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자제력이 다른 유인원들을 능가하기 시작하는 것은 4세에서 6세 이후로, 마시멜로 테스트도 이 시기부터 가능하다.37,38 자제력은 아주 더디게 발달해서 20대 초반이 되어야 완전한 성인 수준의 자제력을 갖추게 된다(이것이 10대에 우리가 위험한 일을 많이 저지르는 이유이며, 16세의 자동차 보험료가 21세의 보험료보다 비싼 이유다). 다행스러운 것은, 10대 청소년기에는 실패의 감정도 더 강렬하기 때문에 뭐든지 빨리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39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헤어,버네사우즈 / 이민아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GvZnaZF8rWUJB4i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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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발명
-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다 왕국의 후손들이다
- 세상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은 개종한 지중해 연안국의 사람들이다.

시온주의는 종교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주의의 하나이다. 건국의 주역들 중 많은 이들이 무신론자들이었다. 바이츠만, 벤구리온, 골다 메이어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스라엘 건국부터 1977년까지 집권한 정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좌파정당이었다. 벤구리온 총리가 이끈 마파이당 그리고 이를 이어 받은 이스라엘 노동당이 초기 이스라엘을 이끌었다. 1977년 이후 우파정당과 좌파정당이 엎치락뒤치락 했고 1990년대 이후 우파와 종교적 시온주의자들 나아가 극우파가 결합한 이들이 이스라엘의 주류가 되었다.










기원 전후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된 유다 왕국 패망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뿌리나 정체성은 시오니즘 운동 이후 논란의 대상이었다. 유대인이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됐다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신화는 그 이후 팔레스타인에서는 고대 이스라엘의주민 혹은 유다 왕국 주민의 종족적 뿌리를 가진 주민들이 사라졌다는인식을 일반화시켰다. 이 사안에 대해 가장 논쟁적인 화두를 던진 사람은 텔아비브대학교 역사학자인 슐로모 산드이다. 유대인은 기원 전후 지중해 전역에서 개종한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산드는 고대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국 주민들의 역사적 뿌리를 이어간 이들이 팔레스타인의 펠라힌이라고 주장했다. - P326

하지만, 초기 시오니스트 사이에서 널리 퍼졌던 팔레스타인 펠라힌이 유대적 기원을 가졌다는 주장이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펠라힌의 융합 시도는 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갔다. 벤즈비가 팔레스타인 펠라힌과 유대인 사이의 공통 기원을 연구한 소책자를 발표한 1929년에 유대인의 입식 과정을 둔 갈등으로 헤브론에서의 아랍 주민 폭동과 학살 사건이 폭발했다. 헤브론 폭동으로 본격적으로 점화된 팔레스타인 현지 주민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은 1936~1939년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광범한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인해 시오니스트 사상가들이 갖고 있던 팔레스타인 현지 주민과 유대인의 통합이라는 꿈은 완전히 동력을 잃고 말았다. - P334

‘야훼라는 유일신을 믿던 이스라엘 종족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하고,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통일왕국이 영화를 누리고, 이들이성경을 만들고 유대교를 발전시켜, 기독교 등 유일신앙의 모태가 되고,
로마의 정복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돼 유랑과 이산을 겪고, 서방 기독교 세계에서 박해받다가, 고토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이스라엘을건국하고, 주변 아랍 국가와의 투쟁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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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중동전쟁의 결과
- 요르단의 서안지구 점령
- 이집트의 가자지구 점령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이 유엔 결의안에 규정된 자신들의 영역 이상을 확보하는 완승으로 끝났다. 다만,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차지했고,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차지했다. 전쟁 뒤 건국에 성공한 이스라엘로부터 요르단은 별다른 대가를 지불받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자국의 힘에 자신감을 가지자, 요르단과의 협력이 절실하지 않았다. 요르단이 서안 지구를 점령해 이스라엘 국내의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떠안아주자, 이스라엘로서는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었다. 반면 압둘라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수용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이 취약해졌다.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압둘라의 통치력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 P393

이런 상황은 시오니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건국 전쟁, 팔레스타인/아랍 입장에서 보면 ‘나크바Nakba‘로 치달았다. 아랍어로 재앙, 참화라는 뜻인 나크바는 75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추방 사태를 의미하는 ‘팔레스타인 참화‘라는 뜻의 고유명사가 됐다.

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는 유엔 결의안 181호가 가결된 다음 날인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이 완전철수하고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된 1948년 5월 15일까지의 내전이다. 2단계는 이스라엘 건국의 선포를 저지하려는 주변 아랍국가와 이스라엘의 전쟁이다.

1948년 5월 15일부터 1949년 3월 10일까지 진행된 이 전쟁은 흔히 1차 중동전쟁 혹은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불린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현대 중동분쟁의 시작이었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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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와 민족주의

특히, 유대인에게 성지로의 집단적 귀환은 시온에서 최후의 집단적 구원을 징조하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할 뿐이다. 시온이 있는 예루살렘은 종교적 성지일 뿐이다. 유대인의 조국 땅이거나, 나라를 재건할곳은 아니었다. 기독교도, 무슬림, 불교도가 성지를 갈망하고 순례하기는 하지만 그곳을 조국이거나 돌아가서 종교 왕국을 세울 곳으로 상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해서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의 출현은 근대 이후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 조류를 배경으로 한다.
시오니즘을 국제적인 정치 운동으로 이끈 헤르츨 이전에 시오니즘은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18세기 이후 출현했다. 유대인을 물리적으로박해하고 동화를 거부한 포그롬(조직적인 탄압과 학살) 등 근대의 반유대주의가 고조되는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도피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조류와 짝을 이뤄 출현했다. 그리고민족주의 흐름을 맞이한 유대인의 대응 또한 제 정체성을 민족화하는것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쇠락하는 가운데그 영역 안에서 섞여 살던 종족과 종교 집단들이 민족주의를 추구하자, 유대인 역시 유대교를 기반으로 자신들을 ‘민족‘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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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유대인 격리지 확대로 유대인 차별이 절정에 오르던18세기 말 서구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를 필두로 ‘모든 인민이 법 앞에서 평등할 것"이라는 이념에 따라 유대인 해방 물결이 번졌다.
서구에서 유대인 해방령은 유대인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첫째는 말 그대로 유대인 해방을 통한 법적·제도적인 차별과 금기의 폐지였다. 유대인을 국민국가 내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함으로써, 법적으로는 기존의 차별과 금기를 폐지했다. 둘째, 차별과 금기를 폐지하는 대신에 그동안 유대인에게 부과하지 않던 의무가 생겼다. 유대인 자치가 없어지고, 군역 등의 의무가 부과됐다. 국민국가 내에서 동등한 시민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독립적인 유대인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대인 해방령은 현실에서는 차별적인 효과를 낳았다. 유대인 상류층은 이 해방령을 전기로 제도적인 굴레를 완전히 제거하고, 세속화속에서 주류 사회로 동화해갔다. 하지만, 대다수 하층 유대인에게는 관습적인 차별은 그대로 존재하고 유대인에 대한 기존 보호막만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서방에서는 어쨌든 유대인에게 동등한 시민구을 부여하고, 그 공동체를 해체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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