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만들어지는 보험은 기본적으로 같은 타입의 사람들의 위험에 대한 대응책이다. 사람의 타입에 따라 위험에 차이가 날 때 이런 다른 타입의 사람들이 섞인 보험은 균형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에 둘 이상의 타입이 가입할 경우 어느 한 타입이 손해를 보게 되고 손해를 보는 타입은 자신들만을 위한 보험에 들지 섞은 보험에 들지 않으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영보험은 가능한 한 세분화된 타입들로 나뉜다.
문제는 여러 타입을 섞은 보험을 가입하면 이익을 보는 타입들이 대체로 불쌍한 사람들(레 미제라블)이라는데 있다. 이들 타입은 위험이 높다. 그리고 하나의 종류의 위험만 높은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위험도 높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높은 위험에 상응하는 높은 보험료를 낼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들은 보험을 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둘 것인가. 물론 그냥 두자는 냉혹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오늘날의 대세이다. 이들을 돕는 해결책은 두가지다. 하나는 정부가 이렇게 보험을 들 수 없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정부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보험을 들 수 있는 이들로부터 세금을 걷어야 한다. 형편이 나은 이들의 양보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여러 타입을 섞은 보험을 만들어서 강제로 모두 가입시키고 형편이 좋은 타입의 사람에게 보험료가 좀더 비싸지더라도 참고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형편이 나은 타입에게 양보를 요청하는 것이다. 전자를 공공부조라고 부르고 후자를 사회보험이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대로 사회보험은 다른 타입의 사람들을 강제로 하나의 보험에 가입시켰기 때문에 돈 내는 사람 따로 있고 돈 받는 사람 따로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실업보험(우리나라에서는 고용보험)의 경우 실업할 확률이 높은 타입의 사람들은 덜 내고 더 받고, 실업할 확률이 낮은 타입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질병보험(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의 경우 질병에 잘 걸리는 타입의 사람들은 덜 내고 더 받고, 건강한 타입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산재보험의 경우 재해율이 높은 사업장의 사람들이 덜 내고 더 받고, 재해율이 낮은 사업장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노령연금(우리나라에서는 국민연금)의 경우 노후를 준비하기에 경제적 여력이 없는 이들이 덜 내고 더 받으며, 노후를 대비하기에 충분한 재력을 갖춘 이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실업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것 아닌가. 의료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 아닌가. 산재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다치지 않는 것 아닌가. 노령연금을 받지 않는 대신 넉넉한 재산이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재산을 넉넉히 갖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은 좀 더 내고 덜 받는다고 그렇게 열받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좀 불공평하지만 양보할만 하지 않은가.
* 이 글은 김태성, 김진수(2001), 사회보장론, 청목출판사.를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메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