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글쓰기 나남산문선 11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기획 / 나남출판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꽤나 오래전에 사들이고는 드문드문 생각날 때마다 펼쳐 본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사들일 당시에는 내가 아는(?) 작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분히 이름만 들어봤거나 작품을 한두 개 혹은 아예 접하지 못한 내 부족한 경력(?) 때문에 다소나마 겁(?)을 먹었던 것도 같다. 뭔가를 공감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저자들의 작품을 차례차례 접해보는 것?)를 거쳐야 마땅하다는 내 생각은 판단미스(?)였다. 작품에 이끌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것 못지않은 매력이《내 인생의 글쓰기》에 배어 있다.

전체적으로 ‘그’들의 사생활이 잘 녹아 있어 매우 흥미롭다. 어떤 시절을 거쳤으며 어떤 동기들이 지금에 그들이 있도록 했는지 간략하게, 비교적 상세하게 녹아 있다. 더군다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각자 한마디씩 던지고 있어서 기분 좋은 무게감(심오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조금은 친숙한 느낌. 동네 아저씨, 삼촌, 이모들이 들려주는 생생한 ‘문학의 길’에 대한 이야기랄까. 무튼 편안함을 기본으로 자질구레한 이야기와 적잖은 무게감까지 두루 섞인 그들의 ‘문학일기’를 엿본 건 정말이지 행운인 듯하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그들 대부분은 ‘읽기’로부터 다시 태어났다. 무엇을 읽었나? 동시집, 시집, 세계문학전집 등등 통칭 ‘책’읽기가 그들을 시인, 소설가로 재탄생하게 만들었다.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를 하거나 어떤 책을 읽어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는 딱딱함은 없다. 그저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그때 이러이러한 책을 만났지, 그냥 책이 좋았어,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들었지,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감동) 때문에 조금은 혼란스러웠어, 아마도 그래서 글을 쓰게 된 건지도 몰라, 내 속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강렬한 욕구가 내게 펜을 들게 한 것 같아, 라고 회상하면서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구도 글쓰기에 대해 거창하거나 고귀한 작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보는 책을 쓴 사람이 ‘사람’이니까, 뭔가 의미가 있든 없든 한 편에 글을 썼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성취감에 빠져 등 소소한 자기성취라는 개인적인 욕구와 보편·단순한 진리를 따라 실행에 옮기다보니 어느덧 글쓰기가 인생이 되었음을 말한다. 이 세상 누구나가 글을 쓰고 책을 내며 그 책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가 읽음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적인 것이며, 소통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며, 그런 서로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읽음으로써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철학을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문학의 근본은 무엇일까. 그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들을 정리해보면, 문학의 뿌리는 외로움, 슬픔, 고독, 불완전, 물질로는 죄다 채울 수 없는 뭔가 아쉬운 것에 대한 의문, 마냥 쓰는 것에 대한 즐거움, 물밀듯 밀려오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 등등이다. 문학은 글을 씀으로써 탄생하지만 그 시작은 앞서 말한 이 모든 것에 기인한다. 자기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생각이 견고해지고, 세상을 자신만의 색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와 맞물려 기꺼이 펜을 들게 되는 것. 그로 인해 문학은 시작되고 만들어지며 비로소 탄생한다. 읽는 이와 교감함으로써 문학은 끊임없이 재탄생하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비록 문학의 길이 좁아지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그 맥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의 일상과 삶 속에 그 씨앗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언제고 싹을 올리고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가 종말을 맞이하더라도, 모든 인간이 소멸하더라도 이곳은 문학을 기억할 것만 같다. 물질적인 모든 것과 육신의 소멸과는 무관하게 우리네 의식은 어느 곳이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의식은 문학적 씨앗이 가진 가능성을 기억할 것이고, 찬란하면서도 일상적인 소소한 멋을 자랑한 꽃봉오리를 추억할 것이다.

어쩌면 ‘문학수난시대’라 일컫는 요즘, 역설적이게도 그 좁은 길은 더욱 뚜렷해지고 보이지 않는 의식의 끈으로 묶인 결속력은 더욱 견고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문학의 뿌리는 고통과 슬픔, 외로움 등등을 근간으로 하기에 이러한 시련을 먹고도 더욱 견고해지지 않을까. 어쩌면 문학수난시대라는 지금의 위태로운 이 시기에 비로소 문학의 정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상의 곳곳에서 피어나는 그윽한 문학적 향기에 취해보는 것, 그 향기를 직접 세상으로 날려 보내보는 것, 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넉넉한 마음을 가진 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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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책을 따라다니며 글을 쓰다】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은 시작되었고, 나는 책을 따라다니며 글을 썼다. 그 길고도 긴 인생의 길이 책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내 책이 다른 책들 속에 섞여 있을 때 나는 신기하다. 내가 처음 글을 써보려고 했던 기억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책을 읽다가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많은 책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 저 책을 쓴 것이 사람들이지. 그렇다면 나도···.’ 그리고 나는 글을 써보기 시작했던 것이다.(p030)

【김원우; 책읽기와 글쓰기의 고락】
잘 썼든 못 썼든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그 득의감은, 과장이 심한 상투적 표현을 끌어다 쓰면, 천하를 얻은 성취감과 견줄 만하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세상의 이치에 대한 부분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나름의 시각·설명·해석으로 풀어보였으므로 자가당착의 빈말만도 아니다. 게다가 극소수의 독자들로부터나마 동감을 얻을 수 있다는 자부심은 꽤나 알찬 것이기도 하다.(p053)

【도종환;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글을 쓰려는 이들 중에는 의외로 삶에서 받은 상처를 오래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해와 사랑의 부족, 그 결핍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 내면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소외의 기억, 소통의 부재 그런 것이 글을 쓰게 하는 원인인 경우가 있다. 이런 상처와 소외와 고통이 도리어 재산이 되는 분야는 많지 않다. 그러나 문학의 토양은 상처다. 상처가 스승이다. 결핍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고 내면 깊숙한 아픔이 시의 밭이다. 그 아픈 기억들을 아름다운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장르가 문학인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남의 아픔을 위로하는 의료행위인 것이다.(p064)

글을 쓰는 이들 중에는 개인적 시간, 개인적 공간 속에 오래 갇혀 지내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언가를 쓰고 또 쓰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끝없이 자기를 알리고 싶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기표현이야말로 자기존재의 확인인 것이다. 부재의 시간 속에서 소통을 향한 신호를 끝없이 날리는 일이다.(p065)

【서정오; 글장이는 별종인가?】
이제는 정말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 농사꾼과 행상과 어부와 노동자가 글을 써야 한다. 공연히 어려운 말로 젠체하는 글이 아니라, 삶 속에서 절로 터져나오는 내 생각과 내 느낌과 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글을 써야 한다. 그리하여 글이 온 세상에 강물처럼 흘러넘쳐야 한다.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글을 읽어야 한다. 초등학생이 쓴 글을 국회의원이 읽고, 농사꾼이 쓴 글을 대학교수가 읽고, 염전노동자가 쓴 글을 장관과 법관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감동하며 배워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을 바꾸어 말해도 물론 마찬가지다.(p092~p093)

【성석제; 문학의 뿌리와 샘, 감동】
“내 어머니의 손은 언제나 흙손이다. 언제나 밭을 매고 김매고 흙과 떨어지지 않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은 흙처럼 거칠다. 흙처럼 메마르다. 흙처럼 볼품없고 푸석푸석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손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싸아악,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바로 내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감동으로 곤두서는 소리였다.(······)
왜 나는 감동했을까.(······) 내 어머니의 손에는 흙이 묻어 있기보다는 부지깽이가 들려 있을 때가 많았다. 동네에서는 비교적 농사를 많이 짓고 식구가 많은 집안인 데다 머슴까지 두고 있어서 늘 밥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손은 빨래 때문에 거칠 수도 있었지만 깨끗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흙 묻은 손이나 어머니 때문에 감동한 게 아니었다.
나는 문학이 가지고 있는 본질, 보편의 감동에 닿았던 것이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감정, 감각에 나는 당황했다. 왜 머리카락이 곤두설까. 왜 눈꼬리가 시큰할까. 왜 침이 마르고 혀끝이 아릿할까. 나는 일어나 앉아서 다시 그 동시를 읽었다.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아예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이가 두 자리 숫자인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눈물이.(p101~p102)

【신달자; 문학적 자전 - 여자의 길, 문학의 길】
그 많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하지 않고 외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나는 얼굴은 보이나 보이지 않는 인간의 얼굴을 찾는 마음의 내면읽기를 찾아 떠나고 싶었다. 그것이 문학 그리고 시를 찾아 나선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p118)

【안도현; 처음처럼】
문학은 여전히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외로움의 거름을 먹지 않고 큰 문학이 있다면 그 뿌리를 의심해 봐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롭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p155)

【안정효; 책을 읽다가 글을 쓰게 된 사연】
나는 쓰고 싶은 마음뿐이었지, 어디엔가 응모하고 당선되어 나의 작품을 남들에게 보여준다는 과정은 설계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썼다.
밤낮으로 썼다.
정말로 행복했다.
나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답답한 구석방에 틀어박혀, 바깥세상을 뒤덮은 한여름 열기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방석 깔고 앉아 책상다리를 하고는, 서예라도 치는 듯 펜촉에 잉크를 듬뿍 찍어 검(劍)처럼 치켜든 다음,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채워 나갔던 모든 순간이 그때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는, 거의 50년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p178~p179)

【우애령; 뗏목 위에서】
오랜 세월 동안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친지,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통과 슬픔이 평안과 기쁨보다 더 많이 삶에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강한 힘으로 휘두르는가···, 우리는 운명에 맞서 싸울 아무 힘도 지니지 못한 무력한 존재인가···. 의문은 지금도 내 곁에 머무르고 있다. 아마 나는 그 의문에 대답해 보려고 절망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사랑과 삶의 의미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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