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 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라는 이름은 자신의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로 획기적 변화를 연상시키게 될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이자, 자신이 추진한 개혁에 추월당한 개혁자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다민족 제국을 해체되게 한 황제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정보화시대로 이끌려고 했지만 소련의 몰락을 주재할 운명에 처했다. 혁명을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이 착수한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았어도 벌어지도록 ‘허용’한 일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소통의 달인이었다면 고르바초프는 촉진의 달인이었다. 힘으로 유토피아를 만들기 시작한 초기 볼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 고르바초프는 역사가 자연스러운 경로로 되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헤엄을 쳤다. 혁명이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해진 뒤에도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서 뒷걸음치지 않았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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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로 개종한 공산주의자,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핵심 인물은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다. 관료적 음모에 능한 밀로셰비치는 1980년 티토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동유럽에서 민족주의의 힘을 이해한 첫 번째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긴 세월 억압된 민족적 불만의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유고슬라비아의 6개 공화국 중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세르비아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지도자가 되었다. 밀로셰비치의 행동은 거장의 공연과도 같았다. 무신경하고 색깔 없는 공산당 당직자였던 밀로셰비치는 불과 몇 달 만에 세르비아 민족의 아버지로 변신했다. 공산주의 구체제가 붕괴하면서 종말을 맞기는커녕 거의 반세기의 균열 뒤에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밀로셰비치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역사의 재탄생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할 줄 아는 감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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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팔아먹은 공산주의자들

수년간 국가를 희생시키며 개인적 부를 축적하는 데 몇 안 되는 진짜 제약은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덕분에 그런 거리낌도 사라졌다. 소련경제를 통제하는 관료들은 각자의 지위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앞을 다퉜다. 놀랍게도 한때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자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 장군들은 NATO의 위협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연료와 군용품을 암시장에 팔았다. 자유 기업의 싹을 근절하도록 훈련받은 KGB 관리들은 상품거래소를 만들었다. 국가계획위원회인 고스플란 관리는 소련 경제의 작동 방식을 둘러싼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서 개인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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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권과 먹튀, 타라소프

큰돈을 버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공산품이나 원자재를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한 정부 가격으로 사서 훨씬 비싼 시장가격으로 파는 것이었다. 소련의 첫 백만장자인 아르툠 타라소프가 개척한 이 방법은 나중에 소련에서 성공한 사업가 다수가 따라 했다. 모스크바 시의회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타라소프는 소련의 폐품으로 미국 달러를 버는 법을 알아냈다. 나라 곳곳에서 고철을 샅샅이 찾아내어 헐값에 사서 서방국가에 판 다음 그 돈으로 컴퓨터를 구입해 러시아에 팔았다. 이 사업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며 규모가 금방 커졌다.

타라소프는 1990년 말 수익성이 훨씬 더 좋은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다. 새로 출범한 러시아 정부를 설득하여 자기 회사인 이스토크Istok가 원유 수백만 배럴의 수출허가권을 얻게 했다. 타라소프는 85센트에 해당하는 루블화로 원유 1배럴을 사서 해외에 20달러에 팔았고 이런 거래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타라소프가 러시아 당국과 서명한 계약에 따라 이스토크는 프랑스 은행 계좌에 자금을 보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도 있었다. 석유 판매로 얻은 외화는 “수확 ’90”이라는 인센티브 제도에 따라 러시아 농민들에게 이미 약속한 소비재 물품을 사는 데 사용해야 했다.43

1991년 4월 초 타라소프를 비롯해 타라소프와 함께 일하던 사업가들이 러시아를 떠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수확 ’90”에 배정한 돈도 프랑스 은행에서 사라졌다. 러시아 농민들은 또다시 손해를 봤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농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 마련한 수입-수출 협정에서 농민들이 얻은 유일한 혜택은 하자가 있는 고무 부츠 수천 켤레뿐이었다. 검찰은 타라소프를 “횡령”과 “배임” 혐의로 기소했지만 공소시효 때문에 정식 기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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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대 옐친
- 사회주의를 재정의하려던 고르바초프
- 고통스런 전향을 겪은 옐친


스타일과 성격보다 훨씬 큰 차이는 가장 결정적인 질문, 즉 “공산주의는 끝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태도였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재정의해서 그 의미를 많이 퇴색시키려는 의지는 있었어도 공산주의 이념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러시아가 11월 9일에 선택했다고 알려진, 돌이킬 수 없는 “사회주의 선택”에 대해 말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레닌은 난공불락의 권위로 남았다. 반면 옐친은 고통스럽고도 공개적인 전향 과정을 겪었다. 공산당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에 자극을 받아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신념을 재검토하고 더 이상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옐친의 지적 발전에서 한 가지 전환점은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1989년 9월, 더 구체적으로는 텍사스 휴스턴의 슈퍼마켓을 방문했을 때였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식품과 가정용품이 깔끔하게 쌓여있는 선반이 끝도 없이 이어진 광경에 놀라기도 했고 낙담하기도 했다. 미국을 처음 방문한 다른 소련인 방문객과 마찬가지로, 그런 모습은 옐친에게 자유의 여신상이나 링컨기념관과 같은 관광명소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그런 광경이 이례적이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랬다. 대부분 소련인이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소비재 상품을 일반 시민이 몇 시간씩 줄을 설 필요 없이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부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칙칙한 공산주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특권층인 엘리트에 속하더라도 서방의 슈퍼마켓 방문은 온몸이 마비되는 충격을 받게 된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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