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페포포 레인보우
심승현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종종 자판기 커피 한 잔이 그립다. 특히나 밤이 깊어질수록 더 그런 건 왜일까. 슬리퍼를 끌며 한밤중에 커피 한 잔 뽑으러 느릿느릿 걸어간다. 깊은 밤, 막창에 소주 한 잔 걸치는 무리들에게만 이 밤이 허락된 듯 한 기분이다. 커피 한 잔을 뽑아 다시금 아파트 입구 계단 앞으로 냉큼 걷는다. 쪼글시고 앉아 담배 한 대 빼문다. 그리곤 커피 한 모금 마셔본다. 어느새 미적지근히 식은 커피만. 자판기에서 계단까지 오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사이로 뭔가 흘러 빠져나간 기분이다. 아아, 가을이, 가을도 이젠······. 가을은 야속하게도 담배 한 대 빼무는 틈을 타 내뺐구나, 싶다. 


*

『파페포포 레인보우』가 내게 왔다.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가 펼치면 손가락 사이로 숭숭 죄다 빠져나가버리듯, 여태껏 나 살아오면서 그렇게 숭숭 빠져나가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모아 일곱 빛깔 상자(꿈, 사랑, 눈물, 평화, 하모니, 열정, 그대라는 이름의 무지개)에 각각 담아 나에게 전해주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빠져나간 기억, 나 모르는 사이 도망간 기억, 그저 시간에 묻히고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기억 등 다시는 오롯이 마주할 수 없지만 아직도 티끌처럼 내 몸 구석구석 어딘가에 남아 있을 기억들을 바람이 죄다 실어가기 전에 여밀 수 있게끔······. 


어머니의 헤진 머리카락,
굳은살이 박인 아버지의 손마디,
마냥 행복해하는 아기의 미소,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잊을 수 없는 너의 그 눈빛. 

 

그냥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고래와 하마」_ p25∥ 


어쩌면 그저 저대로 아름답다는 것은 그리움에 가까운 심정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세월이 보일 듯 말 듯, 알 듯 모를 듯 다듬고 다듬은 흔적들은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저대로는 변했음을 안다. 그걸 알기에 그리운 법이고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늘 거기에 있다, 는 이들의 말에 가슴이 저린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묵묵하게 저대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에 아름답다, 불리는 게 아닐까 싶다. 시간도, 세월도 다듬어 비껴내지 못한 본질이라나, 그런 마음이려나. 


새하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편지는 ‘수취인 불명’이란 소인이 찍혀 되돌아왔다.
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자작나무 껍질에 편지를 쓰면
영원토록 변치 않는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받는 이 없는 자작나무 편지가 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은들 무엇 하나.∥「자작나무」_ p82~83∥ 

 

우리가 누군가에게 당장이라도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짤막한 문자메시지이건,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화통화이건, 천 년은 고사하고 일백 일도 겨우 피어 견디다 떨어지는 백일홍에 남몰래 살짝 사랑을 고백해보는 일이건 간에 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만약, 스스로가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무이유 없이 문자메시지 한 통,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을 전할 수 있는, 전하고픈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문득,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어렴풋하지만, 학교 구석진 곳에 숨어사는 새하얀 한 그루 자작나무 수피에 볼펜으로 보일 듯 말 듯 살짝 적어놓은 내 바람은 지워지지 않고 잘 있으려나, 궁금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바람이 오고갈 만큼의 거리가 필요하다.∥「원형」_ p115∥ 


나는 종종 바람처럼 살고 싶다, 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런 기별 없이 왔다가 또 아무런 기약 없이 떠도는 삶을 말이다. 이는 불확실하고 막연하며 미련한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언젠가는 바람처럼 두서없이 살포시 가닿을 거라는 작은 기대감으로 살고 싶다. 나는 그런 바람이 되어 내 흔적이 지난 자리 곳곳에 이런 속삭임을 남겨두고 싶다. 바람이 오가기를 바란다면 그리워하라고, 바람은 그리움을, 그 시간을 못견뎌하는 이에게는 불지 않는 법이라고····  


**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미적지근하게 식혀버리고 어느새 내빼버린 바람을, 금방이라도 그렇게 가버릴 것만 같은 가을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부디 바람이 실수 없이 들을 수 있도록 벌써부터 네가 그립다고, 그리움의 시간을 못견뎌하며 안달하지 않을 거라고, 조곤조곤 속삭여 이 까만 밤 속에 몰래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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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자만두 2009-12-2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엄마가 커피 마시는 거 한번만 더 눈에 띄면 쫓아낸데요...ㅠ.ㅠ 숨어서 마셔요..밖에 나가서..

ragpickEr 2009-12-28 00:31   좋아요 0 | URL
우아한 냉혹님^^*
어머님께서 무서우신가봐요..^^*;
어째요..숨어서 마셔서..^^* 그래도 스릴(?)이 더해져서 더 맛있겠어요~^^* 후훗.. 추운데 밖에서? ^^* 따숩게 잘 숨어 마시어요! ^^*
(그래도 적당히 마시어요! ^^* 과하면 탈납니다~@_@;;ㅋ)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