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을 거부하면 전쟁은 당연했고 전쟁을 하면 필패였다. 사무라이 정권인 막부는 청 조정처럼 서양 오랑캐 따위는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직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막부이기에 전쟁에서 지면 끝장이었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지고도 건재했지만, 막부는 다르다. 장군將軍의 원래 이름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아닌가. 말 그대로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있는 자리다. 전쟁에서 지면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게 막부가 서양과의 전쟁을 끝내 회피한 이유다. 실제로 막부가 무너진 것은 조슈번長州藩과의 전쟁에서 패한 게 결정타였다. 무력이 정통성의 원천이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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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19세기에 들어가면 하급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궁핍이 아주 심해진다. 많은 사무라이들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다. 그런데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다. 조선의 양반들은 가난해도 과거에만 붙으면 일거에 신세가 핀다. 그런데 사무라이는 문장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 사회엔 당연히 과거제가 없다. 그럼 사무라이는 무엇으로 출세할 수 있나? 전쟁이다. 평생 닦은 무술 실력으로 전투에서 큰 공훈을 세우면 일거에 집안도 일으켜세우고 거액의 봉록도 받을 수 있다. 전쟁이야말로 사무라이들의 존재이유다.
그런데 도쿠가와 시대는 사무라이 국가이면서도 1615년 오사카 전투 이후 250년간 이렇다 할 전쟁이 없었다.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장기 평화 시대였다. 차고 다니는 칼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니 사무라이들이 출세할 일도 없고, 그저 주군이 맡긴 자잘한 사무나 보며 쥐꼬리만 한 녹봉을 받아 근근이 생활해나가는 것이 그들의 인생이었다. 세상이 소란해지고 전쟁을 해야 자기들이 위세를 부릴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상업이 발달해도 경제를 모르는 사무라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상인들의 배만 불릴 뿐이었다.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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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농업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특히 밭작물 생산력은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힘으로 10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농업생산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상품과 화폐경제는 위축되어 있었다. 어떤 학자는 이를 두고 국가재분배 경제라고도 한다. 이게 조선사의 흥미로운 점이다. 왜 조선은 이웃인 청이나 일본과는 달리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는가, 혹은 그토록 성공적으로 상업 발전을 통제할 수 있었는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나름대로 고도의 사회수준과 문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유럽 이외 지역에서도 근대의 ‘맹아’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으면 청과 도쿠가와 일본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조선은 근대인인 우리들에게는 훨씬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다. 그런 만큼 근대를 상대화하고 근대를 넘어서려는 상상에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연구대상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빈부격차였다. 한 사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고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그 혜택을 골고루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억제하려고 했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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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접근과 사회적 불안이라는 내우외환의 시대에 직면하여, ‘세이시사이’는 역사적 실체로서 천황을 중심에 놓고, 일본이란 나라의 본체, 즉 국체(國體)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신론(新論)’이다.

‘세이시사이’는, 막부와 번의 정치적 상황을 강하게 비판하며, 시대적 위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국체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번을 중심으로 사고해온 무사들의 인식을, 일본이라는 국가적·민족적 범위로 전환시켰다. - <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탁양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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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년의 판적봉환으로, 구 번의 영주가 자발적으로 판(토지), 적(인민)을 천황에게 반납하여, 다시 지번사(知藩事)로 임명되어, 번의 영지와 영주의 분리를 도모할 수 있어, 중요 지역이나 옛 막부부 직할지였던 부, 현과 함께 부번현체제(府藩県体制)가 된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진행시켜, 개혁을 전국적으로 망라하려는 데에 있어, 번의 존재는 방해가 되었고, 번 측에서도 재정의 핍박이 계속 되어, 자발적으로 폐번을 신청하는 번이 잇따랐다. 1871년 8월 29일, 사쓰마, 조슈 번 출신의 지도자에 의해 폐번치현이 실시되어, 도도부현제도 설치(당초에는 3부 302현, 직후 정리되어 3부 72현), 중앙정부로부터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 <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탁양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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