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대학과 지주


미군정 초기에 각지에서 난립한 대학설립기성회의 간부들은 기성회 이름으로 가장 먼저 적산을 입수하는 데 열중했다. 부를 쌓기 위해 대학을 세웠다는 의미에서 이들을 ‘기업주의식 육영론자‘라고 불렀다.

미군정이 1946년에 일정한 기본 재산을 소유한 재단법인만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자, 기업주의식 육영론자들은 토지와 토지를 가진 대지주들에 주목했다. 미군정은 기존에 설립된 기관은 5,000만 원, 신설 기관은 1억 200만 원의 기본 자금이 있어야 대학을 세울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를 토지로 계산하면 기존 기관은 63만평, 신설 기관은 133만 평이 있어야 대학 설립이 가능했다. 지주들은 토지개혁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토지를 기본 재산으로 한 대학 설립에 관심을 보였다. - P146

토지개혁을 해도 ‘학교 소유 전답 및 문교재단의 자산인 농지는 수용하지않는다‘는 소문이 힘을 얻으면서 대지주들이 재산 보존의 수단으로 사립대학 설립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문교재단이란 문교부 장관의 허가를 얻어 유치원, 학교, 장학회 또는 교화 사업을 경영하는 재단법인을 말한다. 농지개혁을 전후해 신설된 사립대학 개인 설립자들은 대부분 관료, 지주, 자본가와 같이 농지개혁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었다. - P147

1951년에 이승만 정부는 백낙준 문교부 장관의 주도 아래 ‘문교재단 소유농지특별보상법‘을 공포해 사학재단을 설립한 지주들에게 특혜를 주었다. 사립대학이 소유했던 전답에 대한 지가증권을 특별보상증권으로 바꾸어 현금과 같이 유통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당시 특별 보상을 받은 문교재단의 비율은 사학재단이 64퍼센트, 사찰 및 불교재단이 13퍼센트, 향교재단이 12퍼센트, 종교재단이 6퍼센트, 기타 재단이 5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 조치는 곧 악용되고 말았다. 기존에 있던 사립대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너도나도 사립대학을 세우는 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한낱 종잇조각인 줄만 알았던 지가증권을 학교에 기부하면 돈이 된다는 것을 지주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다수 사립대학이 토지를 기반으로 재단을 설립하거나 학교 재정을 충당하면서 대학 설립자와 가족들이 대학 운영을 장악해갔다. 대학설립자와 가족들이 재단 이사장뿐만 아니라 대학 총장과 이사장 직책을 번갈아 맡으면서 운영에 직접 참여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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