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란은 무함마드가 서기 610년에서 632년까지 23년간 예언자로서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 내용을 담은 이슬람 최고의 경전이다. 꾸란은 아랍 어로 기록되었으며,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 지역 유목민이 사용하던 아랍 어를 기준으로 하였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NjjZvUZmMGRkFUqa7


꾸란은 하느님의 말씀만을 의미하며, 무함마드가 언급한 것은 꾸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무함마드의 말씀은 하디스라고 하여 이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경전이지만, 꾸란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꾸란 내용을 인용할 때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반면, 예언자의 말, 즉 하디스를 인용할 경우에는 “예언자가 말하기를”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EJRt9TxWNMwPVUsi9


정복 전쟁을 통해 이슬람의 영토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비아랍 어권으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인 꾸란이 달리 읽히고 발음되기 시작했다. 어떠한 왜곡이나 의미의 변화를 막기 위해 꾸란이 구전 전통에서 책으로 편찬되었고, 정확한 발음의 통일을 위해 점차 모음부호를 붙이게 되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7tmhf81DQkDaygmV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함마드는 알라의 말씀을 전달해 준 훌륭한 인간 예언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를 다만 존경할 뿐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어떤 신비로운 존재로서의 기적, 특별한 탄생, 초월적인 능력 등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완성된 인격체일 뿐이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u2W4dmxLFt9gsC366

기독교 서구 사회에서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 아닌 인간 예언자로 추앙하는 이슬람을 용서할 수가 없었고,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다른 종교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쪽은 서구의 기독교였지 이슬람 사회가 아니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RoqgoCHUVvTzLWKo9

그의 사후 많은 추종자들이 그의 신격화를 꾀했을 때, 후계자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무함마드를 섬기고 경배하지 말라. 그는 죽어 없어졌다. 하느님을 섬기고 복종하라, 그분은 영원히 살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ggRhKUNZ9KhzNe28

남성이 마음대로 여성을 노예로 매매하고 자신들의 장식물로 여기던 무지의 시대에 무함마드는 여성들을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할 것을 명했으며, 여성들에 대한 상속을 법제화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THtoD49MQM1tjx56


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동료 우마르는 밖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공동체를 향해 “우리의 예언자는 죽지 않았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재림하여 우리 곁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만약 무함마드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칼에 목이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외쳤다. 그 순간 맏형격인 아부 바크르는 다시 우마르를 달래며 말했다 “그분은 돌아가셨다. 다시는 살아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처럼 그분의 몸은 흙이 되어 썩어 사라질 뿐이다.”
그는 이처럼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죽음을 맞았다. 철저히 인간으로 남은 그의 생애야말로 이슬람이 어떤 신비화나 신격화를 거부하고 무함마드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도자로 남아 있게 된 배경이 아닐까.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tdNTe9j1uWFmNJka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슬람교와 교단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중재자나 대속자 없이 신과 신자의 직접 대화나 교통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누구도 하느님에게 대적할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하느님은 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지도 않았다. 꾸란 전체의 3분의 1만큼 중요한 한 구절에 이 사상이 집약되었다.
「말하라, 그분은 오직 한 분
시작도 없고 영원하시도다.
그분은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았으니
그분과 필적할 자 아무도 없느니라.
- 꾸란 112장」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AWCgQSyCyJCsYXhf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슬로 협정과 라빈의 암살

걸프 전쟁 이후 야기된 정치적 상황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도 영향을 끼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사이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오슬로 평화 협정(1993)으로 이어졌다. 두 나라가 상호불가침과 외교 관계 수립 등을 통해 공존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1993년의 오슬로 평화 협정으로 마침내 이스라엘의 점령지인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 설립이 가능해졌다.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오랜 기간 분쟁과 갈등을 접고 화해와 공존으로 가는 중요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1995년 평화 협정의 이스라엘 당사자인 이츠하크 라빈 수상이 암살당하고 2001년 우파 리쿠드 당의 아리엘 샤론이 새로운 이스라엘 수상이 되면서 오슬로 평화 협정의 골격이 훼손되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yZkYq8WaZaU4HfVY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제리 민주화와 서방
- 민주적 선거로 이슬람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것을 서구는 반대한다?

1991년 알제리에서는 오랜 군부 독재 체제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알제리 대통령 차들리(Chadli)에 의해 다당제가 인정되었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실시된 1991년 총선에서 그동안 정치적 연금 상태에 있던 이슬람 정치 세력인 이슬람구국당(FIS)이 1차 투표에서 의석의 과반수 이상을 확보하였다. 예상 밖의 선거 혁명이었다. 다음 해로 예정된 2차 투표를 통해 이슬람 정당의 집권이 확실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슬람 정치 세력의 집권을 이슬람 원리주의의 부활로 확대 해석한 알제리 군부는 프랑스와 서구의 지지와 묵인으로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집권을 눈앞에 둔 이슬람구국당을 해체시키고 야당 인사들을 구금하였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 선거 방식이라도 서구의 이익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안겨 주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d76vUAZbkv1v7Yu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