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책을 어떻게 보면 이렇게 깨끗하게 볼 수 있는 것일까. 햇귀님께 받아든 이 책은 마치 새 책 같다. 책이 워낙 깔끔하고 멋스럽게 태어난 것도 있겠지만, 한 사람의 책손으로서 책을 어떻게, 얼마나 소중하게 다뤄야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참 아끼는 책이랍니다.’라고 씌어있는 글귀에서 자신을 떠나 다른 책손에게서도 곱게 다뤄지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과 당부마음이 읽힌다. 이처럼『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는 ‘척추로 읽읍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한다.  


호시노 미치오. 그는 되도록 알래스카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쓴 흔적들이 역력하다. 가급적 ‘환상’과 ‘동경’의 대상인 알래스카가 아닌 우리와 꼭 같은 ‘일상’이 존재하는 알래스카를 보여주기 위한 그의 노력은 ‘참 잘생겼다!’는 인상을 남기고 감탄을 자아낸다. 누군가가 말한 ‘생명보식’을 생각하면 그의 마지막이 그리 ‘불행’한 것만도 아닌 듯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만나게 된 걸 고맙게 생각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함은 오래도록 그리움으로 남을 듯하다.  


자연은 가끔 이야기가 담긴 풍경을 보여준다. 아니, 우리를 둘러싼 풍경은 전부 어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인간이 그 퍼즐을 읽지 못할 뿐.(p48)  


사진가는 사진으로, 시인은 시로, 소설가는 소설로. 우리는 직접적으로 자연을 대면하면서도 그것과 대화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 증세가 어떠냐면 늘 한 다리 거쳐서, 걸러진, 다른 누군가의 눈과 마음으로 손쉽게 보려고 하고 만나려고 한다는 것. 늘 우리는 누군가의 손을 빌어 다 맞춰진 하나의 퍼즐을 싱겁게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에 반해, 호시노 미치오는 낱낱의 퍼즐이 갖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모습인지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풍경과 마주보기, 풍경과 대화하기, 그것마저도 귀찮게 느낀다면 과연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꼴이 되려나.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알코올중독 문제는 그 뿌리가 깊다. 이상할 정도로 높은 자살률, 폭력, 가정붕괴······. 많건 적건 그 모든 것에 알코올이 관계되어 있다.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문화 사이에서 흔들리며 정체성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그들에게, 알코올은 도저히 어찌하지 못하는 배출구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나로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약간 망설여진다. 자칫 알래스카 원주민 사회 전체를 어두운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과 어우러져 소소한 일상생활을 꾸려가며 사는 수많은 에스키모와 인디언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알래스카 원주민 소년이 15세에서 25세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열 명 중에 한 명이 자살을 시도할 위험이 있다는 것, 실제 자살률도 같은 연령대의 백인에 비해 10배나 많다는 것······. 이는 못 본 척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문제였다.(p89~p90)  


때론 문명이란 게 모질디 모질다는 인간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가 버릴 수도 있는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비록 내가 처한 상황이 ‘그네들’보다 편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을 뿐. 그네들이 일으킨 그네들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모른 척 이해해 볼 수도 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저지른 혹은 쓸데없을 만큼 오지랖 넓게 관여한 탓이리라. 이는 침략과 다를 바가 없고 파괴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암 덩어리와 같다. 세상 어느 누구도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이런 도박과 악취미를 즐길 권리는 없다.  


화폐경제가 침투하고, 전통의 샤머니즘이 추방되고, 학교에서는 새로 영어를 가르치고, 토착 언어를 말하면 비누로 입을 씻어야 하는 시절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동화정책이라고는 해도, 태곳적부터 그들의 삶을 엮어주고 서로를 맺어주었던 보이지 않는 끈은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문화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94) 

 

우리 눈엔 쉽사리 와 닿지도 상상할 수도 없는 그네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소위 ‘동화정책’이라는 것도 이렇게 끔찍한 모습인데, 과거 식민지시대의 모습은 얼마나 처참한 모습이었을까.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끈’을 모조리 자르고 잘라 그 씨를 말리려했던 그때를 경험한 건 아니지만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그네들과의 거리를 좁혀본다. 그네들이 겪는 고통은 얼마나 클까. 몇몇은 애먼 환상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네들에게 품은 이 연민은 괜한 오지랖일까. 
 

 

전쟁이 끝나자 셀리아는 유럽을 여행한다. 거기서 본 것은 집을 잃고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구걸하는 어린이들이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셀리아는 두 대륙의 차이에 아연실색한다. 많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미국은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고, 롱스커트 유행에 들떠 있는, 허영과 자만에 가득 찬 사회로 보였던 것이다.
마침내 셀리아에게 알래스카로 비행할 기회가 찾아온다. 알래스카에서 부시파일럿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한 남자가 본토에서 알래스카까지 누군가 소형비행기를 가져다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이 1947년 1월 1일. 블리자드 속에서 페어뱅크스에 착륙을 감행하는 비행으로 연결된 것이다.
알래스카라는 땅은 모험심 강한 셀리아를 금세 매혹했다. 
“어떤 행색이든, 돈이 있든 없든, 또 어디 태생이든 이 땅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고, 무엇을 하든 자유였어.”(p108~p111)   

 

여행이란 살아 있는 역사의 한 조각을 직접 만질 수 있는 뜻밖의 ‘행운’을 늘 잠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살아 있는 역사, 진행 중에 있는 역사를 만난다는 것은 글과 영상에 갇힌 죽은 것과는 분명 다른 것. 여행을 통해 비로소 신념은 더욱 두터워지고, 두려움은 얄팍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비로소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제 삶을 모조리 태워 버릴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느낀다는 것, 마주한다는 것, 함께 호흡한다는 것은 과거라는 시간에 갇힌 채로 누군가에 의해, 어떤 것에 의해 걸러진 ‘사실’로는 이루기 힘든 것일지라.  


‘진실’이란 늘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는 것이고, 그것과 마주하기 위해 한걸음 떼어낼 수 있는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여행이 늘 초행길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로부터 연마할 수 있는 테크닉이 통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멈춰 서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또한 아닌지도 모른다. 용기를 내어, 신념을 가지고 부지런히 쫓지 않는다면 언제나 우리는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떻건 간에, 무엇을 하건 간에 모든 건 자유라지만. 

 

물보라를 뿜어 올리며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 고래가 자연이라면, 그 고래에 작살을 던지는 에스키모 사람들의 생활도 역시 자연인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의 삶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마저 포괄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름답고 잔혹하고, 그리고 작은 것에서 큰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강하고 연약하다.(p244~p247)  


‘도서관은 우주와 인간과 책을 함께 품고 연결해주는 있는 거대한 자궁과 같다’는 글귀를 어느 책에선가 본 기억이 난다. 자연 또한 거대한 자궁이 아닐까 싶다. 진화와 생산만을 낳는 자궁이 아니라 재생산의 이치도 함께 낳는다. 영원불변한 것은 없으며 늘 그런 것만도 아닌 지혜를 낳는 게 자연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을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미약한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밀어내고 파괴할 만치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욕망일지라도 태연히 품어내는 지혜로운 존재가 바로 자연이 아닐까.  


호시노 미치오. 그는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면만 보려하지 않았다. 좋은 것만을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단지 그 속에 동화되어 대자연의 일부이면서 유일하고 전부인 알래스카를 보여준다. 한 인간으로서 강하고도 연약하며, 아름답고도 잔혹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연과의 괴리를 좁혀 코앞까지 들이민다. 그가 남긴 많은 사진들의 피사체는 대자연의 모습, 알래스카의 모습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호시노 미치오의 일상의 모습이고 삶인 것이다. 동시에 여태껏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우리의 또 하나인 일상이다.  


이제 그는 없지만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친구들은 남아 있다. 대자연과 알래스카가 그이자 친구이며, 셀리아 헌터와 밥 율, 알, 케니스 누콘 역시 그를 추억할 수 있는 내 친구로 남았다. 카리부 떼와 그리즐리 가족, 고래, 무스, 북극곰, 늑대들과 이 친구들의 숨결에서도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먹힘으로써 종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삶으로 다시 시작한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언제나 생명과 생명 속을 여행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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