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혁명의 신화와 실제

국왕은 점증하는 탄압의 소용돌이 속으로 국가를 몰아넣었고 그 결과 갓 태어난 민주주의의 도정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국왕은 모든 부분에서 즉각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은 그가 비이슬람교도에게 투표권을 주자 분개했다. 또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은 국왕의 기반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한편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민족주의자들은 굴욕감을 느꼈다. 그 쿠데타는 국민들로 하여금 외세의 입김을 받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 < 지리의 힘 2, 팀 마샬 / 김미선 > 중에서


현정권은 신앙심 깊은 국민들이 아야톨라(이슬람 시아파에서 고위 성직자에게 수여하는 칭호)들이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며 거리를 뒤덮었던 일을 즐겨 거론한다. 하지만 당시 사정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국왕 퇴위의 서곡이 된 시위들에는 세속적인 단체들, 공산주의자들, 노동조합, 그리고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를 중심으로 한 종교 단체들까지 섞여 있었다. 호메이니는 신속하게 여타 그룹의 사람들 수천 명을 사살했다. 그렇게 해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 지리의 힘 2, 팀 마샬 / 김미선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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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시아파와 영국 성공회

사파비 왕조의 탄생은 이란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1501년 이스마일 왕은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분열의 기원은 서기 632년 선지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뜬 뒤 누가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를 두고 싸운 서기 680년의 카르발라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이스마일 왕이 시아파를 택한 데는 정치적 동기가 상당히 작용했다고 보는 역사가들이 많다. 영국 역사에서 헨리 8세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드는 나라로 규정하기 위해 성공회교를 주창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이해될 듯하다. 이스마일 왕은 사파비 왕조를 그들의 최대 숙적이라 할 수니파 오스만 제국과 맞서는 나라로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 < 지리의 힘 2, 팀 마샬 / 김미선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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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 마블


거짓말처럼 영국인들이 싹 떠나버렸다.
이내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이 있는 서부로 가기 위해 인도의 새 국경선으로 몰려들었다. 마찬가지로 수백만 명의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반대편 국경으로 몰려왔다. 공동체 하나가 이동할 때마다 족히 3만 명은 되는 인간 띠가 길 위에 펼쳐졌다. 열차 칸칸마다 대륙을 교차하는 난민들이 숨 쉴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찼다. 열차들은 사람들을 도시로 토해냈다. 귀환하는 열차 또한 반대 지역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 지리의 힘, 팀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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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중앙아시아에서는 인도를 향해 남하하는 러시아와 식민지 인도를 지키려는 영국 사이에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벌어지고 있었다. 1853년 10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벌인 크림전쟁에 오스만 편으로 참전했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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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제도의 타락
- 조선 전성기의 재정제도와 비교하여 대한제국의 그것은 얼마나 타락했을지 따져보고 싶다.

국가 예산을 집행하는 탁지부는 토지세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호세戶稅, 일부 사업 수익만 재원으로 가지게 됐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내장원은 갑오정부에서 폐지한 무명잡세를 대거 부활시켜 내장원이 징수하도록 했다. 소금에 염세를 부과했고, 포구 여관에도 세금을 부과했고 벌목한 통나무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무명잡세가 부활한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1905년 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 황실 1년 수입은 국고에서 지급하는 165만여 원과 내장원 수입 326만 원을 합한 491만여 원이었다. 내장원 자체 수입이 전체 황실 수입의 66.3%로 국고에서 지급하는 수입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 역둔세(각종 공유지에 매기는 토지세)가 62만 원, 인삼세가 200만 원, 광산세가 4만 원, 사금砂金 수입이 60만 원, 합계 326만 원이었다. 탁지부가 관할하는 국고 실수입의 69.6%(1903), 43.9%(1904)에 달하는 규모였다.41 그리고 그 수익은 실질적으로 황제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황제 소유였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제국 건설 2년 뒤인 1899년 8월 24일 황실 재산관리 기구인 내장원을 대폭 확대하고 11월 16일 최측근 이용익을 내장원 수장인 내장원경에 임명했다.37
그때 이용익은 탁지부에서 돈을 찍는 전환국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용익은 홍삼을 관리하는 삼정감독과 광산을 관리하는 광무감독까지 겸했다. 1900년 탁지부 소속이던 전환국은 황제 직속으로 승격됐다. 그해 말 고종은 이용익을 탁지부 차관급인 협판에 임명했다. 이로써 고종은 이용익을 통해 국가 예산을 맡은 탁지부와 황실 금고 내장원을 함께 장악했다.38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대한제국은 옛 방식 그대로 지방관과 지방 서리들에게 징수를 맡겼다. 이들이 백성으로부터 거둔 세금이 중앙으로 올라올 때까지 많은 부정이 개입됐고 이는 예전 삼정문란 때처럼 심각한 수준이었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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