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는 1125년 북부에서 남부로 밀려난 후 상업이 본래 활발했던 남부의 영향을 받았고, 이전의 대다수 왕조보다 상업에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전 왕조들은 유교 전통에 따라 상인을 천시했다(〈지도 10.5〉). 북방의 경쟁자였던 만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충돌하는 비용을 대기 위해 송나라는 상업에서 조세를 거둘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외국 교역자들에게 새로운 항구를 개방하고 화폐 공급량을 늘려 외국과의 교역을 장려했다. 시장 활동이 경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자 일부 농민들도 전문화했고, 농법과 관개 기술이 개선되었다.

<빅 히스토리>,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2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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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무함마드가 상인이었기에 무슬림 세계는 다른 농경 문명보다 상업에 우호적이었고, 정부는 대개 거래를 지원하고 수익을 얻었다 - <빅 히스토리>,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2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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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의 교역 체계는 동아프리카에서 중동을 거쳐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이 아니라 주로 대양에 흩어진 작은 도시국가들을 오가는 형태였다. 이 지역에서 상업적 경쟁이 심했다는 의미다. 강력한 통치자가 물품이나 교역로를 독점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 - <빅 히스토리>,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2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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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한국

기계적인 사본 제작법인 인쇄는 8~9세기에 한국에서 최초로 개발된 듯하다. 그보다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이 돌에 새긴 글자로 문서 사본을 만들곤 했지만, 한국인들은 나무판에 꼼꼼하게 글자를 새겨 찍었다. 활자판 인쇄도 11세기 한국에서 처음 나타났다. 글자들을 나뭇조각에 따로따로 새긴 뒤 활자판에 끼워 인쇄했다. - <빅 히스토리>,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2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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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 섬 중 가장 동떨어진 곳인 이스터섬에는 27.2t에 달하는 유명 석상 ‘아후’와 독자적 문자를 만든 작은 마을 공동체가 생겨났다. 전성기의 인구는 7,000명 정도였지만 얼마 후 붕괴했다. 원인은 삼림 파괴 때문일 것이다. 목재가 없어지자 난방을 못 하고 건물을 짓지도 못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갈 배를 만들 수도 없었다. 사회가 무너지자 생존자들은 엉성한 수렵채집 생활로 돌아갔다. - <빅 히스토리>,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2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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