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의 다양한 영향
2014년은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1964년 9월 22일 한국군의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이 사이공Sài Gòn(당시 남베트남 수도, 에 도착했고, 이들은 곧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배치됐다. 이후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모두 네 차례의 파병을 통해 32만 5,000여 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됐고, 이 가운데 5,000여 명이 전사했다. 참전 뒤에도 1만 2,000여 명의 장병이 고엽제로 인한 질병 판정을 받았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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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사건 등은 모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는 또한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으로 위기를 느낀 북한 정부가 공격적인 대남對南 정책을 채택하면서 나타난 사건이었으며, 이 시기 북한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은 국방비가 급증하면서 북한 사회가 경제적인 문제를 노정하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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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전체주의 아래 있던 북한이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이 조직한 비동맹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의 대표가 이 회의에 참석을 거절당한 것도 당시 세계적으로 불었던 반전의 바람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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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과 수정주의에 대한 반동 역시 거세게 일어났다.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으로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을 때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했고, 반전과 탈근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보수주의가 태동했다. 마치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 이에 대한 반동으로 모든 진보적인 움직임을 ‘종북’으로 규정하는, 냉전시대보다 더 비논리적인 보수주의가 나타나는 것처럼.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의 인권 외교가 ‘베트남에서 있었던 미국의 전쟁’에 대한 반성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 康弘 총리는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바로 이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극우적인 역사 인식과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시작됐고, 미국과 영국에서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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