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의 높아진 남북 긴장

1965년과 1966년 한 해 30~40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남북한 사이의 교전은 1967년에는 400건을 넘어섰고, 1968년에는 500건에 달하도록 급증했다. 거의 전쟁에 가까운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베트남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또 하나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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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1968년 1월 6일 비상치안회의를 제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에서 소집했다. 북한이 어떠한 도발을 할지 모르니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뿐만 아니라 경찰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회의였다. 보름이 지난 1968년 1월 21일에는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틀 뒤에는 동해에서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됐다.

사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예견된 일이었다. 1965년 전투부대 파병을 반대했던 야당은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한국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뿐만 아니라 휴전선에서 한국군의 방위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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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한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돕는 방법으로 한반도에서 안보 위기를 일으키는 방안을 선택했다. 한반도의 안보 상황이 불안해진다면 더 많은 한국의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투 요원의 일부를 북베트남에 보내 직접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한반도에 안보 위기를 조성하는 것 역시 측면 지원의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호찌민과 가까운 관계였던 김일성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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