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은 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나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는 미국에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에게는 더욱 민감한 문제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일본에게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고, 동남아시아는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였다. 일본이 35년간 지배했던 한반도에 대해서는 배상하지 않으면서 5년 남짓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배상금을 준 것은 이러한 정책 때문이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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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의 높아진 남북 긴장

1965년과 1966년 한 해 30~40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남북한 사이의 교전은 1967년에는 400건을 넘어섰고, 1968년에는 500건에 달하도록 급증했다. 거의 전쟁에 가까운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베트남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또 하나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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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1968년 1월 6일 비상치안회의를 제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에서 소집했다. 북한이 어떠한 도발을 할지 모르니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뿐만 아니라 경찰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회의였다. 보름이 지난 1968년 1월 21일에는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틀 뒤에는 동해에서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됐다.

사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예견된 일이었다. 1965년 전투부대 파병을 반대했던 야당은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한국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뿐만 아니라 휴전선에서 한국군의 방위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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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한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돕는 방법으로 한반도에서 안보 위기를 일으키는 방안을 선택했다. 한반도의 안보 상황이 불안해진다면 더 많은 한국의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투 요원의 일부를 북베트남에 보내 직접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한반도에 안보 위기를 조성하는 것 역시 측면 지원의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호찌민과 가까운 관계였던 김일성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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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의 다양한 영향

2014년은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1964년 9월 22일 한국군의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이 사이공Sài Gòn(당시 남베트남 수도, 에 도착했고, 이들은 곧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배치됐다. 이후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모두 네 차례의 파병을 통해 32만 5,000여 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됐고, 이 가운데 5,000여 명이 전사했다. 참전 뒤에도 1만 2,000여 명의 장병이 고엽제로 인한 질병 판정을 받았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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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사건 등은 모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는 또한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으로 위기를 느낀 북한 정부가 공격적인 대남對南 정책을 채택하면서 나타난 사건이었으며, 이 시기 북한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은 국방비가 급증하면서 북한 사회가 경제적인 문제를 노정하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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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전체주의 아래 있던 북한이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이 조직한 비동맹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의 대표가 이 회의에 참석을 거절당한 것도 당시 세계적으로 불었던 반전의 바람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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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과 수정주의에 대한 반동 역시 거세게 일어났다.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으로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을 때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했고, 반전과 탈근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보수주의가 태동했다. 마치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 이에 대한 반동으로 모든 진보적인 움직임을 ‘종북’으로 규정하는, 냉전시대보다 더 비논리적인 보수주의가 나타나는 것처럼.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의 인권 외교가 ‘베트남에서 있었던 미국의 전쟁’에 대한 반성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 康弘 총리는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바로 이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극우적인 역사 인식과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시작됐고, 미국과 영국에서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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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마타 그리고 뇌샤텔

설명이 모호하긴 했지만 라 메트리의 저서에서 핵심이었던 기계에 대한 비유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 및 오토마타를 향한 관심이 커지던 당시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특히 소형화 기술이 발달하면서 생동감이 더해진 태엽식 기계들은 데카르트가 언급했던 수압식 동상 따위는 한참 전에 뛰어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1738년에는 프랑스의 발명가 자크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이 기계식 플루트 연주자를 만들고 뒤이어 스스로 드럼 반주를 넣는 피리 연주자, 움직이고, 먹고, 배변할 수 있는 소화하는 오리라는 기계까지 만들어 파리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71 런던에서는 시계 장인이었던 제임스 콕스James Cox가 화랑 전체를 할애하여 자신이 제작한 오토마타들을 전시했는데, 그중에는 현재 영국 더럼 소재 보우스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은빛 기계식 백조도 있었다. 창의적인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오던 이 시기의 끝판왕은 뭐니 뭐니 해도 1770년대 스위스의 시계 장인 피에르 자케 드로Pierre Jaquet-Droz가 6천 개가량의 부품으로 조립한 ‘글 쓰는 사람’이라는 오토마타였다. 현재 뇌샤텔에 전시되어 있는 이 놀라운 기계는 깃펜으로 편지를 쓸 수 있으며, 글을 쓰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유리로 만들어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집중하는 듯한 모습마저 연출한다. - <뇌 과학의 모든 역사>, 매튜 코브 / 이한나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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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멕시코, 브라질의 도시 빈민굴은 농업의 규모의 경제 신화와 자유로운 농지거래의 결과다.

엘리시움에서 본 빈민굴은 충격을 잊을 수 잆다

구유럽에서 전통적인 농업사회가 근현대적 공업화와 도시화의 전환을 겪는 과정에서, 종주국은 자신의 잉여 인구와 빈곤 인구 및 범죄자들을 외부로 대규모 이주시켰고, 그럼으로써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자원을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본국의 인구와 토지와 자원 사이의 모순이 완화되었고,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전환에 따른 여러 부담도 더불어 완화되었다. 그리고 현대적 정치경제 제도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만들어졌다.

주로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이 새로 세운 식민지 국가는 해당 지역의 토착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나머지 땅들을 전부 보류지로 점거함으로써 광활한 토지와 천연자원을 독점했기 때문에, 여전히 토착민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중국이나 인도)에 비해 그 내부적 모순이 상대적으로 훨씬 덜했다.

유럽 국가들이 대규모로 식민지화를 추진하던 수백 년 동안 서구의 공업화에 따른 제도의 비용은 내부에서 외부로 전가되었고, 자원은 외부에서 내부로 이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구유럽 국가들은 오늘날 중국이나 기타 제3세계 국가들을 장기간 괴롭혀온 삼농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 P202



객관적으로 ‘시야를 전 세계에 둔다면‘, 세계에서 불과 10개를 넘지 않는 대농업 국가들만이 토지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농업에서 규모의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그 국가들은 거의 전부가 식민지화 과정 중에 해당 지역의 토착민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농지를 개척한 경우이다. 

그 경우를 제외한 구유럽의 선진국들은 이미 수백 년의 시장화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규모의 경제‘를 농업에서 실현한 경우는전혀 없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소농장 위주이거나, 3분의 2의 농업경영자가 여전히 겸업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산업화 국가와 지역가운데 한국과 일본 및 타이완은 중국보다 앞서 온전한 시장경제의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농업은 지금까지 여전히 소농경제 위주이다. - P203

서구의 이론에 따라 ‘토지 사유화+시장화전환‘을 실행한 결과는 예외 없이 빈부의 양극화, 농촌 빈곤지역에서의 게릴라전, 도시 빈민굴의 범죄조직 만연, 그리고 심지어 테러리즘으로의 경도였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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