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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여태 읽었던 책들 중 몇몇 책에서『나무를 심은 사람』을 언급한 걸로 기억한다. 정확하게 어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지를 죄다 기억할 수 없지만, 최근에 읽은 이명원의『말과 사람』에도 이 책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종종 ‘책 속에 언급된 다른 책을 통해 어떤 메시지, 신호가 쏘아져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혹은 상상, 어떤 예감을 한다. 그래서 웬만큼 제목이 눈에 익고 암암리 뇌리에 각인된 이 책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살육전쟁.. 그 속에서 주인공은 초연하게 무엇이 올바른 가치인가를 몸소 실천한다. 그것은 바로 나무를 심는 것, 건강한 도토리를 골라 심는 것. 올바른 가치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으며 살아가는 소박함.’ 이 소박함이란 당연한 것, 그저 단출한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숭고한 그 ‘무엇’이 있다. 진중권의『레퀴엠』에서 말하는 미학이 내포하고 있는 그런 숭고함이랄까.
‘충격과 공포’의 미학이 만연한 살육전쟁 통에 묵묵히 나무를 심는 주인공의 행위는 다분히 자연의 이치를 따랐기에 드러나는 미학적 가치, 즉 그런 숭고함을 넘어선다. 그것은 현 시대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를 대입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전 인류적·지구적 가치를 위한 행위인 것이다. 단 한사람의 이 행위로 인해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현대미학이 전하는 충격과 공포, 눈부신 기술 발전이 전하는 숭고함의 가치, 태곳적 자연으로부터 풍겨 내려오는 또 다른 충격과 공포를 넘어 인간만이 발현할 수 있는 그 숭고한 미적가치를 지닌다.
그는 3년 전부터 이 황무지에 홀로 나무를 심어왔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십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다. 그리고 십만 개의 씨에서 2만 그루의 싹이 나왔다. 그는 들쥐나 산토끼들이 나무를 갉아먹거나 신의 뜻에 따라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경우, 이 2만 그루 가운데 또 절반 가량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이 땅에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살아 남아 자라게 될 것이다.(p32~p33)
김용규의『숲에게 길을 묻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번식’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번식은 곧 생산과 재생산을 의미하며 자연을 가꿔나가는 것에 있어 단시간에 뚝딱! 하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것. 지금의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끈기가 필요한 것이지 과학과 기술력으로 뚝딱! 해결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류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진중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번식이란 시간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으며, 미련하리만치 끈기 있게 순응하는 그 과정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젊은 나이에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다른 고독한 사람들의 영혼에 섬세하게 다가갈 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젊은 나이 탓에 나 자신과 관계된 일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미래를 상상해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삼십 년 후면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일 하느님이 삼십 년 후까지 그를 살아 있게 해주신다면 그 동안에도 나무를 아주 많이 심을 것이기 때문에 이 1만 그루의 나무는 바다의 물 한 방울과 같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p34)
인식의 차이랄까. 어떠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 나가는 방식과 자세가 극명히 대조를 이룬다고 느꼈다. ‘뚝딱!’으로 만족하고 그것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윗세대들이 삶을 이해하는 방식과 차이를 보인다. 좁은 시각, 자신과 관계된 일들을 우선시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경향, 미래를 스스로 그리기보다 이미 정해진 미래상을 자신이 그린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 ‘빠른’것으로부터 느끼는 쾌감에 젖어 ‘느린’것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고방식 등등. 앞으로의 미래가 양적인 부분과 함께 질적으로도 성숙한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배워야한다. 윗세대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말이다.
1933년엔 숲을 보고 깜짝 놀란 산림감시원이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왔다. 그 관리는 ‘천연’ 숲이 자라는 것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니 집밖에서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이 노인에게 경고했다. 그 관리는 순진하게도 숲이 혼자 저절로 자라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p49)
어쩌면 우리는 이 ‘관리’와 다르지 않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일는지도 모른다. 또한 당시를 포함해 현재 우리가 자연에 대해 어떤 관점을, 어떻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런 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베르공 마을에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공동작업을 한 뚜렷한 흔적이 있었다. 희망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망가진 집들과 담장을 모두 허물어버리고 다섯 채의 집을 새로 지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의 수는 28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가운데는 네 쌍의 젊은 부부도 있었다. 산뜻하게 벽을 바른 새 집들이 채소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채소밭에는 양배추와, 장미, 파와 금어초, 셀러리, 아네모네 등 채소와 꽃들이 가지런히 자라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p62~p64)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가. 그런 도시를 만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자연이 아닌 조형물이 자라는 도시, 경계가 불분명한 어울림의 장이 아닌 상가가 자라는 도시, 살고 싶은 도시가 아닌 살아내야 하는 도시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선이 분명하고도 분명해서 요즘 말로 ‘완전!’ 단절이 가능한 그런 도시·터에서 살고 있으면서 정작 뜬구름 잡듯 행복을 말하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가련한가.
한 사람이 오직 육체적, 정신적 힘만으로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늙은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된다.(p68~p69)
‘진정 숭고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고 칸트가 말한 바 있다. 과학과 기술 역시 인간을 도구화하고 지배하고 있는 형국이긴 하지만, 인간만의 숭고하고 창조적인 인식과 사유가 없었더라면 과학과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원대한 힘을 지닌 인간, 숭고한 인간이 물질문명에 찬사와 존경을 표하고 숭배함으로써 타락의 길을 걷고 나약함을 인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연 역시 인간이 어떤 인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더불어 숭고한 빛을 발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지배의 대상으로의 인식을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인간은 절대 이 지구상에서 어느 것보다 숭고하지 않을 것을 안다. 인식은 행동과 행위의 바탕이 아닌가 싶다. 또한 인식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위치를 존경과 숭고함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고 나약한 도구적 인간으로 전락함을 초래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초조함 속의 욕속부달欲速不達이 아니라 인식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골몰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이 책을 통해『장터』에서 느꼈던 ‘회생불능의 유물’인 장터마저 되살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한 인간의 행위가 어떤 인식을 바탕으로 어떤 가치를 내세우느냐에 따라 이만큼 숭고할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일지라. 이렇듯 ‘희망의 전주곡’ 같은 책을 늦게나마 만나게 돼서 기쁘다. 또 시들어가고 병들어가는 인간, 자연, 도시, 그리고 이 지구를 되살리는 방법이 꼭 돈과 기술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한다. 진정 일말의 이기심조차 짜내어 여태 자연이 일군 ‘천연의 숲’이 주는 지혜를 답습함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으로 ‘시작’을 외칠 수 있지 않을까. 시작이라는 그 첫발은 이렇게 내딛어야 비로소 ‘성공’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