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11세기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 지방의 어떤 귀족이 합스부르크(Habsburg)라는 성(城)을 지었다. 그때만 해도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시골 귀족이었을 뿐인데, 2백 년쯤 지났을 때 후손 한 사람이 독일 지역 봉건영주들의 왕으로 뽑혔고 그 아들이 오스트리아 영지를 물려받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주로 혼인을 통해 보헤미아·헝가리·스위스 티롤·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손에 넣었고 15세기 중반부터 3백여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위를 대물림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xyDMVqMhdwAWVbfJ9

신성로마제국은 중세 봉건 귀족들의 느슨한 ‘정치적 동호회’였고 황제는 일종의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다. ‘신성’할 것도 없었고 ‘로마’에 있지도 않았던 그 제국의 황제는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 대륙 전체를 장악했던 1806년 제국의 해체를 공식 선언했다. 그런데 그가 다스린 나라는 그때 처음으로 실체를 가진 제국이 되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4TqXCdpbNj6oeG889

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심장을 보호하는 갑옷이었다.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획득했고 전쟁에는 지극히 무능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도시 전체를 둘러싼 대성벽을 축조하고 바깥에 외성벽을 한 겹 더 쌓았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V8foCV4FpyVGL3SG6

숭례문-서대문-인왕산-북악산을 돌아 낙산-동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길이는 18.6킬로미터다. 그것이 조선의 수도 한양의 크기였다. 링은 북쪽 도나우 운하 구간까지 다 합쳐도 5.4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SFKggdXoDVctoETk8


요제프 황제를 오늘의 빈을 창조한 주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통치했던 19세기 후반에 빈은 예술·건축·문학·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 최고 수준의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빈은 어쨌든 그가 성벽을 철거한 덕분에 태어났다. 그는 새로운 문화를 북돋운 계몽 군주도 아니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역한 반동적 전제군주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백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빈 시민들은 황제를 잊지 않았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82orrXchwy8B8k7L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테판 성당이 독일어로 슈테판스 ‘돔’(Stephans‘dom’)이니까 지붕이 반구 형태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돔’은 가톨릭의 대주교좌 성당을 가리키는 말일 뿐 지붕의 모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독일 사람들이 ‘쾰르너돔’이라고 하는 쾰른의 대성당에 쏟아져 내릴 듯 무시무시한 고딕 첨탑이 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8b72RvRzH3m1gNeu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주의자들은 신약성서, 특히 그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성 바울로에게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성인, 성례, 성체 등의 특징을 갖는 14세기 말의 기독교와 사도들의 소박한 초기 교회를 가르는 엄청난 거리감이었다. 그때부터 신약성서는 르페브르 데타플의 말대로 “생명의 책이자 기독교 신자들의 유일한 지침”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인문주의 학자들은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수행하는 일부 행위와 도덕적인 의무들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발견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eQaWHSUWnDbN3dE7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로이힐린은 《히브리어의 기초》(1506)를 저술하여 성서의 히브리어 원문에 다가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이것으로 그의 반대자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성 바울로와 그의 편지들은 인문주의자와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핵심적인 참고문헌이었다. 바울로 역시 베드로에서 비롯된 기성 교회에 대한 개혁 교회를 대표하고 있었다(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 불렸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e743iUM2hUtH5swC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옥을 믿는 사림들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서 영혼이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켰다. 유언장에 자선 기부금을 많이 적는 것과 면죄부를 구입하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것으로 사람이 죽은 뒤에 연옥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
하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xEe3PFvsb2M3f5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는 진작부터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것이었다. - <변신>, 프란츠카프카 지음, 붉은여우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eEYBpEGcmukspQ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