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에는 노동과 자본이 필요하다고 쉽게 얘기하는데 이때 노동은 단순한 육체노동을 지칭하고 자본은 물적자본을 지칭한다. 그런데 단순한 육체노동의 투입과 물적자본 이외에 숙련과 기술도 생산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 숙련과 기술은 사람을 통해서 투입되므로 노동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물적자본처럼 교육이나 훈련과 같은 투자에 의해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경제학에서는 노동과 물적자본 이외에 생산에 영향을 주는 숙련과 기술을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적자본의 개념은 시카고 대학의 벡커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이후 노동경제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응용되었고 이후 경제성장론에도 적용되었다. 인적자본이 경제성장론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선진국은 노동자의 교육수준이 높고 후진국은 교육수준이 낮다는 자명하면서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교육수준의 차이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일인당 소득수준 격차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적자본이 경제성장론에 들어온 것이다.

솔로우의 경제성장모형을 약간 수정하면 그 안으로 인적자본이 들어올 수 있다. 앞선 로빈슨 크루소우의 예에서 크루소우는 2시간을 낚시대(물적자본)를 만드는데 사용한다고 가정했는데 이것을 바꾸어서 1시간을 낚시대 제작에 쓰고 1시간은 집중력을 키우기 위한 요가연습에 쓴다고 하자. 집중력 강화 훈련을 지속하면 점점 집중력 수준이 올라간다. 그리고 집중력 수준이 높을수록 같은 6시간의 노동시간과 낚시대 수로 더 많은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솔로우의 경제성장모형에서는 생산요소로서 노동과 물적자본이 있고 물적자본은 저축에 이은 투자에 의해 축적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소비하지 않고 남은 돈을 투자할 때 반드시 물적자본의 축적을 위해 투자할 필요는 없다. 인적자본의 축적에 투자할 수도 있다. 가계 소득은 소비와 저축으로 나뉘어 사용되는데 소비되지 않은 돈은 물적자본의 투자 외에도 인적자본의 투자에도 사용된다. 학교 등록금이나 학원비 등등이 인적자본의 투자비에 해당된다. 저축한 돈이 물적자본과 인적자본의 축적에 사용되고 물적자본과 인적자본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생산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저축도 늘어나서 다시 물적자본과 인적자본의 수준이 높아지는 호순환이 계속되고 이 과정에서 경제성장이 지속된다. 물적자본이 감가상각이 되는 것처럼 인적자본도 감가상각이 된다. 인적자본의 감가상각이란 계속적인 훈련을 하지 않으면 숙련도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감퇴되는 것을 말한다. 물적자본과 인적자본의 수준이 낮을 경우에는 투자량이 감가상각량보다 커서 자본의 순증가가 이루어지지만 자본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감가상각량이 커져서 결국 자본의 순증가가 없는 균제상태에 도달하게 되어 경제성장은 멈추게 된다.

이처럼 인적자본이 도입된 솔로우 모형은 솔로우 모형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앞서 솔로우 모형을 이용해 경제성장을 설명한 결과 자본증가의 영향이 크지 않고 설명되지 않은 기술진보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물적자본의 증가만을 고려했을 때 그러했고 인적자본도 함께 고려했더니 설명되지 않는 요소의 영향 중 상당부분이 인적자본의 영향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경제성장 = 노동량 증가 + 물적자본 증가 + 설명되지 않은 부분
설명되지 않은 부분 = 인적자본 증가 + 정말 설명되지 않은 부분

인적자본의 도입은 솔로우 모형을 낭떠러지에서 구원했다. 그런데 인적자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솔로우 모형에 심각한 변형을 가져오게 되었다. 솔로우의 기본모형은 기술에 변화가 없는 한 저축->투자->자본축적->생산증가->저축증가의 호순환과정은 점차 둔화되어 경제성장이 멈추게 된다는 예측을 담고 있다. 앞서 설명한 인적자본이 도입된 솔로우 모형 역시 이러한 예측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이 생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가정을 약간 수정했더니 놀랍게도 저축->투자->자본축적->생산증가->저축증가의 호순환과정은 둔화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이런 소식은 처음에 좋은 소식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균제상태에 도달한 듯 보이는 미국조차도 매년 2% 정도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계속되었는데 이것을 경제학이 잘 설명하지 못하는 기술의 영향으로 두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자본의 영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이론적으로 우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가정을 수정했다는 것일까? 독자는 한계생산 체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의 한계생산 체감이란 노동 투입량을 한단위 더 추가할 때 늘어나는 추가의 생산량이 노동 투입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자본의 한계생산 체감도 이와 유사하다. 로빈슨 크루소우의 예에서 노동시간을 6시간으로 둔 채 낚시대가 하나씩 늘어남에 따라 생산량이 6->10->13->15개로 변화했는데 이때 생산량의 증분은 4->3->2로 줄어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한계생산 체감이다. 단, 하나의 생산요소의 한계생산 체감을 말할 때는 항상 여타 생산요소의 양은 불변으로 고정되어 있음에 주의하라.

자본을 물적자본과 인적자본으로 나누는 경우에도 한계생산 체감의 원리는 작용한다. 경제학자들은 물적자본의 한계생산이 체감하고 인적자본의 한계생산도 체감한다는 점에 대해 대부분 동의한다. 물적자본량은 고정되어 있고 교육수준이 올라갈 때 한계생산은 체감하며 교육수준은 불변이고 물적자본량이 늘어나면 한계생산은 체감한다.

그런데 물적자본과 인적자본을 합친 자본 전체가 한계생산 체감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까? 쉽게 말해서 단순노동은 불변인데 물적자본이 2배로 늘고 인적자본도 2배로 늘게될 경우 생산량은 2배로 늘까, 아니면 2배 이하로 늘까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한계생산 체감의 원리가 작용하여 2배 이하로 는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다른 학자들은 2배로 늘어 한계생산 체감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계생산 체감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물적자본의 증가가 인적자본의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인적자본의 수준 상승도 물적자본의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상호보완효과가 매우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루카스 교수는 이런 의문을 말한 바 있다. "자본량이 많으면 금리가 낮고 자본량이 적으면 금리가 높다. 이론적으로 선진국은 금리가 낮고 후진국은 금리가 높다. 그런데 왜 선진국의 자본이 금리가 높은 후진국으로 대량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루카스 교수 본인이 내놓은 답변은 인적자본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인적자본이 동일한 수준이라면 자본량이 많은 선진국의 금리가 낮을 것이지만 선진국의 인적자본 수준이 높아서 같은 물적자본이라도 선진국에서 훨씬 높은 생산성을 발휘하게 되고 따라서 선진국의 금리가 후진국보다 낮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본 전체적으로도 한계생산 체감이 있을 경우에는 결국에는 성장이 멈추는 상태로 귀결되며 자본 전체적으로는 한계생산 체감이 없다면 저축->투자->자본축적->생산증가->저축증가의 호순환과정은 둔화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 물론 후자의 경우에도 자본축적이 낮은 수준일 때는 성장률이 높고 자본축적과 함께 성장률이 떨어지고 자본축적이 일정궤도에 이르면 성장률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런 점에서 전후 독일과 일본의 경제기적을 여전히 설명할 수 있다.

인적자본이 경제성장모형에 도입되면서 경제성장이론은 보다 많은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론적으로도 많은 함의와 예측을 제안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놓은 설명들에 대한 반론과 의문도 만만치 않게 늘어 갔다. 인적자본에 대항한 대표적인 이론이 연구개발과 기술혁신을 강조하는 성장이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계속 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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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우 경제성장 모형은 자본축적에 의해 경제가 성장한다는 아이디어를 체계화시킨 것이다. 국민소득은 노동의 투입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투입도 필요하다. 노동량이 불변일 때 자본량이 늘어나면 생산 및 소득은 늘어난다. 그런데 노동은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라 인간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지만 자본은 지금 당장은 그 크기가 주어져 있지만 오늘 저축하여 투자하면 내일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저축과 투자가 경제성장에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무인도로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우를 생각해보자. 크루소우는 아무 것도 없이 출발하며 물고기로 연명하고 하루 8시간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자. 모든 시간을 맨손으로 물고기 잡는데 쓴다면 항상 10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물고기는 하루가 지나면 먹을 수 없으므로 크루소우는 매일 10마리만 먹고 산다.

어느날 월요일 아침 크루소우가 생각을 바꾸어서 2시간을 낚시대를 만드는데 쓰고 6시간을 맨손으로 물고기 잡는데 쓰기로 했다. 낚시대 하나를 만드는데 2시간이 들고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면 6마리의 물고기를 잡는다고 하자. 크루소우는 하루 6마리밖에 먹지 못하므로 예전보다 배가 고프고 고생스러워졌다. 하지만 화요일에는 낚시대 하나를 갖고 물고기를 잡게 된다. 낚시대 하나를 가지고 6시간을 들여 물고기를 잡으면 10마리를 잡을 수 있게 된다. 크루소우는 나머지 2시간은 여전히 낚시대 만드는데 쓴다. 수요일에는 낚시대 2개를 갖고 물고기를 잡게 된다. 낚시대 2개로 6시간 물고기를 잡으니 13마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2시간은 낚시대를 또 만들었다. 목요일이 되어 낚시대 3개로 6시간을 들여 15마리를 잡고 또 낚시대를 하나 더 만들었다.

낚시대는 견고함이 부족하며 사흘을 쓰게 되면 망가진다. 이럴 경우 금요일에는 낚시대가 4개가 아니라 3개밖에 남지 않는다. 목요일에 만든 낚시대가 하나 늘었지만 월요일에 만든 낚시대가 목요일 저녁에 부러졌기 때문이다. 크루소우는 이제 하루 6시간은 3개의 낚시대로 물고기 15마리를 잡고 나머지 2시간은 매일 부러지는 오래된 낚시대 하나를 만드는데 쓰며 생활하게 된다. 맨손으로 생활하던 때에 비해 5마리를 더 먹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야기에 솔로우 경제성장 모형의 중요한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생산 및 소득은 물고기의 개수이다. 낚시대는 자본이며 4시간의 낚시대를 만드는 시간은 소비를 포기하고 저축을 하는 행동이자 새로운 자본을 만드는 투자 행동이다. 투자를 통해 자본이 축적되면서 결국에는 더 많은 생산을 하게 된다. 저축->투자->자본축적->더 많은 생산의 논리가 솔로우의 핵심이다.

이제 솔로우 자신의 모형을 보자. 솔로우는 국민소득(Y)이 노동(L)과 자본(K)을 함께 이용해 만들어진다고 가정했다. 이때 노동은 가만 두고 자본만 늘어날 경우 소득은 늘어나지만 늘어나는 속도는 점점 줄어든다. 자본은 저축(S)에 이은 투자(I)에 의해 증가할 수 있다. 자본은 일정 비율(d)만큼 감가상각되어 사라진다.

K(t+1)=K(t) + I(t) - d K(t)

솔로우는 저축되는 양이 소득의 일정비율(s Y)이라고 가정했다.

K(t+1)=K(t) + s Y(t) - d K(t)

감가상각되는 양(d K)보다 저축되는 양(s Y)이 더 많으면 자본량은 순증가한다. 자본량이 적을 경우 저축되는 양이 감가상각되는 양보다 많아서 자본량이 순증가된다.

s Y(t) > d K(t) => K(t+1) > K(t)

자본량이 늘어나면 저축되는 양은 증가하지만 그 증가속도는 자본량 증가에 따른 소득의 증가속도가 떨어지므로 점점 저축량의 증가속도가 둔화된다. 이에 비해 감가상각되는 양은 자본량에 비례하므로 둔화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증가된다. 결국 일정 자본량 수준에 도달하면 저축되는 양과 감가상각되는 양이 일치하게 되고 더이상 자본의 순증가는 없다.
출발점이 자본량이 너무 많은 상태라고 해보자. 이 경우 저축되는 양보다 감가상각되는 양이 더 많다. 이럴 경우 자본량은 순감소한다.

s Y(t) < d K(t) => K(t+1) < K(t)

자본량이 감소하여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축되는 양과 감가상각량이 일치하여 더이상 자본의 순감소는 없다. 이처럼 자본의 순증가도 순감소도 없는 상황을 솔로우는 균제상태(steady state)라고 불렀다.

솔로우의 기본모형은 다음의 함의를 갖는다.
첫째, 균제상태로 가는 동안에는 빠른 경제성장이 나타나며 자본량이 늘어남에 따라 성장률은 점점 떨어진다. 자본량이 적은 나라는 경제성장률이 높고 자본량이 많은 나라는 경제성장률이 낮다. 이 점은 1945년부터 1970년 사이 선진국 내에서의 소득수렴현상에 의해 크게 주목받았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황폐화된 일본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 등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미국과의 상대적 격차를 줄여나갔다. 솔로우의 기본모형은 선진국 내의 소득수렴을 설명하는 점에서 강점을 가지지만 후진국들이 왜 선진국과의 상대적 격차를 줄이는데 성공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 저축성향이 높아 저축률이 높은 나라는 저축성향이 낮은 나라에 비해 더 큰 자본량과 더 큰 소득수준에서 균제상태에 도달한다. 따라서 균제상태를 비교하면 저축률이 높은 나라는 저축률이 낮은 나라에 비해 일인당 소득수준이 높다. 후진국 중에서 경제성장에 성공한 동아시아 NICs의 저축률이 매우 높았다. 이에 비해 라틴아메리카의 저축률은 낮았다. 후진국 중에서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의 성공요인을 저축률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솔로우 모형의 강점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왜 이 나라들은 저축성향이 높은가에 대해서는 문화적인 차이 등이 거론되었지만 대체로 그다지 믿을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약점을 갖고 있다.

솔로우의 기본모형은 저축률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취하고 있는데 경제성장과정에서 저축률은 변화한다. 저축률은 무엇에 영향받냐면 소득수준에도 영향받지만 무엇보다도 이자율에 영향받는다. 금리가 높으면 저축을 많이 한다. 그런데 금리는 자본량 수준에 영향받는다. 자본량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자본이 추가되면 큰 생산증가가 있으므로 자본에 대해 높은 이자를 주더라도 빌려 쓰려고 한다. 이자율이 높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오늘의 소비를 희생하고 저축을 통해 내일의 소비를 늘리고자 한다. 자본량 수준이 낮을 경우에는 이자율이 높고 저축률도 높다.
자본량 수준이 증가하면 자본 추가에 따른 생산증가가 둔화된다. 경제 내에 투자할만한 왠만한 사업기회는 다 이용되었으므로 낮은 수익을 보장하는 투자처만 남게 된다. 이에 따라 자본을 빌려 쓰는 사람들은 많은 이자를 줄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이자율이 떨어진다. 이자율이 떨어지면 오늘의 소비를 희생할 유인이 떨어진다. 이에 따라 저축률은 줄어든다.
이러한 저축률의 변화가 솔로우의 기본모형의 결론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저축률이 높은 나라가 결국 더 잘살게 된다는 두번째 함의가 약간 변경된다. 원래부터 저축률이 높은 나라라고 해도 경제성장과정에서 저소득상태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저축률이, 고소득상태에서는 낮은 저축률이 관찰된다. 이것은 저축률이 무척 높았던 일본의 저축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앞선 솔로우의 기본모형에서는 노동량이 고정되어 있다고 썼는데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을 고려할 수 있다. 이 경우 약간 모형이 복잡해지므로 수식은 제시하지 않고 결과만 제시하면 인구증가율이 높은 나라는 균제상태 소득수준이 하락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인구증가율이 높은 나라의 소득수준은 낮고 인구증가율이 낮은 날의 소득수준은 높다.

솔로우의 기본모형에서는 생산성이 노동과 자본량에만 의존할 뿐 기술이나 지식의 영향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 노동과 자본량이 불변이더라도 기술과 지식이 증가하면 생산성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생산성의 증가는 소득증가를 낳고 이것은 저축증가를 낳고 자본증가를 낳으며 다시 소득증가->저축증가->자본증가의 호순환과정을 거쳐 균제상태 자본량을 증가시킨다. 기술과 지식의 증가는 균제상태 소득수준을 증가시킨다. 기술이 계속 향상되면 균제상태 소득수준도 계속 증가된다. 솔로우의 기본모형은 결국 성장은 멈춘다는 약간은 암울한 전망을 갖고 있는데 기술과 지식의 향상을 고려하면 성장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솔로우는 일인당 소득의 증가를 자본증가의 영향과 기술향상의 영향으로 구분하여 연구했는데 그 결과는 기술향상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솔로우의 기본모형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솔로우는 자본증가에 대한 설명에 치중해 있고 상대적으로 기술향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는데 실제 선진국의 경제성장은 주로 설명하지 않었던 기술향상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점을 설명하지 않은 불완전한 이론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솔로우의 기본모형은 세인들의 관심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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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험지옥-과거 - 중국학술사상 15
미야자키 이치사다 / 청년사 / 198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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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평이란 참 애매한 장르이다. 길게 늘어놓으면 차라리 책을 읽는 것이 나은데 왜 서평을 읽냐는 소릴 들을테고 너무 짧으면 내용도 알 수 없고 느낌만 기록된 것이 무슨 평이냐고  한 소릴 듣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쓴 서평들을 읽어보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쓴 서평들을 읽어보면서 내 나름대로 서평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능한 한 짧아야 한다. 긴 서평이란 단편소설을 요약하는 행위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둘째, 읽는 이에게 이 책이 읽을만한 책(또는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라는 서평자의 느낌을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책의 판매자로서 이득을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평되는 책을 읽는 이의 증식(또는 그것의 차단) 자체로 기쁨을 느끼는 서평 고유의 목적에 부합되는 준칙이다.

셋째, 본인이 나중에 읽었을 때 도움이 되는 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란게 읽고 난 뒤 생각하고 느낀 바를 글로 남겨 정리해둘 때 훨씬 자신에게도 남는게 많다. 일종의 독서노트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런 세가지 요건을 충족하는 서평쓰기에 나 자신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세가지 원칙을 지킨다면 내가 쓴 서평도 좋은 서평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미야자키 선생의 이 책은 이전에 내가 읽은 이스트만의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돌베개, 1999, 이승휘 옮김) 그 중에서 특히 제9장 근대 전기의 새로운 사회계층을 읽으면서 느낀 문제의식 때문에 읽게 되었다. 나는 중국의 전통시대 과거제도가 의외로 비용측면에서 값싼 계층이동의 수단이라는 이스트만의 평가에 흥미를 느꼈고 실제로 그러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학문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 글을 읽다가 참고문헌에 있는 글을 읽고 싶어서 뒤져서 읽게 되면 새로운 문제의식을 느끼고 다시 그 글의 참고문헌을 뒤지게 되어, 결국 산더미같은 지식의 네트워크 속에서 희열을 느끼며 헤매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은 이스트만의 책에서 흥미를 가진 문제 이외에 독자적인 또다른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것은 과거제도와 교육제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교육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인재를 선발하는 목적을 놓고 보완관계일 수도 있고 대체관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전국적인 교육시스템의 구축은 정부의 재정 부담을 크게 하는 것이었으며 최소한 명, 청조는 교육시스템에 투자를 꺼렸다(북송대는 학교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교육은 민간 자체의 비용부담에 맡겨졌고 정부는 값싼 시험제도만을 운용하여 필요한 인재를 뽑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근대적 교육시스템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리를 맴돌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드는 의문은 과거제도가 우리 역사의 제도와 참 유사하다는 것과 함께 그렇다면 과거제도를 둘러싼 중국 내의 논쟁이 우리에게도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논쟁이란 예를 들면- 과거는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닌가, 교육시스템에 투자를 하는 것은 어떤가, 채점관의 부정을 막기 위해 시험지의 이름을 가리거나 필체를 알 수 없게 사본에 의해서만 채점을 했던가, 사농공상 모두에게 시험자격은 공평했던가, 문벌귀족과 사대부 사이의 과거를 둘러싼 투쟁은 없었는가 등등이다. 이런 질문이 그 시대 내에서 또는 그 시대를 연구하는 현시대에서 없을리 만무한데, 과연 그러하다면 우리의 선조들과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이런 문제에 어떤 고유한 대답을 하였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우리 역사학의 현단계를 보여주는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싶다.

이 책은 미야자키 선생이 대중용으로 저술한 책이다. 전혀 딱딱하지 않고 소설책처럼 읽힌다. 이 말은 단순히 쉽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좋은 소설처럼 과거를 치루던 사람들의 마음 속까지 우리의 머리 속에 재현시켜준다는 점에서 명저라고 불릴만하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가장 주관적으로 서술된 "과거에 대한 평가"와 "저자 후기"만을 읽어도 얻는 바가 상당하다.

마지막으로 써놓고 보니 너무 긴 서평이다. 첫번째 조건부터 충족하지 못한 졸평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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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학문.정치 범우문고 119
막스 베버 지음, 김진욱 옮김 / 범우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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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난 뒤 느낌은 크게 두가지다. 첫번째는 원저와 관련된 것으로서 왜 이 책이 유명한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한정하여 특별히 전달되는 메시지는 없어보인다. 내가 특별히 느끼는 바가 없는 이유는 짐작으로는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상황에서 독일의 미래를 둘러싸고 온갖 정파들이 논쟁을 벌이는 환경을 기반으로 쓰여진 책이다. 독일이 나아가야할 길에 대한 시대적 고민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논쟁이 이루어졌는지 잘 모르는 백년 후의 독자가 이 책만으로 저자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애초부터 어려운 일 아니었을까. 역자 서문에서 소개된 것처럼 동시대인들은 베버의 글로부터 엄청난 감동을 받았겠지만 나로서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대해 그리 배운 것 없이 책을 덮었다.

두번째 느낌은 번역과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의 번역은 실망스럽다. 책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원래 어려운 책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을 잘못해서 어려운 책이다. 이 번역서는 후자의 고전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왜냐하면 교단 위에서의 예언은, 교실 속에서는 아무래도 솔직한 지적 염직 이외의 덕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불명확하여 여러번 읽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문장뿐만 아니라 단어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눈에 띤다. 예를 들어 '지성의 희생', 지식과 대비되는 말로서의 '소유'  등등이다. 번역하기 힘든 단어일 경우 독일어 원문을 싣고 말의 맥락을 미주를 통해 설명해주는 수고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다 긴 해제가 달린 보다 나은 번역서를 찾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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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가 왜 중국에서 성공하지 못했느냐는 이스트만의 질문은 제국주의가 중국의 산업화의 걸림돌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은 지난 10여년 사이 한국의 경제사학회 내에서 안병직, 이영훈 선생의 연구에 의해 중심화두로 부각된 질문이기도 하다. 일제의 침략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파괴적인 작용을 했는지에 대해 안병직 선생은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기반을 형성한 긍정적 효과를 실증적으로 밝혀내는 작업을 오랫동안 계속해왔다. 이런 연구는 국사학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지만 국사학계는 안병직 선생의 연구성과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실증연구를 산출하는데는 - 최소한 지금까지는 -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이스트만의 책 제8장은 한국 경제사학계와  국사학계의 치열한 논쟁을 염두에 두고 읽은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이스트만이 요약한 제국주의의 중국 산업화에 대한 파괴적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거액의 보상금을 강요했다.

둘째, 1895년 이후 개항장 안에 공장을 설립한 외국인은 막대한 이익을 본국으로 송금했다.

셋째,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수입관세를 5% 이상 부과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미성숙한 산업을 보호할 수 없었다.

넷째, 값싼 공산품의 수입은 중국의 전통적 수공업을 파괴하여 인민을 빈곤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인민의 구매력을 저하시켰다.

다섯째, 중국경제를 불안정한 세계 무역 시장으로 끌어들여 세계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해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지 못한 이들을 수요와 가격 변동에 노출시켜 생산자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견해가 제국주의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정통파적인 고전적인 논의라고 한다면,  수정주의적 견해가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경제사학계에서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수정주의적 견해를 이스트만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외국의 제조업과 투자는 개항장과 만주에 집중되어 있어서 중국 국내의 경제는 제국주의의 충격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제국주의의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둘째, 비록 관세주권을 제국주의가 제약한 점은 있지만 중국인 역시 외국인에 비해 불공정한 이점을 향유했다. 예컨데 중국인들은 중국 소비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고 시장구조나 상관행에 대해 우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외국상품 보이콧이나 국산품 장려운동은 외국인에게 매우 불리했다.

셋째, 서양의 충격은 근대적 기술, 경영기법을 도입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넷째, 무역은 농민이나 수공업 생산자에게 제품을 좀더 나은 가격에 판매하는 기회를 부여했다.

다섯째, 중국계 기업은 외국계 기업에 뒤지지 않는 성장률을 보였고 이윤율도 거의 동등했다. 중국의 산업화를 외견상의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바닥에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이스트만의 주장의 핵심은 산업화의 지체요인으로서 제국주의는 기껏해야 부분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산업화가 지체된 근본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산업혁명에 성공한 나라가 독특하고 이례적인 것이며 실패한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공한 후 프랑스와 독일이 산업혁명을 완수하는데 거의 100년이 걸렸다. 영국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들 나라들도 산업혁명을 완수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점을 생각하면 중국이 산업화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독일과 프랑스의 상황을 중국의 상황과 비슷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1880년대부터 1949년 사이 중국의 산업화의 성과는 그렇게 비참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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