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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죽음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다.
무엇이 어찌될지 모르고, 어디에 캠프를 쳐야 할지,
거기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죽어 가는 과정에 관해 썼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죽어 가는 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곧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고 언제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인생을 배우는 일이다.
버텨 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이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계속될지 모른 채로 살아가는 일이다.
나는 원래의 내 방식과는 다르게,
그 익숙하지 못한 낯선 삶의 조류에 대항해 헤엄쳐 나가기보다는 그저 떠내려가듯 살았다.
..
∥..본문 中..∥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난 후 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힌 이유 때문도, 절망의 한 켠에 그대로 방치된 것 같은 이유 때문도 아닌데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가 이렇게 어렵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그저 멍한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 게 조금은 솔직하고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담긴 어떤 절망과 고뇌, 아픔과 슬픔이 나를 옥죄는 덫으로 작용한 게 아니라 이 모든 감정선을 훌쩍 뛰어 넘어 마치 넋이 나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한다면, 나만 이해하는 표현에 불과한 것일까.
『어머니를 돌보며』는 파킨슨 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본 7년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절절한 모녀간의 사랑과 보살핌이라는 내용으로 가득한 책이 아닐까, 하고 읽기 전에 생각했었다. 만약 내 예상이 적중했다면,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가 꽤나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그 이상의 것이라기보다 7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이라는 존재, 이성과 감성, 육체와 의식, 시 · 공간에 대한 성찰이 담담하고 빼곡하게 담겨 있다.
밤낮없이 환시에 시달리고,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는 능력을 상실해가는 저자의 어머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존재마저 인식하지 못하고 표현능력까지 상실해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저자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누구나가 말하듯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며, 어느 누가 ‘아름다운 희생’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자식된 당연한 도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당사자의 문제이다. 그리고 주변 이웃들 친지들이 너무나도 쉽게 내뱉는 말들조차도 당사자에겐 크나큰 고통의 한 조각일 뿐이다. 하기 좋은 말, 응당 그렇게 해왔던 말이 당사자에겐 어떤 현실적인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어느 날 불현듯 불어 닥친 이 고난의 시간을 담담하고 현명하게, 때론 지혜롭게 해결해 나간다. 파킨슨 병에 관한 의학 자료를 수집하고, 시간에 맞춰 약을 챙긴다. 하루에도 몇 군데씩 병원을 예약하고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은 부지런하게 찾아 검진을 받는다. 결국 심장병 수술을 받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노인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보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손쉽게 내린 결정만은 아니었다. 한없이 밀려드는 자괴감과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크나큰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결코 자신의 선택을 최선이었다고, 항변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선택은 삶에서 불가피한 것이며 오직 선택 그 자체의 중요성만이 아니라 그 선택으로 인해 앞으로 어떤 미래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노인 요양원으로 부모를 보내고는 일 년에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리 매일 같이 어머니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최대한 편리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힘쓴다. 어머니의 성격을 고려해 부분 부분이나마 생활 패턴을 조율하고 건의하는 모습은 우리가 ‘희생’이라는 단어나 ‘사랑’ 혹은 ‘헌신’이라는 단어로 쉽게 치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저자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 아주 인간적인 모습 그대로를 스스럼없이 써내려간다. 화가 날 때도 있었으며 어머니를 원망할 때도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저 거짓 없이 모든 속내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내보이면서 좀 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어머니나 아버지, 자신, 남편이 한 인간으로써 겪는 고통에 대해, 한 인간으로써 감내해야하는 존재의식과 존재이유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해나간다. 어쩌면 꾸밈이 없다는 것으로부터, 가장 솔직한 인간의 속내로부터 이러한 성찰은 가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통을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니까, 자신된 도리로써 당연한 것이니까, 헌신이나 희생이니까 하는 자기부정이 아니라 ‘인정’을 통해서였기에 고난의 시간이 성찰의 시간으로 빛을 발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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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저자와 어머니를 통해 안타까운 현실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노년의 삶이란 병들고 쇠약하기 마련이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노년의 삶은 무수히 많은 병원을 전전하고 갖가지 약과 처방으로 점철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아프고 안타깝게 다가왔다. 하루에도 몇 군데씩 혹은 몇 십 군데씩 병원을 예약하고 진료를 받으며 거기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하고 의료혜택을 염두에 두어야하는 노년의 삶이란 얼마나 불행한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서도 평온하지 못하고 더욱더 치열하게만 느껴지는 노년의 삶을 보면서 나는 소름이 돋을 만큼 치가 떨렸다.
죽음이란 과연 두려운 것에 불과한 것일까. 두렵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떤 ‘축제’의 한 형태처럼 특별한 무엇일까. 특별하지 않다, 라면 과연 죽음이란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일까.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죽음은 삶 속에 있으며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라고 쉽게 말하고 생각해온 나를 질책하게 된 것은 저자가 보여준 끝없는 자기갈등과 고통 속에서 어렵사리 길어 올린 삶과 죽음, 인간의 존재 등에 대한 성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스스로 나름의 정의를 내리는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하고 힘든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나의 손쉬움과 가벼움이 어리석게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