르지만 한 번 상상해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가장 강력한 공공의 적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모든 두려움의 근간은 자연이나 동물들에서 인간으로 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설마’라는 불완전하고 불안정적인 믿음을 희망삼아 자신의 의식세계를 허물어뜨리지 않게 버텨내고 참아내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들 대부분의 몸통에서 남은 것들을 살펴보니 질병이나 심각한 쇠약의 증거가 있더라는 사실이다. 뼈의 기형, 특히 두개골의 괴사(壞死: Necrosis, 생체 세포·조직의 일부가 죽거나 죽어가는 상태 -옮긴이)에 의한 기형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두개골에 달린 이빨이 닳은 정도로 봐서, 순록들이 늙고 병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갓 잡은 몸통을 바로 조사할 수 있는 현장은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은 늑대가 순록을 잡자마자 다가간 경우도 있었다. 변명의 여지없이 뻔뻔스럽게 늑대들을 쉬이 하고 쫓아버리고서 말이다.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겁을 적당히 먹고 물러났다. 이들 순록 중 몇몇은 안팎으로 기생충이 심하게 들끓어서 언제 죽을 줄 모르고 걸어다니는 불쌍한 순회동물원용 짐승 같았다.(p195~p196)』
팔리 모왓이 전하는 이러한 흥미로운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까. 늑대가 나약하고 병든 카리부를 사냥감으로 택하여 생존해나가며, 그것으로 인해 순록은 건강한 유전자를 유지·발전시키며 생명을 이어가고 진화한다는 보고를 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소설과 에세이의 애매한 경계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 책의 사실성에 집착하기보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진실성’만큼은 한 번쯤 더듬어 봐야하지 않나 싶다. 만약 소설로서 판가름이 난다면 우리는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하는가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다소 불편한 진실로 판가름이 난다면 우리는 비로소 드러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야하지 않을까. 피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염두에 두고 말이다.
『동쪽 어디선가 늑대가 울었다. 가볍게, 궁금하다는 듯이.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전에 많이 들어본 소리였기 때문이다. 조지였다. 없어진 가족의 대답을 듣기 위해 황야에 울려 퍼뜨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소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조화롭지 못한 역할을 선택하기 전, 한때는 우리의 것이었던 세계. 내가 얼핏 알아보고 거의 들어가기까지 했지만, 결국 내 스스로가 외면하고 만 세계에 대한 노래였다.(p233~p234)』
기나긴 여정의 끝은 씁쓸했다. 늑대 울음은 더 이상 소름끼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 저 편에서 몰려온 침략자들에게 가족을 빼앗긴 채,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천진하게 가족을 찾는, 평화롭기까지 한 울음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버려버린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각성의 울음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간절한 울음임과 동시에 일상적인 울음이다. 조화로움을 싣고 퍼지는 화해를 청하는 전령임과 동시에 곧 바스락 소멸될지도 모르는 처연한 울음이다.
누구에게는 마음을 열게 하는 울음이며, 누구에게는 더 굳건하게 마음을 닫게 만들어버리는 울음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우리의 자세에 달렸고, 언제까지 기다려줄 것인지는 우리 선택의 몫일 것이다. 부디 사라져버려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팔리 모왓이 이 책에서 그려낸 늑대는 우리가 그동안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쌓아온 야수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다. 한때 인간과 공존했던 늑대는 인간 문명의 탐욕에 희생된 대표적인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늑대에 대한 ‘신화’는 인간 자신의 죄와 비겁의 투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우리가 늑대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과 몰이해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정작 피에 굶주린 야수는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라는 것이다.(옮긴이의 글 中)』
인간과 늑대의 이미지가 뒤바뀌어 버린 세상. 그것이 사실이건 허구이건 간에 문명이라는 미명아래 가득히 들어차있는 탐욕스런 인간들, 제 죄 값을 타인들 혹은 약자들에게 전가하는 비열한 인간들, 또 겁은 많아서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편견을 학습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약한 인간들, 이해라는 과정을 배제한 채 무조건 빠른 해답·결과를 바라 몰이해를 가장 효율적인 투입요소로 생각하는 비효율적인 인간들. 인간의 각성은 언제쯤 일어나게 될까.
덧붙이건대, 책의 재질이 어떤 면에서는 조금 아쉽고 실망스럽다. 또 어떤 면에서는 가볍고 나름 분위기도 있다. 페이퍼백 재질이어서 쉽게 닳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양장본으로 깔끔한 책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