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이전의 봉건 체제는 유럽보다 동아시아에서 더 높은 수준까지 발전해 있었다. 근대 체제의 가능성이 떠올랐을 때 유럽에서 쉽게 전환이 이뤄진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은 기존 봉건 체제에 허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주변부에 있던 일본도 봉건 체제의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과 중국은 고도로 발달한 봉건 체제가 깊이 체화되어 있어서 급격한 전환이 어려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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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 체제만이 아니라 어떤 체제라도 질서의 근본 가치는 비용절감과 폭력 억제의 효과에 있다. 한국과 중국의 봉건 체제가 유럽이나 일본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도 그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봉건 체제를 ‘관료 봉건제‘라고도 하는데, 무력이든 경제력이든 정보력이든 우월한 실력을 가진 유력 계층을 관료층으로 편성해서 제한된 범위의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 왕권의 통제 아래 두어 낭비적 무한경쟁과 무절제한 폭력 행사를 가로막는 것이다. 인구가 조밀한 동아시아 농업 사회는 이 질서 위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과 일본의 봉건 체제는 유력 계층의 중간 권력이 일으키는 낭비와 폭력에 대한 억제가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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