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람 -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을 만나다
이명원 지음 / 이매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그것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아니면 체제형이건 반체제형이건 간에
앞으로 출현하게 될 새로운 지식인들은 그러한 근대적 범주로는 포괄될 수 없는
난제들에 대한 해결 능력과 패러다임 구성 능력이 필요하다.
모든 근대적 사유는 발전론적 세계관과 이항대립적 인식론의 기반 아래서 출현한 것이지만,
새롭게 출현할 ‘비체제적 지식인’들은 그러한 분류 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회의함으로써, 좌와 우의 가느다란 이데올로기적 협곡을 관통해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새로운 지식인들은 분과 학문 체계는 물론이고,
인식론과 존재론을 둘러싼 모든 칸막이들을 지혜롭게 횡단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 그리고 유머 감각이 있어야 한다.
....
|여는 글; 비체제적으로 횡단하는 사유 中..|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이 책을 만났다. 적당한 크기에 깔끔한 디자인이 내 눈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읽고는 며칠 전에 사들였다. 솔직히 제목『말과 사람』만 보고는 그다지 내 구미를 당길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표지를 보면 저자 이명원이 만난 여섯 명의 ‘사람’이 보인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들어온 건 이문열이다. 여태 불거진 이문열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를 떠나서 그가 구설수로 공공의 적(?)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 밋밋한 제목이 군침 도는 호기심으로 달리 보였다고나 할까.  


『말과 사람』은 앞서 인용한 구절을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비체제적으로 횡단하는 사유’가 절실하게 필요한 현재와 미래, 그 속에서 진정한 지식인을 대변하는 ‘말’을 찾아, 그런 ‘사람’을 찾아 발품을 팔고 판 기록에 관한 책이다. 사람은 없고 말만 반질반질 윤이 나는 세상, 영양가 없는 말들이 무수히 많이 부유하는 세상, 책임질 사람은 없는데 책임감 있는 척 시건방지게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말, 말, 말. 저자는 총대를 메고 이처럼 부유하는 많은 말 중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말을 잡아다가,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의도와 책임을 따져 묻고 있는 듯하다.  

 

그럼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비체제적으로 횡단하는 사유’를 가지고 현재의 많은 모순들을 타계해나가는 진정한 지식인인가, 하고 묻는다면 내 능력으로는 확답을 낼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반질반질한 말로 뺀질거리기 바쁜 여타 어처구니없는 인사(?)들에 비해서 조금은 ‘말’이 통한다는 것과 현재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몸담고 있지만 영양가 있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또한 자신들의 색과 닮은 이들의 주장이 그릇되었을 때 과감하게 들은 귀를 자르고 그 수족을 잘라낼 수 있는 강단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모든 책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먼저 장점은 저자가 되도록 중립적인 시각을 갖고 인터뷰를 한 것이다. 여섯 사람의 말을 주워 담아 있는 그대로 기록하되, 자신의 견해를 덧붙임으로써 말을 ‘전달’하고 마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애쓴 흔적이 그것이다. 물론 저자의 견해와 비판이 죄다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적어도 여러 시각과 주장들을 비교하고 보다 합리적인 주장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또 책의 구성이 비교적 깔끔하고 주제에 따라 단락구분이 잘 되어 있어 보기에 편한 것도 이 책이 주는 장점이라 하겠다.  


반면에 아쉬웠던 점을 들자면, 저자가 책속에서 구사하는 말은 참 고답적으로 다가온다. 좀 쉬운 말, 알아듣기 쉽게 풀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게 책을 읽어나가는데 적잖은 방해요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물론 지적소양이 모자란 내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은 듣고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하지 않나 싶다. 그것이 독자를 위한 정보 전달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세상에는 말이 존재하고 무수히 많은 말들이 부유한다. 또 그 말들은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카드라!’ 통신을 생산한다. 그 사이사이에 오해와 억측이 난무하고 그 또한 영양가가 있든 없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당당히(?) 말로써 존재하고 부유한다. 소위 말을 ‘인격’이라고 한다. 출처가 불분명한 말들이 이토록 많이 부유하는 세상에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도 명확하지 않은데 더더욱 말에 인격이 붙은 말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또 인격이 없는 말은 ‘화’를 부르기 십상이고, 그 화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물을 사람을 찾아내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나름대로 제목과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짐작컨대, ‘비체제적으로 횡단하는 사유’를 가진 지식인들은 적어도 말을 함에 있어 그 출처를 분명히 하고 제 입을 통해 뱉어낸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생각과 좋은 의도를 담은 말을 가감 없이,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강단만큼이나 그 기본을 잘 지키는 사람이 미래의 지식인으로서 갖춰야할 기본적인 소양임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좋은 말을 듣고 그렇지 못한 말을 가려낼 수 있는 것은 일반의 대중들의 몫임을 알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종속됨이란 자본에 의해서, 이념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건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지름길임을 명심하고 그릇된 말로 더럽혀진 귀를 자르거나 때에 따라 여닫을 수 있는 소양을 갖추는 것 또한 무척이나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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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과 현실; 이문열∥
진정성과 행위와 이념의 일관성, 과거에도 기능했고 앞으로도 기능해야 할 중요한 세대가 386세대다. 물론 내가 이 소설에서 386 찌꺼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비판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간 사람, 특히 원한에 주목한 것이다. 권위주의 정부와 싸우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 고통에 망가진 것 같다. 원한을 벗어나지 못해 원한으로 미래를 결정하거나, 단순한 ‘적’의 논리로 간 친북 좌편향에 빠진 사람들을 비판했다면 비판한 것이지. 386세대 전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p32)  


그러나 나는 남북한의 문학 교류가 이문열이 말한 대로 단합대회로 비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지적한 바처럼 남북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문인들의 성향은 다양했다. 이념적으로는 가장 오른쪽에서 가장 왼쪽까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 교류는 말하자면 동일한 모어母語의 구성원이지만, 문화어와 한국어라는 다른 명칭의 언어권으로 재편된 언어들의 어려운 만남이었다. 거기에는 한국의 노무현과 북한의 김정일로 상징되는 정치 체제와는 그 층위가 다른 문화적인 전망과 자율성이 있는 것이다. 이산가족이 만나면, 껴안고 울지 서로 이념을 묻지 않는다. 나는 언어적 재회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p35)

∥민족주의자의 초상; 조정래∥
문인이 현실 정치에 대해서 발언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모순과 갈등을 감시 감독하는 관점에서 발언해야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자기의 사적 견해, 개인의 감정,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면 안 된다. 자기에게 불리하더라도 대의를 위해서 객관적으로 해야 한다. 작가들이 사회적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헌신성과 희생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p53)  


강준만 교수가 문단 권력을 주제로 한 책을 냈을 때,『오마이뉴스』에서 내게 인터뷰를 나온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군사정권 30년만 나쁜 것이 아니고 문단권력 40년이 더 나쁘다. 그랬더니 기자가 이대로 써도 됩니까 하더라. 기사가 나간 후 구설수에 많이 올랐다. 한국의 문단이 그 정도로 소아병적이고 폐쇄적이고 편협하다. 자기 파 아니면 언급을 안 하고 묵살해버리는 패거리 의식이 너무 심하다. 문화에 종사하는 자들이 가장 반문화적 행위를 하는 셈이다.(p54)  


∥디자인과 사회철학; 김민수∥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독한 군중이 되고 있다. 남들이 소비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소외된다는 사회적 공포감이 한국 사회만큼 높은 곳이 새삼 그 어디에 또 있겠는가. 애고 어른이고 얼짱·몸짱 신드롬에, 왕따는 죽음을 의미한다. 리스먼은 대중매체가 발달된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타인을 의식하고 개인의 개성이나 인격보다 집단 동질성 속에서 안주하려 한다고 말했다. 풍요 속에 고독감과 획일성으로 점차 인간들이 고독한 군중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인 지향적인 현상은 출생률과 사망률이 낮아지고 고령화 사회가 돼가는 인구의 초기 감퇴기에 나타난다고 한다.(p117)  


왜 우리의 대학은 학생들 스스로 창의적일 수 있게 하는 동기를 유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대학에 대해서는 학생이고 교수고 모두 냉소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대학이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자신의 잠재력을 퍼올릴 수 있는 창조적인 곳이 되려면, 적어도 지금처럼 창조적이지 못한 기업 문화가 요구하는 그런 시스템과 맞물려서는 안 된다. 그건 자살 행위인 것이다. 지금은 대학이 창조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주도권을 기업에 내준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신자유주의 정책에 발 빠르게 부응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가시적 효과를 만들어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학의 창조적 지성을 훼손할 여지가 많다. 지금 한국의 고등교육 체제에서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전문대학이 152개나 존재하면서 4년제 대학을 전문대학 차원으로 몰고 간다는 점이다. (······) 그런데 전문대학이 지향하는 교육 목표를 보자.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각 분야의 전문적인 직업 교육을 실시하는 데 있다. 요즘 4년제 대학에 대해 정부와 기업이 요구하고 있는 목표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공급하기 위한 전문대학이 엄청나게 존재하고 있는데, 4년제 대학을 포함해서 전 대학에 획일적으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건다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
지난 20세기 산업사회에서 지구의 원시림은 단지 개발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가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속에서 뿜어 나오는 한 줌의 산소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자본의 지배와 권력에 물들지 않는 천연의 지성력으로 산소 같은 지식과 학문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이 아쉬워지는 때가 언젠가 올 것이라고 본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급조된 산업화의 여파로 긴 호흡을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하고 붕어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p131~p133)  


∥씨알의 자기 실현; 김상봉∥
국가기구가 자기 존립의 정당성을 확증하려고 할 때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현실적인 어떤 국가기구의 현실성 그 자체를 증명해 보여줌으로써 ‘내가 국가다’라고 하는 걸, 국가가 여기 있다고 하는 걸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뭘 통해 보여주나? 폭력밖에 없다. 자발적인 동의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시대가 이제 시작이다.(p163~p164)  


국가가 ‘서로 주체성’의 현실태일 때는 법이라는 것이 자유의 형식이다. 자유가 방종이 아닌 한에서 나름의 형식과 질서가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국가와 자본을 대리한 국가 폭력의 형식이 되어가고 있다.

국가가 약자를 보호해주지 못할 때, 오히려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는 약자들을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먼저 나서서 억압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노동자들이 어떤 합법적인 저항의 수단도 없을 때,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전쟁 상태다. (······)

추상적으로 표현해서 국가는 시민들의 서로 주체성의 현실태인 한에서 서로 주체성의 표현이고, 그 실현인 한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국가가 씨알을 모두 보호하고 최선을 다해서 모든 씨알을 위해서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국가기구 또는 헌법적 질서라고 하는 것이 법을 빙자해서 극소수의 특권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때, 수탈과 억압의 도구에 지나지 않을 때, 씨알들과 국가 사이에는 전쟁 상태 말고는 다른 것이 조성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국가기구와 씨알들 사이의 전쟁 상태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5·18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그 역사가 과거 어느 한때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다시 있을 수 있는 역사가 5·18이다.(p166~p167)  


∥비체제를 향하여; 김종철∥
(······) 이 세상에는 지금 두 가지 종류의 탱크가 있다. 하나는 전쟁무기로 쓰이는 탱크이고, 또 하나는 지식인들이 모인 조직인 싱크탱크다. 그런데 싱크탱크란 무엇인가. 실제 탱크를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아, 그 사람들이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조직 아닌가. 대학도 지금은 일개 싱크탱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교수들이야말로 가장 노예적인 신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정말 흙 속에서 땀 흘려 자기 손으로 일하고 먹고 사는 사람들인 농민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다. 농민들은 국가에서 농업에 대해 지원금을 주느니 마느니 하는 것들에 콧방귀를 뀐다. 농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다만 자신들이 기른 작물을 제값 받고 팔게 해 달라는 것이다. 제발 국가와 시장이 이걸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물론 농촌에 가면 국가 보조금에 목을 단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대개 뿌리 있는 농민이 아니다. 대개가 대규모의 시설농, 축산업, 상업농을 하는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야심을 가진 사람들은 비즈니스맨이지 농민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농민은 기본적으로 자급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국가의 도움을 성가시게 여긴다.(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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