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얻게된 소중한 정보 중의 하나는 전통중국에서 교육이 갖는 의미였다.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를 선발했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많이 이들이 평생을 매달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과거제도와 이를 위한 교육제도가 나름대로 계층이동을 위한 효과적인 통로로서 기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옛 교육제도 아래에서 교육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사숙은 일반적으로 촌락에 있었기 때문에 학생은 자신의 집에 거주하며 다닐 수 있었다. 유교경전이나 묵필, 종이 등의 가격은 대부분의 농촌 소년에게도 지불 가능한 액수였다. 게다가 친척이나 종족, 혹은 촌락이 총명하지만 가난한 소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젊은이의 교육을 주로 방해한 것은 금전보다도 오히려 시간이었다. 가난한 농민은 농사일을 도울 자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p. 269)."
이스트만의 주요 논점 중의 하나는 중국이 근대화를 경험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엽 사이에는 근대교육이 과거제도에 비해 훨씬 비싸고 서민이 접근하기 어려운 이동경로였다는 점이다. 근대교육은 우선 도시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농촌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의 경우 도시에 유학할 수 있는 비용이 필요했다. 또한 근대적 학교의 수업료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다. 그리고 교재 역시 선배나 선조로부터 물려받을 수 없고 새로 장만해야 하므로 부대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20세기 초엽 중국의 새로운 엘리트는 유학파였다. 상해의 어느 회사의 월급표에 따르면 최고의 연봉을 받는 이는 서구 유학파이다. 중국의 대학 출신은 월급이 80원에 3X1.5 책상을 받았지만 일본의 제국대학의 월급은 150원, 유럽과 미국의 대학은 200원이었다. 하버드나 옥스포드 출신은 250원을 받았고 맞춤책상, 서가, 등나무의자에 크리스탈 잉크스탠드를 받았다.
청조 말엽에 정부는 국비를 들여 학생들을 유학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의 유학생들은 가난한 천재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엘리트 집안의 자제들은 유학을 엘리트코스로 여기지 않았기에 유학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학을 통한 성공 가능성이 확연해지자 엘리트 가문이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자제들을 유학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변화의 시점에 부패한 청조가 신해혁명과 함께 무너지자 국비유학생이 급속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난한 천재들이 유학을 통해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격감하였다.
중국 유학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들이 근대혁명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인데, 이런 현상은 러시아의 혁명운동이나 독일 나치 운동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유학파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국민당계열과 공산당계열은 약간 차이가 난다. 전형적인 공산당 지도자는 지주나 부농의 자제로 농촌 출신이며 소련이나 프랑스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이에 비해 전형적인 국민당 지도자는 상인이나 도시 전문직 종사자의 자제이며 해안지역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에서 공부하였다.
이스트만의 이런 설명은 중국 근대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한국의 근대사에도 비슷한 굴곡이 있을텐데 관련된 연구를 요약한 글을 읽어보고 싶다. 근대조선, 일제강점기에서 근대교육이 전통교육과 비교할 때 민중에게 얼마만큼의 기회로 여겨졌는지가 궁금하며, 근대화운동 및 민족해방운동에서 유학파는 어떤 배경의 인물들이었으며 어떤 역할들로 분화되었는지를 읽을 수 책을 만나기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