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먹지 않았어도 누군가 조선을 식민지화했을거다?

아편 교역은 근대적 시장 확대보다 전근대적 약탈의 성격을 가진침략 양상이었다. 영국의 면직물을 비롯한 유럽 공산품의 중국 시장 점령은 1856~1860년의 제2차 중영전쟁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의 인구 조밀 지역을 산업화의 시장으로 편입시킬 전망이 비로소 세워진 것이다. 조선에 대한 개항 요구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유럽 열강들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만들던 추세에 비추어 동아시아 지역도 곧 식민지가 될 참이었다는 주장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곧잘 해왔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친 열강들의 대화 중국 정책을 보면그 전까지 통상적 의미의 식민지를 구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청나라를 유지시킨 채 경제적으로 이용하려는 방침이 열강 정책의주류였다. 영국이 겪어본 인도 경영의 어려움이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 P21

그리고 조선과 일본에 대한 유럽 열강의 정책에는 중국에서의 경힘이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시대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고 하는일본도 1880년대까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의 약점을 파고든 것처럼 일본의 약점을 냉혹하게 파고든 열강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자력 근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일본의 성장을 가로막으려는 의지를 가진 유럽 세력은 러시아 하나뿐이었고, 일본보다 근대화가 크게 앞서지 못한 러시아는 압도적인 힘을가진 열강이 아니었다.
중국에 대한 유럽 열강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말로 ‘찢어먹기‘
分, [‘쪼개먹기‘(分)라고도 함)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청일전쟁 (1894~1895)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고, 일본과 러시아가 앞장서서 일으킨 사태였다. 제국주의 경쟁이 막바지에 이른 현상으로, 주류 열강들이 추진해온 방향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이 1890년대 이후 격화되는데는 일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고, 이것을 거든 것이 러시아였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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