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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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관심이 가고 손이 갈듯 말듯 한 책이 있는 것 같다. 덥석 짚어들었다가도 왠지 오늘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애매모호한 그런 기분이랄까. 진중권의『레퀴엠』은 그렇게 나와 어렵사리(?) 만난 책이다. 매번 도서관에서 만나면서도 미루고 미루다가 이웃님이신 YJ님의 리뷰를 읽고서 겨우 만나게 되었다. 결국 사들이기까지 한 책이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해,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 책의 집필 당시에 벌어졌던 이라크 전쟁을 중심으로 서술해 나가고 있다. 다분히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식할 것인가의 물음을 넘어서, 저자가 말하는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의 현상과 의미를 살펴본다.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고찰함으로써 이것이 근대를 지나며 이룩하게 되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어떤 특징을 갖게 되고 어떠한 형태의 전쟁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깊이 있게 살피고 있다.  


솔직히 나는 사회, 정치, 예술, 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아주 무지하다. 책을 찬찬히 읽어나가면서도 이게 무슨 말인가, 도대체 이 책의 정체성(?)은 뭘까 등의 의문이 들었을 정도로 아는 게 없다. 하지만 나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일단 호기심을 들 수 있겠다. 그보다 더 몰입하게 만든 요소는 진중권 특유의 서술(어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속된 말로 깔 때 제대로 까주는 센스(?), 조소를 흘리며 조롱하는 듯 한 어투(?), 얄미우리만큼 치고 빠지는 반복적인 술래잡기 같은 강약조절(?) 등이 흡입력 있게 나를 빨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을 들자면 ‘충격과 공포’에 관한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이 충격과 공포라는 개념을 통해 현재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의 특성과 인간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미적탐닉에 관한 저질성과 변태성을 깨닫게 한다. 더 나아가 그 속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쟁을 지켜보며 치졸한 욕망의 부스러기를 탐하는 다수의 ‘방관자’들이 있다는 것까지 지적한다.  


원래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 생산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로 사람들은 강이 흐를 운하를 파는 대신 인간의 무리를 참호 속으로 흐르게 하고, 비행기로 씨를 뿌리는 대신 도시에 소이탄을 뿌려 댄다. 인간을 위해 탄생한 기술이 이제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 ······ 기술을 생산이 아니라 파괴에 사용하는 도착증. 이것이 파시스트 문명이다. 그리고 자기가 만들어낸 것을 스스로 파괴하며 미의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 이것이 파시스트들의 감성이다.(p53~54)  


어쩌면 ‘전쟁미학’에 관한 우리들의 몰이해, 무관심, 지각능력의 상실은 곧 기술의 발달로 인한 기계의 반란에 종속당한 인간의 광적이고 변태적인 미적 탐닉에 기인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인간의 한계성(관념적인 것이 아닌 물질적인)을 극복하기 위해 그릇된 욕망과 쾌락으로 스스로에게 씌운 올가미, 그런 올가미가 변태적인 탐닉과 파괴적인 도착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게 아닐까.  


이라크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는 끔찍한 일상이나, 우리에게 그것은 그저 미의 체험 대상일 뿐이다. 이라크 사람들이 찢어진 몸과 상처받은 영혼으로 고통받는 장면을, 멀리 떨어진 우리는 기껏 한 편의 오락처럼 즐기고 있다. 콜로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리저리 쫓기다 사자 밥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맘껏 즐거워했던 로마인들의 야만은 동시에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진화를 했다 하나 야수의 수준에서 그리 멀리 나오지는 못한 듯싶다. 오늘날 우리는 발달한 기술의 힘으로 그 아기자기한 놀이를 대규모 스펙터클로 만들고, 발달한 미디어의 힘을 빌려 그것을 콜로세움에 모인 이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p63)  


인간의식의 잔혹성이란 이처럼 ‘미’라는 예술적 개념을 빌어 정당화, 합리화, 명분화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잔혹성은 욕망으로부터 피어나 현실공간을 배제함으로써 기술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상상 속 현실을 현실화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로인해 우리는 대다수의 ‘방관자’들처럼 현실적 무감각에 도달하게 되며, 오락을 즐기듯이 ‘충격과 공포’를 일상적으로 즐기는 꼴이 된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쾌락이란 결국 잔혹성을 바탕으로 한 파괴적 미학이라는 이름하에 죄의식 없이 오로지 탐닉의 대상으로 현실세계를 상상 속 세계로 착각한 채 살아가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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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우위(패배)와 정치적 우위(패배)에 대한 엉뚱한 생각..∥  


이 이야기는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상대적인 약소국을 침략·점령한다고 해서 승리(?)한다는 게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그 속에서 정치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야만 승리라 할 수 있다는 것. 가령,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우위와 정치적 우위라는 이 두 포지션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군사적인 열세와 경제적인 열세로 인해 간섭이나 침략을 허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치적으로까지 패배한다면 속국으로의 굴레에서 헤어나기 힘들다는 말이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하자면, 미시마 유키오의 사무라이 존재 미학에 대한 확신이 ‘시대적 착오’에 부딪혀 좌절했다는 부분을 보면서 어쩌면 그때는 현재보다는 조금이나마 살만 한 시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요즘의 권력은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것에 겁을 먹지 않는 듯하다. 다시 말해, 하고 싶은 대로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들의 뜻을 현실화 해나간다. 아마도 자본의 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애초에 시대적 착오를 겪는다할지라도 자본의 힘으로 시대의 주류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했으리라. 물론 그 성공이 요즘 균열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아 아주 조금은 희망적이지만 말이다.  


덧붙이자면, 자본과 더불어 정치적인 우위를 선점했다는 것도 주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정부에 끌려 다니는 세력(?)들을 보면, 정치적 우위를 선점하는데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정치적인 우위가 정치적인 승리, 정의의 승리는 아니겠지만, 군사 혹의 무력이라는 힘의 논리로 게임이 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영향력을 기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힘으로 밀어붙이는 억압·구속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적어도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으려면 아마도 정치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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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책을 읽고서 ‘싸이코패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됐다. 우리들의 무표정 속에 담긴 한줄기 선명한 증상은 어쩌면 싸이코패스를 정의하는 그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싶은 생각에서다. 단지 일반적 의미인 소수의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는 불명예가 아닌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와 찬성, 용인에 기인한 ‘합법적’인 불명예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사회구성원의 집단적인 병폐가 싸이코패스라 할 만하지 않나 싶다.  


‡‡‡‡‡‡‡‡‡‡‡‡‡‡‡‡‡‡‡‡‡‡‡‡‡‡‡‡‡‡¨¨주워 담기¨¨‡‡‡‡‡‡‡‡‡‡‡‡‡‡‡‡‡‡‡‡‡‡‡‡‡‡‡‡‡‡

‘진정한 인간은 탈영병이다.’(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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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잔혹함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나, 그 한도를 넘어서는 압도한 잔혹함은 인간을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만든다.(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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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심판하겠다는 것인가. 남의 땅을 침공한 것이 누구인가. 남의 물건을 약탈한 것이 누구인가. 무고한 이들을 학살한 것이 누구인가. 수많은 아이들을 고통 속에 태어나 죽게 한 것이 누구인가. 대량 살상무기를 살포한 것은 누구인가?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외려 심판을 하겠노라고 나선다. 재림 예수 부시는 적그리스도다. 야훼는 질투하는 신이며, 진노하는 신이며, 복수하는 신이기에, 자신을 참칭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진노한 원숭이들의 발광은 끝났고, 이제 그들은 언젠가 다가올 진짜 ‘진노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p66~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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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숨을 던져야 비로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증오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미움일까?(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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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위력은 인간의 물리적 존재, 즉 신체를 파괴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내면의 도덕성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고로 도덕의 주체로서 인간은 자연보다 위대하다. 기술의 발전 수준이 높지 않았던 시절, 칸트는 이렇게 자연의 적대적인 힘을 ‘심리적으로’ 극복하려 했다.(p85)  


==>미국의 광폭한 기술에 대항해 이라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이렇듯 도덕의 주체로서의 인간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종교에 힘을 빌어서 애국을 강요하듯. 결국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되는 주체는 죄 없는 선량한 국민이라는 점, 그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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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함의 미학과 윤리는 정치적으로 겁탈당하여 전쟁의 원리가 되었다. 침략자와 독재자는 인간의 척도를 넘어선 이 두 개의 숭고함으로 서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려 했다. 하지만 이 숭고한 놀이의 대가를 몸으로 치러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은 결코 숭고하지 않은 민간인들이었다. 침략자의 파괴력을 방어할 고도의 기술도, 순교하라는 독재자의 요구에 부응할 광적인 신앙심도 없는 사람들. 그저 평균 수준의 합리성과 평균 정도의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 그렇게 평범한 남자들,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 그리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들······.(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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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어린 양. 그리스도는 목숨 하나로 인류 전체의 죄를 대신 씻어주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예수보다 운이 나쁜 편이다. 2천 개의 목숨을 합하여 기껏 한 사람의 죄를 씻어주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사흘이 넘도록 아직 부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담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제사장 부시는 시퍼런 칼로 제단 위에서 양들의 멱을 딴다. 몇 마리의 목을 땄을까? 이 귀찮은 질문에 사제들은 대답한다. “희생양의 수를 집계할 계획이 없다.” 양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이 광경에 경악하는 우리에게 파월 사제가 태연히 말한다. 후세인의 죄를 씻기에 저 정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양들의 침묵은 기가 막혀서일까?(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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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는 러시아 인민의 어깨에서 공산주의의 멍에를 벗겨주러 왔다는 히틀러의 군대에 포위됐고, 바그다드는 사담에게 억눌린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주러 왔다는 부시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침공하는 부시와 침공당하는 후세인, 어느 편이 옳은가? 침략하는 히틀러와 침략당하는 스탈린, 정의는 어느 편에 있을까? 침략당한 독재자와 침략하는 제국주의자,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이라크 민중의 해방자는 누구일까?(p140~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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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막을 수 있다. 문제는 평화주의 역량을 강화하여, 그것으로 국가가 저지르려는 전쟁에 대한 시민사회의 내성을 기르는 것뿐이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그렇게 전쟁이 하고 싶은가? 그럼 제발 ‘정치’를 하라. 내가 다니던 베를린 자유대학의 화장실 벽에 누군가 이렇게 써놓았다. “정치는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전쟁의 연장이다.”(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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