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산책 - 바람과 얼음의 대륙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고경남 지음 / 북센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책좀읽자님이 이 책을 구하고 싶어 하셔서 검색하다가 운 좋게 판매하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려드리고는 정작 나는 여태껏 잊고 있었다니. 도서관 서가산책 도중에 생각나 빌려와 읽었다. 북로그를 하면서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책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간보기’를 통해 직접 좋은 책을 가려내 읽을 수 있는 능력도 참 중요한 것임을 안다. 하지만 그만한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내 손맛보다 늘 이웃님들의 손맛을 얍삽하게 몰래 탐하기 일쑤다. 어쩌겠는가! 이미 인이 배길데로 배겨 끊을 수 없는 이 맛을!  


『남극산책』의 저자는 짜증(?)날 정도로 밉상이다. 서울대 의대를 나왔고, 학교를 다니면서 연극반에 들어가 연출을 담당했단다. 그리고 서울대 병원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여러 음악잡지에 칼럼을 기고했으며 외과와 내과 그리고 소아과까지 두루 섭렵한 엘리트더라는. 또 있다. 사이버 신춘문예 디카 에세이 부문 당선, 한미수필문학상 대상까지. 이런 다재다능한 저자가 남극 세종기지 의료담당으로 1년을 보낸 이야기가 바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이 첫 느낌이랄까. 첫 장의 구성과 느낌은 마치『블루데이북』을 연상케 한다. 귀여운 펭귄이 뒤뚱거리기도 하고 고민에 잠긴 듯 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내용이나 의미는 생각했던 것보다 깊다. 글도 참 맛깔나고 그 의미들 역시 곱씹을수록 맛이 우리난다고 할까.  


자명종이 없는 잠, 휴대전화의 알람에 방해받지 않는 잠. 인간은 시간을 구획 지으면서 오히려 시간에 구속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p74)  


얼마 전에 읽은 성전 스님의『삼천 년의 생을 지나 당신과 내가 만났습니다』에도 위와 꼭 닮은 구절이 있다. 굳이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혹은 타인이 규정한 것들로부터 구속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는 생각을 예전부터 막연하게 해왔던 터라 공감이 가는 구절이다. 누구는 참 성실해서 지각 한 번 안한다, 는 말에 구속당하고 또 누구는 은근한 우월감에 도취되어 도시적 삶 속 편리성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규제당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어쩌면 거대한 흐름인 시간을 진정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욕심과 효율이라는 착각 때문에 토막토막 내려는지도 모를 일이다.  


희망은 인간을 위한 단어일 뿐이다. 자연은 인간의 희망을 평가하지 않으므로, 예측불가의 자연 앞에서 인간의 희망은 성공의 변수가 되지 못한다.(p85)  


언제부턴가 자연을 바라보는 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할까. 아마도 호시노 미치오의『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와 팔리 모왓의 원작과 영화인『울지 않는 늑대』를 접하고 난 후가 아닌가 싶다. 이전까지 자연은 늘 안식처요, 아름다운 낙원이요, 엄마의 품과 같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은 악의 없는 잔혹함과 혹독한 순리 역시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생명보식도 그렇고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한낱 나약한 자연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 역시 그렇다. 대자연의 아름답고 신비로우면서도 악의 없이 잔혹한 순리, 때론 노골적인 썩소 같기도 한 자연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인간이라고 해서 사사로이 항상 모든 걸 너그럽게 보호하고 예외를 허용하지는 않음을 알게 된 것 같다.  


단순히 글이 좋고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에 그치는 책은 아닌 듯하다. 멋진 풍경과 남극의 동식물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동식물의 종류와 특성까지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어서 다양한 맛이 느껴진다. 또 남극의 경이로움을 통해 저자 자신을 비롯한 우리 삶을 그 속에서 투영해나간다. 자기반성과 성찰, 생태학적인 면모, 인문학적인 사유, 동식물학 등등이 한데 어우러져 흥미와 감동 그 이상을 담아 전하고 있다.

덧붙여, 펭귄이나 바다표범, 새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떻게 각양각색의 표정들을 담아냈는지 참 놀랍고 신기했다. 펭귄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새의 표정까지 담아낸 사진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경이로웠다. 비록 사진이지만 그 속의 주인공들은 아주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다. 넘치는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주워 담기¨¨‡‡‡‡‡‡‡‡‡‡‡‡‡‡‡‡‡‡‡‡‡‡‡‡‡‡‡‡‡‡ 

 

해가 스무 시간 도안이나 떠 있는 남극의 여름은 하루가 곧 사흘이다. 동이 트는 새벽 2시에서 아침식사할 때까지 하루, 그리고 저녁식사 때까지 하루, 마지막으로 해가 질 때까지 또 하루. 그래서 여름에는 3일 치의 일과가 필요하다. ······ 뭔가를 결심했다가 작심삼일로 끝나더라도, 실상은 단 하루가 지날 분이다. 남극의 여름은 세 배의 삶을 살고, 세 배로 나이 들어가는 계절이다.(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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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바다로 벚꽃놀이를 나간다.
바다가 녹으면 어디선가 수많은 유빙들이 몰려오고,
남극의 봄바다는 차갑게 빛나는 얼음 벚꽃으로 채워진다.(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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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은 초라하지만 본능은 위대하다.(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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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바위처럼 단단한 관계라도 조그마한 균열이 생기면 그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간다. 그러다가 혹한의 시련이 닥치면 바위에 침투한 물이 얼면서 바위를 쪼개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쪼개져 버린다.(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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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걷고 있으면 풍화된 먼지들이 몰려온다. 남극에서 살았던 동식물의 풍화된 먼지들. 오래된 고래뼈, 거친 자갈, 푸른 이끼의 풍화된 먼지가 바람을 타고 호흡기 속으로 들어온다. 나도 글 바람에 풍화되어 미세하게 벗겨진 내 체세포는 남극의 먼지들과 뒤섞인다. 나는 그렇게 남극을 호흡하고, 남극은 그렇게 나를 호흡한다.(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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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푸르다는 것은 푸른빛을 거부한다는 것.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빛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다.(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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