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 즉각적인 퇴사 욕구가 끓어오른다고 한다. 그들은 보여주기식 노력이 대부분 그들의 직속 상사에 대한 소속감 때문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90년대생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상사나 회사에 대한 수직적인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과거와는 달리, 주변 동료나 지인들을 향한 수평적인 소속감을 더 많이 느낀다.<90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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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결정을 방어적으로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의도적인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다. 책임 회피를 위해 꼭 필요한 의사결정을 미루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안을 검토하는 하급자는 보고서를 만들고 회의를 거듭하며 불확실성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필요 이상의 복잡한 결재 단계에서 시간을 끌기도 한다. 이는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급자도 마찬가지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 보고서의 사소한 오류나 정보 부족을 탓하며 재작업을 지시해 시간을 끈다.<90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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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이전의 봉건 체제는 유럽보다 동아시아에서 더 높은 수준까지 발전해 있었다. 근대 체제의 가능성이 떠올랐을 때 유럽에서 쉽게 전환이 이뤄진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은 기존 봉건 체제에 허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주변부에 있던 일본도 봉건 체제의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과 중국은 고도로 발달한 봉건 체제가 깊이 체화되어 있어서 급격한 전환이 어려운 상태였다.
- P50

봉건 체제만이 아니라 어떤 체제라도 질서의 근본 가치는 비용절감과 폭력 억제의 효과에 있다. 한국과 중국의 봉건 체제가 유럽이나 일본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도 그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봉건 체제를 ‘관료 봉건제‘라고도 하는데, 무력이든 경제력이든 정보력이든 우월한 실력을 가진 유력 계층을 관료층으로 편성해서 제한된 범위의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 왕권의 통제 아래 두어 낭비적 무한경쟁과 무절제한 폭력 행사를 가로막는 것이다. 인구가 조밀한 동아시아 농업 사회는 이 질서 위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과 일본의 봉건 체제는 유력 계층의 중간 권력이 일으키는 낭비와 폭력에 대한 억제가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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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이 자기 신체가 하나의 유기적 전체임을 알게 되고,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생후 18~24개월경이라고 한다. 거울에 있는 자기 모습을 알아보고 좋아하는 시기가 바로 그때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가 라캉은 ‘거울단계’라고 부른다.

이때까지 뇌의 신경세포들은 1,000조 개 정도의 시냅스로 연결된다. 우주 전체의 별보다 많은 숫자다. 그런데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은 행동이나 사고에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짐을 뜻한다. 그에 따라 연결되어 있던 시냅스 가운데 사용하지 않는 것을 단절시키는데, 이때 3분의 2 정도의 시냅스가 단절된다. 모든 방향으로 열린 잠재력이 ‘자아’라는 말로 요약되는 반복적 선택지만 남겨두고 축소되고 소멸되는 것이다. ‘나’라고 부를 어떤 패턴의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은 엄청난 수의 시냅스와 그것이 할 수도 있었을 거대한 잠재성의 축소 내지 소멸을 동반하는 것이다. 어떤 게 살아남을 것인지는 특정한 뉴런들을 활동하게 자극하는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 - <불교를 철학하다>, 이진경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aCptR2b2KhYEim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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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먹지 않았어도 누군가 조선을 식민지화했을거다?

아편 교역은 근대적 시장 확대보다 전근대적 약탈의 성격을 가진침략 양상이었다. 영국의 면직물을 비롯한 유럽 공산품의 중국 시장 점령은 1856~1860년의 제2차 중영전쟁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의 인구 조밀 지역을 산업화의 시장으로 편입시킬 전망이 비로소 세워진 것이다. 조선에 대한 개항 요구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유럽 열강들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만들던 추세에 비추어 동아시아 지역도 곧 식민지가 될 참이었다는 주장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곧잘 해왔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친 열강들의 대화 중국 정책을 보면그 전까지 통상적 의미의 식민지를 구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청나라를 유지시킨 채 경제적으로 이용하려는 방침이 열강 정책의주류였다. 영국이 겪어본 인도 경영의 어려움이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 P21

그리고 조선과 일본에 대한 유럽 열강의 정책에는 중국에서의 경힘이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시대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고 하는일본도 1880년대까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의 약점을 파고든 것처럼 일본의 약점을 냉혹하게 파고든 열강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자력 근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일본의 성장을 가로막으려는 의지를 가진 유럽 세력은 러시아 하나뿐이었고, 일본보다 근대화가 크게 앞서지 못한 러시아는 압도적인 힘을가진 열강이 아니었다.
중국에 대한 유럽 열강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말로 ‘찢어먹기‘
分, [‘쪼개먹기‘(分)라고도 함)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청일전쟁 (1894~1895)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고, 일본과 러시아가 앞장서서 일으킨 사태였다. 제국주의 경쟁이 막바지에 이른 현상으로, 주류 열강들이 추진해온 방향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이 1890년대 이후 격화되는데는 일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고, 이것을 거든 것이 러시아였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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