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
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허승철 감수 / 롤러코스터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련과 민족주의

서구 열강들은 소련을 제국으로, 그것도 불법적인 제국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소비에트연방을 바라보았다. 볼셰비키당 지도부 중 다수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옛 러시아제국 치하에서 억압받던 소수민족인 라트비아인, 폴란드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제국주의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러시아제국이 몰락하기 전 3년 동안 점점 심해진 비러시아인 차별에 분노하면서 성장했다. 그들은 소비에트연방 지역 안팎, 특히 (19세기에 러시아제국에 의해 정복당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주민을 해방하는 일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러시아의 광신적 민족주의’가 ‘가장 큰 위협’이라는 1920년대의 슬로건은 소련의 모든 민족주의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 러시아 민족주의라는 뜻이었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MrDQbnFW5D6eF43A

볼셰비키는 열렬한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민족주의는 허위의식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민족주의가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녔고, 없애려고 시도할수록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볼셰비키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들의 전략은 비러시아인의 민족주의를 권장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각 민족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민족문화를 장려하며, 공화국 단위(예컨대 우크라이나)에서 시작하여 마을 소비에트 단위(유대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 라트비아인, 그리스인, 그리고 다른 ‘자치 구역들’)까지 내려가는 독립된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소련의 행정 체계가 각 민족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 소련 통치의 역설 가운데 하나였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Bbp6r6nE8Q3MHvxe8

다문화주의(무정부주의적 용어를 사용하자면)는 기본적인 사회적 약속이었다. 민족적 선입견을 공공장소에서 표현하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vGMijbwSRkWEumD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 중세의 질서

프랑스에서 9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질서 관념은 인간을 세 가지 직분으로 나누고 있다. 이 구분은 인도유럽어족의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해지는데, 이것이 기독교와 연결되어 1027년경에 랑의 주교 아달베롱 등에 의해 정식화되었다. 그것에 의하면 ‘신의 집‘은 기도, 노동, 전투 세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상에서는 성직자, 농민, 기사가 그것을 담당한다. 아달베롱은 왕이 이 세 기능을 통합하여 보편적인 질서를 보증하는 존재이고 왕·성직자·기사는 ‘일하는 자‘(농민)을 보호하는 대신 노동의 봉사를 받는 상호 봉사의 관계라고 설명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37년 대숙청

이른바 ‘대숙청’이라는 공포 기간–소련 시민들은 완곡하게 ‘1937년’이라고 표현한다–은 1937년 초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시작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YdfthaxHqC74vn86

1937년 6월, 대숙청은 군으로 확산되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와 사실상 모든 최고위 군사령관(정치국원인 클림 보로실로프는 제외)이 독일과 공모했다는 혐의로 비공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유죄 선고를 받고 즉결 처형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gubqcngG8m5RCSQ7

엘리트 계층 체포는 1937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사장, 동료 노동자, 이웃에 대한 기회주의적 고발이 당국에 계속 밀려들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uZCAEDnCrDBbc1e96

아마도 볼셰비키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혁명 내부에는 혁명이 끝날 때 자기 자녀를 잡아먹게 만드는 취약한 내적 논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듯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241FVb622U59Z7Em7

70만 명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하고 100만 명 이상을 굴라그로 보낸 것은 너무 큰 대가였다.

대숙청 이후 당, 정부, 군, 보안대 등 모든 기관의 고위 지도부는 대부분 초보자로 채워졌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em63afTwAjJzepz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32-33 대기근

스탈린은 농민을 죽이려 했다기보다, 농민들이 봄 파종까지 생존할 수 있는 양만 남기고 최대한 많은 곡식을 확보하려 했다. 문제는 누구도 그 양이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지방 관리들이 최대한 많은 곡식을 확보하도록 압박했고, 농민들이 더는 숨겨둔 게 없다고 말해도 곧이 듣지 않았다. 농민들의 ‘기근 연기’와 ‘거짓 파산 행세’와 같은 기괴한 표현이 소비에트 담론에 등장했다. 농민들이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어간다는 것을 스탈린이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1932~33년 겨울, 굶주림을 피해 도망치는 농민을 막기 위해 도시 입구를 봉쇄해야 했다. 봄이 오자 파종을 위해 국가 창고에 저장했던 양곡을 다시 농촌으로 보내야 했다. 기아 사망자(수십 년 후까지 소련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500만 명 이상이었다. 기근은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반세기 동안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다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시절 우크라이나 당서기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 건설 70주년 기념식에서 침묵을 깼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vk3M49EmjYD2XSYd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약자 우대 정책, 적극적 조치

약자 우대 정책은 1930년대에 세계적으로도 신선한 것이었다. 동시대 영어에는 이런 정책을 표현할 용어조차 없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을 떠나고 싶어 해서는 안 되기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이 정책을 경멸했다. 하지만 노동계급, 농민, 비러시아인 출신 가족은 상승 기회를 환영했다. 미래의 국가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그 밖의 여러 공화국 토착민 출신 지도자들이 이 우대 정책의 수혜자들이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xHnu8CevF8RLT7s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